종루
종루(鍾樓)는 종을 걸어 놓는 누각을 말한다. 조선 시대의 경우 도성에 종루•종각(鍾閣) 등을 세웠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따르면 종루가 운종가(雲從街)에 있어서 왕조의 공업을 후세에 전하고, 통행 금지와 해제시각 등을 알렸으며, 태조 4년(1395)에 만들었고 세종 때 층루(層樓)로 고쳐지었다고 한다. 그후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여러 번 화재를 겪고 다시 고쳐지어 현재에 이름을 사용한다. 고려 시대에도 도성에 종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도시건축에서는 시가 중앙의 십자로에 세운다. 보통 고루(鼓樓)도 같이 세워서 도시경관을 좋게 하는 동시에 시보, 경보를 울렸다. 원대(元代)경부터 북부 여러도시에 보급되고 남부에도 미쳤다. 원의 수도(北京)에서는, 궁궐 북쪽에 해당하는 도성 중심의 동서에 종루, 고루가 있었다. 서안, 주천, 태곡, 은천 등의 성곽에 보이는 종루는, 성내 간도(幹道)의 교차점에 아래층을 아치형 문으로 하여 내부에서 십자로 교차하는 누식(樓式)으로, 2~3층의 누각으로 되어 있다. 산시성 대동의 종루는 동서 3간X남북 3간, 3층건물, 합각지붕. 명대 초기의 건물로 보이며, 비교적 오래된 건물. 절, 도관(道觀), 묘우(廟于) 내에도 종루와 고루를 짝지어 배치하는 것이 통례이다. 한국에서는 남대문 등의 도성 누문에 종을 단 경우가 있다.
개요
종루는 조선시대 한성부의 도성내 전체의 중심이 되는 곳에 종을 단 누각을 말한다. 서울 종로구 종로 2가 보신각 자리이다 .
운종가(雲從街)의 동편, 즉 동서 대문을 연결하는 대로와 대광통교(大廣通橋)에서 남대문을 잇는 대로의 접점에 종루를 세우고 큰 종을 달았다.
오늘날의 종로 네거리에 있는 종각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 초기 이곳을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발달하였다. 종루에 걸린 종을 쳐서 인정(人定)과 파루(罷漏)를 알렸을 뿐 아니라 도성내에 큰 화재가 나도 종을 쳐서 모든 주민에게 알렸다.
1396년(태조 5) 종루에 달 종을 만들었으나 시험 타종 때 파열되어 다시 주조, 2년 뒤인 1398년 완성되었다.
종을 처음 달았을 때 개국공신 권근(權近)은 종명서문(鐘銘序文)에 종각을 짓고 종을 달게 된 이유를 ① 새 왕조의 개국을 후세에 전하고, ②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후세인들의 이목을 깨우치고, ③ 도시와 통도대읍(通都大邑)에서 새벽과 저녁에 종을 쳐 백성들의 일하고 쉬는 시간을 엄하게 한다고 하면서, 종의 용도가 다양하다고 하였다.
당시 종루는 2층 5칸으로 청운교(靑雲橋)의 서쪽에 있었다. 그러나 1413년(태종 13) 행랑(行廊)의 공역(工役)을 다시 시작할 때, 종묘 남로(南路)에 5칸의 층루를 세우면서 순금사(巡禁司)의 남쪽, 광통교의 북쪽인 오늘날의 종로 네거리로 옮겼다.
그 뒤 1440년(세종 22) 종루의 개구(改構)가 이루어졌다. 이 때 종루의 아랫 부분이 십자형으로 뚫려 인마(人馬)가 통행하였다고 한다. 1458년(세조 4) 개구에 맞추어 대종(大鐘)을 다시 만들어 종루에 걸었다.
이 때 종루 크기는 동서 5칸·남북 4칸으로 26평이 조금 넘는다. 오늘날로 보아서는 대단하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하나의 단위건물로서, 특히 다락[樓]형식의 건물로는 대단히 큰 건물이었다.
종루의 높이에 대하여서는 전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488년(성종 19)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의 ≪조선부 朝鮮賦≫에 "종루가 있는데……매우 높고 커서 국도 안에 우뚝 솟았고, 길을 둘러 높고 높도다."라고 한 데에서 그 규모가 광대하고, 웅장한 자태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뒤 재건되었으나, 규모는 처음보다 작은 17평 정도로 오늘날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한편, ≪경국대전≫에 의하면 "의금부는 화재 감시인을 정해 항상 종루에 올라 간망하게 하였는데 이궁이나 관청에 불이 나면 종을 치고, 민가에 불이 나도 종을 치게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종루를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이곳을 중심으로 한 시전(市廛)의 성립 과정은 대체로 태종 때에 이룩되었다.
한성부의 도성 내 시전 건립은 태종이 도성을 한성으로 옮긴이래 네 차례에 걸쳐 궁궐과 방(坊)·이(里)의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진행되었다.
즉, 도성내의 간선도로 좌우 양측에 막대한 국가 비용과 노력을 기울여 정주상인(定住商人)의 점포를 관설(官設)하였다. 여기에 상민(商民)을 초치해 최대한의 어용적 상업 경영에 종사하게 하고, 관부(官府) 및 양반층을 비롯한 수도 주민들의 경제적 수요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종루를 중심으로 한 시전 건립은 1394년(태조 3) 운관사(雲觀事) 권중지(權仲知)의 왕도시전(王都市廛)에 대한 도안이 마련됨으로써 비롯되었다.
1399년(정종 1) 혜정교(惠政橋)로부터 창덕궁동구(昌德宮洞口)까지 행랑시전(行廊市廛) 좌우 800여칸을 영조(營造)하여 착수한 일이 있지만 실제로 완성되지 못하고, 태종이 한성에 천도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즉, 1410년 먼저 시전의 지역적 한계를 정하고 대시(大市)는 장통방(長通坊 : 지금의 종로구 관철동·장교동), 미곡 잡물은 동부 연화동구(蓮花洞口 : 지금의 연지동)·남부 훈도방(薰陶坊 : 지금의 을지로2가 부근)·서부 혜정교(지금의 종로1가 福淸橋)·북부 안국방(安國坊 : 지금의 안국동)·중부 광통교(지금의 남대문로와 광교 사이)에서 하고, 우마 등은 장통방 하천변에서 각각 매매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 여항소시(閭巷小市)는 각각 소거(所居)의 문전(門前)에서 영위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계획된 시전 건립은 1412년 2월부터 4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1차는 1412년 2월부터 4월까지혜정교로부터 창덕궁 동구에 이르는 800여칸의 좌우행랑이 건조되었고, 제2차는 1412년 5월 궐문에서 정선방동구(貞善坊洞口)까지 행랑 472칸이 건조되었다.
제3차는 같은 해 7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종루로부터 서북쪽의 경복궁까지와 창덕궁에서 종묘 앞 누문(樓門)까지, 그리고 남대문 전후까지 모두1,360여칸이 완성되었다. 제4차는 1414년 7월 종루로부터 남대문까지와 종묘 앞의 누문으로부터 동대문까지 좌우행랑이 조성되었다.
종각과 종루
서울은 도성으로 빙 둘러싸여 있고, 도성에는 네 대문과 네 소문이 나 있었다. 그 가운데 숭례문이 제일 정문이었다. 숭례문을 들어서서 성안의 중심부로 통하는 길이 오늘날의 남대문로이다. 옛 서울의 성안의 큰 가로(街路)로는 남대문로 외에 흥인문―동대문과 돈의문―서대문을 연결하는 가로가 있었다. 흔히들 이 가로를 운종가(雲從街)라고 하였다. 구름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여는 가로라는 뜻일 터이다. 이렇게 볼 때 운종가는 오늘날의 종로와 신문로를 합한 셈이 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운종가는 이 가로의 일부, 곧 운종가와 남대문로가 만나는 지점이 있던 종루(鐘樓)의 서쪽 편 일대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운종가와 남대문로가 만나는 지점, 다시 말하자면 서울의 중앙부에 종루가 있었다. 정확한 위치와 모양은 차이가 나지만 오늘날의 종각(鐘閣)―보신각(普信閣)이 그것이다. 오늘날에는 종루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대부분 종각이라 하지만, 종루와 종각은 분명히 구분되는 용어이다. 한자로 루(樓)란 지면에서 한 길 정도 떨어진 마루집이거나, 이층집의 이층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각(閣)은 단층의 단촐한 집이거나, 이층집의 일층을 가리킨다.
조선초기에 애초에는 1396년(태조 5) 지금의 인사동 입구쯤에 있던 청운교(靑雲橋) 서쪽에 정면 5간에 2층 짜리 누각을 짓고 종을 걸었었다. 그러다가 서울의 중심 가로을 따라 상가나 관가, 창고 등으로 쓸 대규모의 행랑(行廊)을 짓던 1413년(태종 13)에 종묘 남쪽 길에 고쳐 지었다가, 다시 지금의 종로 네거리로 옮겼다. 이 무렵에는 그 종루에 누기(漏器), 곧 물시계를 함께 설치하여 그것이 알려주는 시각에 따라 종을 쳐 시각을 알렸다.
태종 14년에 이르러 파루(破漏) 치는 시각을 5경(更) 초점(初點)에서 5경 3점으로 늦추고, 밤을 알리는 인정(人定)은 주역의 64괘에 맞추어 64번이나 쳤었는데 하늘의 별자리 28수(宿)에 맞추어 28번만 치는 것으로 고쳤다. 그러나 시각을 재는 누기가 정확치 못한데다가 그 담당자가 착오를 일으키면 관원이나 민간인들의 출입까지도 이르거나 늦는 수가 많았으므로 1437년(세종 19)에는 궁궐 안에 있는 자격루에서 잰 시각을 종루로 전달하기 위하여 지금의 세종로에 쇠북(金鼓)를 설치하였다.
그러다가 1440년(세종 22)에는 기존의 종루를 헐고 동서 5간, 남북 4간의 2층으로 고쳐 지어 위층에 종을 달고 아래 층으로는 인마가 다니게 하였다. 이 종루는 서울 한복판에 높이 솟아 서울의 상징이 되는 장엄한 것이었다. 그 종루의 어간(御間)―중앙 간은 아무나 다니는 것이 아니라 왕만이 지나다닐 수 있었다. 그랬던 종루에 대해서 1459년(세조 5)에는 종각(鐘閣)을 광화문 앞에 지었다. 이 종각은 경복궁 안의 보루각에서 잰 시각을 종루로 알려주는 중간 전달 기능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용을 자랑하던 종루는 임진왜란 당시 불타 없어지고, 거기 달려 있던 종은 깨어진 채 흙속에 묻혔다. 임진왜란의 와중에는 그 종을 녹여 다른 데 썼다. 그후 광해군 때 종루를 다시 짓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전처럼 장엄하게 2층의 누각을 짓지는 못하고 단층 종각으로 지었다. 그것을 몇차례 고쳐 지으면서 그 모습으로 전해 왔다.
1895년(고종 32)에 고종이 "보신각(普信閣)"이라는 사액 (賜額)을 내렸다. 이것이 1915년 길을 넓히면서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뒤로 물렸었다. 그 종각은 6.25때 파괴되어 1953년에 다시 뒤로 조금 더 물러 중건하였다. 지금의 종각은 1979년에 중건한 것으로 철근콘크리트조로 된 정면 5간 측면 4간의 2층 누각이다. 그러므로 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것은 "종각"이 아니라 "종루"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1]
중국의 종루
시안 종루
시안 종루는 명나라 초기에 세워진 시안시의 상징물로 1384년에 세워졌다. 중국에 있는 종루 중 가장 규모가 큰 것 중의 하나이다.
종루에는 당나라 시대 만들어진 대형 청동 주조로 된 종이 여러 개 있다. 종루의 누각은 정사각형이며, 1,377m2의 면적으로 벽돌과 원목을 사용하여 40m 높이로 지어졌다.
남문에서 위쪽(북)으로 6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교통의 중심이자, 여행의 중심지가 된다. 종루에서 고루는 한눈에 보이며 직선거리로 260m 떨어져 있고, 오른편으로 종고루 광장을 끼고 기역자 형태로 위치한다.
난징 종루
난징 종루는 중국 장쑤성(江蘇省) 난징시(南京市) 구러우공원(鼓樓公園)에 있는 종루(鐘樓)이다.
명나라 태조(太祖) 때 지금의 난징 구러우공원에 있는 구러우(鼓樓)의 서쪽에 건립되었으나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1661~1722) 때 훼손되었다. 이후 광서제(光緖帝) 때인 1889년 장닝(江寧;청나라 때 난징의 명칭]의 낙사(落司) 허진의(許振禕)가 대종정(大鐘亭)을 세워 중러우를 대신하게 하였다. 대종정은 구러우와 마찬가지로 시간을 알리고 경보(警報)를 발하는 역할을 하였다. 1965년 성급(省級)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대종정은 흰돌로 쌓은 높은 축대 위에 우뚝 솟아 있다. 모두 2층에 전체 높이는 14.5m이며, 육각찬첨정(六角攢檐頂)의 지붕 위에는 회색 유리기와를 얹었다. 안에는 명나라 때 주조된 자동대종(紫銅大鐘)이 6개의 쇠기둥과 쇠들보로 지탱하여 걸려 있다. 원래 중러우에는 명종(鳴鐘)·입종(立鐘)·와종(卧鐘) 등 3개의 자동대종이 있었으나, 강희제 때 중러우가 훼손되면서 와종만 남았으며, 허진의가 대종정을 세운 뒤 이를 보존하였다.
자동대종은 자체 높이 3.6m이고 고리의 높이까지 합치면 4.27m이며, 지름 2.3m, 두께 0.17m, 무게 2만 3000㎏이다. 동종을 주조하는 데 구리 4만 7000근, 주석 4000근, 황금 50냥, 백은 120냥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동종을 걸어 놓은 들보에 "홍무 21년 9월의 길일에 주조하다(洪武二十一年九月吉日鑄)"라고 새겨져 있는데, 홍무 21년은 명나라 태조 때인 1388년이다. 동종은 모양이 아름다우면서도 소리가 맑아 수십 리 밖에까지 전해진다.
동영상
각주
- ↑ 홍순민, 〈종각(鍾閣)? 종루(鍾樓)!〉, 《한국역사연구회》, 2007-12-12
참고자료
- 〈종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종루(鐘樓)〉, 《위키실록사전》
- 〈종루〉, 《미술대사전(용어편)》
- 〈종루〉, 《한국고전용어사전》
- 〈시안 종루〉, 《위키백과》
- 〈난징 중러우〉, 《두산백과》
- 홍순민, 〈종각(鍾閣)? 종루(鍾樓)!〉, 《한국역사연구회》, 2007-12-12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