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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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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신라 제29대 왕이다.

개요[편집]

  • 태종무열왕은 신라 제29대 왕으로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재위 654~661) 성은 김(金), 이름(諱)은 춘추(春秋)이다. 시호(諡號)는 무열(武烈),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다. 25대 진지왕(眞智王)의 아들인 이찬(伊湌) 용춘(龍春, 용수라고도 함)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26대 진평왕(眞平王)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각찬(角飡) 김서현(金舒玄)의 딸이자 김유신(金庾信)의 동생인 문명부인(文明夫人) 문희(文熙)와 결혼하여 법민(法敏), 인문(仁問) 등의 아들을 낳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문왕(文王, 文汪이라고도 함), 노차(老且), 인태(仁泰), 지경(智鏡), 개원(愷元) 등의 서자(庶子)가 있었으며, 고타소(古陁炤)와 지조(智照)라는 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타소는 642년(선덕여왕 11) 남편 품석(品釋)과 함께 백제군에 살해되었으며, 지조는 655년(무열왕 2) 김유신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법민과 인문, 문왕, 노차, 지경, 개원 등이 모두 문명부인의 소생이며, 이들 이외에 개지문(皆知文), 거득(車得), 마득(馬得) 등 딸까지 포함해 5명의 서자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열왕의 재위 기간에 신라는 율령(律令)과 관료체계를 정비하여 왕권의 전제화를 강화했으며,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 직계자손으로 8대째 왕위가 계승되면서 120년 동안 정치의 안정에 기초한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1]
  • 태종무열왕은 신라(新羅)의 제29대 임금(재위: 654년 음력 3월 ~ 661년 음력 6월)이다. 무열왕(武烈王)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은 김(金)이고, 휘는 춘추(春秋)이다. 진골(眞骨) 출신으로 이찬(伊飡)에 이르기도 했던 김용수(金龍樹)과 진평왕의 차녀 천명공주(天明公主)의 아들이다. 선덕(善德) · 진덕(眞德) 두 조정에 걸쳐 국정 전반, 특히 외교 문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특히 진덕여왕 때는 이찬(伊飡)에 이르게 되고 진덕여왕 사후 대리청정으로서 국인의 추대를 받은 알천의 사양으로 진골 출신 최초의 신라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그렇게 신라 중대왕실(中代王室)의 첫 왕이 된 김춘추는 아들 김문왕(文王), 김지경(智鏡)과 김개원(愷元)을 각각 이찬(伊湌)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이후 660년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 재위한 지 8년 만에 죽으니 나이는 59세였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한반도 최초로 묘호를 사용하였다.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다. 시호(諡號)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를 지냈으며, 묘호(廟號)를 올려서 태종(太宗)이라고 하였다. 당 고종은 무열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2]
  • 태종무열왕은 신라의 제29대(재위: 654년~661년) 왕이다. 성은 김씨. 이름은 춘추(春秋). 진지왕의 손자로 이찬(伊飡) 용춘(龍春 또는 龍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으로, 각찬(角飡, 角干) 김서현(金舒玄)의 딸, 즉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 문희(文姬)이다. 김춘추는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제세(濟世)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덕여왕을 섬겨서 관등이 이찬에 이르렀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왕위계승자로서 상대등 알천(閼川)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하고 그 대신 제세의 영걸(英傑)로서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신라 중대왕실(中代王室)의 첫 왕이 되니 당시 나이가 52세였다. 그의 즉위에는 오래 전부터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해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간의 정치적 · 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는 동안 고구려는 660년에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해왔다. 661년에는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연합해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하고 다시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주인 대사(大舍) 동타천(冬陁川)이 효과적으로 방어했으므로 대나마(大奈麻)로 관등을 높여주었다. 압독주(押督州)를 대야(大耶 : 지금의 경상남도 陜川)로 다시 옮기고 아찬(阿飡) 종정(宗貞)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정복된 백제지역의 관리에 적극성을 보였다. 재위한지 8년 만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다.[3]
  • 태종무열왕은 신라의 제29대 국왕이다.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와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 사이의 아들로, 선덕여왕의 조카이다.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로 골품제라는 신라의 특수한 사정상 즉위 직전까지 태자 및 후계자가 아니었으며, 마지막 성골인 진덕여왕이 승하한 후 화백회의의 합의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교관, 정치가로 활발하게 활동해서 태종 무열왕이라는 묘호와 시호 외에 본명인 김춘추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신라의 정치사로 보면 제36대 혜공왕 대까지 이어지는 신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신라 중대 왕실의 시조격이 되는 임금이기도 하다. 태종 무열왕은 그의 행보와 업적에 대해 여러 상반된 평가들이 나오고 있지만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7세기 당시 김춘추를 빼고 한반도 정세를 이야기하는 건 불가능할 정도로 핵심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라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태종무열왕은 여러모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능수능란한 외교술과 임기응변을 통해 고립무원이었던 신라에게 있어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삼국통일의 판을 짠 명군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당나라와의 동맹으로 말미암아 패강 이북의 땅을 외세에 넘겨 두 번 다시 되찾지 못한 군주라는 부정적인 평가로 나뉜다.[4]

태종무열왕의 생애[편집]

  • 태종무열왕의 성은 김(金), 이름은 춘추(春秋). 이찬 용춘(龍春 : 龍樹)의 아들.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 김씨(金氏)이다. 642년(선덕여왕 11)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域主) 품석(品釋)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고자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만났으나, 국경의 영토문제로 감금당했다가 돌아왔다. 태종무열왕은 웅변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서 사신으로 일본과 당(唐)나라에 다녀왔으며, 특히 당나라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외교에 성과를 거두고 군사원조까지 약속받아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654년 진덕여왕이 후계자가 없이 죽자, 신라왕실에 성골(聖骨)이 다하여 진골(眞骨)의 신분으로 군신(群臣)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으로써, 신라 최초의 진골출신 왕이 되었다.
  • 《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종무열왕은 풍채가 영준하고 거동이 위엄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리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하루에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으며,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었는데도 하루에 쌀 여섯 말과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었다고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무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642년에 딸인 고타소가 백제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직접 고구려로 가서 원병을 요청해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진덕여왕이 즉위한 뒤에는 이찬(伊湌)의 직위에 있었는데, 648년(진덕여왕 2)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가 백제를 공격할 원병을 요청하여 당나라의 출병 약속을 받았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당나라 왕제가 그의 풍채를 보고 신성한 인물이라며 곁에 두려고 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무열왕이 당에 가서 황제에게 의대(衣帶)를 받아온 뒤부터 신라에서 당의 의복제도를 따르게 되었다고 나온다.
  • 태종무열왕은 654년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죽자 이찬 알천(閼川)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나라 사람들이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부터 진덕여왕까지의 28대를 성골(聖骨)이라고 불렀으며, 무열왕부터를 진골(眞骨)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위한 해에 이방부(理方府)의 영(令)인 양수(良首) 등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정비하였으며, 이듬해인 655년에는 금강(金剛)을 상대등(上大等), 문충(文忠)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그리고 원자인 법민을 태자로 삼았으며, 서자인 문왕과 지경, 개원 등을 이찬, 노차를 해찬(海湌), 인태를 각찬(角湌)으로 삼았다. 655년에 고구려와 백제, 말갈이 연합하여 쳐들어와 북쪽 33개 성을 점령하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그래서 당나라는 소정방(蘇定方) 등을 파견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 658년(무열왕 5) 아들인 문왕을 중시로 임명했으며, 659년에는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660년(무열왕 7)에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소정방 등이 이끈 당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황산벌싸움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웅진성(熊津城)을 포위하여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 백제를 멸망시켰다. 소정방이 당나라로 돌아간 뒤에도 이례성(尒禮城), 사비(泗沘) 남령(南嶺) 등을 공격하여 백제의 잔존세력의 저항을 진압했다. 661년(무열왕 8) 백제의 잔존세력이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해오자 품일(品日)을 대당장군(大幢將軍), 문충(文忠)을 상주장군(上州將軍), 의복(義服)을 하주장군(下州將軍), 문품(文品)을 서당장군(誓幢將軍), 의광(義光)을 낭당장군(郞幢將軍)으로 임명해 파견했다. 그리고 고구려 군대가 남하하여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해와서 함락될 위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성주 동타천(冬陁川)이 20일이 넘도록 성을 방어하여 고구려 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무열왕은 그해 음력 6월 무열왕은 즉위 8년 만에 죽었고, 아들인 법민이 왕위를 계승하였다(30대 문무왕). 《삼국유사》에는 그가 죽었을 때에 59세였으며,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 태종무열왕의 재위 기간에 신라 왕권의 전제화(專制化)가 확립되었고, 또한 크게 성장한 귀족세력을 중심으로, 당나라의 율령제도(律令制度)를 모방한 관료체계가 정비되었으며, 구서당(九誓幢)이라는 9개 군단(軍團)의 설치로 군사조직이 강화되는 등 본격적인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 또, 김유신의 매부(妹夫)가 됨으로써 경주 김씨 왕실과 김해 김씨와의 결합이 성립되었고, 그의 직계자손으로 8대가 계속됨으로써 120년 동안 정치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경주 무열왕릉[편집]

  • 경주 무열왕릉(慶州 武烈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능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능의 외형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지름 36.3 m, 높이 8.7m이다. 밑둘레를 따라 비교적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무덤의 보호석으로 드문드문 놓았으며, 능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다. 경내 비각에는 국보로 지정된 경주 태종무열왕릉비가 있다. 이 비석의 이수 전면 중앙부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어, 이 무덤이 무열왕의 능임을 알게 되었다.
  • 경주 태종무열왕릉비(慶州 太宗武烈王陵碑)는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통일신라 초기의 화강석 비석.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크기는 귀부(龜趺) 높이 0.93m, 길이 3.34m, 폭 2.53m, 이수(螭首) 높이 1.1m, 폭 1.44m, 두께 0.44m이다. 무열왕릉 전방 약 40m 좌측에 머리가 서남쪽을 향하도록 세웠으며, 현재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이름은 김춘추이며,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碑)들은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보통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신 위의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최초의 예이다. 사실적인 표현과 능숙한 기법으로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낄 수 있다. 비석조각 중에서도 최대의 걸작이며, 당시의 석조 조각기술의 발전상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603~661)〉, 《두산백과》
  2. 태종무열왕〉, 《위키백과》
  3. 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태종 무열왕〉,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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