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군
남해군(南海郡)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군이다. 남해상의 남해도와 창선도 두 큰 섬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1973년 660m의 남해대교가 개통되면서 육지와 연결되었고, 1980년 창선교가 놓이면서 남해도와 창선도가 연결되었다. [1]
개요[편집]
남해군은 동경 127°48′∼128°51′, 북위 34°04′∼34°56′에 위치한다. 동쪽은 통영시, 서쪽은 전라남도의 광양시·여수시, 남쪽은 남해, 북쪽은 하동군·사천시와 접하고 있다. 면적은 357.52㎢이고, 인구는 2023년 6월 기준 41,243명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9개 면, 222개 행정리(79개 법정리)가 있다. 행정구역은 모두 섬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주요한 섬은 남해도와 창선도 2개의 섬인데, 모두 사천시, 하동군을 통해 육지와 대교로 이어져 있다. 군청은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서변리에 있다.
흔히 남해라고 하면 이 지역보다는 바다를 연상하기 때문에 출신이 남해라고 하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경상남도 남해군이라고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비슷한 경우로 강원 특별자치도 동해시가 있다. 다만 강원 특별자치도 동해시가 1980년에 새로 만든 명칭인 것과 달리 남해군이라는 이름은 신라 경덕왕이 지어 이미 1,300여 년이나 된 오래된 지명이다. 유자와 마늘, 시금치, 죽방 멸치로 유명하다.[2][3]
자연환경[편집]
남해도는 대한님국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며, 남북 약30㎞, 동서 약 26㎞이다. 망운산(786m)·금산(681m)·원산(627m)등 다소 높은 산지는 많은 반면 하천은 모두 짧고 평야도 매우 협소한 편이다. 해안선 연장은 302㎞이며 육지부인 하동군 금남면과 연결되는 육계도(陸繫島)에 해당한다.
지세는 소백산맥의 말단부가 거창·산청·함양·하동을 거쳐 내려와 바다에 함몰했다가 다시 본 섬에서 솟아올라 일부의 산악지역을 형성하고 있어서 기복은 낮지만 적지 않은 산들이 분포하고 있다. 평야 지대는 전체면적의 약 25%를 점유하며, 대부분이 해안이나 산곡을 따라 형성된 분지에 분포한다. 군 관내에는 또한 68개의 섬이 있는데, 3개의 유인도(큰섬·범섬·노도)와 65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선은 대단히 굴곡이 심하며, 군 동쪽으로 강진·동대·미조·앵강 등의 만과 작은 포구들이 형성되어 있다.
서반부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전개되는 녹두산(鹿頭山, 451m)·사학산(四鶴山, 340m)·삼봉산(三峰山, 422m)·망운산(望雲山, 786m)·관대봉(冠帶峰, 469m)·천황산(天皇山, 395m)·망기산(望崎山, 340m)·응봉산(鷹峰山, 473m) 등이 있다. 또한, 동반부의 북쪽에서 남쪽으로는 산성산(山城山, 371m)·금음산(金音山, 481m)·대국산(大局山, 375m)·괴음산(槐陰山, 604m)·송등산(松登山, 617m)·노구뒷산(501m)·금산(錦山, 701m) 등이 펼쳐져 있다. 이 군에 부속된 전국 제9위의 큰 섬 창선도(昌善島)에도 연대산(蓮臺山, 339m)·동금산(東錦山, 358m)·대방산(臺芳山, 468m)·망치산(268m) 등이 있다.
이들 산악에서 발원한 입현천(笠峴川)·동산천(東山川)·초음천(草陰川)·무림천(茂林川)·다천천(茶川川)·화천천(花川川) 등 15개의 하천들이 산지를 개석하여 곳곳에 작은 분지와 평지를 형성하고 각 방향으로 흐른다.
기후는 동한난류의 영향을 받아 온화한 해양성기후이며, 연평균기온 14.6℃, 1월 평균기온 3.1℃, 8월 평균기온 26.6℃이다. 연 강수량은 1,780㎜로 한국에서 3대 다우지역에 속하고 강수의 대부분이 여름철에 집중된다. 평균습도는 66%이다.(2007년 현재)
지질구조는 중생대 백악기 경상계 지층이 대부분이며, 불국사화강암층이 지배적이다. 토양은 대부분 표층이 얕은 산지 암설토이나 해안지역에는 충적토가 분포한다. 식생으로는 비자나무·편자꽃·유자나무·난음비자림 등이 자생하고 있다.[4]
역사[편집]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이동면 다정리, 남해읍 남변리·평현리·심천리를 비롯해 군내 각지의 해안평야와 창선도에까지 밀도 높게 분포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 섬이 내륙지방 못지않게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으나 690년(신문왕 10)에 신라가 전야산군(轉也山郡)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에 남해군으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현(領縣)으로 설치했던 난포현(蘭浦縣)은 본래 내포현(內浦縣)이고, 평산현(平山縣)은 본래 평서산현(平西山縣, 혹은 西平)으로 모두 이때 개칭한 것이다.
1018년(현종 9) 남해현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영현인 난포·평산 양현은 왜구의 침범이 심하여 사람이 살지 못했다. 남해현도 1358년(공민왕 7) 진주목의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 일명 鐥川 : 지금의 하동군 북천면)에 피란하였다. 창선도는 고려시대에 유질부곡(有疾部曲)이라고 했다가 뒤에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쳐서 진주목의 영현으로 삼았다. 충선왕 때 흥선현(興宣縣)으로 개칭했으나 왜구 때문에 역시 살기는 힘들었다. 1269년(원종 10) 일본이 변경을 침범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어, 창선도에 수장했던 국사(國史)를 진도로 옮겼다. 고려 말 왜구의 침범이 날로 심해지자 1384년(우왕 10) 해도도원수(海道都元帥) 정지(鄭地)가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1404년(태종 4) 왜구 때문에 진주 땅으로 피란한 지 46년 만에 남해현을 복구하였다. 이때 구라량(仇羅梁 : 지금의 사천) 만호 임덕수(任德秀)가 현령을 겸임하여 남해읍성을 축성하였다. 1414년 하동현과 합쳐져 하남현(河南縣)이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하동과 분리되면서 진주목의 금양부곡(金陽部曲)을 편입, 해양현(海陽縣)이 되었다. 2년 뒤에는 다시 남해현으로 환원하고 현령을 두었다. 1419년(세종 1) 곤명현(昆明縣)과 합쳐져 곤남군(昆南郡)이 되었다가 1437년 다시 남해현으로 환원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호구수는 61호 271명이었다.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남해현의 민호가 738호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불과 15년 동안에 남해가 급속도로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흥선도는 진주목 소속의 목장으로서 말 737두를 방목하고 있었다. 세조 때의 진관체제 성립에 따라 남해현은 진주진관 휘하에 들어갔으며, 현령이 절제도위를 겸임하였다. 수군은 제포진관(齊浦鎭管) 휘하의 평산포만호(平山浦萬戶)가 통제하였다.
1486년(성종 17)에는 미조항(彌助項)에 수군첨 사진을 설치했다. 그러나 왜구 때문에 한때 폐쇄했다가 1522년(중종 17)에 복구하였다. 이 무렵 기묘사화로 김구(金絿)가 남해도에 유배되었으며, 이때 「화전별곡(花田別曲)」을 남겼다.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막바지에 노량 앞바다에서 대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李舜臣)은 왜군의 퇴로를 가로막아 병선 400척을 섬멸하는 대전과를 올렸으나, 관음포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633년(인조 11) 고을 사람들이 초사를 세워 제사를 모시다가, 1658년(효종 9) 통제사 정익(鄭榏)의 명으로 사당을 크게 중수하였다. 이 사당은 1663년(현종 4) 통영 충렬사와 같이 ‘충렬사(忠烈祠)’로 사액 되었다. 근년에 남해군민들의 정성으로 충렬사·관음포 등 충무공의 유적이 정비, 정화되었다.
임진왜란 후 흥선도는 창선도라는 옛 이름을 되찾고, 진주목 소속의 말문리(末文里 : 지금의 사천)에 합쳐졌다. 1759년(영조 35) 남해현의 호구수는 4,491호 2만 1,737명이었다. 1863년(철종 14)에는 진주민란에 호응해 농민 수천 명이 민란을 일으켜서 관아와 창고를 파괴하고 문서를 불태우는 사건이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으로 남해군으로 개편하였다. 1905년에는 진주목에 속해 있던 창선도가 남해군으로 편입되었으며, 1906년 창선도를 창선면으로 승격하여 남해군에 편입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이예모(李禮模)의 주도하에 3월 3일 남해시장에서 1,0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였다.
1964년 1월 20일 삼동면 미조출장소와 서면 중현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68년 한려수도가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70년 4월 1일이동면 상주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3년 7월 1일에는 이동면 상주리의 갈도(葛島)가 통영군 욕지면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남해고속도로와 남해대교가 완공, 개통되었다. 이로써 남해군은 완전히 육지와 연결되어, 본래의 농·수산업 이외에 관광지로도 각광 받게 되었다.
1979년 5월 1일 남해면은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0년에는 창선교가 개통되어 남해도와 창선도가 연결되었다. 1983년 삼동면 난음리가 이동면에, 서면 연죽리 일부가 남해읍에 편입되었다. 1986년 4월 1일에는 상주·미조 출장소가 각각 면으로 승격하였다. 1988년 동이 리(里)로 개칭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상주면 상주리 일부가 미조면 송정리로 편입되었다. 현재 남해읍·이동면·삼동면·남면·서면·고현면·설천면·창선면·상주면·미조면 등 1읍 9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업[편집]
임야 면적이 68%로 국내 섬 중 산의 비율이 가장 많은 지역이고 농지는 23%에 불과하다. 군내 산지에서 입현천·동산천·초음천·다천천·화천천 등 15개의 하천이 사방에서 흘러들어 좁은 평지를 이루는데, 그 중 비교적 넓은 평지는 6㎢의 관당들이다. 특히 계단식 밭과 논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특색이다.
주요 산업은 농업이고 농지는 8,188ha, 농가 한 가구당 경지면적은 0.6ha에 불과하다. 높은 소득을 올리기 위해 남해의 주요 생산물인 마늘과 쌀을 이모작하는 방법으로 토지 이용률을 높여 왔다. 주요 농산물은 마늘·쌀·고구마 등인데 마늘의 주산지로 전국 생산량의 7%를 차지하고 있다. 그 밖에 시설채소와 화훼 및 난대성 과수인 치자·유자·비자와 밤 등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
남해군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해안선이 길고 크고작은 만(灣)이 많아 수산업 중 양식업이 발달하였다. 2001년 현재 수산업 종사인구는 1만 4883명으로 전체 인구의 25%나 되며 어선의 보유수가 3,320척으로 많은 편이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수산자원이 풍부하여 연근해어업은 물론 수산양식의 최적지로 유명하다. 우럭·광어·전복·우렁쉥이·피조개·굴·미역·바지락·보리새우 등의 양식 적지이며, 연안 바다에는 감성돔·삼치·멸치·도다리 등이 많이 잡히고 있다. 1986년 미조항을 어업 전진기지로 삼고 제방공장, 수산물 판매장, 냉동설비 등을 갖추어 소득 증대에 힘쓰고 있다. 상주에는 국립수산진흥원에서 설치한 수산종묘배양장이 있어 종묘생산과 기술보급에 힘쓰고 있다.
1970년대 후반기부터 1980년대 중반기까지는 피조개 등 수산물 양식이 남해경제를 주도하게 됐으며 이후 가두리양식장과 멸치액젓 개발 등 수산물의 상품화가 본격 추진되었다. 그러나 수산물 경기는 1985년 광양제철소가 건립되고 이후 광양만의 수질이 악화되면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축산업으로는 한우를 가장 많이 기르고 있고, 젖소·돼지·염소·닭 사육 농가도 많다. 남해의 화전 한우는 육질이 뛰어난 1등급이 많아 농가소득 향상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특히 토끼 사육은 경상남도에서 1위를 차지한다.
산야초(풀사료)와 밭에서 고구마가 많이 생산되어 가축의 사료로서 넉넉하지만, 산세가 가파르기 때문에 목축업은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동면과 설천면은 목장하기 알맞은 여건으로 목장을 경영하는 농민들도 있다.
수출농업 육성을 목표로 추진한 멜론과 오이는 일본 시장에 좋은 조건으로 수출되고 있고, 버섯·참다래·청정오이·호박잼·해바라기·유채를 비롯한 새로운 농산물을 상품화하는 데 전력을 쏟고 있다.
2001년 현재 등록된 제조업체 수는 44개 업체에 종업원 수 542명으로 적은 편이다. 소규모의 1차 금속기계 및 식료품 공업이 주종을 이루고, 소형선박을 건조하는 조선업도 성하다. 남해에는 공장이 별로 없고 고현농공단지에서 주방용 칼을 생산하는 동은산업이 국제시장에서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명맥을 이어온 상설시장인 남해읍 시장을 중심으로 남해읍 시가지 상가에서 남해의 상업활동이 대부분 이루어지고 그 외 5일 장으로 서는 7개소의 정기시장에서 지역주민의 상거래가 형성되고 있다. 요즘 들어 도시형 가게들이 점차 늘어나 지역주민의 쇼핑 기회를 다양하게 충족시켜 주는 등 상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교통[편집]
섬이라서 다리를 통해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남해대교와 창선대교, 그리고 노량대교를 이용할 수 있고 현재까지는 대중교통 수단은 버스만 이용할 수 있다.
섬 지역이라서 그동안에 계획마저 없었지만 2023년 4월 마침내 대전 남해 철도가 경남도 차원에서 검토중에 있다. 한려해저터널이 완공된다면 남해읍으로 가기엔 여수엑스포역에서 이동하는 게 가장 빠를 것이다.
1973년 남해대교가 생기기 전에는 연락선을 이용하여 남해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1973년 6월 길이 660m의 남해대교가 개통되면서 육지와 직접 연결되었고 남해군의 교통이 비약적으로 개선되었다. 1980년에 창선도를 잇는 창선교, 2003년에 창선도와 육지를 잇는 창선삼천포대교가 개통되면서 도로망은 한층 발달한 상태다. 2018년 9월 13일에는 오래된 남해대교를 확장 및 대체하는 노량대교가 새로이 개통되었다.
관광[편집]
남해도는 예로부터 산과 바다가 아름다운 데다 물과 공기가 맑고 깨끗한 고장으로 이름나 있다. 특히, 섬의 남단에 있는 금산과 상주 해수욕장은 산과 바다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절경을 이룬다.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얽혀 있고 난대림이 울창한 금산은 예로부터 소금강산으로 불릴 정도로 남해안 최고의 명승지이다. 일출의 장관을 맛볼 수 있는 망대(望臺)를 비롯해 산정의 보리암·문장암(文章巖)·대장봉(大將峰)·삼불암(三佛巖)·쌍홍문(雙虹門)·팔선대 등은 ‘금산 38경’으로 불리는 자연조각품이다.
한려수도를 굽어보면서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면 반달 모양의 포구를 이루는 상주해수욕장에 이르게 된다. 이곳은 모래가 곱고 수심이 얕기로 유명해 여름철 피서객이 끊이지 않는다. 한편,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전적지인 노량에는 1657년(효종 8)에 건립한 충렬사와 1952년에 건립한 이순신공덕기념비 등이 있다.
또한, 한려수도의 명물인 구름다리가 가설되어 있어서 이 다리 위에서 바라다보면 한려수도가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1973년 설천면 노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를 잇는 남해대교의 개통으로 육지와의 교통이 편리해졌고, 숙박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는 편이다. 이 고장에는 연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해마다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2003년에 완공된 서면 서상리의 스포츠 파크는 남해군의 대표적인 체육시설로서 축구장, 야구장, 테니스장, 풋살 경기장, 중앙공원, 야외공연장, 대한야구캠프, 스포츠 파크호텔, 아천문화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문화행사 및 축제[편집]
미조항의 해산물축제에서는 미조항의 대표적인 먹거리인 갈치회를 맛볼 수 있다. 남해군 전역에서 매년 정초에 이루어지는 보물섬 해맞이 축제와 상부 정월대보름 달맞이 축제는 이 고장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표적인 민속예술행사이다.
문화축제로는 남해일출제를 비롯해 화전 문화제·전복축제·멍게 축제·달맞이 축제·단풍축제·충무공노량해전승첩제 등이 있다. 화전문화제는 군민의 날을 맞아 격년제로 열리는 행사로, 줄다리기·널뛰기 등의 민속놀이와 다양한 예술행사 및 체육대회가 펼쳐진다. 일출명소로는 금산, 망운산, 설흘산, 대방산, 가천 바다 등이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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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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