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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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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박정희(朴正熙)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개요[편집]

  • 박정희는 한국의 군인, 정치가이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였다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만주군 중위가 되었다. 해방 후 한국군 소장이 되어 5·16군사정변을 주도하였다. 1963년 제5대 대통령이 되어 경제개발을 단행하였고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3선개헌을 통과시켰다. 1972년 국회 및 정당을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74년 8월에는 영부인 육영수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에게 저격당했다. 이러한 정권의 위기는 결국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을 야기시켰으며,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安家) 만찬석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의 저격으로 서거(逝去)하였다. 저서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민족의 저력》, 《민족중흥의 길》, 《국가와 혁명과 나》, 《지도자의 길》, 《연설문집》 등이 있다.[1]
  •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中樹)이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한 후 1944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본 제국이 수립한 만주국의 일제관동군장교로 근무하였다.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국가변란 성격의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깨면서 군복을 벗고 직선제로 치루어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등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치러진 선거에서 당선되어 제5·6·7·8·9대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다.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여 1968년부터 경부고속도로 기공 및 개통, 서울 지하철 기공 및 개통, 농촌의 현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 운동, 대규모 중화학 공업 건설 및 육성, 민둥산의 기적인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자족 실현, 자주국방 및 군대 현대화 사업 등 국가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국가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던 여야 및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1979년 9월 말에 일어난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에서 중정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하였다.[2]

박정희의 생애[편집]

  • 박정희는 1917년 경상북도 선산(善山)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박성빈(朴成彬)과 모친 백남의(白南義)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26년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졸업하였고 1932년 4월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졸업하였다. 사범학교 졸업후 경상북도 문경에 소재한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 교사로 부임하여 1940년 2월까지 근무하였다. 교사를 그만두고 만주의 무단장시[牡丹江市]에 소재한 제6군관구 사령부 초급장교 양성학교인 신경(新京:지금의長春)군관학교를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이때 그는 나이 제한에 걸려 1차에서 낙방하였으나 장교가 되겠다는 자신의 간곡한 편지를 보내 합격하게 되었다. 2년간의 군사교육을 마치고 우등생으로 선발되어 1942년 일본육군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로 졸업하였으며, 8·15광복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에 배속되어 일본군 중위로 복무하였으며 팔로군을 공격하는 작전에 부관으로 참가하였다.
  • 박정희는 일본이 패망하자 베이징을 거쳐 천진항에서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에 입학하여 3개월간 교육을 마치고 조선국방경비대 육군 소위가 되었다. 그 당시 1946년 9월 대구에서 좌익에 의한 시위가 일어났는데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가 시위를 주도하였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시민들과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하였고 박상희가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형의 영향을 받았던 박정희는 군부에 비밀리에 조직된 남로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47년 육군소령이 되어 육군사관학교 중대장이 되었다. 1948년 10월 국방군 내 좌익계열의 군인들이 제주4.3사건 진압을 거부하고 일으킨 여수·순천사건이 일어나자 육군 정보사령부 작전참모로 배속되었다. 1948년 박정희는 당시 국군 내부 남로당원을 색출하자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만주군 선배들의 구명운동과 군부 내 남로당원 존재를 실토한 대가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이후 15년으로 감형되어 군에서 파면되었다.
  • 박정희는 군에서 파면되었지만 육군본부에서 비공식 무급 문관으로 계속 근무하다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소령으로 군에 복귀하였다. 1953년 11월 준장이 되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육군포병학교에서 고등군사교육을 받았다. 1954년 제2군단 포병 사령관, 1955년 제5사단 사단장, 1957년 제6군단 부군단장과 제7사단 사단장을 거쳐 1958년 3월 소장으로 진급한 뒤 제1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으며, 1959년 6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에 군수기지 사령관, 제1관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제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1961년 5월 16일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재임 중에 5·16군사정변을 주도하여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고, 1962년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하였으며,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고, 1963년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1969년 3선개헌을 통과시켰다. 제3공화국 재임동안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문제'를 강행하였다. 1972년 국회 및 정당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 박정희는 유신 초기에는 새마을운동의 전국민적 전개로 농어촌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였고, 제5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완성으로 국민들의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의 심화와 장기집권에 따른 부작용, 국민들의 반유신 민주화운동으로 그에 대한 지지도가 약화되자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내치(內治)의 어려움을 통일문제로 돌파하고자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민족통일의 3대원칙으로 규정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1973년 6·23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할슈타인원칙의 폐기)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의 획기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정책면에서는 북한의 비협조와 당시의 국제정세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서울 신당동 박정희 가옥[편집]

  • 서울 신당동 박정희 가옥(新堂洞 朴正熙 家屋)은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에 있는 가옥이다. 2008년 10월 10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저(私邸)로, 신당동에 위치하며 지상1층, 지하1층짜리 건물 1동이다. 크기는 건축면적 123.97㎡, 연면적 128.93㎡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제7사단장이던 1958년에 매입하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현동에서 이사하였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기 전까지 3년 동안 이 집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하였고, 1979년 서거 후에는 유족들이 살았다. 5·16군사정변의 산실로서, 한국 현대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다. 재단법인 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가 소유 및 관리한다.

박정희 대통령 생가[편집]

  • 박정희 대통령 생가(朴正熙 大統領 生家)는 한국의 대통령(제5대∼제9대)을 역임한 박정희의 생가이다. 1993년 2월 25일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또한, 이 일대 대지 228평이 보호구역으로 고시되었다. 박정희(朴正熙)는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에 있는 이 집에서 1917년에 태어나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20년을 살았다. 박정희의 본관은 고령(高靈)이지만, 선조 때 고령에서 성주(星州)로 옮겼다가, 1914년에 현 위치인 상모동으로 이사하였다. 이 집은 1900년경에 지은 15평 규모의 초가집으로, 전형적인 농촌 가옥이다. 1964년 구미시가 안채 및 사랑채를 단장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꾸몄다. 생가 안에는 1979년에 설치한 분향소가 있다. 동쪽을 제외하고 사방이 대나무와 탱자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어서 담을 쌓을 필요가 거의 없다. 안채는 북향으로, 정면에 있는 언덕과 대나무 숲이 바람막이 역할을 하게 방향을 잡았다.

박정희정부의 남북통일방안[편집]

  • 1960년대 대통령 박정희는 선(先)건설 후(後)통일 노선에 따라 뚜렷한 통일방안이 없이 경제건설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초부터 미국과 중국의 수교 등 국제정세의 변화와 정권유지의 필요성 때문에 1970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평화통일구상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1972년 역사적인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합의하였다. 그후 정부당국간의 "남북조절회의"와 민간차원의 "남북적십자회담"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동시에 진행되었다. 당시의 남북대화는 실질적 성과보다는 정권유지의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10·26사건[편집]

  • 10·26사건(十二六事件)은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載圭)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사건이다. 1979년 10월 26일 오전, 박정희 대통령은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따라 헬기를 타고 삽교천으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차지철의 제지로 준공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행사가 끝난 뒤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宮井洞) 안가(安家, 안전가옥)에서 저녁 연회를 준비하도록 하였고, 김재규와 차지철,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을 불러들였다. 이 밖에 김재규의 초청으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鄭昇和)가 안가 별채에 있었다. 저녁 7시 무렵 김재규는 연회장에서 나와 정승화를 찾아가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한 뒤, 권총을 가지고 중앙정보부 직원이었던 박흥주(朴興柱), 박선호(朴善浩) 등을 불러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살해 계획을 알리고 준비하도록 하였다. 김재규는 연회장으로 돌아갔고, 저녁 7시 40분 무렵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향하여 권총을 격발하였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오른쪽 가슴을 쏘았다. 김재규는 가지고 있던 권총이 고장 나자 박선호의 것을 가지고 돌아와 차지철을 살해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시점까지 살아있었고,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의 오른쪽 머리를 향해 권총을 쏘았다. 그렇게 박정희 대통령은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박정희(朴正熙,1917.11.14.~1979.10.26)〉, 《두산백과》
  2. 박정희〉,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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