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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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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고왕(대조영)

발해 고왕(高王)은 발해의 시조(재위 698~719)로 본명은 대조영이다.

개요[편집]

  • 발해 고왕은 698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동모산을 도읍으로 한 진국(震國)을 세웠으며, 713년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 본명은 대조영(大祚榮)이며, 고구려의 유민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분산정책에 따라 가족과 함께 요하(遼河) 서쪽의 영주(營州)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696년 이진충(李盡忠) 등이 이끈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영주 지역에 억류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탈출하여 자립을 꾀하였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거란족의 반란을 평정한 뒤 군대를 파견하여 그의 집단을 추격하도록 하였으나 장령자(長嶺子) 부근의 천문령(天文嶺)에서 대조영에게 대패하였다. 이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는데 더욱 힘써 국가건설의 기반을 굳히고, 계속 동부로 이동하였다. 698년 지금의 지린성(吉林省) 옌볜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둔화시(敦化市) 지역인 동모산(東牟山)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어 국호를 진(震 또는 振)이라 하였다. 발해의 건국 지역은 계루부(桂婁部)의 옛 땅이었으며, 대조영의 큰아들 대무예(大武藝, 훗날의 무왕)도 계루군왕으로 불렀다. 한편, 당나라는 유화정책을 펼쳐 705년 중종(中宗)이 진에 사신을 보내왔고, 고왕도 둘째 아들 대문예(大門藝)를 당나라에 보냄으로써 우의를 표하였다. 713년 당나라 현종(玄宗)은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忽汗州都督)의 별직을 주고 우의를 나타냈다. 그해에 국호를 진국에서 발해로 바꾸었고, 양국은 건국 초기의 갈등을 극복하고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1]
  • 발해 고왕은 발해를 건국한 초대 왕이다. 고왕에 관해 중국 측 기록인 《구당서》에서는 대조영(大祚榮)을 고구려의 별종 출신으로 서술했고, 반면 《신당서》에서는 본래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당나라의 영주(營州)에 그 고구려 유민과 함께 이주되어 살았으며, 걸걸중상, 걸사비우 등을 따라 고구려 유민 및 말갈족을 이끌었다. 696년 이진충(李盡忠), 손만영(孫萬榮)이 이끄는 거란족의 반란을 틈타 걸걸중상, 걸사비우 등과 동쪽으로 이동, 무주(武周)는 사신을 보내 회유했으나 거절했다. 무주에 항복한 거란족 출신 장군 이해고(李楷固)의 습격을 받고 대패했으나 동쪽으로 이동했다. 698년 천문령 전투에서 무주 군대를 격파하고 동모산에 성을 쌓고 진(震)을 건국,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했다. 705년에 당나라와 화친하였고, 713년 당나라 예종으로부터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左驍衛員外大將軍 渤海君王) 홀한주도독부도독(忽汗州都督府都督)으로 책봉되고 형식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했다. 한국 측 기록인 《삼국유사》에 인용된 《신라고기》와 《제왕운기》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구장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신라고기에서 고구려 구장 조영은 성이 대씨라고 기록되어 있다.[2]
  • 발해 고왕은 발해를 건국한 발해 왕조의 창업군주이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에서 고구려의 유민들을 국외로 강제 이주시켰으나, 영주(營州) 지역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있었다. 당나라의 가혹한 통치로 거란인들이 봉기하여 영주 일대를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대조영은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다. 대조영은 걸사비우가 전사한 후 말갈과 고구려의 무리들을 규합하여 계속 동쪽으로 진군해 천문령 전투에서 이해고가 이끄는 무주군을 무너뜨렸으며, 다시 동쪽으로 향해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 위치한 동모산(東牟山)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웠다. 중국의 기록 외에는 신라의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내는 국서 등에 대조영이 언급되는데, 이에 따르면 대조영이 처음 나라를 세우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 이를 알렸는데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했을 당시 신라는 효소왕의 재위기였다. 신라에서는 대조영에게 5품 관등 대아찬을 주었다. 대아찬은 신라 골품제에서 진골만 받을 수 있는 관등인데 신라가 외부인에게 진골 대우를 한 것이 기록상 남아있는 건 금관가야 왕족 구형왕, 고구려 왕족 안승 둘뿐이었다. 이걸 준 건 발해가 신라보다 아래라는 정치적 제스처긴 하지만, 어쨌든 신라 측에서 신생국가 발해와 대조영을 새로운 한 나라의 군주로 인정한 것이다.[3]
  • 발해 고왕은 발해의 제1대(재위: 698년~719년) 왕이다. 본명은 대조영(大祚榮)이다. 고구려 유민으로서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의 영주(營州) 지방에 그 일족과 함께 옮겨 와 거주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696년이진충(李盡忠) · 손만영(孫萬榮) 등이 이끄는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 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대조영은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대조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고 회유해 당나라의 세력 아래 다시 복속시키고자 했으나 그들은 거부하였다. 당나라는 거란군을 격파한 뒤, 성력연간(聖曆年間, 698∼699)에 추격군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에 항복한 거란족 출신의 장군 이해고(李楷固)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가 공격해 오자, 걸사비우의 말갈족 집단이 먼저 교전했으나 대패하였다. 그러자 대조영은 휘하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당나라 군사의 예봉을 피해 동으로 달아나면서, 한편으로 흩어진 걸사비우 예하의 말갈족 등을 규합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 추격해 오자, 대조영은 지금의 혼하(渾河)와 휘발하(輝發河)의 분수령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에서 그들을 맞아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그 뒤 계속 동부 만주 쪽으로 이동해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인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였다. 698년에 국호를 진(震),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건국 후 곧이어 당나라와 대결하고 있던 몽고고원의 돌궐(突厥)과 국교를 맺고 신라와도 통교했으며, 당나라와는 중종 때 정식으로 통교하였다. 당나라는 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는데, 그때부터 발해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4]

천문령전투[편집]

  • 천문령전투(天門嶺 戰鬪)는 698년 대조영이 이끈 고구려 유민들이 천문령에서 당나라 군대와 싸운 전투이다. 698년 대조영(大祚榮, 고왕)이 이끈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靺鞨人) 집단이 거란(契丹) 출신의 장수 이해고(李楷固)가 이끈 당나라 군대와 천문령(天門嶺)에서 싸운 전투이다. 대조영의 세력이 승리하면서 발해(渤海)가 건국되는 계기가 되었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오대회요(五代會要)》, 《신오대사(新五代史)》 등에 관련된 기록들이 전해진다. 고구려 출신인 걸걸중상(乞乞仲象)과 대조영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요서(遼西) 지방의 영주(營州)로 끌려가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696년 거란의 부족장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문홰(趙文翽)를 죽이고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걸걸중상과 대조영은 백산말갈(白山靺鞨)의 수장인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요하(遼河)를 건너 동쪽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백두산의 동북 지역을 차지하고, 지금의 무단 강[牡丹江]인 오루하(奧婁河)에 의지해 성벽을 쌓고 방어를 튼튼히 하였다. 이들의 세력이 커지자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봉했다. 하지만 이들이 복속을 거부하자 측천무후는 거란족 출신의 옥검위대장군(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와 중랑장(中郎將) 색구(索仇)가 이끄는 토벌군을 보냈다.
  • 698년 걸사비우 등은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고 걸사비우마저 전사했다. 당시에는 걸걸중상도 이미 병으로 죽은 뒤였으므로 그의 아들인 대조영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당나라 군대가 추격해오자 대조영은 세력을 규합해 천문령에서 당나라 군대와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이해고가 이끈 당나라 군대는 토벌에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 대조영은 걸사비우가 이끌던 무리를 흡수해 세력을 더욱 키웠다. 그리고 동모산(東牟山)에서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를 진국왕(震國王)이라고 칭했다. 또한 당나라에 맞서기 위해 돌궐(突厥)로 사신을 보내 그들과 통교하였다. 당시 대조영의 세력은 십여만 호의 인구에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릴 정도로 커졌으며, 지배하는 영역은 사방 오천 리에 이르렀다. 713년 당나라 예종(睿宗)은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했고, 그 뒤로 대조영은 진국(震國) 대신 발해(渤海)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발해 고왕의 생애[편집]

  •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버지는 걸걸중상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는다. 대씨와 태씨 족보에 의하면 대조영의 어머니는 시씨(時氏)라고 한다.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대조영에 관한 많은 견해가 표명되어 왔지만, 일반적으로 구당서에 나온 고려 별종(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으로 보아 고구려 장군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왜냐면 신당서의 기록은 전반부는 발해국기, 후반부는 구당서에 의거해 서술된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 외의 주장으로는 말갈족으로서, 고구려에 복속된 뒤, 고구려화 과정을 거친 말갈계 고구려인 또는 쑹화강(송화강) 유역에 거주하던 고구려 종족이라고 본다. 대조영이 수나라 개황 연간 돌지계가 이끌고 수나라로 귀부하여 유성에 정착하게 된 속말말갈의 후손으로 보아, 그의 출자에서 고구려를 배제하는 학설도 존재한다. 결국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연남생은 당나라에 망명했다. 당나라는 667년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최고 권력자였던 연남생의 합류로 고구려는 크게 무너져 당나라는 파죽지세로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결국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 발해에 관한 기록은 중국사서의 열전에 적혀 있는 몇 장이 전부이고, 대조영에 관한 기록은 한 줄에 불과하다. 그나마 적혀 있는 대조영의 출신에 관한 내용도 사서마다 달라서 혼란스럽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원래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하였고, 『신당서(新唐書)』에서도 '발해는 원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붙은 자로 성은 대씨이다'라고 하였다.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대조영의 출신에 대하여 원래는 속말말갈이고, 고구려의 별종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말갈적 요소와 고구려적 요소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반면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한국 측 사서인 『삼국사(三國史)』와 『신라고기(新羅古記)』를 인용하여 고구려의 옛 장군 조영의 성은 대씨(大氏)인데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나라를 세워 발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조영의 종족적 출신에 대해서는 정확히 언급하지 않은 채 고구려의 장군 출신이라고 하고, 발해를 세운 주체가 고구려의 유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즉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삼국사』와 『신라고기』는 발해에 대하여 고구려적 요소만을 서술하고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도 대조영을 고구려의 옛 장수라고만 언급하였고,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도 발해는 속말말갈인데 “고구려인 대조영(高句麗人 大祚榮)”이 발해를 세웠다고 하여 대조영을 고구려인으로 규정하고 고구려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말갈적 요소만을 언급한 기록도 확인되는데 최치원은 대조영이 원래 속말말갈 출신이라고 하였고, 『삼국유사』에서 중국의 『통전(通典)』을 인용한 내용에서는 “발해가 원래 속말말갈로 그 추장인 대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고 하여 속말말갈이라고 칭하고 있다.

발해[편집]

  • 발해(渤海)는 한반도 북부·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동부·연해주에 있던 나라(698∼926년)이다. 발해는 고구려 출신 대조영(고왕 高王)이 국가를 세웠으나, 만주지방에 혼거하던 말갈족도 함께 포용하여, 일반적으로 고구려 유족이 주로 상류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말갈족이 하류층을 형성하였다. 대조영은 북서쪽의 거란이나 돌궐족의 성장으로 요서지방이 막혀 당나라의 방해를 받지 않고 발해를 안전하게 운영할 수 있었다. 당도 결국 발해의 자립을 인정하고 외교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대조영을 이어 그의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제2대 무왕(武王)으로 즉위하여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하고, 부왕이 건국한 발해를 무력을 통한 강력한 대외정책으로 국토를 넓히는 데 주력하였다. 무왕은 당시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松花江) 접경 지역에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여 발해와 대립하고 있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압박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동생 대문예(大門藝)가 말갈을 공격하라는 왕명을 어기고 당나라로 망명하자,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당나라의 등주(지금의 산둥반도)를 공격하게 하여 성주를 살해하고 당나라에 위압적으로 대항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 공격에 성공함으로써 당나라로 하여금 발해를 더 이상 멸시하지 못하게 하고, 발해 북쪽의 흑수말갈과 유대관계도 약화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 발해 제3대 문왕(文王)은 즉위 후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고, 부왕이 군사력을 이용한 대외적 팽창에 주력한 데 비하여 주로 내치와 외교에 주력하였다. 우선 문왕은 좁은 지역인 동모산(東牟山)에서 벗어나 약간 남쪽에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를 건설하고 도읍을 옮겼다. 농경지가 넓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리고 또 다시 얼마 후 북쪽에 위치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천도하였다(742~755년 사이). 이곳은 발해 북쪽에 세력을 펴고 있던 흑수말갈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략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즉, 발해의 국세는 말갈 세력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 수준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또 다시 두만강 하류 지역에 위치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옮겼다(785~794년 사이). 이곳은 동해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다.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관계와 교역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는 물론 관무역의 경제적 발전을 꾀하였다. 발해는 당과도 사신을 수시 파견하여 친당외교를 폈고, 공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신라와는 경계하는 입장으로 활발한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뒤 여러 왕들이 단명하다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인 대인수(大仁秀)가 제10대 선왕(宣王)으로 15년간 재위하였는데, 이 시기는 영토를 넓히고 내치를 충실히 한 발해 중흥기라 할 수 있다. 우선 영토를 크게 넓혀 흑룡강 하류 지역까지 개척하고 흑수말갈을 압박하여 말갈과 당나라의 교류가 중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문왕 때의 3경 외에 2경을 더 개척하여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와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를 둠으로써 전국이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과거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오히려 북쪽 연해주 지역으로 더 진출한 형세를 갖게 되었다.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호칭할 정도의 국세를 가지게 되었다.

발해 고왕에 대한 상훈과 추모[편집]

  • 719년 발해 고왕이 죽자, 그의 아들 대무예(大武藝, 무왕)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고왕이 어느 민족 출신인지에 대해서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이 서로 달라 견해가 분분했으나, 『구당서』에는 걸사비우를 말갈인으로 기록한 데 반해 대조영은 말갈인이라는 기록이 없다. 또한 『오대회요』나 『신당서』에서는 고려 별종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말갈과는 구분되며 고구려와 일정 부분 연관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미 발굴된 발해의 무덤들이 고구려식 천정 양식 및 장법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나, 걸걸중상이 영주를 벗어나 처음 정착한 곳이 고구려의 고지라는 것에서 이들이 말갈계 고구려인일지라도 고구려 귀속의식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당 역시 대조영의 아들인 대무예를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봉한 사실에서 당시에는 이들을 고구려계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고왕(高王)〉, 《두산백과》
  2. 고왕〉, 《위키백과》
  3. 고왕〉, 《나무위키》
  4. 고왕 (高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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