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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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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제너럴일렉트릭(General Electric)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은 미국의 발명가이자 사업가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명을 남긴 인물로 1,093개의 미국 특허가 에디슨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또한, 미국을 대표하는 제조업체로, 전기조명 회사를 모체로 성장한 제너럴일렉트릭(General Electric Company)의 창립자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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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토머스 에디슨은 1847년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출생해 미시간주 포트 휴런에서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만물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당시의 주입식 교육에 적응하는데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정규 교육을 받은 것은 3개월 뿐 이었으나, 결혼하기 전에는 교사로 일했던 어머니의 열성적인 교육 덕에 점차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중앙교육연구원에서 펴낸 에디슨 전기에 따르면, 에디슨의 어머니는 아들의 재능을 생각해서 직접 실험을 할 수 있는 과학책을 사 주었다. 이후, 전신기 특허로 큰 돈을 벌게된 그는 1876년 세계 최초의 민간연구소로 알려진 멘로파크연구소를 세워 발명을 계속하였다. 그의 발명은 굉장히 많아서 특허의 수효만도 1,300여 개나 된다. 에디슨의 발명품으로는 1874년 자동 발신기 개발, 1877년 축음기, 1879년 전화 송신기개발, 1880년 신식 발전기와 전등 부속품개발, 1881년 전차의 실험을 했고, 1882년 발전소를 건설했고, 1888년 영화의 제작방법을 알아냈고, 1895년 광물을 가려내는 방법, 1900년 시멘트 공업의 개량, 1909년 엔진형 개발, 축전지개발 등이 있다. 이 중 가장 높게 평가되는 부문은 도시의 밤을 환하게 밝혔다는 것이다. 전구의 발명은 발전, 송배전 부문의 발전을 가져오게 했고 각 가정마다 전기가 들어가게된 계기가 되었다. 이 전구가 조선시기에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전기 발전의 시초에 기여했다. 토머스 에디슨은 82세의 나이로 백열 전구 발명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연설을 하고 난 뒤 병을 앓게 되었다. 이후 1931년 10월 18일에 총 1,033개의 발명품을 남기고 향년 8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1]

약력[편집]

  • 1869년 : 전기 투표 기록기 발명
  • 1870년 : 주식 상장 표시기 발명, 뉴저지주 뉴어크에 공장 설립
  • 1871년 : 인자 전신기 발명
  • 1872년 : 이중 전신기 발명
  • 1876년 : 탄소 전화기 발명
  • 1877년 : 축음기 발명
  • 1879년 : 백열전구 발명, 탄소필라멘트 이용 40시간 이상 지속 가능한 전구 발명
  • 1882년 : 에디슨 전등회사 설립
  • 1887년 : 마테우치 메달 수상
  • 1891년 : 자기선광법 발명, 영화 촬영기 발명, 영사기 발명
  • 1895년 : 럼퍼드 상 수상
  • 1900년 : 축전기 발명
  • 1928년 : 의회 명예 훈장 수상[2]

주요 활동[편집]

전구의 상용화[편집]

토머슨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여 미국의 가장 위대한 발명가라고 평가받는 인물 중 한명이다. 하지만 그는 전구를 직접 발명한 것이 아니고 전구의 상용화에 이바지했다. 우선 최초의 전기는 전기화학을 크게 대중화시킨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Humphrey Davy)이다. 그의 연구로 1808년에 탄생한 아크등은 볼타 전지를 이용해 전지와 연결된 두 개의 탄소 조각 사이에 전류를 통과시켜 제작되었다. 프랑스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서 공공조명으로 사용되었지만 가정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해 상용화되지는 못했다. 이후, 그는 안전등을 개발하여 무료로 전세계 탄광에 보급되었다. 하지만, 험프리 데이비가 전구의 최초 발명가로 이름을 알리지 못한 이유는 전구의 성능이 상용화되기엔 부족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전구를 발명한 인물은 스코틀랜드의 발명가 제임스 린제이(James Lindsay)이다. 하지만, 여러 단점으로 끝내 상품화하지 못했고 이후 1875년 영국 화학자인 조셉 스완(Joseph Swan)이 여러 번에 걸쳐 개량하여 백열등을 만들어 특허를 신청했다. 그리고, 토머스 에디슨은 이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전구를 개발해 상품화에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토머스 에디슨은 최초로 상용화될만한 상품성을 가진 전구를 발명한 인물로 보는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조셉 스완을 상대로 도용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고소했지만 패소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전기는 전등발전시설을 하기 위해 에디슨 전등 회사로부터 고종이 경복궁에 전구를 설치하면서 서서히 보급되었다. 1886년 당시 토머스 에디슨이 백열 전구를 발명한지 8년 후로 조선에서 전기 시설 설비와 운영 권한에 전권을 그에게 전임했다. 먼저 발전설비는 3kw 증기발전기 2대로 건청궁내 뒤편 향원정 부근에 설치되었고, 경복궁과 그 앞뜰에 가설하여 점등했다. 하지만, 토머스 에디슨이 직접 선발해 한국에 파견한 책임자 윌리엄 맥케이(William McKay)가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전등소 사업이 흥행하지 못했다. 이후, 조선 정부가 영국인 퍼비가 포사이스(Furby Forsyth)를 고용하고 전등소 사업이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3]

제너럴일렉트릭 창립[편집]

제너럴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은 에디슨이 설립한 전기조명 회사를 모체로 성장한 세계 최대의 글로벌 석유 및 에너지 인프라 기업이다. 1892년 토머스 에디슨이 만든 에디슨 제너럴일렉트릭(Edison General Electric)과 톰슨 휴스턴(Thomson-Houston)이 합병해 뉴욕 주 스케넥터디에 설립되었다. 1911년 국립전기조명협회(NELA)가 제너럴일렉트릭 조명사업부에 흡수되었다. 국립전기조명협회는 에디슨전기연구소의 전신이다. 1935년 제너럴일렉트릭은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주식이 거래된 상위 30개 기업 가운데 하나였다. 제너럴일렉트릭의 사업부 목록은 오랜 시간에 걸쳐 수차례의 인수, 자산매각, 구조조정을 통해 변경되었다. 에너지, 인프라, 기술, 항공, 금융, 의료 등의 부문에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사업을 발굴했다. 2005년부터 환경문제 해결에 앞장서며 녹색기업의 입지를 굳혔다. 회사의 건물은 지붕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이는 제너럴일렉트릭 로고 덕분에 제너럴일렉트릭 빌딩으로도 알려져있다. 자회사인 라디오 코퍼레이션 아메리카(RCA)를 통해서 그 건물이 1930년대에 건축된 이래 이곳과 인연을 만들어왔고, 전력, 항공, 헬스케어, 운송 등의 분야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중전기기와 가정용 전기기구를 주체로, 원자연료, 제트엔진, 원자력발전설비 등을 제조한다. 또한, 프랑스의 스네크마와 합작하여 항공기용 제트엔진 제조업체인 CFM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토머스 에디슨은 제너럴일렉트릭의 주식을 5% 정도를 차지했지만 이때부터 전기사업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이후 미국의 전력산업도 테슬라와 에디슨이 아닌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 회사와 제너럴일렉트릭 간의 경쟁으로 그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4]

에디슨 효과[편집]

에디슨 효과로 잘 알려진 이 명칭은 리처드슨효과와 열전자방출로도 불리는데, 1873년 영국의 과학자 프레더릭 구드리(Frederick Guthrie)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프레더릭 구드리는 (-)로 대전된 구가 진공에서 전하를 잃지만, (+)로 대전된 구는 전하를 잃지 않는 다는 것을 처음 발견했고, 이후 토머스 에디슨에 의해 이론이 성립되었다. 그는 백열전구의 연구 도중에 필라멘트의 증발에 의해 유리구가 흑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구 안에 금속판을 삽입하였다. 삽입한 금속판이 필라멘트에 대해 양전위이면 전류가 흐르고, 음전위이면 전류가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좁은 의미의 에디슨 효과는 이러한 방향성을 띠는 전류 효과를 뜻하고, 넓은 의미의 에디슨효과는 열전자방출을 뜻한다. 가열에 의해 금속표면을 이탈한 전자는 (-)전하를 띠게 되고 나머지 한 극에 (+)극을 연결하면 전기력에 의해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극을 연결하면 같은 극이므로 척력이 작용해 전자가 이동하지 않고 전류가 흐르지 않게 된다. 토머스 에디슨은 전압이 증가함에 따라 전류가 급상승하는 것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정전압장치를 개발했다.[5] 열 에너지가 전하 운반자에게 그것을 붙잡고 있는 금속의 에너지를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기 때문이다. 이때 붙잡고 있는 에너지란 것은 일함수이다. 전하 운반체에는 이온이나 전자가 있는데, 열전자라고도 한다. 방출 후에, 방출된 전하와 양은 같고 부호는 반대인 전하가 방출된 지역에 남게 된다. 그러나 배터리와 연결이 돼 있다면, 방출체에서 전하가 방출됨에 따라 전하가 공급되고, 남아있는 전하가 배터리를 통해 공급되는 전하와 상쇄된다. 열전자 방출의 전형적인 예로써 진공상태에 있는 뜨거운 음극에서 방출되는 전자가 있으며, 이것을 에디슨 효과라고도 한다. 음극은 주로 금속 필라멘트나 탄소화물, 붕소화물 등이 쓰인다. 1000K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들을 다루는 학문을 열이온학이라고 한다.[6]

전기자동차 개발[편집]

1900년대에는 자동차의 3분의 1이 내연기관 자동차가 아닌, 전자동차로 이루어져 있었다. 차량의 조작이 쉬웠으며 최고 속도가 시속 37km에 달했다. 미국의 베이커 자동차 회사가 20세기 초에 제작한 전기자동차베이커 일렉트릭(Baker Electric)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전기자동차는 전기가 흔하지 않았던 시대에 출시되어 배터리로 충전해야만 했고 충전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된다는 큰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기술의 발전이 미숙했기 때문에 제한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이때 토머스 에디슨은 전기가 차량의 동력원으로서 적절하다고 판단했으며 미국의 자동차 회사인 포드(Ford)의 창업자인 헨리 포드(Henry Ford)와 함께 자동차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헨리 포드는 가솔린을 개발한 포드 자동차를 창립하고 모드 모델 T를 출시하게 되고, 토머스 에디슨은 장거리도 주행이 가능한 전기자동차의 개발에 착수했다. 1901년 그는 전기자동차의 동력원이 될 니켈 철 전지를 개발하고 이를 사용해 160km까지 주행이 가능한 방법을 찾아냈다. 에디슨 전지는 기존의 전기자동차에 탑재된 납축전지보다 에너지 밀도가 훨씬 더 높고 충전 시간도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전지는 개당 10,000달러 이상으로 개발비용이 높았다. 또한, 낮은 온도에서는 작동이 잘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토머스 에디슨은 원가를 낮추기 위해 연구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에디슨의 전기자동차는 생산된지 얼마 안가 단종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도전이 있어 현재까지의 전기자동차 역사에 큰 의미가 있다.[3][7]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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