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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7일 (월) 17:21 판

극장(劇場)

극장(劇場)은 무대가 있으며, 뮤지컬이나 오페라를 보기 위한 공간이다. 규모에 따라 대극장, 소극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요

극장은 연극이나 음악, 무용 따위를 공연하거나 영화를 상영하기 위하여 무대와 객석 등을 설치한 건물이나 시설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고대 그리스의 반원형 극장이 인류 최초의 극장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현대에 와서는 영화관 등의 시설이 극장의 이름을 이어받았다.

극장(theatre)의 어원이 관람석(theatron)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 듯이 극장은 배우와 관객을 하나의 공간 속에 연결하는 데 의의가 있으며, 그 건축양식이나 구조는 시대적 변천을 겪어왔다. 그리고 극장의 형태와 연극양식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다양한 무대예술을 공연하는 장소라는 극장 개념은 20세기에 들어와서 기계문명의 발전에 따른 영화가 등장하면서 변화되어왔다. 영화가 처음 생겼을 때는 무대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극장에서 상영되었으므로 극장은 무대예술 외에 기계예술까지 다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서양에서는 영화상영만을 목적으로 한 영화관이 생겨나면서 극장과 영화관은 뚜렷이 구별지어졌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개화기에 처음 극장이 세워지면서 연극·무용·영화 등을 같은 극장무대에서 상연하는 습성이 생겼고, 그것은 1950년대까지 지속되어왔다.

세계연극사를 보면 극장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최초의 극장을 가진 나라는 그리스로 서기전 5세기 무렵에 이미 반원형의 장소에 유자형(U字形)으로 관중이 앉을 수 있도록 목조무대를 세운 야외극장이 있었다. 1백년쯤 뒤에는 비교적 과학적 시설을 갖춘 아테네의 디오니소스극장을 비롯해 그리스 전역에 40여 개의 극장이 세워졌다.

그로부터 1세기 뒤에는 석조극장까지 세워질 정도로 서양에서는 매우 일찍부터 극장이 발달하였다.

국가별 극장

고대 그리스

지붕이 없는 갖가지 건조물 중에 특히 중요한 것은 극장으로, 그리스인들이 공회를 위해 이용했다. 정규의 그리스 극장은 큰 원형 오케스트라(舞踊場)와 보통 반원보다 약간 큰 관람석(테아트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케스트라의 중앙에는 디오니소스에게 제사 지내는 제단이 있고, 합창대가 이 제단을 둘러싸고 노래하면서 춤을 춘다. 관람석은 일반적으로 구릉의 경사진 변을 차지한다.

스케네(skene)는 배우가 분장을 하는 곳으로 쉽게 등장과 퇴장을 할 수 있도록 지어진 건물이다. 스케네는 그리스어로는 본래 천막이나 허술한 가옥을 뜻한다. 극장의 유래는 이처럼 작은 집 앞에 낮은 무대를 설치하여, 배우가 이 무대 위에서 합창대에 대한 회답을 한 것인 듯하다. 관람석과 양끝의 무대와의 사이에 통로(parodos)가 있고, 합창대는 이곳으로 입장하고 퇴장을 하도록 꾸며져 있다.

원래 무대는 오케스트라와 거의 같은 높이였으나, 차차 높이를 늘려 열주(列柱)로 세우게 되었다. 이전에는 목조였으나, 점차 석조 건축으로 바뀌었다. 이 발전의 여러 단계에 대해서는 많은 의론을 자아내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 극장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의 남쪽 경사면을 차지하고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으로, 기원전 6세기에 세워졌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적은 여러 시대, 주로 리코르고스 시대(기원전 4세기 후반)나 로마 제정 시대에 개조된 것이 전해지고 있다. 관람석을 보면 일반석은 높이 33cm의 낮은 계단 모양이지만, 앞줄의 고관석은 등과 팔꿈치걸이를 설비, 부조(浮彫)로 꾸며져 있다.

한국

한국에서는 극장이라는 개념이 연극·무용·음악·영화 등을 상연하는 장소로 인식되어 있으며, 대중에게는 오히려 영화관으로서 인식된 실정이다. 무대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극장과 영화관이 뚜렷하게 구별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였다.

한국은 개화기에 와서야 극장이 세워졌다. 고려시대에 산대(山臺)라는 가설무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우리의 전통극이 야외놀이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옥내 극장이 발전되지 못한 것이다. 창고 같은 기존건물을 연예공연을 위한 옥내극장으로 개조했는데, 광무대(光武臺)·아현무동연희장(阿峴舞童演戱場)·용산무동연희장 등이 초기의 대표적인 극장들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옥내극장 형태를 갖춘 최초의 극장은 1902년에 설립된 협률사(協律社)이다.

협률사는 연극사상 최초의 관립극장[皇室劇場]이기도 한데, 3년반 만에 문을 닫기는 하였지만 개화기의 대표적인 극장이었다. 협률사는 5백 석 규모의 중형극장이었으나 당시 기술의 부족으로 인해 무대구조·조명 등에 있어서 원시성을 탈피하지 못하였다. 이 극장은 1908년 7월에 민간인들에 의해 원각사(圓覺社)라는 명칭으로 다시 개관되었지만 고전예능과 창극을 주로 공연하다가 국권상실과 함께 2년여 만에 완전 폐쇄되었다.

개화기에는 이러한 관립극장과는 달리 광무대·연흥사(演興社)·단성사 등의 사설극장들이 세워져 무대예술발전에 기여했다. 서울 동대문 부근(광무대)·종로(단성사)·낙원동(연흥사) 등지에 자리잡고 있던 이들 사설극장들도 시설은 형편 없었고 중형 규모였다. 그러나 이 사설극장들은 창극이나 민속무용 등의 전통예술을 주로 공연한 광무대를 제외하고는 주로 영화를 많이 상영하였다.

특히 광무대는 1931년 폐관될 때까지 우리 나라 전통공연예술을 전승시키는 활동무대로서 대단한 공로가 있다. 1911년부터 신파극이 생기면서 연흥사는 그 본거지 구실을 하였다. 이들 극장들은 원각사가 그러했듯이 프로시니엄 아치(proscenium arch) 형태의 무대는 갖추었으나, 객석에는 의자도 배치되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명도 전등을 사용하는 정도였다.

음향시설은 물론 화장실 시설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여성들은 작은 요강을 갖고 극장에 갈 정도였다.

이러한 극장 사정은 1920년대까지 별로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한국인이 경영하던 조선극장 정도가 그래도 괜찮은 공연장이었다. 일본인 흥행업자들이 서울·부산·인천·대구·광주·평양 등 대도시에 극장을 짓기 시작하면서 시설도 많이 개선되었다. 일본인 흥행업자들은 예술보다는 흥행만을 생각하고 극장을 경영했기 때문에 영화와 신파극만을 상연하였다.

영화가 인기를 끌자 전국의 일본인 소유 극장들은 거의 다 영화만을 상영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 연극인들은 공연을 위해 극장을 빌리는 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고, 일본인 흥행업자에게 착취와 박대를 함께 당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연극전용극장으로 설립된 것이 바로 동양극장(東洋劇場)이다.

이 극장은 무용가 배구자(裵龜子)·홍순언(洪淳彦) 부부가 1935년 11월 서울 서대문 근처에 20여만 원을 들여 설립했는데, 회전무대와 호리촌트, 조명실의 배전반까지 갖추고 무대에 스팀까지 들어올 정도의 시설을 갖춘, 당시로서는 최신시설의 근대적 연극전문극장이었다.

중형 규모의 동양극장은 청춘좌(靑春座)와 호화선(豪華船) 등의 전속극단을 비롯해 전속연출가·작가·무대미술가·조명가까지 둘 정도로 전문화의 길을 걸음으로써, 단번에 우리 나라 대중연극의 중심지가 되었다. 상당한 액수의 월급제를 장기간 실시한 극장도 동양극장이 처음이었는데, 이는 그만큼 전문극장으로서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동양극장은 광복 직후까지 대중연극의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한국 사람들의 사설극장과는 달리 1939년 다목적 홀 성격의 대형극장인 부민관(府民館)을 서울 태평로에 세웠는데, 1천석이 넘는 객석과 대형무대의 등장으로 공연물도 대형화되기 시작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광복과 함께 극장 판도는 크게 변했다. 우선 전국의 극장 한 두 개를 제외하고 모든 극장이 일본인 소유에서 한국인 소유로 바뀐 점이다. 그러나 극장들이 연극인들에게 넘겨진 것이 아니라 비전문적 흥행업자들에게 넘겨짐으로써 광복 후 연극 발전의 장애가 되었다.

처음에는 주요 극장들이 한국인 소유가 되어 공연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서울의 주요 극장들인 중앙극장·수도극장·대륙극장·동양극장·단성사·국제극장·제일극장·국도극장 등이 연극과 영화를 상연하다가 점차 영화관으로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다시 연극전용극장의 필요성이 나타났고, 국립극장 설치운동이 문화계에서 광범위하게 일기 시작하였다.

1950년 4월에 최초로 국립극장이 설립되었으나 건물을 새로 지은 것이 아니고 구부민관 건물의 내부를 수리하여 개관한 것이었다. 국립극장은 대표적인 연극인들을 모아 협의기구로 신극협의회를 구성하고, 전속극단으로 신극협의회와 극예술협의회를 두었다. 5천만 원을 들여서 내부 일체를 수리하고 현대적 호리촌트와 조명기구를 모두 갖추었다.

국립극장은 개관공연인 유치진(柳致眞) 작, 허석(許碩) 연출의 <원술랑>이 1주일 동안 6만여 명의 관객이 동원될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이 국립극장 개관은 광복 직후 좌·우익 연극의 분열·갈등이 일단 정리되고 민족연극이 정립단계에 들어섰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립극장은 일단 폐쇄되었다가 1953년 2월에 피난지 대구에서 문화극장이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어 재개관되었는데, 이때 전속단체를 두지 않고 수지타산만을 생각한 흥행 위주의 공연을 자주 가져 비난을 사기도 하였다.

1957년 6월에는 서울로 돌아와 명동에 있는 시공관(市公館:옛날의 明治座)을 국립극장으로 쓰게 되었다. 새 국립극장은 3층 건물로서 1935년 일본인이 영화관으로 지은 것이지만 연극공연장으로서 손색이 없는 건물이었다. 국립극장이 환도하면서 신극협의회도 다시 전속단체로 복귀하여 국립극장이 우리 나라 연극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전쟁 직후이기 때문에 연극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영화나 여성국극이 인기를 끌면서 대부분의 사설극장들이 관중을 끌어모았기 때문에 연극은 명맥유지조차 어려웠다. 1958년 12월 서울 을지로 입구에 소극장 원각사가 개관되었고, 이 본격적인 소극장이 생기면서 침체되었던 공연예술계가 생기를 찾았고 극단들도 몇 개 더 조직되었다.

원각사는 시설도 비교적 좋았고 내부나 극장문이 정취가 풍기도록 꾸며져 있었는데 불행히도 1960년 12월에 불이 나서 전소됨으로써 소극장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1962년 4월에 유치진이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아 현대식 중형극장인 드라마센터를 건립함으로써 연극 부흥의 새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극장은 1백 평의 본무대, 30여 평의 원형무대와 양편에 사이드 스테이지(side stage)를 갖추고, 소극장 아래층에 도서실과 연극학교의 교실, 그리고 작가실·의상실·분장실·욕실 등을 규모있게 갖춘 최신식 극장이었다.

그러나 재정문제에 부닥쳐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휴관하는 등 개관과 휴관을 거듭하다가 지금까지 재기하지 못하고 부속학교인 서울예술전문대학의 강당으로 쓰이고 있다. 드라마센터는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연극 발전에 별다른 기여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자 극단들은 다시 공연을 위해 명동의 국립극장 무대로 되돌아왔고 따라서 국립극장도 처음 설립목적과는 달리 대관극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처럼 연극공연장의 부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면서 다시 소극장운동이 일어났다. 1969년 4월에 자유극장 대표 이병복(李秉福)이 서울 충무로2가에 다방 겸용 살롱형의 소극장 '카페 떼아트르'를 개관한 것을 시작으로, 극단 에저또가 을지로에 소극장을 개설하였고, 1970년대에 들어서서는 실험극장 등이 자체적으로 소극장을 마련하여 국립극장 중심의 공연방식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1973년에는 명동의 국립극장도 정부에 의해 매각되고 서울 장충동에 신축 국립극장이 세워졌다. 이 국립극장은 4백 평 무대에 지름 20m의 회전무대와 최신시설의 조명·음향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전속단체도 5개에서 8개로 늘리는 등 대형화되었다. 국립극장은 명동시절과는 달리 자체공연만을 주로 갖기 때문에 사설 극단들은 소극장 등에서 주로 공연하며, 1981년에 관립극장인 문예회관이 세워진 뒤 큰 공연들은 여기서 열리고 있다.

1980년대 들어 서울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많은 소극장들이 개관함으로써 극단들은 이전과 같은 공연장 부족현상에서는 벗어난 셈이다. 더욱이 예술의 전당과 같은 고급 오페라극장이 생겨난 것은 우리의 극장수준이 세계수준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한국의 극장은 형극(荊棘)의 근대사 속에서 지지부진하게 발전해오면서도 대중에게 오락을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각성시키는 기능도 하였다. 다만, 무대예술이 전문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극장들이 때로는 울분토로의 장(場)으로, 또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오락장으로서의 구실을 해왔고, 대중의 교양 향상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극장들이 제 구실을 하려면 연극·무용·음악 등 공연예술이 활성화되어야겠지만, 그에 앞서 극장들도 전문화를 이룩해야 할 것이다. 과거처럼 무엇이든 상연하는 잡종의 극장 또는 다목적 홀이 아니라, 성격이 다른 연극·무용·오페라·전통예술 등이 제대로 공연될 수 있는 전문극장으로 분화되어야 한다.

서양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의 형식은, 크레타섬의 파이스토스 궁전(B.C.2000)과 크노소스 궁전(B.C.1600)에서 볼 수 있다. 야외의 폭넓은 계단식 좌석으로 이것이 그리스 극장이나 로마극장의 반원형 관람석(카웨아)으로 발전한다. 중세에는 궁전이나 여관의 안뜰에 가설무대를 장치해놓고, 안뜰 주위에 가설무대를 장치해서 안뜰 주위의 회랑이나 베란다에서 구경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른바 '세익스피어 극장'의 형식도 이 형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고대극장의 부활이 여러 곳에서 시도되는데, 팔라디오가 북이탈리아의 비첸차에 세운 테아트로 올림피크(1579~1580)는 그 좋은 예이다. 이후의 극장은 관객석 위를 지붕으로 덮은 건물로 하는 것이 통례가 되어, 지점(支点)간의 거리가 긴 대(大)스판 구조로서 특징지어졌다. 렌이 옥스퍼드 대학에 만든 셸던 기념강당(1669)이 고대극장과 근대극장을 이어주는 것으로 주목된다.

극장건축이 급속히 발전하는 것은 바로크 후기로 오락용의 궁정극장이 많이 지어지고, 특히 이탈리아의 갈리 다 비비에나 일가족은 극장 및 무대장치의 디자이너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궁정극장의 특색은 마제형의 3층 갤러리석으로 둘러싸인 큰 칸지름, 높고 넓은무대, 휴게용 및 사교용의 넓은 포와이에 등 호화로운 장식을 하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베르사유 궁전의 오페라 극장(1753~1770)으로, 이것은 오랫동안 각국의 모델로 삼아졌다. 이 궁정 극장 타입을 이상적 극한에까지 추구한 것이 파리의 오페라좌(1861~1874)이다.

근대극장의 특색은 상업극장으로서의 변화와 설비의 근대화가 두드러지며 객석수의 증대, 냉난방, 조명, 음향설비의 충실, 무대장치의 기계화, 자동화 등에 중점이 두어져서 연출자나 배우측으로부터는 무대나 분장실이 협소하다는 지적을 받는 수가 많다.

중국

중국에서 예로부터 각지에 보급된 극장은 희대(戱台)이다. 송대에는 극장을 구란(勾欄, goulan)이라 하여, 제도(帝都)의 변경(抃京)에서는 수십 개의 구란이 있었지만 관객석 위의 지붕은 없었던 것 같다. 관제묘나 천후궁 등 서민신앙의 묘관(廟觀)앞에 있는 광장의 남단에 묘의 대전을 향해서 설치된 희대가 무대이며 광장이 관람석이 된다.

산시성의 사묘에는 원대 이후 희대의 유구가 많이 남아 있다. 같은 시설은 황제의 궁중에도 보인다. 북경의 자금성(북경고궁)에는 내정(內庭) 서북 귀퉁이의 수방제(漸芳齊)에 옥내와 옥외의 희대가 있었지만, 소규모인 까닭으로 건륭 37년(1772)에 외동로(外東路)의 북쪽에 3층의 희대를 무대로한 창음각(暢音閣)과 앞면과 관람석인 열시루(閱是樓)가 설치되었다. 또한 이화원이나 열하피서산장과 같은 청조의 이궁(離宮)에도 3층의 희루와 전방의 관람석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관객이 있는 쪽에는 지붕이 있었다. 지붕은 근대에 와서 발생했으며 구미 등지에서 그 나름대로의 완전한 극장건축이 대도시에 성립한 것 같다.

분류

크게 일반 (실내)극장과 야외극장으로 구분된다. 역사적으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 시기에 야외극장이 먼저 등장했고, 실내극장은 이후 건축 기술이 발달하면서 서서히 지어지기 시작했다. 실내극장은 용도에 따라 연극극장, 오페라/발레극장, 콘서트홀(음악당), 영화관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야외극장

요르단 제라쉬의 반원형 극장

역사적으로 처음 등장한 형태의 극장. 옆면과 밑면 까지는 건축물로 지어지기는 했지만, 윗면을 덮을 지붕 건축 기술이 없거나 부족해서 내버려 둔 형태다. 흔히 반원형 혹은 완전 원형인 건물이 많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 시기의 유적 중 극장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은 거의 이런 형태다. 반원형 야외극장은 이후 일반 극장의 모태가, 완전 원형 야외극장은 원형경기장(스타디움)의 모태가 되었다.

대부분 높으신 분들의 치적 과시용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수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지붕이 없이 위가 뻥 뚫려 있어서 기후 변화에 취약하고, 특히 비나 눈에 매우 취약하다. 이 때문에 기후가 그리 변덕스럽지 않은 건조한 지역에 주로 건설된다. 또 주위의 소음이 섞여 들어오기 쉽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청중석의 정숙을 요하는 클래식 같은 장르의 공연이 어려운 편이다.

연극극장

연극을 주로 상연하는 극장. 실내 극장 중 가장 먼저 등장한 형태인데, 다만 극장이 따로 만들어지는 경우는 르네상스 시절까지만 해도 흔하지 않았고 주로 왕이나 귀족 등의 궁전에서 가장 큰 공간이나 별채에 마련한 공간에 부속 시설처럼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현대에도 연극 상연만을 목적으로 지어지는 극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객석과 무대가 완전 분리되는 것이 기본 설계 방침이고, 이러한 형태의 설계는 이후 오페라와 발레가 등장하면서 해당 장르를 상연하는 극장에도 응용되었다.

무대 중앙에 빼꼼히 솟아난 작은 공간이 마련된 곳도 있는데, 프롬터 박스(prompter box)라고 한다. 연극 연출가나 대본 작가가 들어가 대본을 보면서 배우들이 대사를 잊어먹을 경우 그 대목을 나지막히 속삭여주며 공연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데, 물론 이들은 연기자가 아니고 또 청중석에서 그런 모습이 보이면 쪽팔리는 게 당연하기 때문에 무대 쪽으로만 개방되어 있다.

오페라극장

오페라나 발레를 주로 상연하기 위해 지어진 극장. 특히 오페라가 태동하고 지금도 종주국으로 손꼽히는 이탈리아에 상당히 많고, 그 외에도 유럽 지역에서는 매우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형태의 극장이다. 기본적으로 객석과 무대가 분리되는 것을 보면 연극극장과 유사하지만, 연기가 주가 되고 음악은 필요 없거나 부수적 형태인 연극에 비해 음악 반주가 필수요소기 때문에 무대와 객석 사이에 구덩이 형태의 공간을 하나 더 마련해 관현악단이나 합창단을 착석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이 공간을 오케스트라 피트라고 한다. 사실 그리스 비극을 상연하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야외극장에서도 합창단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 있었는데, 이 전통이 다소 변형되어 내려온 것이다. 또 연극극장의 구조를 본따 무대와 오케스트라 피트 사이에 프롬터 박스를 설치한다. 기능은 마찬가지로 가수들이 대사를 까먹을 경우 알려주는 역할.

오케스트라 피트는 일단 음악이 울려퍼져야 하고, 또 공연을 이끄는 지휘자가 무대와 직접 소통할 수 있도록 지붕은 덮지 않는다. 다만 무대에서만 피트가 보이도록 반원형 지붕을 덮어씌운 곳도 한 군데 있는데, 독일 바이로이트의 축제극장(Festspielhaus)이다. 바그너가 자신의 오페라를 상연하기 위해 지었기 때문인데, '관현악단은 가능한한 청중석에서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자신의 예술관을 설계와 건축 때 모두 관철시킨 탓에 이런 구조가 되었다. 덕분에 정장을 갖춰 입고 무대에 오르는 게 예의인 관현악단 연주자들이나 지휘자 중에는 '청중들한테 안 보이는데 뭐 어때'라는 식으로 그냥 가벼운 차림으로 들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고전적인 설계의 오페라극장들은 청중석 공간이 말발굽처럽 둥근 반원형으로 설계된 곳이 많다. 1층 좌석은 흔히 플로어(floor)라고 칭하며, 벽 주위를 빙 둘러싼 좌석은 발코니(balcony)라고 칭한다. 플로어 쪽이 조망과 음향이 좋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18~19세기는 기본적으로 계급 사회였던 탓에 무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정중앙 2층의 발코니석에 최고 등급이 매겨진다. 흔히 국가 원수가 오페라나 발레 공연에 초대받을 때도 대개 이 자리를 배정하며, 호화로운 커튼과 최고급 의자, 여러 장식물 등이 추가 치장되며 매우 호화로운 인상을 준다.

물론 20세기에 와서는 이런 형태의 설계도 구닥다리가 되었고, 모든 청중은 특권 없이 평등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의식에 따라 발코니석을 아예 없애거나 되도록 축소시키고 층 수만 구분하는 형태의 극장도 많이 지어지고 있다. 뮤지컬을 공연하는 극장들도 대개 이런 형태의 설계로 지어진다. 또 아시아권에서 20세기 중반 이후 새롭게 지어지는 공연장도 대개 무대 작품과 후술할 연주회용 음악의 상연까지 모두 가능하도록 무대와 객석을 분리하되 계단식 층별 좌석만 배치하는 복합 공연장 형태인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도 문화예술회관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지는 공연장들이 대부분 이러한 구조를 갖고 있다.

콘서트홀

복잡한 무대 설비를 요하지 않는, 연주회용 음악 상연에 적합하게 지어지는 극장을 통틀어 칭한다. 한자로 음악당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근대에 와서야 등장한 형태의 극장이다. 이전까지는 그냥 일반 연극 극장이나 오페라 극장을 사용하는 형태였지만, 아무래도 음향 설계 목적이 다른 탓에 충분히 만족스러운 음향이 연출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 때문에 아예 이런 형태의 공연에 특화된 공연장도 필요하다는 여론이 많았고, 대략 19세기 무렵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

무대와 청중석이 완전히 분리되는 기존 극장과 달리, 굳이 무대 작품을 상연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청중석이 무대 위에도 마련되거나 또는 청중석이 무대를 빙 둘러싸는 형태로 지어지는 곳이 많다. 19세기 식으로는 구두상자 형태의 직사각형 건물에 지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슈박스(shoebox) 형태라고 칭한다. 오페라극장 시절의 설계 전통이 남아서 1층 플로어석 주변으로 발코니석이 한 층 높게 빙 둘러서 설치되는 경우가 많고, 좀 큰 규모일 경우 무대 바로 뒤에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슈박스 형태의 콘서트 홀은 1층 구조가 너무 평평하기 때문에 뒷줄에 앉은 사람은 보는 재미를 다소 죽여가면서 관람해야 하고, 2층 발코니도 너무 치우친 공간 때문에 음향적으로 불리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각 층마다 경사를 줘서 가능한한 시선이 불편하지 않게 하고, 또 무대 뒤에도 충분한 좌석을 마련하는 포도밭 형태의 빈야드(Vineyard)식 공연장이 20세기 중반 이후 많이 지어지고 있다. 한스 샤룬의 설계로 지어진 베를린 필의 상주 공연장인 필하모니가 빈야드식 콘서트 홀의 선구적 모델로 거론되며, 한국에서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 롯데콘서트홀, 고양 아람누리 아람음악당, 성남의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 대구의 대구시민회관 그랜드콘서트홀, 통영의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이 빈야드식 혹은 빈야드식으로 응용한 슈박스식 설계로 지어지거나 리모델링된 공연장에 속한다.

공연장 전체가 하나의 악기라는 사고관으로 지어지기 때문에, 음향 면에서 매우 신경을 많이 쓴다. 이 때문에 지을 때 건축가 외에 음향 설계사가 설계와 건축에 적극 관여하며, 내장재로 목재를 쓰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무대 뿐 아니라 청중석 바닥도 마찬가지인데, 카페트를 깔면 음향에 손상을 주기 쉽기 때문이다. 유럽이나 미국, 일본 등에서는 대부분의 관현악단 상주 공연장이 이러한 콘서트 홀로 되어 있는데, 한국의 경우 아직까지 이런저런 예산 문제와 클래식 수요의 부족 등으로 인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윗동네에서도 콘서트 홀로 분류되는 공연장은 평양모란봉극장과 인민극장의 원형생음극장 정도 뿐이다.

영화관

가장 늦게 등장한 개념의 극장. 영화라는 매체가 빨라 봐야 19세기 후반에야 등장했기 때문에, 영화 상영을 전문으로 하는 극장의 출현도 많이 지연되었다. 초기에는 일반적인 연극극장이나 오페라극장 등에서 상영했지만, 영사실이 필수고 무대가 필요 없기 때문에 이러한 구조를 갖춘 영화관들이 20세기 초반 무렵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 다만 규모는 기존 극장들과 비슷했고, 대개 영화관 한 개당 상영관 한 개, 혹은 많아 봐야 두세 개 정도였다.

영화의 초창기이던 무성영화 시대인 1910~1940년대에는 영화궁전(Movie palace)이라는 고급 영화관이 있었는데 영미권을 중심으로 당시의 영화궁전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영화궁전에는 오르간 같은 악기가 구비되어 상영 내내 연주해야 했다. 무성영화라고 침묵 속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아니었고, 배경음악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경우에는 근처에서 악기를 연주해서 음악을 넣어줘야 했기 때문.

하지만 단관(單館)극장의 시대는 20세기 중반 이후로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굳이 수천 명이 들어가는 영화관을 짓는 것보다 다양한 영화를 여러 곳의 중소 규모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게 더 돈벌이가 되고 관객들의 선택 폭도 넓어진다는 것을 흥행주들이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건물 하나에 여러 곳의 영화관을 집어넣는 멀티플렉스식 영화관이 대세가 되었다. 무대가 필요 없고, 좌석이나 음향 설계도 일반 극장보다 그렇게 까다로운 편은 아니기 때문에 건축비나 운영 예산을 아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선호되고 있다.

참고자료

  • 극장〉, 《나무위키》
  • 극장〉, 《위키백과》
  • 극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극장〉, 《미술대사전(용어편)》
  • 극장〉,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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