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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7일 (수) 16:48 판
손자(중국어:孫子sūn zǐ)는 춘추시대 오나라의 최고의 명장으로 손자병법 13편의 저자이다.
개요
손자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략가이다. 오왕 합려를 섬겨 절제·규율 있는 육군을 조직했다고 하며 합려가 패자가 되게 했다고 한다. 그가 저술했다는 병서 《손자》는 단순한 작전서가 아니라 국가경영의 요지, 승패의 기미, 인사의 성패 등의 내용을 다룬 책이다. 본명 손무(孫武). 자는 장경(長卿). 러안(樂安:山東省) 출생. 제(齊)나라 사람. BC 6세기경 오(吳)나라의 왕 합려(闔閭)를 섬겨 절제·규율 있는 육군을 조직하게 하였다고 하며, 초(楚)·제(齊)·진(晋) 등의 나라를 굴복시켜 합려로 하여금 패자(覇者)가 되게 하였다고 한다.
손자가 저술하였다는 병서(兵書) 《손자(孫子)》는 단순한 국지적인 전투의 작전서가 아니라 국가경영의 요지(要旨), 승패의 기미(機微), 인사의 성패(成敗) 등에 이르는 내용을 다룬 책이다. 그는 "싸우지 아니하고도 남의 군사를 굴복시키는 것은 착한 자의 으뜸이니라"라고 가르치고 있다.[1]
손자의 생애
손자가 기록된 사서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외에 오나라와 월나라의 흥망사를 기술한 오월춘추(吳越春秋), 손자의 선조와 그의 자손에 대하여 기록한 신당서(新唐書)가 중요한 기록이 있다. 이러한 문헌에 기록한 손자의 생애는 이와 같지만,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논쟁의 대상이다.
조상은 진나라 왕족으로 본래 성은 규성(媯姓). 기원전 627년, 공자 완(公子完)이 제나라로 망명해 정착했을 때 전(田)으로 씨를 바꾸고 100여 년 동안 전씨 일족이 번성했는데, 손자의 조부인 전서(田書)가 거 땅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손(孫)이라는 씨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손자도 조상이 그러했듯 제나라에서 살았으나 손자가 장성했을 때 제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손빙(孫憑)과 함께 전국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것으로 추정된다. 손자는 일족을 따라서, 강남 지방 오나라(吳)로 피하여 오나라의 재상 오자서(伍子胥)를 알게 되었다. 손자는 그 후, 오나라의 수도 근처의 산간에서 칩거하여 손자병법 13편을 저술했다.
손자는 기원전 515년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나라 왕 합려의 초빙을 받아 오나라의 군사(軍師)가 되었다. 합려가 손자의 용병술을 시험하고자 말하며, "선생의 병법 13편을 모두 읽었지만, 궁녀들이 조금이라도 군의 지휘를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손자는 이것을 승낙했다. 궁녀 180명을 내어주며 훈련시키도록 하자, 손자는 합려가 가장 아끼는 궁녀 둘을 대장으로 세워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궁녀들은 훈련에 따르지 않고 장난처럼 여겼다. 그러자 손자는 군령을 세우기 위해 궁녀 둘을 처형하도록 하였고, 합려가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손자는 군령은 왕명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며 사형을 집행하였다. 그리고 다시 다음가는 궁녀를 뽑아 대장으로 삼고 훈련을 시키자, 모든 궁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합려는 기분이 상했고, 손자는 그런 합려를 낮게 평가했으나, 이후 합려가 손자를 중용하여 상장군을 삼았다.
손자는 오나라의 군대를 훈련시켜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고, 초나라와 대항할 수 있는 국력을 키울 때까지 무리한 군사 행동을 자제하였다. 기원전 506년, 합려는 손자와 오자서를 대장으로 삼아 초나라 원정을 개시하였다. 손자의 전략에 따라 오군은 연전연승하여 초나라의 수도 영(郢)을 함락하고 초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이후 진나라의 개입으로 오나라는 철군하였으나, 그 후로도 오나라는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패자의 위세를 떨쳤다. 기원전 496년, 손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려는 월나라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합려도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손자와 오자서는 합려의 후계자 부차를 보좌하여 국력을 키운 뒤 월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부차가 패자가 될 무렵, 손자는 은퇴하여 이후의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병법서 《손자》
《손자》(孫子)는 중국 고대의 병법서(兵法書). 《오자(吳子)》와 병칭(倂稱)되는 병법 칠서(七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병서로 이 둘을 합쳐 흔히 '손오병법(孫吳兵法)'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춘추시대 오나라 합려(闔閭)를 섬기던 명장 손무이며, 손자는 그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예전에는 손무의 손자로 전국시대 제(濟)나라에서 활동한 손빈의 저서라고 추정하기도 하였으나, 1972년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 인췌산(銀雀山)에 있는 전한시대의 묘에서 《손자》와 《손빈병법》 2가지가 동시에 출토됨으로써 손빈이 지은 병법서는 별개의 책임이 확인되었다. 《사기(史記)》에는 손자 13편이라 하였으나 그 편목은 알 수 없으며,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오손자병법 82편이라 하여 <병서략(兵書略)> 첫머리에 기재하고 주(注)에는 그림 9권이 있었다고 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13편으로 이것은 당초의 것이 아니고, 삼국시대 위(魏)의 조조(曹操)가 82편 중에서 번잡한 것은 삭제하고 정수(精粹)만을 추려 13편 2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손자》 13편의 편명은 계(計)·작전(作戰)·모공(謀攻)·군형(軍形)·병세(兵勢)·허실(虛實)·군쟁(軍爭)·구변(九變)·행군(行軍)·지형(地形)·구지(九地)·화공(火攻)·용간(用間)으로 되어 있으며, '병(兵)은 국가의 대사(大事), 사생(死生)의 땅, 존망(存亡)의 길'이라는 입장에서 국책(國策)의 결정, 장군의 선임을 비롯하여 작전·전투 전반에 걸쳐 격조 높은 문장으로 간결하게 요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 뜻하는 바는 항상 주동적 위치를 점하여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을 주로 하고, 또 사상적인 뒷받침도 설하고 있어 병서로서는 모순을 느낄 만큼 비호전적(非好戰的)인 것이 특징이다.
손자병법의 전체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전쟁을 간단하게 일으키는 것이나, 장기전에 의한 국력 소모를 경고한다. 이 점에 대해 도가 사상의 연관성을 있다고 하여서 그 점에 대한 연구도 있다. 치밀하게 관찰한 모습에 근거하여, 전쟁의 여러 가지 양상을 구별하여, 그 상황에 대응한 전술을 시행하였다. 주도권의 중시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했다. 부전승 사상인데 실질적인 전쟁을 벌이지 않고 정치, 외교 차원에서 적을 이기거나 적 군사력을 와해시키므로서 승리하는 것을 최상으로 보았다. 벌모, 벌교, 벌병, 벌성이라 하였는데, 벌모는 적의 전략을 와해시키는 것이고 벌교는 적의 동맹관계, 벌병은 적의 군사력, 그리고 벌성은 적의 성을 공략하는 것이다. 정보의 중요성을 보면 용간편에서 강조되듯 정보는 대전략 차원에서든 전술차원에서든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한다. 환경을 강조하는데 시계편에서부터 전체적으로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유리한 조건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로부터 작전의 성전(聖典)으로서 많은 무장들에게 존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경영의 요지와 인사의 성패 등에도 비범한 견해를 보이고 있어 인생문제 전반에 적용되는 지혜의 글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예로부터 많은 무신들이 이를 지침으로 삼았고, 조선시대에는 역관초시(譯官初試)의 교재로 삼기도 하였다.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하여, '남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명구도 담고 있으며, 전쟁하여 이기는 것보다 전쟁하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 《손자병법》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인용 번역되고 있다.
손자에 대한 평가
손자는 춘추시대의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고 평가되는 인물로서, 전차가 위주였던 당시의 전투체계가 보병 위주로 전환되던 시대상황을 가속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원에 전차를 운행하기 편리한 평원이 많았던 반면, 오나라는 습지가 많아 전차를 운용하기에 좋은 지형이 아니었고 문화권이 중원과 달랐다는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였다. 지형에 알맞은 전술을 사용함에 따라 오나라의 정복을 가속화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특히 비록 보병의 역할이 점점 강화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보병이 전력의 보조역할에 머물렀던 중원과는 달리 보병이 독립부대로서 주력이 된 오나라는 전차로는 넘을 수 없던 산악과 숲 등을 통과하는 등 폭넓은 진군이 가능해졌고 전차에 비해 군의 은폐성도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이로써 효율적인 양동작전과 분진합격, 기습, 매복이 가능해졌고 장거리 원정 및 빠른 기동전이 가능해지게 되어 전쟁의 패러다임을 한 차례 바꾸어낸 것이다.
손자는 진나라 왕족의 후손으로 본래 성은 규성(媯姓). 기원전 627년, 공자 완(公子完)이 제나라로 망명해 정착했을 때 전(田)으로 씨를 바꾸고 100여 년 동안 전씨 일족이 번성했는데, 손무의 조부인 전서(田書)가 거 땅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손(孫)이라는 씨를 받았다고 한다.
손자가 저술한 손자병법은 서양 군사학에서는 근대에 들어서야 등장한 대전략의 개념을 일부나마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용병술을 넘어 전쟁술 그 자체를 논함에 따라 2천 년 이상의 시대 속에서 동양의 병법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뿐더러 현재에 이르러서도 사상적 가치가 퇴색하지 않는 동양군사학 최고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시대 흐름의 변화에 따라 춘추시대와 달리 공성전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기병의 주목성이 높아짐에 따라 손자의 후손인 손빈은 기존의 손자병법에 공성전이나 기병의 운용 등을 첨가, 또한 구체적인 진법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손자병법을 한 차례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손자수
손자수는 중국 병서(兵書)인 《손자》를 주해(註解)한 책. 활자본. 1책. 고종 때의 금위대장(禁衛大將) 조희순(趙羲純)이 주해하여 1869년(고종 6)에 간행하였다. 어려서부터 병서(兵書)에 관심이 컸던 조희순이 손자의 저서 한 권이 주(註)가 없는 것을 보고 깊이 연구하여 여러 주석서의 잘못을 규명하고 자신의 의견을 붙여 주석한 책이다.
내용은 시계(始計) ·작전 ·모공(謀工) ·군형(軍形) ·병세(兵勢) ·허실(虛實) ·군쟁(軍爭) ·구변(九變) ·행군 ·지형 ·구지(九地) ·화공(火攻) ·용간(用間) 등 13항목으로 분류하고 원문 아래 주석을 단 다음 각 항 끝에 부록이라 표한 후 자신의 안설(案說)을 부기하였다. 책머리에 김학성(金學性) ·조희순 ·남병길(南秉吉)의 서(序)가 있다. 손자를 연구하는 데 참고가 된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손자병법〉, 《위키백과》
- 〈손무〉, 《위키백과》
- 〈손자(孫子)〉, 《두산백과》
- 상산,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 《네이버블로그》, 2024-11-16
- 세이콤 이야기, 〈인간관계를 위한 손자병버 – 나를 알고 상대를 알고〉, 《네이버블로그》, 2024-08-28
- 북앵글러, 〈자기계발책, 손자병법 이해와 인생고수로 살기 / 염규중〉, 《네이버블로그》, 2024-01-26
- 지에스더, 〈손자병법 명언이 담긴 책 고전 읽기는 OO을 알면 쉬워진다〉, 《네이버블로그》, 2024-02-19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