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필
유금필(庾黔弼)은 고려 태조 때의 무장이며 936년에는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개요
- 유금필은 고려 시대의 무장이다. 골암진에 침입한 북번들을 평정했고 연산진에 침입한 백제 장군 길환을 죽이고 임존군을 공격했다. 조물군에서 견훤을 무찌르고 청주에서 백제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936년 후백제를 정벌, 멸망시켰다, 평산유씨(平山庾氏)의 시조. 시호 충절(忠節). 923년(태조 6)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골암진(鶻岩鎭)에 침입한 북번(北蕃)들을 평정했다. 925년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때 연산진(燕山鎭)에 침입한 백제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임존군(任存郡)을 공격, 전공을 세웠다. 태조를 도와 조물군(曹物郡)에서 견훤(甄萱)을 무찌르고 청주(淸州)에서 김훤(金萱) ·애식(哀式) 등의 백제군을 독기진(禿岐鎭)까지 추격, 대승을 거두었다. 931년(태조 14) 무고로 곡도(鵠島)에 유배 중, 대우도(大牛島)에 견훤이 침범, 전세가 불리하자 출전을 자원하여 적을 패주 시키고 그 공로로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이 되어 의성부(義城府)를 지켰다. 936년(태조 19) 도통(都統) 대장군이 되어 후백제를 정벌, 멸망시켰다. 성종 즉위 후 태사(太師)로 추증,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1]
- 유금필은 고려(高麗)의 무신(武臣)이며 개국공신이다. 평주(平州) 출생이며, 평산 유씨(平山 庾氏)의 시조이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처음 그가 기록에 보이는 것은 918년 개국(開國) 이후 청주(淸州)의 반란을 우려한 태조(太祖)이 그와 홍유(洪儒)에게 군사(軍事) 1,500명을 주어 청주(淸州)의 반란((叛亂)을 막게 하였다는 《고려사》(高麗史) 권92 열전 제5 홍유(洪儒) 열전 및 견금 열전의 기록이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비록 개국공신(開國功臣)목록에는 없지만 이전부터 태봉(泰封)에 봉직하였으나 태조(太祖) 일파였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초반의 주요 활약 무대인 서부 전선 일대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딸은 태조(太祖)의 제9비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이며, 왕건(王建)은 그에게서 효목태자(孝穆太子)와 효은태자(孝隱太子)를 보았다고 한다. 그는 941년 음력 4월 사망하였다. 994년(성종(成宗) 13년)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고, 태조(太祖) 묘정에 배향되었다. 아들은 유긍(庾兢), 유관유(庾官儒), 유경(庾慶)이다.[2]
- 유금필은 고려전기 중군장, 태사, 대광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평주(平州) 사람으로 태조를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 데 커다란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다. 920년(태조 3) 3월 북계(北界)의 골암진(鶻巖鎭)이 거듭 북적(北狄)에게 침략당하자 개정군(開定軍) 3,000여 명을 거느리고 전투에 나섰다. 유금필은 골암진의 동산(東山)에 성을 쌓고 북번(北蕃)의 추장 300인을 복종시켰다. 925년 10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이 되어 후백제의 연산진(燕山鎭)을 공격해 장군 길환(吉奐)을 죽였다. 또한, 임존군(任存郡: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을 공격해 군사 3,000여 명을 베었다. 그리고 경상북도 안동의 조물군전투(曹物郡戰鬪)에서는 불리한 처지에 있던 태조의 군사를 도와 견훤(甄萱)을 곤란하게 하였다. 928년 탕정군(湯井郡: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에 성을 쌓고 있다가 후백제 군사가 청주에서 태조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어 이를 쳐부쉈다. 그 뒤 독기진(禿歧鎭)까지 추격해 300여 기를 살획하였다. 929년 견훤이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을 포위·공격하자 많은 장수들이 진군을 망설였다. 그러나 유금필은 홀로 결사적인 태도로 임해 저수봉(猪首峰)으로부터 돌격한 뒤 크게 승리하였다. 931년에 참소를 입어 곡도(鵠島)로 귀양을 갔다. 932년 후백제의 해군장(海軍將) 상애(尙哀) 등이 대우도(大牛島)를 공략할 때 귀양지의 장정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고 전함을 수리해 방어하였다. 이에 태조가 감동해 다시 불러들여 중용하였다. 933년에는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이 되어 의성부(義城府)를 수비하였다. 마침 후백제 군사로부터 경주를 구하라는 태조의 명을 받았다. 그래서 장사 80명으로 결사대를 조직해 신라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돌아오는 길에 후백제의 신검(神劒) 등을 만나 싸워서 크게 승리하였다. 장군 금달(今達)·환궁(奐弓) 등 7인을 사로잡고 매우 많은 사람들은 살획하였다. 술사 종훈(宗訓)과 의사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최필(崔弼) 등을 사로잡아 웅진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항복하게 하였다. 935년 나주가 후백제의 공격을 받자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이 되어 이를 경략하였다. 이듬해 고려와 후백제가 결전을 벌일 때 중군장(中軍將)으로 출전해 커다란 공을 세웠다. 994년(성종 13)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고,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3]
- 유금필은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임천 유태사 묘에 위패가 봉안된 고려 전기 무신이다. 유금필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평산 유씨(平山 庾氏)와 무송 유씨(茂松 庾氏)의 시조이다. 아들은 유긍(庾兢)·유관(庾官)·유유(庾儒)·유경(庾慶)이며, 딸은 태조 왕건의 제9비인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이다. 유금필은 생전에 이미 개국공신으로 책봉을 받았고, 전장에서 개선하고 돌아오면 태조가 반드시 맞이하여 위로하는 등 다른 장수들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994년(성종 13) 다시 태사(太師)로 추증되고,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유금필은 후손인 유자우(庾自㥥)[1260~1313]의 묘지명에 따르면, 고려 왕실에 의하여 제오호기위(第五虎騎尉), 삼중대광(三重大匡), 장위익대광위협보좌성저정공신(壯威翼戴匡衛協輔佐聖底定功臣) 등으로 추모되고 있었다. 조선에서 고려 왕실의 제사를 위하여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세운 숭의전의 배신청에도 고려의 충신 16명 가운데 1명으로 배향되어 있고, 황해도 평산군의 태백산성에 있는 태사사(太師祠)에는 신숭겸·배현경·복지겸 등과 함께 유금필의 철상(鐵像)이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부여 지역에도 유금필을 모시는 사당이 임천면의 가림성에 있는 임천 유태사 묘 이외에, 장암면 장하리의 태성산 정상에 1980년대 초까지 태사각이 있었다고 한다.[4]
유금필의 생애
- 유금필은 지금의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났다. 유금필은 고려 건국 이후 920년 골암진으로 가서 북번(北蕃)을 평정하였고, 925년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이 되어 후백제의 연산진을 공격하였다. 조물성 전투에 이어 929년 고창 전투에서 견훤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고려가 후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기여하였다. 933년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이 되어 의성부를 지키면서 신검과 싸워 승리하고 신라를 구원하기도 하였다. 935년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이 되어 나주 지역을 경략하다가 견훤의 고려 귀부를 도왔다. 북방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후백제와의 마지막 전투에 참전하여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 임천 지역과 관련하여, 「성흥산성실기」에 유금필이 “진남장군으로 전라도 순천군의 산성에 머물다 송도로 돌아가면서 임천의 성흥산성 곧 가림성에 들러서 가난한 주민들을 진휼하였고, 그 뒤에 유금필의 은덕을 잊지 못한 주민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 지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유금필이 934년 9월 운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웅진 이북 30여 성이 고려에 항복하였던 사실에 주목하면서, 후백제가 항복한 936년 9월까지 임천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유금필이 임천에 머물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후백제가 항복한 것을 계기로 본래 후백제 영역 안에 있던 임천 지역의 반고려적 정서를 제압할 목적으로 936년 무렵에 주둔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임천 지역은 통일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황산군의 마성(馬城)과 사실상 같은 지역이다.
- 마성에서 후백제의 항복을 받았던 고려는 한편으로 연산 지역에 개태사를 창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금강을 마주하고 있는 임천의 가림성에 유금필의 군대를 주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에 적대적이었던 후백제인들을 상대로 한편으로는 불교를 내세운 온건책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무력을 통한 강경책으로 회유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래서 가림성에 주둔하였던 유금필은 점령군의 위세가 아닌, 가난한 주민의 진휼을 포함한 민심 수습책을 내세우면서 후백제인에 대한 적극적인 통합을 시도하였을 것이다. 유금필은 941년(태조 24) 4월 사망하였다.
유금필에 대한 평가
- 고려사를 보면 유금필은 패한 경우의 기록이 없다. 유금필은 육전만이 아니라 해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을 정도로 모든 전선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유금필은 대부분 무모하다 싶은 전투를 홀로 치렀으며, 군사들을 사지에 몰아넣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탄전투와 같이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자신의 목숨을 아깝지 않아 했으며, 유금필을 깊이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 즉 승리를 확신하였기에 그런 무모한 행동이 나왔다고 보인다. 유금필의 이와 같은 용맹은 훗날 또 다른 맹장이 이어받는다. 바로 척준경이다. 하는 전투마다 피하는 걸 마다하지 않으며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적을 업신여기지도 않으며 주군을 위해 또는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운 게 공통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유태사지묘
- 유태사지묘(庾太師之廟)는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산1-1번지에 있는 유금필 장군의 사당으로 부여군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있다. 태사(太師) 유금필(?∼941) 장군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를 정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개국공신이다. 장군의 위패를 모신 이 사당은 성흥산성 내에 자리 잡고 있다. 후백제를 정벌하고 태조를 만나러 가는 도중 임천 마을에 들려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장군이 죽은 뒤 백성들이 그 공덕을 기리고자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올렸다 한다. 그 뒤 고려 성종 임금이 "태사유공지묘"라는 어필 현판을 내렸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유금필〉, 《위키백과》
- 〈유금필〉, 《나무위키》
- 〈유금필〉, 《향토문화전자대전》
- 〈유금필(庾黔弼,?~941)〉, 《두산백과》
- 〈유금필 (庾黔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레디, 〈유금필 장군, 후삼국 통일의 선봉장〉, 《네이버블로그》, 2024-05-16
- 학당, 〈부여 충혼사(忠魂祠) - 前고려 장군 태사공 유금필 사당〉, 《네이버블로그》, 2022-06-05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