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조
조선 세조(世祖)는 조선 제7대 왕 (제위 1455~1468). 세종과 소헌 왕후 사이에 태어난 8형제 중의 둘째 아들이다.
개요
- 조선 세조는 조선 제7대 왕(재위 1455~1468)이다.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수양대군에 봉해졌다. 문종이 사망하자 어린 단종을 제거하고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였다. 1417년 세종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휘(諱)는 유(瑈), 자는 수지(粹之), 시호는 혜장(惠莊)이다. 윤번(尹璠)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왕위에 등극하여 정희왕후(貞熹王后)가 되었다. 형인 문종에 비해 학문보다 무예(武藝)에 능하고 병서(兵書)에 밝았으며, 진평대군(晉平大君)·함평대군(咸平大君)·진양대군(晉陽大君)이라 칭하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首陽大君)에 봉해졌다.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홍위(단종)가 즉위하자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한 야망을 가지게 되었다. 일거에 실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조·병조판서(吏曹兵曹判書),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하면서 병마권을 장악하고 좌의정에 정인지(鄭麟趾), 우의정에 한확(韓確)을 임명하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 찬양의 교서를 짓게 하였다. 1455년 단종을 겁박하여 왕위를 자신에게 선위하게 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상왕으로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이미 유학이 정치적 이념으로 자리 잡은 조선에서 충신들에 의해 단종 복위를 도모하려는 사육신(死六臣)사건이 일어났다.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류성원이 주도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세조를 살해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자의 가족까지 모두 참수되었다. 당시 조선은 사회적 불안이 높아졌고 세조에 대한 민심은 흉흉해졌다. 후대에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란은 권력욕 이외 명분 없는 반란으로 평가된다. [1]
- 조선 세조는 조선의 제7대 국왕이다.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형인 문종 사후에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단종을 폐위시키고 즉위하였다. 조선에서 최초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임금이자,정변을 일으켜 즉위한 군주이기도 하다.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 권신들을 주살하고 정권을 잡았으며, 1455년에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1456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사육신(死六臣)을 잡아 죽인후 단종 또한 죽였다. 이에 분개한 생육신(生六臣)은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기도 했다. 1417년(태종 17년) 11월 7일, 태종의 셋째 왕자인 아버지 충녕대군(세종)과 경숙옹주 심씨(소헌왕후)의 차남이자 네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조선 세조는 태어나고 궁궐 밖에서 양육되었으며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세조는 한동안 궁밖 민가에서 자랐다. 세조실록은 그에 대해 '어릴 때 민간에서 자랐으므로 모든 어려움과 사실과 거짓을 자세히 일찍부터 겪어 알고 있었다.'고 하였다. 세조는 또한 이미 다섯 살의 나이에 《효경(孝經)》을 외워 주위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영특함은 자라면서 형제들 중 단연 뛰어나 아버지 세종과 형인 문종에게 인정을 받았다.[2]
- 조선 세조는 조선의 제7대 국왕으로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휘는 유(瑈), 자는 수지(粹之)이다. 세조 사후 신하들이 올린 신종, 예종, 성종 등의 묘호를 세조의 아들인 예종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자 신하들은 최종으로 '열조(烈祖)'라는 묘호를 제시했다. 하지만 예종은 세조로 밀어붙였으며 시호 또한 열문영무신성인효 대왕 8글자를 제시하였지만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 대왕으로 20자로 지었다. 세조는 나라를 다시 만든 임금에게 주는 묘호로 한나라를 부흥시킨 후한 광무제를 생각하고 따온 것이다. 사실 조선시대 후반기로 갈수록 묘호 인플레가 일어나는데 그 시작이 세조로 정통성이나 성과가 부족한 왕일수록 그 후손의 정통성도 부족하고, 그걸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묘호를 높이는 것. 묘호 작명법에는 나쁜 의미의 묘호들도 있긴 하지만 조선에서 사용된 일은 없다. 전임 왕의 묘호를 정하는 사람이 대부분 그의 후계자로, 친아들이면 당연하고 아들이 아닌 방계 계승자여도 최대한 선대에게 좋은 묘호를 챙겨줘야 자기 권위도 더 서기 대문이다. 또 폐위된 연산군이나 광해군 같은 경우 살아있을 때 각각 반정으로 이미 국왕 신분을 상실했기에 죽을 때 묘호를 줄 이유가 없었다. 만약 연산군이나 광해군이 쿠데타 과정에서 폐위되기 직전에 자결이라도 했다면 나쁜 묘호를 받았을 수도 있다.[3]
- 조선 세조는 조선의 제7대(재위: 1455년~1468년) 왕이다. 재위 1455년(세조 1)∼1468년(세조 14).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유(李瑈). 자는 수지(粹之).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왕비는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이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明敏)하여 학문도 잘했으며,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대군으로 있을 때, 세종의 명령을 받들어 궁정 안에 불당을 설치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승려 신미(信眉)의 아우인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불서(佛書)의 번역을 감장(監掌)하고 향악(鄕樂)의 악보(樂譜)도 감장, 정리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관습도감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았다. 세조는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에게 명해 지리지(地理誌)와 지도를 찬수(撰修)하게 하였다. 시호는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고, 묘호는 세조(世祖)이다. 능호는 광릉(光陵)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다.[4]
조선 세조의 생애
- 조선 세조의 휘는 유(瑈), 본관은 전주, 자는 수지(粹之)이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문종의 친남동생이자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의 친형이며 단종의 숙부이다. 즉위 전 군호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다. 왕자 시절 《월인석보》와 《역대병요》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말타기와 활쏘기, 사냥을 즐겨 했고, 권람과 한명회를 필두로 신숙주, 정창손, 정인지, 김질 등의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
-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안평대군,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영의정부사에 올라 전권을 얻은 뒤 일등정난공신에 녹훈되었다. 단종 대신 섭정하며 조정을 장악하였다. 1455년(단종 3년) 단종으로부터 명목상 선위의 형식을 빌려 즉위하였다. 이는 생육신과 사육신 등의 반발과 사림 세력의 비판을 초래하였다. 단종 복위운동을 저지하고 사육신과 그 일족을 대량 숙청하였다.
- 조선 세조는 즉위 후 태종이 실시하였던 6조 직계제를 부활시켰으며 과전법을 수정하여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을 시행하였다. 세종 때 설치한 4군과 6진의 출몰하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토관제도를 실시하여 두만강 유역의 영유를 확고히 하였다. 불교에 귀의하여 왕실 사찰과 탑을 중수하고 법당을 찾아 승려들을 모아 불사를 자주 행하였으며 불교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후반에는 반정을 통해 정계에 진출한 훈구 공신들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사림파와 귀성군과 남이 등 신진 세력을 등용하여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 1468년(세조 14년) 9월 7일, 예종에게 전위하고 태상왕이 되었다. 전위 다음 날인 9월 8일, 수강궁 정전에서 승하하였다. 세조는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큰 아들은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죽은 의경세자로, 후에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조선, 德宗)으로 추존되었다. 작은 아들은 예종으로 그 역시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스무 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불행했던 세조의 개인사만큼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 또한 조선시대 내내 엇갈렸다. 여러 야담집에서는 세조와 그를 따랐던 측근 신료들의 도덕적 부당함을 지적하는 이야기들이 전래되고 있다.
조선 세조의 업적
- 세조는 불법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14년간 재위하면서 많은 공적을 쌓았다. 안으로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개혁을 단행하고, 밖으로 중국에 대해 자주성을 높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먼저 국방을 강화하고자 종전의 변방 중심 방어체제를 진관체제로 바꾸어 지역 중심의 방어체제로 고쳤다. 아울러 호적사업을 강화하고, 보법을 실시해 병역 인구를 100만 명으로 늘렸다. 강화된 국방력으로 1460년 (세조 6)에는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몰아냈고, 만주의 요동(랴오둥)지방을 수복하려는 계획도 세웠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 세조는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6조(六曹)의 직계제(直啓制)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했으며, 이시애(李施愛)의 난(1467)을 계기로 유향소(留鄕所)를 폐지하고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 세조는 국방력 신장에 힘써 호적(戶籍)·호패제(戶牌制)를 강화, 진관체제(鎭管體制)를 실시하여 전국을 방위체제로 편성하였으며 중앙군(中央軍)을 5위(五衛) 제도로 개편하였다. 북방개척에도 힘써 1460년(세조 6) 북정(北征)을 단행,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두만강 건너 야인(野人)을 소탕하게 하고, 1467년(세조 13) 서정(西征)을 단행, 강순(康純) ·남이(南怡)·어유소(魚有沼) 등으로 건주(建州) 야인을 소탕하는 등 서북면 개척에 힘쓰는 한편, 하삼도(下三道) 백성을 평안·강원·황해도에 이주시키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단행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힘썼고 각도에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였다.
- 세조는 경제정책에서 과전법(科田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과전을 폐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수입을 늘렸다. 또한 궁중에 잠실(蠶室)을 두어 비(妃)와 세자빈으로 하여금 친히 양잠을 권장하도록 하는 한편,《사시찬요(四時纂要)》 《잠서주해(蠶書註解)》 《양우법초(養牛法抄)》 등의 농서를 간행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
- 세조는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자 집현전을 폐지하였으나 문교 면에도 진력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그는 즉위 전에 《역대병요(歷代兵要)》 《오위진법(五衛陣法)》을 편찬했으며, 1465년(세조 11)에는 발영 ·등준시(拔英登俊試)를 두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다.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훈사십장(訓辭十章)》, 《병서대지(兵書大旨)》 등 왕의 친서를 저술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사서(史書)를 편찬하도록 했다. 국초 이래의 《경제육전(經濟六典)》, 《속육전(續六典)》, 《원육전(元六典)》, 《육전등록(六典謄錄)》 등의 법전과 교령(敎令)·전례(典例)를 종합 재편하여 법전을 제정하고자 최항(崔恒)·노사신(盧思愼) 등에게 명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게 함으로써 성종 때 완성을 보게 한 것은 그의 치적 중에서도 특기할 만하다. 그는 불교를 숭상하여 1461년(세조 7)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신미(信眉)·김수온(金守溫) 등에게 《법화경(法華經)》, 《금강경(金剛經)》 등 불경을 간행하게 하는 한편, 《대장경(大藏經)》 50권을 필인(畢印)하기도 했다. 그의 능은 경기 남양주시의 광릉(光陵)이다.
조선 세조의 서적 간행 지원
- 세종 사후 세조 때 다시 활판 인쇄술이 활기를 띠고 서적의 보급이 재확산되는데, 활자를 주조, 보급하여 활판 인쇄와 서적 출간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출판 사업 중에는 <법화경> <금강경> 등 대장경을 인쇄하여 유포함으로써 불교발전에 이바지한 업적도 특기할 만하다. 또한 역사 관련 서적을 편찬, 재간행, 중수하고 이를 반포하여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에게도 필독을 권고하여 국가의식,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국조보감 國朝寶鑑〉의 편수, 〈동국통감 東國通鑑〉의 편찬, 〈경제육전 經濟六典〉의 정비 등의 일련의 편수·편찬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밖에도 〈오륜록 五倫錄〉·〈역학계몽도해 易學啓蒙圖解〉·〈주역구결 周易口訣〉·〈대명률강해 大明律講解〉·〈금강경언해 金剛經諺解〉·〈동국지도 東國地圖〉·〈해동성씨록 海東姓氏錄〉 등의 편찬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 1461년(세조 7년)에는 자신의 친필로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을 간행하였다. 주자소에서 세조의 친필과 강희안의 필적을 바탕으로 을해자(乙亥字)와 한글활자로 인출한 책으로, 한글 창제 무렵의 국어의 특징과 조선 초기 활자사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판본이다.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은 후일 보물 제1520호로 지정된다. 불교 경전과 불교 관련 서적들이 시중에 대량으로 유포, 확산되었으며, 훈민정음으로 된 책들 중에는 불경, 불서들이 대량으로 시중에 유통되었다.
조선 세조의 묘호와 시호
- 묘호는 세조(世祖)이며 빈청에서 세조의 묘호로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을 추천했으나, 예종이 '나라를 중흥한 공'을 들어 세조를 제안하였고 이대로 정해졌다. 이는 세종과 문종의 치세를 부정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당시 예종은 승천체도라는 시호를 뺀 사실을 신하들에게 추궁했고 공신인 좌의정 박원형은 뜻이 헛된 거 같다고 했지만 예종은 듣지 않았다. 존호는 승천체도열문영무(承天體道烈文英武)이고, 시호는 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다.
- 사후 일부 무속인들에 의해 무속의 신으로 숭배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여러 사찰에도 봉안되었다. 그를 모신 대표적인 신당으로는 1970년대까지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던 복개당이 있다. 이 당제는 조선시대에는 제관이 열 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일제 시대에 제관이 5~6명으로 줄었다. 1978년 노인정 공사로 철거되었다. 복개당에 보관되오던 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에 있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세조(조선)〉, 《나무위키》
- 〈세조 (조선)〉, 《위키백과》
- 〈세조(조선)/생애〉, 《나무위키》
- 〈세조(世祖,1417~1468)〉, 《두산백과》
- 〈세조(世祖)〉,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강혜란 기자, 〈"내가 왕이 될 상인가"…해인사 '세조 얼굴' 600년 미스터리〉, 《중앙일보》, 2024-09-15
- 사지원 기자, 〈세조가 내린 ‘신숙주 공신 초상’, 국보 승격〉, 《동아일보》, 2024-07-04
- 분양 도깨비, 〈수양대군 세조의 업적과 명언〉, 《네이버블로그》, 2023-10-04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