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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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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箕子)는 단군 다음의 고조선 통치자이다.

개요[편집]

기자는 중국 상(商)의 군주인 문정(文丁, 太丁이라고도 함)의 아들로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이다. 주왕(紂王)의 폭정(暴政)에 대해 간언(諫言)을 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친 척을 하여 유폐(幽閉)되었다. 상(商)이 멸망한 뒤 석방되었으나 유민(遺民)들을 이끌고 주(周)를 벗어나 북(北)으로 이주하였다. 비간(比干), 미자(微子)와 함께 상(商) 말기의 세 명의 어진 사람(三仁)으로 꼽힌다.[1]

기자는 기자조선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성은 자(子), 이름은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이며, 기자는 작위명인 동시에 별칭이다. 상나라 말기에 왕족으로 태어나 주왕 제신 시기를 살았으며, 상나라가 주나라에게 멸망당하자 조선으로 망명하였다고 전해진다. [2]

기자의 활동사항[편집]

이덕무의 《앙엽기》(盎葉記), 이만운의 《기년아람》(紀年兒覽),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 따르면 기자조선의 제1대 군주인 기자는 기원전 1126년부터 기원전 1082년까지 재위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휘는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였고 시호는 태조문성왕(太祖文聖王)이라고 한다. 그의 왕위는 장혜왕이 승계받았다고 한다.

기자(箕子)가 봉(封)해진 기(箕)는 상(商)의 영토 가운데 가장 북쪽이고, 토방(土方), 귀방(鬼方) 등으로 불리는 북방(北方) 이민족(異民族)이 강성(强盛)했던 지역이다. 기자(箕子)는 이들 이민족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여 복속(服屬)시켰고, 그러한 공을 인정받아 태사(太師)로서 형인 제을(帝乙)을 보좌하며 상(商)을 융성(隆盛)케 하였다.

제을(帝乙)의 뒤를 이어 주왕(紂王)이 즉위한 뒤 상(商)은 급격히 쇠락하였다. 주왕(紂王)은 자신의 재능을 과신(過信)하여 신하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았으며, 달기(妲己)를 총애하여 호화로운 궁궐을 짓고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기자(箕子)는 형인 비간(比干)과 함께 주왕(紂王)에게 거듭 간언(諫言)하며 정치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주왕(紂王)이 상아젓가락(象箸)을 만들게 하자 기자(箕子)가 '상아젓가락으로 식사를 하게 되면 그때까지 사용하던 질그릇이 성에 차지 않아 옥그릇을 만들게 하고, 옥그릇을 쓰면 요리가 성에 차지 않아 진귀한 음식을 만들게 하고, 다음에는 화려한 복장과 호화스러운 궁궐을 만들게 한다'며 간언(諫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기에서 하찮은 낭비가 망국(亡國)의 사치로 이어진다는 '상저옥배(象箸玉杯)'라는 말이 생겼다.

주왕(紂王)은 폭정(暴政)을 멈추지 않았으며, 간언(諫言)을 하는 숙부(叔父) 비간(比干)의 충심(忠心)을 확인한다며 몸을 갈라 심장을 끄집어내는 만행(蠻行)을 저질렀다. 사람들은 기자(箕子)에게 상(商)을 떠날 것을 권했지만, 기자(箕子)는 신하 된 도리로 임금이 간언(諫言)을 듣지 않는다고 떠나는 것은 임금의 악행(惡行)을 부추기는 것으로 따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 미친 척을 하며 남의 노비가 되려 하였다. 하지만 주왕(紂王)은 그를 사로잡아서 유폐(幽閉)시켰다.

주(周)의 무왕(武王)은 충신(忠臣)을 잔인하게 살해한 주왕(紂王)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제후들을 규합하여 상(商)을 공격하였으며, 기원전 1046년 상(商)을 멸망시켰다. 그는 갇혀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주고, 그를 찾아가 정치(政治)에 대해 물었다. 기자(箕子)는 무왕(武王)에게 하(夏)의 우(禹) 임금이 정했다는 아홉 가지 정치의 원칙을 전했다고 한다. 이를 '홍범구주(洪範九疇)' 혹은 '기주(箕疇)'라고 하며, <서경(書經)>의 '홍범편(洪範編)'에 그 내용이 전해진다. 하지만 기자(箕子)는 주(周)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며 상(商)의 유민(遺民)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주했다. 당시 기자(箕子)가 상(商)의 멸망을 슬퍼하며 지었다는 '맥수지시(麥秀之詩)'에서 '맥수지탄(麥秀之嘆)'이라는 성어가 비롯되었다.

일부에서는 기자(箕子)가 한반도(韓半島)로 옮겨가 그곳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상서대전(尙書大傳)>의 '은전(殷傳)',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 등의 중국 사서(史書)와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紀)>, <동국사략(東國史略)> 등의 고려(高麗)와 조선(朝鮮) 시대의 사서(史書)들에 나타나 있다. 조선(朝鮮) 시대에는 이러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근거하여 단군(檀君)과 함께 기자(箕子)의 제(祭)를 지냈으며, 그의 사당(祠堂)을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요동(遼東)과 한반도(韓半島) 지역의 청동기가 중국과 크게 다르며, 한(漢) 이전의 기록들에서는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으로 갔다는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자동래설[편집]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중국 은(殷)나라 기자가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기자조선을 세우고 왕(王)노릇을 하였다는 설이다. 기자동래설에 관한 3가지 기록에 의하면 ①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재수중(在囚中)의 기자(箕子)를 석방하니 기자가 그 석방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조선(朝鮮)으로 도망갔다. 이에 무왕이 조선후(朝鮮侯)로 봉(封)했다" 하며, ②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殷)을 멸하고 기자를 방문하여 안민(安民)의 도(道)를 묻고 그를 조선후에 봉했다" 하고, ③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는 "은나라가 쇠하매 기자가 조선에 가서 예의(禮儀)와 전잠(田蠶)과 직조(織造)를 가르쳐 주었더니, 낙랑조선민(樂浪朝鮮民) 사회에는 팔조금법(八條禁法)란 법금(法禁)이 행하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을 종합해 보면, 기자가 조선후로 봉함을 받은 것같이 기록되어 학자들 간에 오랫동안 논제가 되어 왔으나 결과적으로 기자조선에 관한 사적 근거가 불충분하여 기자동래설을 부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해석에 일본인 학자 가리노(狩野直善)·시라토리(白鳥軍吉)·이마니시(今西龍)의 주장이 있고, 국내학자 중 이병도(李丙燾)는 한씨조선설(韓氏朝鮮說)을 주장한다.

즉 후한(後漢)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보면, "주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있었는데, 연(燕)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위만(衛滿)에게 망하여 해중으로 옮겨갔다(…立姓韓 爲衛滿所伐 還居海中)"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위만에게 망한 것은 준(準)왕이니,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準)의 성(姓)은 한씨(韓氏)임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의 성은 기씨가 아니라 한씨이며, 중국인이 아니라 한인(韓人)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후대에 기자를 한씨의 먼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성인을 자기의 조상으로 함으로써 가문을 빛내기 위함이었으며, 특히 기자릉(箕子陵)이나 기자묘(箕子墓)가 생기게 된 것은 고려 시대부터의 사대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8조법[편집]

8조법(八條法)은 고조선의 8개 조항으로 된 법률이다. 범금팔조(犯禁八條)라고도 하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에 따라 기자팔조금법이라고도 한다. 8조 중 3조의 내용만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연조(燕條)에 전하고 있다. 조항은 위만조선을 거쳐 군현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에 인지의 발달에 따라 그 내용이 더욱 복잡해져 60여 조로 늘어났다.

기자조선[편집]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전하는 나라이다.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밖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 세 사서에 그 유래와 근거를 두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봉(冊封)을 받은 기자는 부득이 신하의 예를 차려야 하였으므로 BC 1100년경(무왕 13)에 주나라에 가서 무왕을 만났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9주(洪範九疇)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사기》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을 정복한 뒤 기자를 방문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묻자 홍범9주를 지어 바쳤다. 이에 무왕이 그를 조선왕으로 봉해주었으나, 기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한서》 지리지 연조(燕條)에는 은나라가 쇠하여지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 ·양잠 ·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더니, 낙랑조선(樂浪朝鮮)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기록들을 근거로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다. 기자는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기국(箕國)의 제후'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춘추좌씨전》에는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서 '기국'이 보이며, 《국어(國語)》에는 기국을 정복한 진(晋)나라 고대의 성씨에 기씨(箕氏)가 있다는 사실이 전한다. 또한 기후(箕侯)를 중심으로 한 기씨 일족이 주(周) 초기에 북방의 정복활동에 종사하다가 뒤에 산시(山西)에서 산둥(山東)으로 이봉(移封)되었다는 기록들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기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후(箕侯)' '기(箕)' '기후방정(箕侯方鼎)' 등의 명문이 새겨진 은나라 ·주나라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는 것도 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다만 이 견해는 기국(箕國)이 기자조선을 말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기자조선과 고조선은 어떠한 관계였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기자릉[편집]

기자릉(箕子陵)은 평양 기림리(箕林里)에 있는 기자(箕子)의 무덤이다. 1102년(숙종 7) 분형(墳形)을 찾아 제사를 지냈으며, 성종·고종 때 중축하였다. 무덤 앞에 정자각(丁字閣)과 중수기적비(重修紀跡碑)가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기자(箕子,?~?)〉, 《두산백과》
  2. 기자 (고조선)〉,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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