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목욕탕(沐浴湯, public bathing)은 목욕을 할 수 있게 마련해 놓은 시설을 말한다. 영업시설은 대중목욕탕, 공동 목욕시설은 공중목욕탕이라 부르며, 목욕만을 위한 작은 방은 목욕실 또는 욕실이라 부른다. 대한민국에서는 목욕탕 영업을 목욕업으로 분류한다.
문명이 세워지고 다수의 사람들이 밀집해서 살게 되면서 청결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인더스 문명의 중심지인 모헨조다로 유적에서는 대규모의 공중 목욕탕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문명의 초창기부터 목욕탕이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음을 알려 주는 증거이다.
개요[편집]
목욕탕은 돈을 받고 여러 사람에게 목욕을 하게 하는 시설, 또는 숙박업소에서 편의시설의 일종으로 갖추어 놓거나, 가정에서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설비하여 놓은 시설을 말한다.
한국의 공중목욕탕의 설립 기준과 영업에 관한 사항은 현행 「공중위생관리법」에서 그 세부 법령과 규칙이 제시되어 있다. 공중목욕탕에는 일반목욕장(공중탕·가족탕)과 특수목욕장(한증탕·증기탕) 등이 있다.
개항 이전 한국의 가옥에는 목욕간(沐浴間)이나 목욕탕이 따로 없었다. 따라서 일반 서민들은 봄·여름·가을에는 내 또는 얕은 강이나 호수 등에서 몸을 씻었고, 겨울에는 물을 데워 부엌이나 헛간에서 목욕을 하였다.
양반층은 서민들과 달리 목간통이라 하여 나무로 만든 둥근 욕조를 안방 또는 사랑방에 들여놓고 하인들이 운반해 온 더운 물을 끼얹는 방법으로 목욕을 하였다.
그러나 개항 이후 선교사를 비롯한 각국의 외국인들이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 거주하면서 목욕시설의 불편함을 느끼게 되자, 가옥의 일부 구조를 개량하여 목욕탕으로 만들거나 처음부터 목욕탕 시설을 갖춘 가옥(주로 양옥)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근대적 수도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당시의 목욕탕은 오늘의 목욕탕과는 크게 달랐다. 1920년을 전후한 개량한옥이나 일본식 가옥의 목욕탕은 밖에서 길어온 물을 큰 항아리에 담아 놓았다가 수시로 물을 퍼서 쓸 수 있도록 간단한 샤워시설이나 이동식 간이욕조만을 설치하였다.
또한 쇠로 만든 큰 항아리(두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윗지름 1.2m 정도의 역원뿔형) 같은 욕조에다 물을 채워 넣고 밑에서 장작으로 불을 때서 데워 쓰기도 하였다.
욕탕의 바닥은 지면으로부터 약 한 뼘 정도(17∼20㎝)의 공간을 띄운 뒤 너비가 6㎝ 정도의 나무 판자를 1㎝ 간격으로 이어서 만들었다. 배수와 함께 지면으로부터 올라오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개인주택의 목욕탕 시설이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과 함께 숙박업소에도 목욕시설이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1910년 이후 많은 서양인이 드나듦에 따라 서양인을 상대하는 호텔과 여관이 생기게 되었으며, 이러한 숙박업소들은 거의 모두 목욕탕을 구비하고 있었다.
다만 숙박업소의 규모에 따라 방마다 욕실이 딸려 있는 곳과, 각 방에는 없지만 크게 하나를 마련하여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곳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숙박업소가 대중탕을 겸하고 있는 시초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대중목욕탕의 본격적인 발전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많이 이주해오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기후조건 및 지형적 조건으로 자주 목욕을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목욕의 불편을 느껴 공중욕탕을 설치하고자 하였으나 한국인들의 거센 반발로 쉽게 착수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옷을 벗고 목욕을 하는 것은 천민들이나 하는 짓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에 대중목욕탕이 처음 설립된 것은 1920년대 초반 1921년경 평양에서였다.
이 때의 공중욕탕은 부(府)에서 직접 운영하였으며 관리인을 따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욕탕 사용료의 수납, 시설의 보수, 욕탕 사용인원의 제한 등을 관리하였다. 서울에 공중욕탕이 처음 세워진 때는 1925년이었다.
8·15광복 이후 인구의 증가와 위생관념의 발전으로 사설욕탕의 숫자가 늘어나자 욕탕영업의 허가를 위한 시설규정을 제정하였으며, 한때는 도시민의 공중보건을 위한 복지시설로 시립공중욕탕을 설치하여 지방공무원이 운영, 관리를 맡기도 하였다.
현재는 신축 개인주택에 대부분 목욕탕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대중목욕탕도 차차 고급화되어 그 기능도 단순히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일 이외에 휴게실의 기능 등으로 다변화되고 있다.
그리고 목욕탕의 시설과 기능에 따라 사우나탕·증기탕·찜질방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분류되어 불리고 있다. 2018년말 한국목욕업중앙회에 등록된 업소는 8,000개 이상이다.
고대 로마의 목욕탕[편집]
고대 그리스 때는 온천에서 목욕 문화가 생겼다. 기사. 목욕을 자주 하면 건강에 좋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목욕은 일반 석재나 대리석을 사용해 만든 탕에 따듯한 물을 담고, 그 안에 들어가 시녀가 몸을 닦아주고, 목욕이 끝났다면 젖은 몸의 물기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고, 뽀송해진 몸에 기름을 발라줬다. 손님이 목욕을 한다면 시녀 또는 주인집의 딸이 입욕보조원 역할을 했다. 스파르타의 열기욕도 유행했는데 증기탕에서 땀구멍을 열어 노폐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찬물에 몸을 담그는 것으로 끝맺었다고 한다. 목욕을 하면서 몸과 함께 마음도 닦는다는 인식이 있어 전 그리스에 유행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 최초의 공영 공중목욕탕은 기원전 4세기경에 생겼는데, 원래 강이나 바다에서 목욕하던 고대 로마인들은 이를 보고 그리스식 목욕에 매료되어 그리스식 목욕탕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기사. 또한 신체를 단련할 수 있으며 젊은 청년들의 교육을 담당한 시설인 체육관이 생기게 되자, 자연스레 땀을 씻을 수 있는 목욕탕도 같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로마에서는 수도시설을 통해 먼 곳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어서 목욕탕이 번성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에서 목욕탕은 로마시민의 여가시설로 쓰였다. 실례로 칼리굴라 황제의 경우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목욕탕을 지어, 로마 시민은 대형 목욕탕에서 저렴한 가격에 목욕을 할 수 있었으며, 책방이나 운동시설, 식당 등도 제공되었다. 이러한 목욕의 인기는 중세 유럽에도 전해져서 오스트리아 빈의 경우 공중목욕탕이 100여 개나 되었다.
대한민국의 목욕탕[편집]
일본의 영향으로 1924년에 평양에 첫 공중목욕탕 겸 대중목욕탕 영업이 시작된 것이 첫 근대적 목욕탕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일본인 손님이 많고, 한국인 손님은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때밀이라는 특유 직업과 목욕업을 겸하는 찜질방이 있을 정도로 한국의 목욕 문화는 크게 발전했다. 대표적인 서민 문화로, 1990년대까지 목욕탕의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인한 개인 샤워실의 보급과 찜질방 등 대형화로 전통적인 목욕탕이 쇠퇴해 가고 있다. 목욕탕 안에는 사우나 시설이 있는 것이 보통이며, 탕도 온탕, 냉탕, 쑥탕 등 다양하다.
대한민국의 대중목욕탕은 대부분 7세 이하의 아동을 대상으로 소인 요금을 적용한다.
튀르키예의 목욕탕[편집]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고대 로마의 유산과 함께 청결을 중시하는 이슬람교의 영향 덕분에 목욕탕이 비교적 온전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슬람에선 목욕을 매우 당연시했고 목욕탕도 알라를 뵙기 전 몸을 씻는 곳으로 여겼기 때문에 아랍, 오스만 제국 등 이슬람 나라들에선 제아무리 폭군이라고 해도 적어도 몸을 씻는 목욕탕에서는 야한 짓은 금기시했다. 현대에도 이슬람 성원 앞에 몸을 다 씻진 못해도 손이나 발이라도 씻기 위한 수도 시설이 정비된 곳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이다.
그 중에서도 튀르키예 목욕탕이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튀르키예식 목욕은 로마 제국 목욕 문화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튀르키예에 있는 진짜 터키탕(튀르키예어로 하맘, Hamam)은 고대 로마 시대의 목욕탕과 유사한 형태를 갖고 있다. 중앙에 '괴벡타쉬'(Göbektaşı)라고 불리는 따뜻한 둥근 돌이 있고, 그 주변에는 물이 나오는 세면대와 세면 도구들이 널려 있다. 이슬람에서는 과거 유목 민족 특성상 고여 있는 물을 부정하게 여기기 때문에 욕조가 없다. 세면대도 수도꼭지에서 물이 계속 흘러나와 물이 흘러넘침으로써 물이 고여있지 않게 유지한다. (별도로 샤워기가 있다.) 보통 동성간에도 맨몸은 드러내지 않는 게 당연한 문화이기 때문에 페슈테말(Peştamal)이라는 큰 타월을 둘러 들어간다. 한국에서처럼 물에 몸을 담그는 대신 증기로 때를 불린 뒤 비누칠을 한 다음에 괴벡타쉬에 철푸덕 누워있으면 때밀이 아저씨(혹은 아줌마)가 와서 때를 밀어준다. 물론 개인은 이러한 증기식 목욕탕을 소지하기 힘들다. 외출이 자유롭지 않았던 여성들이 여기서 한 데 모여 수다를 떨 수 있었고, 결혼을 앞둔 신부는 겔린 하맘(신부의 목욕)이라며 마을 여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목욕을 하면서 결혼 생활의 비법을 듣는 행사를 열었다.
일본의 목욕탕[편집]
'센토'(銭湯)라 부른다. 전신은 고대 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제대로 된 공중 목욕탕 개념은 에도 시대부터 발전하여 대중화됐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60년대까지는 전성기를 누렸으나 1970년대부터 개인 목욕탕을 갖춘 단독주택과 고층 아파트가 늘면서 서서히 사양세로 접어들었다.
그래도 1980년대~1990년대까지는 현상유지했으나, 2000년대부터 인구 감소 문제가 완전히 가시화되며 문을 닫는 센토들이 속출하고 있다. 일본에서 목욕탕을 주로 다니는 이가 쓴 책 《450엔의 행복, 도쿄 목욕탕 탐방기》에서 거론되었는데, 일본도 갈수록 대중목욕탕들이 폐업하고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책 저자도 일본 목욕탕에 가서 실감했다고 한다. '손님이 정말 없어서 이거 제대로 운영할까?' 하던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심지어 외국인이라는 걸 알자 반가워하며 음료를 서비스로 주던 곳도 있는데, 거기 주인은 "갈수록 목욕탕들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씁쓸하게 말하며 '이젠 나도 가게를 오래가지 않아 정리할 예정'이라고 했다고 한다. 일부는 슈퍼센토의 형태로 발전해 살아남았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조선시대 때부터 내려오던 때밀이 문화가 일본으로 전래되었는데 광복 이후로 일본인들에게 대중화된 것으로 한국·일본 사학계에서 일부 사람들이 규정하고 있다.
목욕탕 안에서 걸친 것 없이 돌아다니는 한국과 다르게 일본은 목욕탕 안에서도 씻을 때 빼고는 수건으로 몸을 가린 채로 돌아다녀야 한다.
영미권 목욕탕[편집]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Bath House나 Public Bath라고 쓰여진 큰 건물이 있었다. 미국의 경우, 정말로 목욕 시설이 부족했던 서부 시대가 아닌 이상, 대부분 수영장이나 기타 시설을 겸하고 있었다. 현대의 스파의 모태가 된 시설인 셈이다.
영국은 생각보다 대중목욕탕이 발달했는데, 그 이유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가정은 대부분 한 건물에 여러 가구가 북적북적 모여 사는 시스템이었고, 각 가정에는 욕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중 특히 1875년 이전에 지어진, Two-up two-down 형태의 집에 사는 각 가정은 욕실이 없어 부엌 싱크대에서 씻거나, 일주일에 한 번 부엌이나 벽난로 앞에 양철 욕조를 가져다 놓은 후 거기에 물을 따로 데운 걸 부은 뒤 안에 들어가 비누로 목욕하고 남은 목욕물은 양동이에 따로 퍼서 버리고 욕조도 방에서 치워야 했다. 링크. 이렇게 산업 혁명 시대의 노동자들은 제대로 씻지 못해서 꼬질꼬질한 몰골을 한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당시 영국의 가장 열악한 노동 계급 가정의 상황을 묘사한 글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이 노동 계급 부부는 한 방에 십수 명의 자녀들과 함께 사는데, 집안은 언제나 난로의 연기로 매캐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욕조가 놓여져 있었고 이 욕조에서 가장이 퇴근 후에 목욕을 했다. 아이들은 방 구석의 침구 위에서 얼기설기 누워 잠에 들었고, 식탁도 없었기 때문에 밥은 서서 먹는 일이 많았다."
이러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19세기 초엽부터 바닷물로 씻을 수 있는 대중탕이 리버풀의 부둣가에서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부둣가의 선원을 위한 시설에 불과했고, 현대적인 의미의 대중목욕탕은 키티 윌킨슨(Kitty Wilkinson)이라는 아일랜드계 이민자 여성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 리버풀에는 콜레라가 창궐했는데, 키티 윌킨슨은 대인배스럽게 자신의 집과 마당을 빨래 공간으로 제공한 것이다. 또한 키티 윌킨슨은 이웃들에게 표백제를 사용하는 현대적인 세탁법도 가르쳤고 게다가 자신의 보일러로 빨래를 소독해 주기까지 했다. 이러한 상황에 리버풀 시 당국은 청결함이 질병 창궐을 예방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여러 사람들의 지원을 얻고 키티 윌킨슨의 건의에 따라 영국 최초의 대중목욕탕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질병의 위험에서 해방되었고, 가난한 자들이나 노동 계급도 얼마든지 더운 물로 씻을 수 있게 되었다. 단, 무료 목욕은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으로 여겨져 목욕탕에서는 몇 펜스라도 돈을 받았다. 기사
이러한 대중목욕탕은 영국 여기저기로 퍼져나가게 된다. 하지만 일본이나 고대 로마, 튀르키예의 목욕탕과는 조금 달랐다. 무엇보다도 개인 목욕 공간이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 경우에 따라서 가슴 높이나 머리까지 올라오는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고, 그 안에 욕조가 놓여있는 구조였다. 샤워 기구는 19세기 중반에 등장했고, 샤워장 같은 시설은 19세기 말에 프랑스군에서 경제적 효율을 이유로 개발되어 사용되었다. 그 이후 감옥이나 집단 시설 역시 경제적인 이유로 퍼져나갔고, 이것이 전세계로 퍼져나간 것이다. 일본식 목욕탕처럼 커다란 탕에 여러 명이 함께 있는 구조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터키탕이 19세기 후반 조금 유행하기는 했다고 한다. 아무튼 당시에 대중목욕탕을 가리키면 이런 식의 개인 목욕탕을 뜻한다.
재미있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키티 윌킨슨의 노력에서 기인한 문화여서 그런지, 목욕탕 뿐만 아니라 뜨거운 물이 펑펑 나오고 스팀으로 살균소독까지 할 수 있는 빨래터(Wash House)도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목욕탕과 빨래방이 한데 붙어있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한다.
현대에는 이런 식의 대중목욕탕은 현대적 샤워 시설의 확산과 스파의 확산으로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20세기 중후반까지는 꽤 남아 있었다고 한다. 개인 위생이 향상된 후로는 많이 사라졌고, 현대에는 사우나나 스파가 영국식 대중목욕탕 전형이 되었다.
현대 영국에서 사우나에 갈 때는 잘 확인하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영국, 특히 런던은 동성애에 매우 개방적이기 때문에 게이 사우나가 성업 중이다. 물론 그렇다고 게이 사우나에 들어가는 순간 비누 좀 주워줘 같은 상황이 펑펑 터지는 것은 아니니, 본인이 굳이 게이가 아니라고 해도 흥미가 통한다면 상관없다. 애초에 거긴 다들 몸 씻으려고 오는 곳이지 성적인 짓을 하려고 오는 성인 업소가 아니다. 당연히 그곳에서도 상대 동의 없이 누군가를 덮치면 성범죄로 잡혀 들어간다.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