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건물)
정자(亭子)는 경치가 좋은 곳에 휴식과 모임의 공간으로 세워진,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만 있는 건물이다. 누각보다는 작다.
정자(亭子)란 경치가 좋은 곳에 놀기 위하여 지은 건물로 사전적(辭典的)의미는 '주막집' '역' '기르다' '평평하게하다' '고르다' '곧다' '이르다'등으로 이규보의 『사륜정기 (四輪亭記)』에는 ‘사방이 탁 트이고 텅 비고 높다랗게 만든 것’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자는 조선조 유학(儒學)의 영향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하여 자연의 섭리(攝理)에 순응한다는 생활철학이 정신적 바탕을 이루었고 특히 15∼16세기 중반 기묘사화(1519)이후 사림(士林)들의 낙향으로 일반화 되었다. 이 시대의 정자는 신체의 휴식 .잔치 . 놀이를 위한 기능보다는 자연인으로서 자연과 더불어 삶을 같이 하려는 정신적 기능이 강조된 구조물이다.
따라서 정자의 배치도 전망이 좋은 강가나 언덕 또는 산골짝의 냇가에 세우는 경우가 많고 정원시설의 일부로 배치하는 것도 있다. 정자는 단순히 휴식의 공간을 넘어 그들의 학문 . 사상 등을 논하는 장소로 자연스럽게 시(詩)와 가사(歌辭)라는 문학이 태동(胎動)하게 되는 모임의 장소이다.
개요[편집]
정자는 경관이 수려하고 사방이 터진 곳에 지어져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며 정신을 수양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던 건축물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누(樓)·대(臺) 등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그 외형이나 기능이 다르다.
정자의 평면구조는 장방형·육각형·팔각형이며, 개인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누·대와 비교해 규모가 훨씬 작고 단층이다. 누·대의 평면구조는 대개 장방형이며 규모가 크고 2층으로 되어 있다. 현존하는 많은 유구들을 살펴보면 비록 정자로 건립했으나 그 이름은 □□루(樓), □□당(堂), □□헌(軒), □□정(亭) 등으로 혼용한 예가 많다. 예를 들어 경상북도 경주시 양동마을의 심수정은 ㄱ자형의 단층집으로 규모는 사랑채 정도인데, 정이라 부르고 편액은 함허루(涵虛樓)라고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정자가 언제부터 건립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문헌으로 보아 정자·누 등의 건축은 궁궐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건축). 즉 궁궐건축의 조영과 함께 궁원(宮苑)이 조영되었고, 여기에 정원을 감상할 수 있도록 정이나 누를 세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 권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조에 BC 32년 신령스러운 공작새가 궁정에 모여들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궁정에 누와 정자를 건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자에 관한 보다 확실한 것은 〈삼국사기〉 권28에 655년(의자왕 15) 대궐의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는 기록이다. 이외에도 삼국시대 정자 건축을 추정해볼 수 있는 여러 기록에 의해서 삼국시대의 정자는 모두 정원과의 관계 속에서 조영되었고, 연못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현존 유구는 없으나 〈고려사〉·〈고려도경〉·〈고려고도징〉 및 개인문집 등에 정자에 관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고려미술).
예를 들어 〈고려사〉 권18 정축 11년(1157)조에 "관동에 이궁을 짓고 이를 수덕궁(壽德宮)이라 했으며…… 민가 50여 채를 헐어내고 태평정(太平亭)을 짓고 태자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했다. 정자 주위에는 유명한 화초와 진기한 과수를 심었으며 이상하고 화려한 물품들을 좌우에 진열하고, 정자 남쪽에는 못을 파고 관란정(觀蘭亭)을 세웠다. 그 북쪽에는 양이정(養怡亭)을 짓고 청기와를 얹었으며 남쪽에는 양화정(養和亭)을 지어 종려나무로 지붕을 얹었다. 또한 옥돌을 다듬어 환희대(歡喜臺)와 미성대(美成臺)를 쌓고, 기암괴석을 모아 신선산을 만든 다음 먼 곳에서 물을 끌어들여 폭포를 만들었는데 더할 나위 없이 사치스럽고 화려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도 삼국시대의 정자건축이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물과 관련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정자 건축은 현존 유구가 많으므로 이를 통하여 구체적인 고찰이 가능하다(→ 조선시대 미술). 정자는 궁궐·절·향교·서원·일반주택에 부속된 건물로 건축하는 경우와 독립된 단일 건물로 건축하는 경우가 있다.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 경복궁의 향원정 등은 궁궐에 부속된 정자이다. 강릉 선교장의 활래정, 금원 연경당의 농수정, 안동 임청각의 군자정 등은 주택에 부속된 정자이다.
경상북도 안동의 삼구정, 전라남도 담양의 식영정, 충청북도 옥천의 독락정 등은 독립된 건물로 세워진 정자이다. 평면구조는 장방형(창덕궁 후원 능허정, 경북 경주 독락당 계정, 전북 정읍 피향정 등)이 대부분이며 육각형(창덕궁 후원 존덕정, 경복궁 향원정, 충북 영동 세심정 등)과 팔각형(충북 충주 삼련정 등)이 있고, 드물게 칠각형인 경우도 있다. 이밖에 강릉 선교장의 활래정은 ㄱ자형이고, 창덕궁 후원 부용정은 아(亞)자형이며, 관람정은 부채꼴 모양이며 수원성의 방화수류정은 특이한 평면구조로 되어 있다. 지붕은 대부분 기와로 된 모임지붕과 팔작지붕이며 창덕궁 청의정과 다산초당은 초가로 되어 있다.
정자는 자연과의 동화를 위하여 주위를 대부분 개방하고, 바닥은 마룻바닥으로 처리하며 난간을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때로는 마루와 더불어 온돌방을 설치하여 겨울에 대비한 것도 있다. 정자 주변의 숲이나 냇물, 강 등을 그대로 두어 외부공간을 형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연못을 파거나 나무를 심어 조원(造苑)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의 인위적이고 기하하적인 것과는 달리 자연적이다. 즉 냇물이 흐르면 계정(溪亭)을 짓고, 냇물이 없는 동산에는 산정(山亭)을 지었다. 옥산 독락당의 계정과 연경당의 농수정이 이러한 예에 속한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여 정자 주변의 자연경관은 절기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법칙을 일깨워주었다.
위치와 기능[편집]
생활공간과 가깝게는, 정자는 주변 경관을 잘 감상할 수 있도록 집의 뒷동산이나 마을에서 높은 구릉지에 지었다. 모정(茅亭)은 초가지붕을 올린 민간의 정자로, 경관 감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에 마을 어귀에 농사 짓는 곳과 가까이 지었다.
생활공간과 멀게는, 산을 등지고 경관을 감상할 수 있게끔 높은 산이나 언덕, 절벽 따위에 지었다. 강이나 호수, 바다 등 물가를 면한 곳에도 정자를 지었다.
궁궐이나 정원 등 특별한 공간에도 정자를 지었다. 궁궐에서 정자는 보통 후원(정원)에 지었다. 중국 정원(원림)에서는 누각과 정자를 모두 짓기는 하였으나 정자를 더 짓는 편이었다. 연못 주변에 정자를 배치하여 경관을 아름답게 꾸미기도 하였다. 원림에 짓는 정자는 연회와 경관 조망의 공간으로 쓰였다. 원림에 둔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정자가 가진 소유물은 아니지만, 정자에서 보이는 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자에서만이었다. 중국과 일본인들은 원림 안에 정자를 두었을 때 정자에서 바라보는 원림의 경관이 부족하다면 원림 바깥의 것을 차경(借景)한다고 하는 개념이 있었다. 차경은 대개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먼 곳의 풍경, 이웃한 곳의 풍경,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풍경, 고개를 구부리고 바라보는 풍경 등 모든 풍경을 빌려 감상자가 경관을 오롯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정자는 연회나 행사를 열 뿐 아니라 학문을 강(講)하고 무엇보다 쉼을 위한 공간이었다. 전근대의 유학자들은 정자를 주변 경치를 모두 볼 수 있는 거점으로 인식하면서, 정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경관을 석경(石景), 수경(樹景), 수경(水景)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특별히, 중국에서는 정자를 지을 때에 바깥에서 정자를 바라보면 어떻게 보일지와 정자 안에서 바깥 경치를 바라보는 것을 모두 중시하였다.
형태[편집]
정자의 형태는 지붕에 따라 구분된다. 정자에 쓰이는 지붕으로는 삼각지붕, 사각지붕, 육각지붕, 팔각지붕, 둥근 모임지붕, 헬멧 모양의 회정(중국어판)(盔頂), 모임지붕의 위가 잘린 녹정(중국어판)(盝頂) 등이 있다. 건축 설계에 관한 송나라의 책 《영조법식》(營造法式)에는 추녀를 쌓아 정자의 모임지붕을 만드는 방식이 기록되어 있다. 지붕 한 면의 전체에 해당하는 큰 추녀 위에 작은 추녀 세 개를 점차 가파르게 하여 쌓아 올린다. 이렇게 하면 지붕면이 적당한 곡선을 이루면서 형성되며, 지붕은 멀리서 보면 피라미드나 원뿔 모양처럼 된다.
중국의 정자는 추녀가 하늘로 솟았다. 지역에 따라 다르나 북방 지역의 정자는 지붕의 곡선이 적당한 반면, 남방 지역의 정자는 하늘로 치솟을 듯 매우 가파르게 한다.
변천[편집]
조선전기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정자에 대한 기록은 대개 왕실과 관청의 부속 건물, 종실이나 특정 사대부와 관련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최초의 정자는 태조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서해도 해주(海州)에 가서 관아의 동쪽에 있는 정자에서 여러 장수들과 만났다는 기록에서 나타난다. 이는 관아의 부속 건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정자와 정자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1394년(태조 3)의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안종원(安宗源)의 졸기(卒記)로 그가 거처하는 정자를 쌍청정(雙淸亭)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태조실록』 3년 3월 24일).
태종대에는 창덕궁의 동쪽에 해온정(解慍亭)을 건립했다는 기사가 있으며(『태종실록』 6년 4월 9일), 1459년(세조 5)에는 세조가 마포에 있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제(李禔)의 새로 지은 정자에 나아가서 어서(御書)로 그 정자의 이름을 '영복정(榮福亭)'이라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세조실록』 5년 6월 1일).
조선후기의 정자 관련 『조선왕조실록』 기사로는 1675년(숙종 1) 비변사에서 오가작통(五家作統) 사목 21조를 만들면서 그 19조에 정자를 봄·가을에 강신(講信)하고, 문학과 무예를 시험하는 장소로 활용하자는 논의가 있다(『숙종실록』 1년 9월 26일).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문집류나 읍지류를 보면 매우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이 계속해서 건립되었고, 조선후기에 일반화된 지방 사족들의 정자는 그 성격이 매우 다양하고 종합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