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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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사(우크라이나어: Одеса, 러시아어: Одесса, 영어: Odesa, Odessa, 문화어: 오데싸)는 우크라이나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오데사주의 주도이며 흑해에 접한 항만 도시이다. 인구는 약 100만 명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인구가 세 번째로 많은 도시이자 우크라이나 남부 최대의 도시이다. 2023년 1월 25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역사적 중심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영화, 문학, 예술에 미치는 영향력을 인정하여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추가했다. 이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오데사 폭격으로 도시 전역의 건물이 파손되거나 파괴된 것에 대한 대응으로 만들어졌다.[1]
개요
오데사는 흑해 북부 오데사만(Gulf of Odessa)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우크라이나의 문화·관광 및 해상운송을 포함한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이다. 오데사는 러시아제국의 통치 시기부터 '남쪽의 수도'(South Capital) 혹은 '흑해의 진주'(pearl of the Black Sea)로 불릴 정도로 문화와 산업이 번창하였던 지역이다. 또한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며 이탈리아 건축, 르네상스, 신고전주의 그리고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성행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이 시내 전역에 산재하여 독특한 시가지 풍경을 갖는다. 19세기 이래로 소련에서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바르샤바에 이어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공산주의 시절부터 조선, 원유정제, 화학, 금속가공, 식품산업이 발달하였고 곡물 수출항이자 군사 항구로 활용되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오데사는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우크라이나의 최대 수출입 항구로 곡물, 석탄, 원유, 목재 등 주요 자원이 거래되었고 원유정제, 금속가공, 화학, 농업, 식품산업을 포함한 제조업과 금융 및 관광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우크라이나가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오데사는 해군이 주둔하는 군항과 어업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2000년 이후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자유항과 자유 무역지구를 선언하고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하면서 무역항으로서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에 따른 러시아계와의 갈등으로 관광업이 침체되면서 도시발전이 지체되고 있다.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귀족들의 휴양지로 유명했으며, 130여 개 민족이 거주하는 다민족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기후조건으로 시내 전역에 많은 호텔과 레스토랑이 산재하며 해안가를 중심으로 고급 리조트들이 많이 들어서 동유럽 최대의 휴양도시로 명성이 높다.[2]
지리 및 기후
우크라이나의 대초원과 온화한 흑해가 만나는 곳에 자리한 오데사는 겨울에도 바다가 거의 얼지 않는 항구도시이다. 도시 외곽은 전형적인 평지로, 큰 산이나 언덕이 없다. 들쭉날쭉한 경사 때문에 행정당국에서는 무엇보다 바닷물 범람으로 인한 피해가 없도록 다양한 건축물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다. 특히 지하 구조물들은 도시의 기반시설과 건축물 붕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습하고 따뜻한 기후가 도시 지하의 퇴적암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데사는 고온 다습한 대륙성 기후와 습한 아열대 기후의 경계에 있다. 이러한 오데사의 기후는 건강에 좋은 것으로 여겨져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부유층의 요양지로 이용됐다. 이 때문에 스파 문화가 발달하고 도심에는 고급 호텔들이 즐비하다. 바다의 연평균 수온은 13~14℃이며, 1~3월 평균 수온은 6℃, 8월 평균 수온은 23℃ 정도다. 6~9월 오데사만(灣)의 평균 수온은 20℃를 넘는다. 겨울에는 건조하고 추운 편이지만, 평균 기온이 영하 10℃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을 만큼 우크라이나의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대체로 온화하다.[3]
역사
오데사는 기원전 6세기 중반 이전부터 그리스인의 대규모 정착지가 있던 곳이다.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령의 하지베이(Hacibey)라는 항구 도시가 1415년 콘스탄티노플의 문헌 기록에 처음 등장하며, 대공국이 이 일대의 영향력을 상실한 후 1519년 하지베이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200년 이상 이 지역을 장악했다.
러시아-튀르크 전쟁(1787년–1792년)에서 오스만을 물리친 러시아 제국은 1794년 예카테리나 2세의 명으로 이곳에 오데사라는 이름의 근대적 도시를 처음 설립하였고, 이후 오데사는 자유항으로서 발전하였다. 예카테리나 대제로도 불리는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는 당시 흑해를 통해 지중해 연안의 유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심 찬 계획인 ‘그리스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겨울에도 바다가 얼지 않는 이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대형함대를 위한 항구 건설에 적합하다고 본 것이다. 19세기 동안 오데사는 러시아 제국에서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바르샤바 다음으로 큰 제4의 대도시였으며 지중해식 건축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여러 화려한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항구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오데사는 급격히 발전했다. 1797년 처음 실시된 인구조사 결과 3,455명이던 주민은 1803년 9,000여 명으로 늘었다. 1801년에는 최초의 상업은행이 문을 열었다. 1819년부터 1858년까지 오데사는 자유항으로 더욱 성장했다. 1853~1856년 크림 전쟁 때 영국과 프랑스 해군의 폭격을 받으며 잠시 주춤했던 오데사는 곧 성장세를 되찾으며 러시아 제국 최대의 곡물 수출항이 되었다. 1866년 오데사는 루마니아의 이아시(Iasi), 우크라이나 최대 도시들인 키이브(Kyiv) 및 하르키프(Kharkiv)와 철도로 연결되었다.
1905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피의 일요일’과 함께 시작된 제1차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는 오데사에도 몰아쳤다. 흑해에 주둔 중이던 러시아 제국의 최신식 전함 포템킨(Potemkin, 러시아어로는 원래 포툠킨 Потёмкин임)에서 수병들이 봉기를 일으켜 전함을 장악한 뒤 붉은 혁명기를 내걸고 오데사에 입항한 것이다. 흑해에 정박 중이던 다른 전함에서도 최하층 농노계급의 수병들과 사회주의 혁명에 동조하는 일부 장교들이 포템킨의 봉기 세력에 가담했다. 이들은 오데사의 노동자들과도 연대를 시도했으나 결국 러시아 제국의 군대에 진압됐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 체제에 저항한 이 사건은 주모자들 대부분이 처형되는 등 실패로 끝났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우크라이나-소련 전쟁이 벌어진 와중에 이곳에서는 볼셰비키파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에 반기를 들고 두 차례 반란을 일으켰고, 2번째 반란에서는 오데사 소비에트 공화국이라는 국가가 선포되기까지 했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에 따라 동맹국 군대들이 철수하자 끝내 소련이 점령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1년 8월 오데사는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 루마니아 왕국의 공격을 받았다. 73일 간 벌어진 오데사 포위전은 독일-루마니아 측의 승리로 끝났고, 루마니아는 이곳에 트란스니스트리아 총독부를 세우고 오데사와 주변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공방전 이후 오데사에서는 유대인을 비롯한 시민 수만 명이 대량 살해당하는 오데사 학살이 벌어진다. 점령기 동안 오데사 시민 약 25,000명이 도시 외곽에서 살해되었고 35,000명 이상이 추방되었다. 이것은 오데사 대학살로 알려져 있다. 다만 나중에 루마니아 당국은 유대인들을 독일 측에 넘겨주는 것을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학살 사건에도 불구하고 오데사에는 유대인 인구가 많이 남게 되었다. 1944년 4월 10일 소련이 다시 도시를 해방하였고 오데사에 영웅 도시 칭호를 부여하였다. 전후 오데사는 곧 복구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오데사의 중 · 상류층은 더 많은 기회를 찾아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의 대도시로 떠났지만 우크라이나의 농촌에서 온 새로운 이주민들과 소련 전역에서 초청된 산업 전문가들이 이들의 공백을 메웠다.
1991년부터는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었고, 조선, 정유, 화학, 금공, 식품 가공 등의 산업 도시로서 해군 기지가 위치해 있다. 2014년 우크라이나 친러시아 분쟁 중에 이 도시에서는 2014년 오데사 충돌로 불리는 폭력 사태가 있었고, 이때 친러 시위대 측의 46명이 살해당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벌어진 이래로 오데사는 현재까지 대규모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폭격 등의 피해를 입은 바 있다.[4]
주민
오데사는 1819년부터 1859년까지 자유항의 지위를 누렸다. 그동안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은 물론, 알바니아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 불가리아인, 크림 타타르인, 프랑스인,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유대인, 폴란드인, 루마니아인, 터키인 등 매우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게 되었다. 이런 다국적 분위기는 도시 지도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프랑스로(路)나 그리스가(街)라는 의미의 크고 작은 거리 이름은 다양한 민족명을 담고 있다. 민족 구성은 다양하지만 오데사 주민의 다수는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이다. 미국의 비영리기구인 국제공화연구원(International Republican Institute)이 2015년 발표한 조사결과에서는 오데사 인구의 68%가 우크라이나인, 25%가 러시아인이었다. 다른 소수민족들은 시(市) 외곽의 오데사주(州) 전역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인이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데사에서 더 지배적인 일상어는 러시아어다.[5]
관광
19세기 오데사는 러시아 제국을 지중해 연안의 유럽과 이어주는 역할을 하며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역사적 건축물들도 러시아보다 지중해 스타일에 가깝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양식의 영향이 크다. 일부 건축물은 아르 누보(Art Nouveau), 르네상스, 그리고 고전주의 양식이 혼합돼 있다. 오데사는 또한 다양한 수종의 낙엽수림으로 이루어진 가로수길로도 유명하다. 아름다운 가로수길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오데사를 러시아 귀족들이 1년 내내 즐겨 찾는 휴양지로 만든 요인 중 하나다.
아르카디아(Arcadia) 해변은 오래전부터 이 도시의 주민과 방문객 모두에게 가장 좋은 힐링 명소였다. 남쪽에 위치한 이 해변은 자갈이 많은 우크라이나 남부의 해변들과 달리 넓은 모래사장이 있어 더욱 인기가 있다. 노바야 슬로보드카(Novaya Slobodka)로도 알려진 몰도바인(Moldovans) 정착지는 규모는 작지만 포도밭과 정원을 갖춘 전원주택 스타일의 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바닷가에 접한 이 지역 인근에는 오데사 부유층의 별장(다차)들도 많다.
경제
오데사의 경제는 주로 항구도시로서의 전통적인 역할과 관련이 깊다. 겨울에도 거의 얼지 않은 항구는 드니프로강과 보강, 드니스테르강, ]]다뉴브강[[ 어귀들과 내륙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1991년까지의 구소련 시절 이 도시는 가장 큰 무역항이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번화한 국제항이다. 항만 단지에는 석유와 가스 수송 및 보관시설, 화물 취급시설, 대형여객선 항구 등이 있다. 오데사항(港)은 우크라이나 해군의 주요 흑해 기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철도 운송은 오데사 경제의 또 다른 주요 축이다. 항구로 상품과 수입품들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도시 교외에 중요한 석유 터미널인 유즈네(Yuzhne)항이 있다. 이 두 항구는 오데사 남서쪽에 위치한 오데사주의 또 다른 유명한 항구 초르노모르스크(Chornomorsk)와 더불어 철도로 연결되는 흑해의 중요한 교통 거점이다. 오데사의 석유 및 화학 처리 시설은 파이프라인을 통해 러시아 및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연결된다.
오데사에는 이밖에도 조선, 정유, 화학, 금속가공 및 식품 가공업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해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 어선들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관광 산업도 빼놓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에서 외국인 방문객이 두 번째로 많은 도시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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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오데사〉, 《위키백과》
- 〈오데사〉, 《나무위키》
- 〈오데사〉, 《요다위키》
- 〈오데사(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오데사(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