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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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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광해군(光海君)은 조선의 제15대 국왕(재위: 1608년~1623년)이다.

개요

  •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분조하여 의병을 이끌었다. 즉위 후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 노선을 취하였으며 전후 복구와 대동법의 실시 등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지만, 잦은 옥사와 중립외교,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유폐한 일로 인해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1623)에 의해 폐위되었다. 연산군에 이어 반정으로 인해 폐위된 두 번째 왕이기도 하다. 성은 이(李), 휘는 혼(琿),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이다. 1608년 천신만고 끝에 즉위한 광해군은 이후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였다. 유영경의 세자 교체 기도에 대해 적극 반대하고 나섰던 대북파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광해군을 정통으로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었다. 광해군은 파주 교하가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용할 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의 해상 교역이 가능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수도를 교하로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계속 미루어지다가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 광해군은 1618년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을 건국하자 북방의 성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는 등 국경 방비에 힘썼다.[1]
  •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채 끝내 복위되지 못하여 조선왕실 역사에서 연산군과 함께 '조(祖)'나 '종(宗)'으로 끝나는 묘호를 끝까지 받지 못한 임금이다. 생전에 받은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이라는 존호조차 인조반정 이후 삭탈됐다.[2] 광해군은 활동한 나이에 따라 장 • 단점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인물이다. 세자 시절의 업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나, 왕 시절은 대중의 평가와는 달리 학계에서는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광해군, 인조 등 비슷한 시대의 두 임금은 현대 한국사학계에서 정치적인 평가를 걷어내고 동시에 긍정적인 면모가 재평가 받기 시작했으나, 광해군은 일제강점기부터 정치적 필요성과 이권에 의한 재해석이 많았던 탓에 재평가의 기류에서 유독 불필요한 수준의 미화가 혼합되고 실제 왕의 역사가 왜곡되어 해석되는 경향이 크다.
  • 광해군은 조선의 제15대 왕(재위 1608~1623)이다. 임진왜란 이후 부국강병의 기틀을 다졌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조선왕조 제1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608년에서 1623년까지이다. 이름은 이혼(李琿), 본관은 전주, 선조(宣祖)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 김씨(恭嬪金氏)이며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세자 책봉 문제로 임해군과 갈등을 빚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영변(寧邊)에서 갈라졌다. 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광해군은 권섭국사(權攝國事)의 직위를 맡아 분조(分朝)의 책임자로 평안도 지역으로 출발하였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을 수복한 후 무군사(撫軍司)의 업무를 담당하여 수도 방위에도 힘을 기울였다. 1597년 정유재란(임진왜란 중 왜군의 2차 침략을 따로 부르는 말)이 일어났을 때는 전라·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과 병기 조달은 물론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는 등 임진왜란 기간 동안 국가 안위를 위해 노력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임진왜란 동안 많은 공을 세운 광해군이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1613년 대북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서인(庶人)으로 삼았고, 1618년에는 이이첨(李爾瞻)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정치 행위는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서인 주도의 반정(反正)에 의해 폐위당하였다.[3]

광해군의 생애

  • 광해군은 1575년에 태어났으며 선조와 김희철의 딸 공빈 김씨의 서차남으로 위로는 친형 임해군 이진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광해군(光海君)에 봉해졌다. 어려서 생모 공빈 김씨를 여의고 부왕의 냉대 속에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면서 그가 기댈 곳은 없었다. 선조에게 적자가 없는 데다, 서장남인 임해군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어 서차남이었던 광해군이 159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기뻐했던 부왕 선조는 왕자들도 특별히 광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하여 원종공신록에 넣었다. 광해군도 이때 친형 임해군 진, 이복동생 신성군 후, 정원군 부, 순화군 보 등과 함께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
  • 광해군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함경도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인정과 칭찬은커녕 견제와 냉대를 받아야만 했다. 임진왜란 이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금과의 전쟁 위기 상황에서 실리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파의 반발로 당쟁에 휘말리고 말았으며, 이후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이후 줄곧 인목왕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했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이유로 패륜자, 혼군(昏君), 폐주(廢主)로 평가되어 왔으나, 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광해군은 생전에 폐위되었기에 사후 시호는 없으며, 임금이었을 때 신하들이 올린 존호는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이다. 임금이 된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궐을 지어 경제가 파탄나기 시작했다. 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서 쌀로 조세를 내도록 함으로써 소득에 따라 세금을 내는 조세개혁인 대동법을 시행했다. 1611년 양전 사업을 벌였다고 하나 선조 대의 계묘양전, 인조 대의 갑술양전 이외에는 양전을 시행한 기록이 없다. 이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재건하고 인경궁을 설치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서적 간행에도 힘써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했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한의학책인 《동의보감》 등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 1624년 이괄의 난 때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을 우려해 그를 충청도 태안으로 옮겼다가 강화로 다시 옮겼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강화도 옆 교동도에 유배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1637년(인조 15년) 6월 6일, 광해군은 제주 어등포(魚登浦 : 현 구좌읍 행원리)로 입항하였다. 유배 생활을 지내던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년) 7월 1일에 67세를 일기로 독살로 인해 사망하였다. 현재 광해군묘는 문화재보호에 따라 여행관광 및 방문이 제한된 곳으로 광해군 제향식날에만 한시 개방하고 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

  • 인조반정 이후 조선 후반기 내내 친형 임해군을 죽인 패륜사건과 폐모살제(영창대군 살해와 인목왕후 폐위)를 이유로 연산군에 이어 패륜의 군주로 규정되어 왔다. 명나라와 후금의 전쟁 중 강홍립을 파견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점 역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하고 사대를 저버린 것으로 간주되어 인조반정(1623) 이후 조선 시대 내내 광해군은 폭군 또는 혼군(昏君), 즉 판단이 흐리고 어리석은 임금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33년에 이나바 이와키치가 《광해군시대의 만주와 조선의 관계》라는 저술에서 광해군이 실리외교 혹은 중립외교를 펼쳤다는 긍정적 평가가 등장하면서 여러모로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폭군으로서의 이미지가 많이 희석이 되고 있다. 물론 내치의 붕괴로 인해 소극적인 외교를 펼친 결과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남양주 광해군묘

  • 남양주 광해군묘(Tomb of King Gwanghaegun, Namyangju,南楊州 光海君墓)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59번지 일대에 있는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유씨의 무덤. 1991년 10월 25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 1608~1623)과 문성군부인(文成郡夫人) 유씨의 무덤이다. 1991년 10월 25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 7월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사망한 뒤 그곳에 묻혔다가 1643년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59번지로 이장되었다. 광해군의 부인인 문성군부인 유씨는 광해군과 함께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1623년(인조 1) 10월 8일 사망하여 양주군 적성동에 묻혔으며, 광해군이 사망한 뒤 광해군의 무덤 옆으로 이장되었다. 두 개의 무덤이 나란히 놓인 쌍분(雙墳)으로서 3면의 곡장(曲墻;나지막한 담)에 둘러싸여 있으며, 두 무덤 앞에 혼유석(魂遊石)·향로석(香爐石)·비석이 각각 설치되어 있다.

광해군일기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조선의 제15대왕 광해군 재위 15년간의 실록이다. 187권 64책. 1608년 2월부터 1623년 3월까지의 시정(施政)을 연월일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것으로서 광해군이 폐위되었기 때문에 실록이라 하지 않고 일기로 명명하였다. 1624년(인조 2) 6월 남별궁(南別宮)에 찬수청(纂修廳)을 설치하여 편찬에 착수, 정묘호란으로 한때 중단하였다가 1632년 2월에 다시 시작하여 이듬해 12월에 완성하였다. 찬수관은 윤방(尹昉) ·이정구(李廷龜) ·한서봉(韓瑞鳳) ·김류(金瑬) 등이며, 편찬 후에도 물력의 부족으로 수개월분만을 인쇄하였다. 나머지는 정초본(正草本)을 여러 번 등사하여 보관하였으나 1634년 1월부터 5월까지 등사한 정초본도 2부에 지나지 않아 중초본(中草本)을 세초(洗草)하지 않고 64책으로 엮어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보관하였다.
  • 1973년 한국 국내에 현전하는 『실록』이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이후 국보 지정에서 빠진 『실록』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2017년 문화재청의 정밀 조사를 통해 국립고궁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서 96책의 『실록』이 확인되어 2019년 국보로 추가 지정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광해군일기』는 권55-58에 해당하는 1책으로, 1612년(광해군 4) 7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의 정치‧외교 등 현안이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광해군일기』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성종실록』 · 『인조실록』 · 『효종실록』과 함께 그동안 국내에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적상산 사고본 『실록』의 존재를 일부나마 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동영상

각주

  1. 광해군〉, 《위키백과》
  2. 광해군〉, 《나무위키》
  3. 광해군(光海君,1575~1641)〉, 《두산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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