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
조선 영조(英祖)는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1776)이다.
개요
- 조선 영조는 탕평정책을 시행하여 붕당의 대립을 완화하였고 여러 차례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렸다. 《농가집성》을 보급하고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청계천을 준설하고 신문고를 설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휘(諱) 금(昑). 자 광숙(光叔). 숙종이 양성(養性)이라는 헌호(軒號)를 내렸다. 숙종의 2남으로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 1699년(숙종 25) 6세 때 연잉군(延礽 君)에 봉해지고, 172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1704년(숙종 30) 10세 때 맞은 군수 서종제(徐宗悌)의 딸이 첫 왕비 정성왕후(貞聖王后)이고, 1757년(영조 33) 왕후의 승하로 1759년에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를 계비로 맞았다.[1]
- 조선 영조는 영조는 조선의 제21대 국왕(재위 : 1724년 10월 5일~1776년 4월 11일)이다. 성은 이(李), 휘는 금(昑)이며,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숙종(肅宗)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숙빈 최씨(淑嬪 崔氏)이다. 경종의 이복 동생으로 숙종 시절부터 잠재적인 왕위 계승권자였으며, 경종이 즉위하자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었다. 신임사화 등의 숱한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 완론탕평을 주창하며, 노론과 소론의 당론을 중재하고 탕평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악형 폐지, 서적 간행 등을 추진하였으나, 탕평론은 실패하였고, 둘째 아들 사도세자와 갈등을 빗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조선의 역대 국왕 중 가장 장수(81세 5개월)하였으며, 가장 오랜 기간(51년 7개월) 동안 재위하였다.[2]
- 조선 영조는 조선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에 있는 파계사(把溪寺)에 탄생이야기를 갖고 있는 왕이다. 영조의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금(李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부친은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肅宗)이며, 모친은 화경 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 왕후(貞聖王后)이고,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 왕후(貞純王后)이다. 자식은 2남 7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효장세자(孝章世子), 사도세자(思悼世子)이며, 딸은 화순옹주,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화유옹주, 화녕옹주, 화길옹주이다. 영조는 1694년(숙종 20) 9월 13일에 창덕궁(昌德宮) 보경당(寶慶堂)에서 태어났다. 1699년(숙종 25)에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고, 1721년(경종 1)에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었으며, 1724년(경종 4)에 즉위하여 1776년(영조 52)에 승하하였다. 왕으로 재위한 기간이 52년이고 수명은 83세였다. 영조와 계비 정순 왕후의 무덤인 원릉(元陵)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영조의 신위는 종묘에 봉안되었고, 종묘에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3]
- 조선 영조는 조선의 제21대 국왕으로 숙종과 인현왕후를 모시는 무수리 출신이었던 숙빈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왕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자(世子)가 아닌 세제(世弟)로서 왕위에 오른 군주이다. 즉, 혈연적으로는 숙종의 아들로서 직계비속이지만 공식적으로는 경종의 이복동생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서출이자 방계로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에 큰 약점이 있었다. 모친 숙빈 최씨는 궁녀의 허드렛일을 도맡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이복형 경종의 재위 도중 신임옥사가 일어나면서 죽을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영조는 1724년 30세의 나이로 비교적 늦게 즉위했지만 80세를 넘길 정도로 매우 장수했기 때문에 영조의 치세는 장장 52년에 달했는데, 이는 조선 왕사에 있어 최장 집권에 해당하며, 역대 조선의 국왕 중 최장수 군주였다.[4]
조선 영조의 생애
- 1721년 왕세제 책봉은 경종이 숙종을 이어 즉위한 그 해에 정언 이정소(李廷熽)가 왕이 건강이 좋지 않고 아들이 없는 것을 이유로 그를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먼저 발의하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중추부판사 조태채(趙泰采), 중추부영사 이이명(李頤命) 등 이른바 노론 4대신들이 인원왕후(仁元王后) 김대비(숙종의 계비)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 소론측은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를 필두로 시기상조론을 펴 반대했으나 노론의 뜻대로 책봉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후 노론이 대리청정으로까지 몰아가자 소론이 역공의 명분을 얻어 이 일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보냈다. 이듬해 1722년에 소론은 기세를 모아 영수 김일경(金一鏡) 등이 남인 목호룡(睦虎龍) 등을 시켜 노론이 삼수역(三守逆:경종을 시해하기 위한 3가지 방법)까지 꾸며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고 주장하여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0여 명을 처형, 170여 명을 유배 또는 치죄하였다(임인옥사). 옥안(獄案)에는 왕세제도 혐의가 있는 것으로 기록하여 왕세제가 김대비에게 사위(辭位)도 불사하겠다고 호소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나 1724년에 경종이 승하하여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 노론과 소론 사이의 치열한 정쟁 속에 즉위한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즉위와 동시에 당습(黨習)의 폐해를 하교(下敎)하는 한편, 신임옥사(辛壬獄事)를 일으킨 소론 과격파를 축출, 노론을 불러들이는 조치를 내렸다(을사처분). 그러나 노론 내 강경파인 준론자(峻論者)들이 소론에 대한 공격을 일삼자 1727년에 이들을 축출하였다. 이 무렵 그는 붕당이 아니라 국왕이 명실상부하게 정국을 주도하여야 요 ·순의 시대처럼 탕탕평평의 치세가 실현될 수 있다는 왕정관을 명백히 표시하면서 이에 따르는 자들만을 등용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729년에는 노론 ·소론 가운데 자신의 탕평책을 따르는 온건파, 즉 완론자(緩論者)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기유처분). 이때는 노론 ·소론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이른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인사정책을 폈으나 점차 유재시용(惟才是用), 즉 능력 위주로 전환해 가면서 왕권을 지지하는 탕평세력을 구축해 갔다.
- 1728년에 소론 ·남인 등의 일부 과격한 분자들이 영조의 왕위 자체를 부정하는 반란(이인좌의 난)을 일으킨 것이 이러한 새로운 체제 확립의 결단을 더 앞당겨 주었으며 탕평정국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1741년에 이조전랑(吏曹銓郞) 통청법(通淸法)을 혁파하였다. 이조전랑이 삼사(三司)의 언관들의 인사권을 장악한 제도는 언관들의 언론권을 대신들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시키면서 활성화하는 의도 아래 시작되어 붕당정치의 맥점을 이루던 것이었으나, 이 무렵에는 이미 자파 세력강화의 도구로 악용되고 있어 붕당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혁파조치가 불가피하였다.
조선 영조의 업적
- 영조의 삼대 치적으로는 탕평 ·균역 외에 준천(濬川), 즉 청계천(淸溪川)을 준설한 것이 꼽힌다. 도성 가운데를 흐르는 개천을 오랫동안 준설하지 않아 홍수 때 범람이 잦아 1760년에 준천사(濬川司)를 세우고, 수만금을 출연하여 인부를 사서 흙을 파내는 대역사를 진행시켰다. 1773년 6월에는 개천의 양변을 돌로 쌓아 흙이 내려가지 않도록 하였다.
- 영조는 스스로 검약 ·절제의 생활로 일관하는 한편, 재위중에 여러 차례 금주령과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렸다. 요 ·순의 치세를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탕평정치는 민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여러 가지 폐단들을 고치는 개혁적 조치들을 많이 단행했다. 먼저 양반관리, 사족들이 백성들에 대해 사형(私刑)을 많이 행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여 형정을 쇄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이 취해졌다. 1725년에 압슬형(壓膝刑), 1732년에 낙형(烙刑)을 각각 폐지하고, 1740년에는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형벌[刺字]을 금지하였다. 1743년에 《수교집록(受敎輯錄)》을 속편하고 이듬해에 이를 발전시켜 《속대전(續大典)》을 《속오례의(續五禮儀)》와 함께 편찬한 것은 왕조의 법치체계 전반을 재정비하는 의미를 가졌다.
- 영조는 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보고, 듣기 위해 재위 25년째 이후 50여 회나 궁성을 나와 거리 행차를 하였으며, 1773년에는 경희궁 건명문(建明門)에 신문고를 달게 하였다. 세손의 건의를 받아들여 양로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1740년에 개성부 행차 때 정몽주의 충절을 기려 선죽교에 비석을 세운 것을 비롯해 역사상의 충신들에 대한 추존사업을 크게 벌였으며 1771년 10월에는 왕조의 시조묘가 없는 사실을 깨닫고 전주 경기전에 조경묘(肇慶廟)를 건립하게 했다. 1770년 정월 편집청(編輯廳)을 설치하여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할 때 상위고(象緯考) 편찬 단계에서(4월) 세종조의 측우기 만드는 법을 터득하여 호조에 명해 양궐 및 서운관에 만들어 설치하게 하는 한편, 양도(兩都) ·팔도에 분송하여 매번 비가 올 때마다 강우량의 척촌(尺寸)을 재서 보고하게 했다. 학교고(學校考)를 편찬하는 순서(6월)에서는 주(州) ·부(府) ·군(郡) ·학에 6현(賢)을 함께 배향하게 하고, 형고(刑考)를 만드는 순서에서는 포도청에서의 난장(亂杖)을 금하는 명을 내렸다.
- 영조는 농업정책과 수취제도의 개선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734년에 농정의 기본방향을 잡기 위해 세종조에 민을 이끌어 농사에 힘쓰게 한 성의를 관리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농가집성(農家集成)》을 대량 인쇄하여 보급하고, 1748년에는 세입 ·세출 제도의 확립을 목적으로 《탁지정례(度支定例)》를 편찬하고, 1750년 7월에는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여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양역 변통의 논의를 종결지었다. 일반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양역(군역)조의 납포량을 일률적으로 1필을 감하고 어염세 ·결전세(結田稅) 등을 부과해 결손을 채우게 했다. 1774년에 노비 신공(身貢)을 전면 혁파한 것도 획기적인 조치로 평가되었다.
- 영조의 탕평론은 요 ·순 임금의 경지를 이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주 스스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노력을 최대로 기울여야 하는 조건을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조는 학식 있는 신하들과 강론하는 자리인 경연(經筵)을 재위 52년간 무려 3,458회를 열었다. 연평균 66회에 달하는 이 횟수는 조선일대에 최다 기록이었다. 그는 학문적으로 특히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 1758년에 성균관을 방문한 것을 기념해 《대학》에 〈어제서(御製序)〉를 붙였다. 1746년에 《자성편(自省編)》을 지은 것을 비롯해 《정훈(政訓)》(1749) 《대훈(大訓)》(1755) 《경세문답(警世問答)》(1762) 《경세편(警世編)》(1764) 《표의록(表義錄)》(1764) 《백행록(百行錄)》(1765) 등 후세 왕들을 위해 왕자가 걸어야 할 길을 밝히는 저술들을 다수 남겼다.
이인좌의 난
- 이인좌의 난(李麟佐ㅡ亂)은 조선 영조 4년(1728년) 3월 조선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내전이다. 난이 일어난 영조 4년이 간지로는 무신년이었기에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이인좌-정희량의 난(李麟佐ㅡ鄭希亮의 亂)이란 총대장 이인좌가 초기에 진압당했을 때 정희량이 이끌은 영남군이 오히려 최후까지 저항한 결과를 반영한 명칭이다. 소론(완론)이 이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긴 했다. 그러나 이 난의 주동자의 대부분도 소론 강경파(준론)이기에, 이 난으로 소론의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았으며,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50여 년에 걸쳐서 안동을 제외한 경상우도 사람들에게는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게 했으며, 조식의 문하인들은 벼슬 길에 나아갈 생각을 갖지 못했다. 과거 응시가 허용된 뒤에도 필기시험 합격자에게 임금이 낙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 금지는 사실상 130여 년 후 대원군의 과거 혁파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영조 태실
- 조선 21대 왕인 영조의 태실이다. 1984년 12월 31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에 위치한다.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는 이 태실(胎室)이 청주에서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청주목 산내일동면 무쌍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가 바로 현재의 낭성면 무성리이다. 이 태실은 1695년(숙종 21)에 조성되었던 영조(1694∼1776)의 태실을 1729년(영조 5)에 다시 왕의 태실 규모와 구조에 맞도록 고쳐 만든 것이다. 태실의 형태는 공주에 있는 숙종의 태실을 모방하여, 중앙에 2단으로 된 정사각형의 대석을 놓고 그 위에 계란 모양의 태실석(胎室石)과 팔각의 갓처맛돌을 놓았다. 그리고 그 주위에 8개의 장대석을 8각으로 놓고, 8각의 모서리에는 우주석(隅柱石)을 세웠다. 8면의 중앙에는 사각의 동자석을 세운 뒤 육각의 장대석을 가로 얹은 돌난간을 둘렀다.
- 태실 앞에는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 상단에 조각한 태실비(胎室碑)를 세웠다. 비신의 앞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 쓰여 있고, 뒷면에는 〈옹정7년 10월 14일(雍正七年十月四日建)〉이라 쓰여 있다. 이 영조 태실은 1928년에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전국에 있는 태실을 관리하기가 어렵다는 구실로 태항아리만 꺼내어 서울 창경궁으로 옮기면서 크게 파손되었다. 그 후 태실 자리에는 민간의 묘가 들어섰고, 태실비는 마을 사람들이 마을로 옮겨 세웠다. 1982년 청원군에서 갓처맛돌이 없는 상태로 태실을 복원하였다.
영조 어진
- 영조어진(英祖御眞)은 조선 영조가 연잉군으로 있던 20세 때의 초상화. 1987년 12월 26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견본채색화로 크기는 가로 83cm, 세로 203cm이다. 서울특별시 창덕궁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는 1714년(숙종 40) 진재해(秦再奚)가 그렸으나, 1900년(광무 4) 채용신(蔡龍臣)이 이를 보고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반신좌안칠분면상(半身左顔七分面像)인 이 그림은 영조의 청년시절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데, 아깝게도 6 ·25전쟁 때 한쪽이 불탔으나, 다행히 상용(相容) 쪽은 많이 남아 있다. 초상화의 오른쪽 위에 '英祖大王御眞光武四年庚子移模'라고 씌어 있다.
원릉
- 원릉 (元陵)은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경주김씨의 쌍릉 합장릉이다. 원릉은 1659년 조성된 효종(孝宗)의 옛 영릉(寧陵) 자리이다. 1673년 천릉하면서 기존의 돌거리는 매장하였던 것을 1674년 현종(顯宗) 숭릉(崇陵)에 재사용하였으며, 파손되어 재사용되지 않은 일부 돌거리가 원릉 주변에 있다. 지댓돌 등 일부 돌거리는 원릉에 재사용되었다. 영조(英祖)는 생전에 원비(元妃)인 정성왕후(貞聖王后) 홍릉(弘陵)에 합장되고자 홍릉을 허우(虛右, 오른쪽을 비워 둠)의 제도로 조성하였다. 1776년 영조 승하 후 정조(正祖)는 다른 좋은 자리를 찾게 하여, 현재의 원릉이 있는 옛 영릉 자리로 바뀌었다. 1776년 영조 원릉 조성 때 정순왕후(貞純王后) 경주김씨(慶州金氏, 1745~1805)와의 합장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래서 1805년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능호(陵號)를 경릉(景陵)으로 정하였으나 이후 원릉에 합장되는 것이 결정되어 사용하지 않았다. 정순왕후 합장 시 혼유석(魂遊石)과 난간석(欄干石)을 추가로 제작하고, 장명등(長明燈)과 동쪽의 돌거리들을 이동해 지금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원릉은 봉분에 난간석을 두르고 주변에 양석(羊石), 호석(虎石), 망주석(望柱石), 혼유석, 장명등, 문석인(文石人), 무석인(武石人), 석마(石馬) 등이 배치되어 있다. 능강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刻)이 있으며, 수복방(守僕房)은 현대에 재건되었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영조〉, 《나무위키》
- 〈영조〉, 《위키백과》
- 〈영조/생애〉, 《나무위키》
- 〈영조〉, 《향토문화전자대전》
- 〈영조(英祖,1694~1776)〉, 《두산백과》
- 〈원릉(元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도재기 기자, 〈‘삽살개’ 그림으로 신하를 꾸짖다···영·정조가 글·그림을 활용한 방법〉, 《경향신문》, 2023-12-10
- 이수지 기자, 〈영조 52년간 치적…장서각 온라인 특별전 '조선의 중흥군주 영조대왕'〉, 《뉴시스》, 202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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