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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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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조소앙(趙素昻)은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이다.

개요

  • 조소앙은 김구 등과 시사책진회를 결성하고, 한국 독립당을 창당했다. 주요 저서에는《한국문원》, 《소앙집》 등이 있다. 본관 함안(咸安). 호 소앙. 본명 용은(鏞殷). 자 경중(敬仲). 경기도 파주(坡州)에서 태어났다.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조선법학전수학교(朝鮮法學專修學校)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국무위원 겸 외무부장 등을 지내고, 1919년 루체른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국제 사회가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촉구하는 특별결의안이 채택되도록 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의 내분을 수습하려고 김구(金九)·안창호(安昌浩)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결성하고,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으며, 1937년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 결성에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가하였다. 1945년 8·15광복으로 귀국하여 국민의회를 조직하고, 상무위원회 의장을 거쳐 1946년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김구 등과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정부 수립에 불참하였다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득점으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저서에 《한국문원(韓國文苑)》(1932) 《소앙집》 《유방집(遺芳集)》(1933) 등이 있으며, 1970년 삼균학회에서 《소앙문집》 상·하권을 간행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독립기념관 경내에 삼균주의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1]
  • 조소앙은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대의 정치인 겸 교육인이다. 경기도 파주(坡州) 출신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본명은 조용은(趙鏞殷)이며, 자는 경중(敬仲)이다. 필명으로 사용하던 조소앙(趙素昻)이 훗날을 기하여, 1918년 4월 30일 이후부터 개명한 이름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소앙 조용은으로도 부른다. 유교 학맥으로는 할아버지 조성룡의 문인이며, 종교 사상적 활동으로는 삼균주의 사상가이자 육성교를 창시한 바 있다. 정치, 교육, 경제 평등을 말하는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는 중국 기독교 정치가 쑨원의 삼민주의와 일본 유학시절에 번역한 "천부인권론"의 기독교적 '만민평등사상'에 영향을 받아 1918년부터 정립한 정치노선이다. 조소앙은 1911년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에 의해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하였지만 여섯 개의 종교를 두루 아울러야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의 분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1915년 육성교를 창시하였다. 하지만 1918년 삼균주의를 정립한 이후에는 기독교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고 종교통합에 대한 주장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이듬해인 199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을 받았다.[2]
  • 조소앙은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며, 삼균주의를 임시정부의 기본 이념으로 삼은 정치인 ·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함안(咸安). 본명은 용은(鏞殷), 자는 경중(敬仲), 소앙(素昻)은 호이다. 1887년 4월 10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정규(趙禎奎)이고, 어머니는 박필양(朴必陽)이다. 일제식민지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광복 후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득점으로 당선되었으나, 6 · 25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광복을 맞아 12월 1일 임시정부요인 2진으로 환국, 1946년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여 그 의장이 되어 김구 주석과 함께 임시정부의 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다.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고 한국민족대표자대회와 통합을 이룰 때 다시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또한 반탁투쟁위원회 부위원장과 삼균주의청년동맹 위원장에도 추대되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왔고, 12월 방응모(方應謨) · 백홍균(白泓均) · 조시원(趙時元) 등과 사회당을 결성하고 당수가 되었다. 1950년 5 · 30 총선에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하여 3만 4000여 표로 전국 최고득표자가 되어 제2대 국회에 진출하였으나, 6 · 25전쟁으로 서울에서 납북되었다.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 투옥된 것으로 알려졌다. 1958년 9월 10일 사망했으며 70년대 말 평양시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이장됐다. 저서로는 『한국문원(韓國文苑)』(1932), 『소앙집(素昻集)』 · 『유방집(遺芳集)』(1983)이 있으며, 1970년 삼균학회에서 『소앙선생문집』 상 · 하권을 간행하였다.[3]
  • 조소앙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위패가 안장된 독립운동가이다. 조소앙의 아버지는 조정규이고, 어머니는 박필양이다. 조소앙은 1887년 경기도 교하군(오늘날 파주시)에서 태어났다. 1902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904년 황실특파유학생으로 도쿄부립제일중학교 입학하였다. 1908년 3월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일본에 유학했지만, 한일강제병합 반대 운동을 펼쳐 일제로부터 계속 감시를 받았다. 1912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서 경신학교, 양정학교 교사로 활동했지만,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1913년 상해로 망명하였다. 조소앙이 재건한 한국독립당은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이청천의 조선혁명당과 함께 1940년 5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1941년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조소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서 김구 주석과 함께 공동명의로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했다. 또한 임시정부 건국강령 기초를 세웠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 앞서 장제스를 찾아가 한국이 독립할 수 있도록 힘써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국민의회 의장으로 김구와 함께 반탁운동에 나섰으며,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6·25전쟁 이후 납북되어 1958년 9월 10일 사망하였다. 조소앙은 평양 남쪽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으며,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무후선열제단에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4]

조소앙의 생애

  • 조소앙은 경기도 파주(坡州) 출신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본명은 조용은(趙鏞殷)이며, 자는 경중(敬仲)이다. 필명으로 사용하던 조소앙(趙素昻)이 훗날을 기하여, 1918년 4월 30일 이후부터 개명한 이름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소앙 조용은으로도 부른다. 1919년 2월 1일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곧바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2·8 독립 선언을 작성하도록 지도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인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고, 삼균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첫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작성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정부에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한국독립당 당수 등으로 활동했고 김구·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 등을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이론 수립에 참여하였다.
  • 1945년 광복 후에 귀국하여 임시정부 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고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1948년 4월에 김구, 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협상 실패 후에는 노선을 바꾸어 대한민국 단독정부에 찬성하고 지지하였다. 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자택에서 암살될 때 현장에서는 한국독립당의 당원인 초등학교 교사 배희범, 당원이며 군정청 경찰관인 박광옥이 체포되었다. 이들의 배후로는 임정출신인 국민회의 동원부장이자 한독당 중앙상무위원 김석황, 국민회의 비서장이며 한독당 중앙위원인 조상항 등이 체포되었다. 12월 20일 조소앙이 군정청 경찰에 연행되었다.
  • 1947년 12월 20일 조소앙은 장덕수 살해에 연루되어 신문을 받았다.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환당하면서 그에 대한 비판여론이 조성되었다. 1947년 12월 20일 조소앙은 정당관계 등 일체를 사퇴하는 정계은퇴 성명을 냈다. 이에 서중석은 '장덕수 살해에 연루되어 신문을 받은 것도 한 원인이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1948년 1월 남북협상에 참가를 선언하고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1948년 사회당을 만들어 1950년 제2회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시 성북구에 출마해서 전국 최다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1950년 6.25 전쟁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피랍되었다. 납북 후에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존경받는 '선생님'으로 불렸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에 협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납북 후 북쪽에서는 1955년 납북인사들과 함께 한국독립당 재건을 추진하였고 북한에서도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기하면서 납북인사들의 독자적 평화통일운동을 추진하려 노력하였다. 1954년 6월 김일성과 만난 조소앙은 다시한번 중립화 통일방안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 조소앙은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여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한편 1956년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을 암살하려던 공산당원의 암살기도가 미수로 끝났는데, 당시 자유당 정권은 이를 조소앙이 사주한 행위라고 그에게 덮어씌웠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통일방안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판단한 북한당국은 납북인사들을 탄압, '엄항섭, 명재세, 노일환' 등에 반혁명분자라는 혐의를 씌어 연행한다. 1958년 9월 북측이 '엄항섭(嚴恒燮) 사건'으로 엄항섭 등을 체포하자 조작이라며 이에 항의하여 단식투쟁을 벌였다. 단식투쟁 중 병을 얻어 9월 10일 타계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동단결 선언문서

  • 대동단결 선언문서(大同團結 宣言文書)는 1917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신규식(申圭植)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조소앙(趙素昻) 등 14명이 발기하여 작성한 선언문이다. 2015년 12월 8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안창호(安昌浩)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대동단결의 필요성, 국내참상, 해외동지의 역할, 국제환경, 대동단결의 호소 등과 강령 및 이에 대한 답장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7개 항목으로 구성된 강령은 임시정부 수립과 운영에 관한 것이고 이러한 제의에 찬부 여부를 표시하고 찬동하면 회의의 시기 ·장소를 지정해 달라는 찬동통지서가 첨부되어 있다.

대한민국건국강령

  • 대한민국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은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기초로 하여 발표한 해방 후의 국가 건설 계획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1년 11월 임시정부공보(臨時政府公報,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공식 보고)를 통해 발표한 해방 후의 국가 건설 방략으로, 조소앙(趙素昻)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기초로 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1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언을 통해 독립 이후의 국가 건설 방향에 대해 처음으로 발표했다. 해당 선언에서는 특권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등 균등 국가의 건설을 주장했는데, 향후 대한민국 건국 강령의 토대가 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강령의 토대는 조소앙이 마련했다. 국무회의에서 조소앙이 기초한 안을 약간의 수정을 거쳐 통과시켰고, 1941년 11월 28일 국무위원회 명의로 공포하였다.
  •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총강(總綱)·복국(復國)·건국(建國)의 3개 장과 24개 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강에서는 민족의 역사를 통해 향후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복국과 건국에서는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여 신국가를 건설하기까지의 단계를 설정하고, 각 단계마다 수행해야 할 임무와 절차 등을 규정하였다.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해방 후 건설할 민족 국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낸 것으로, 민주공화국 형태의 국가 수립을 목표로 했다. 이를 구체화시킬 방안으로 특권계급 혹은 독재의 배격과 균등사회의 실현을 위한 정치·경제·교육적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비록 그 내용이 시행되지 못했으나, 식민 지배를 벗어나 향후 한반도에 수립될 국가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삼균주의

  • 삼균주의(三均主義)는 조소앙(趙素昻)이 독립운동의 기본방략 및 조국건설의 지침으로 삼기 위하여 체계화한 민족주의적 정치사상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진영에는 민족혁명론·무저항주의·계급투쟁론 등 다양한 좌우익(左右翼) 사상이 혼재, 제각각 자기의 방식으로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삼균주의는 그러한 다양한 운동 중의 하나로,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 완전한 균등(均等)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경제적·교육적 균등을 실현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대전제 위에서 개인 간의 균등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통하여 이룰 수 있고, 민족 간의 균등은 민족자결을 통하여 이룰 수 있으며, 국가간의 균등은 식민정책과 자본제국주의를 부정하고 침략전쟁 행위를 금지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종국적으로는 사해일가(四海一家)·세계일원(世界一元)이라는 완전평등이 국제생활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 삼균주의 사상은 동서양의 기존사상을 보완하여 1931년 임시정부의 ‘대외선언’에서 체계가 정립되었다. 1941년 11월 충칭(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에서 임시정부의 기본이념 및 정책노선으로 이를 확정, "삼균주의로써 복국(復國)과 건국을 통하여 일관한 최고공리인 정치·경제·교육의 균등과 독립·자주·균치(均治)를 동시에 실시할 것"을 명시하였고, 임시정부의 기초정당인 한국독립당과 독립군의 강령이 되었다. 이 사상은 한말에서 광복 후까지도 민족진영의 지도이념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나 남북분단으로 좌절되었다.

동영상

각주

  1. 조소앙(趙素昻,1887.4.10.~1958.9.10)〉, 《두산백과》
  2. 조소앙〉, 《위키백과》
  3. 조소앙 (趙素昻)〉,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조소앙〉,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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