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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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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

손권(중국어:孙权 sūn quán)은 중국의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개요[편집]

손권의 자는 중모(仲謀). 손견(孫堅)의 아들로 유비와 더불어 조조를 적벽에서 무찌르고 위와 제휴하여 제위에 올랐다. 연호를 황룡(黃龍)이라 하고, 도읍을 건업(建業)으로 옮겨서 중국 남방 장쑤(江蘇) 일대를 다스렸다. 재위 기간은 222~252년이다.

손권은 안후이, 후난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 민족과 그 밖의 이민족을 토벌 진무하고, 타이완, 하이난섬 방면에도 원정군을 보냈으며, 랴오둥의 공손씨와도 접촉을 시도하는 등 국내외의 경영에 노력하였다. [1]

손권의 생애[편집]

손권은 손견(孫堅)의 둘째 아들로 200년에 형 손책(孫策)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주유(周瑜) 등의 보좌를 받아 강남(江南)의 경영에 힘썼다. 200년, 강동(江東)의 맹주인 형 손책이 급사하자 어린 나이에 오후(吳侯)의 자리에 올라 강동을 다스렸다. 조조(曹操)와 유비(劉備)의 침공을 방어하여 삼국정립에 기여하였으며, 수성(守成)의 명수로 널리 평가되고 있다.

208년 유표가 죽고 그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의 압력은 더욱 강화되어 국내에서도 화전양론(和戰兩論)이 대립했으나 주유 등의 주전론이 승리하였다. 이에 손권은 유비(劉備)와 손잡고 남하한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에서 격파함으로써 강남에서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그 뒤 형주의 귀속문제(歸屬問題)를 둘러싸고 유비와 대립하였으며, 이 때문에 219년 조조와 결탁하여 유비의 용장 관우(關羽)를 격파하고 형주를 공략하였다. 이때 손권은 관우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보냈다. 그 결과 위(魏)·오(吳)·촉(蜀) 3국의 영토가 거의 확정되었으며, 오나라는 장쑤(江蘇)·안후이(安徽)의 남부, 저장(浙江)·장시(江西)·후베이(湖北)·후난(湖南)·푸젠(福建), 그리고 광둥(廣東) 방면까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220년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한(漢)나라의 제위(帝位)를 찬탈하여 황제로 즉위하자 유비도 촉한(蜀漢)의 황제가 되었다. 손권도 이에 맞서서 황위에 올라 연호를 황룡(黃龍)이라 하고 도읍을 건업(建業;南京)으로 정하였다. 위나라 문제(조비)가 손권의 아들을 신하로 등용한다는 명분으로 인질로 데려가려고 하자 손권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위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위나라와 관계를 청산한 손권은 이후 대체로 촉한과 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한편, 국내의 발전에 힘썼다. 안후이·후난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山越) 민족과 그 밖의 이민족(異民族)을 토벌 진무(鎭撫)하고, 타이완(臺灣)·하이난섬(海南島) 방면에도 원정군(遠征軍)을 보냈으며, 랴오둥(遼東)의 공손씨(公孫氏)와도 접촉을 시도하는 등 국내외의 경영에 노력하였다.

만년에 태자로 책봉한 큰아들 손등(孫登)이 죽자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손권은 둘째 아들 손화(孫和)를 태자로 책봉하여 후계자로 삼는 한편, 넷째 아들 손패(孫覇)를 노왕(魯王)에 봉하여 태자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로써 태자와 노왕 사이에 권력투쟁이 극심하게 일어나 국력이 소모되었다. 241년에 황태자 손등이 죽자 후계 선정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손권은 처음에는 손화를 다음 황태자로 삼았지만, 손패도 아껴 그를 노왕에 봉하고 황태자와 동등하게 대했다. 그래서 신하들은 손화파와 손패파로 분열되었다. 손권이 문책 사자를 보내 추궁했으므로 육손은 분을 이기지 못해 죽게 된다. 그래서 후계 싸움은 더욱 격화되어갔다.

250년 손권은 양쪽 모두 벌하는 형식으로 손화를 황태자에서 폐하고, 손패에게는 자결을 명한 뒤 그 일당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리고 막내 손량을 황태자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손화 폐위를 간언한 신하 수십 명을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다. 손권은 252년 4월, 제갈각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오나라[편집]

오(吳) 나라는 중국 삼국시대 손권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성립된 왕조이며 4대 52년간 지속되었다가 진나라에 멸망되었다. 중국 한나라 말기 군웅(群雄)의 한 사람인 부춘(富春:浙江省 富陽縣)의 호족(豪族) 손견(孫堅)이 오나라의 시조이다. 손견은 원술(袁術) 밑에서 동탁(董卓)을 토벌하여 세력을 얻었지만 유표를 토벌하는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맏아들 손책(孫策) 또한 원술의 휘하에서 몸을 의지하였으며 영자강 동쪽의 여러 군(郡)을 평정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자객에 의해 26세에 암살되었다. 이후 손책의 동생 손권(孫權)이 19세에 주군이 되었다. 손권의 인품과 덕망으로 아버지와 형님의 신하와 세력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점차 명망 있는 신하들도 가세하였다.

208년(건안 13) 유비(劉備)와 연합하여,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 싸움에서 크게 무찌른 뒤, 천하를 3분(三分)하여 그 하나를 영유하게 되었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한나라 헌제(獻帝)로부터 제위(帝位)를 양도받아 위(魏)의 황제가 되자 손권도 오왕에 봉해졌고 222년 스스로 연호를 황무(黃武)라 부르고 229년 위와 촉한(蜀漢)의 싸움이 격화하자 그 틈을 타고 무창(武昌)에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오라 하고 도읍을 말릉(秣陵:현재의 南京)으로 옮겨 그곳을 건업(建業)이라 불렀다.

오나라가 위치한 지형은 양자강 중, 하류로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였다. 강을 바탕으로 물자교역이 많았고 수군(水軍)이 뛰어났다. 손권 때 위세를 떨쳤으나 그가 죽자 국내의 정치파벌이 형성되고 서로 싸우고 내란도 자주 일어나 국력이 쇠퇴하였다. 특히 태자와 동생 간의 파벌로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결국 두 파벌은 모두 패망하고 10세의 어린 손량이 태자로 즉위하게 되면서 오나라의 권력투쟁은 국력을 분열시키게 된다. 263년 촉한이 위에게 망하고, 위가 진(晉)에게 망하자 진은 대군을 파견하여 오를 공략하였다. 280년 진에 함락되고 오는 멸망하였다. 이후 중국 중원은 통일되어 삼국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손권의 업적[편집]

건안 13년인 208년에 조조가 형주(荊州,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시)를 장악하고 장강(長江)을 따라 진군해왔다. 손권은 항복하자는 여러 신하의 의견을 물리치고 주유와 정보를 좌우도독(左右都督)으로 삼아 각각 1만 명의 군대를 이끌도록 했다. 손권의 군대는 유비와 연합하여 적벽(赤壁)에서 조조의 군대를 대파하였고,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손권은 장강의 험한 지형을 의지하여 여러 차례 북방의 조조를 공격했다. 219년에는 여몽을 파견하여 형주를 장악했다.

손권은 삼국 정립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숙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비의 촉한과 연합하여 위(魏)나라를 막는 기본 방침을 택했다. 그러나 여몽을 시켜 형주를 차지하고 관우를 죽이는 바람에 양국의 화의가 깨지고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공격해왔다. 이것이 '이릉의 전투'이다. 유비는 이 전투에서 크게 패했고 촉한의 국력은 급속도로 약해졌다. 그러나 위나라를 막아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오와 촉한의 동맹은 회복되었다. 손권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촉한과의 동맹을 굳게 지켰다. 양국의 오랜 우호관계가 결과적으로 위나라의 공격을 견제했다.

손권은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온 지방 호족 세력을 신임하는 동시에, 재능을 가진 인물들은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발탁했다. 또한 남방의 특징을 파악하여 점진적으로 강동, 특히 오군(吳郡,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 오현에 해당)의 호족 지주와 긴밀하게 연합하여 높은 관직을 위임하는 등 그들을 끌어들이는 데 힘을 다했다. 경제가 발달한 태호 유역을 거점으로 한 호족 지주들은 세력이 막강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 간의 연대도 뿌리 깊었다. 이들은 손권이 자신들의 이익을 충분히 지켜줄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지지하고 충성을 표했다.

손권은 황제가 되어 전제 독재 권력을 확립한 후에는 엄격한 법을 적용했다. 정치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 지방장관이 멋대로 관직을 버리고 도주하면 사형으로 처벌했다. 농관(農官)을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실시하는 한편 산월(山越, 남부의 소수 이민족)을 평정하거나 항복시켜 군현(郡縣)을 설치했다. 각지에 흩어져 세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던 할거 세력을 없애 통치 구역을 강동에서 지금의 푸젠성(福建省), 광둥성(廣東省), 광시성(廣西省), 후난성(湖南省)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확대했다. 동한 말기 이후 분열되어 있었던 이 지역들은 다시 통일되어 사회, 경제가 발전했다.

쑨취안묘[편집]

쑨취안묘(손권묘)는 중국 장쑤성(江苏省) 난징시(南京市) 쉬안우구(玄武区)에 있는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황제 손권(孙权)의 무덤이다. 252년 손권의 사망 당시, 시신이 안장된 곳으로 '손권의 무덤'이라는 의미에서 쑨링강(孙陵岗)이라고 불렸으나, 오늘날에는 메이화산(梅花山)이라고 불린다. 1994년에 손권고사원(孙权故事园)이 지어져 손권 조각상 및 그와 관련된 고사를 테마로 한 벽화 복도가 세워졌다.

『삼국지』에 따르면 손권은 죽은 뒤 장릉에 묻혔다. 이곳은 당시 남경(南京, 난징시)의 종산(鐘山)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 손종(孫鐘)의 이름자를 피해 종산을 장산(蔣山)으로 바꾸고 자신의 무덤을 장릉이라 했다. 훗날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이 종산에 자신의 무덤인 효릉(孝陵)을 만들 때 담당관이 손권의 무덤을 이장하자고 건의했지만 주원장은 손권은 영웅호한(英雄好漢)이니 그대로 두라고 했다. 이곳에는 그의 부인인 보씨(步氏), 반씨(潘氏) 및 선명태자(宣明太子) 손등 등이 함께 묻혀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손권(孫權,182~252)〉,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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