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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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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김대건(金大建)은 조선 후기 병오박해 당시의 신부로서,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다.

개요

  • 김대건은 본관은 김해(金海). 세례명은 안드레아. 초명은 재복(再福), 보명(譜名)은 지식(芝植). 충청남도 당진 출신. 아버지는 김제준(金濟俊)이다. 증조부 김진후(金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순교하자, 할아버지 김택현(金澤鉉)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신자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1] 김대건은 1846년 선교사의 입국과 선교부와의 연락을 위한 비밀항로 개설을 위해 백령도 부근을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후 여섯 차례에 걸친 혹독한 고문 끝에 국금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임이 밝혀졌다. 이에 정부는 그에게 '염사지죄국지율'을 적용, 군문효수형을 선고하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한국천주교회의 수선탁덕(첫 번째 성직자라는 칭호)이라 불리는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여의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지만 이 기간에 한국인 성직자의 자질과 사목능력을 입증해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투철한 신앙과 신념으로 성직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삼고 있다.
  • 김대건(1821년 8월 21일 ~ 1846년 9월 16일)은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순교자, 여행가로,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 어린 시절 이름은 재복(再福)이고, 족보명은 지식(芝植)이다. 성인으로 시성 되었으며 축일 (기념일)은 7월 5일이다. 그의 세례명 안드레아는 아버지 김제준의 동생이자 순교자인, 김대건의 작은 아버지 김한현의 세례명을 이어받았다. 15살 때인 1836년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4]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상해(上海) 진쟈상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1845년 8월 17일 사제로 서품돼 1845년 10월에 귀국한다. 1845년 조선에 입국한 김대건은 용인 일대에서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외국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힘쓰다 1846년 9월 16일 서울 한강변 새남터에서 국문 효수형을 받고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1857년 교황 비오 9세가 김대건을 가경자로 선포하였으며,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복자로 선포하였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지고 있다.[2]
  • 김대건은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신부)이자 마찬가지로 한국 그리스도교 최초의 성직자로,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성 피에르 모방 신부의 천거로 마카오에서 유학하며 신학을 공부해 사제로 서품되고 귀국하였으나, 단 1년밖에 사목생활을 하지 못하고 붙잡혀 군난을 받고 1846년(헌종 12), 병오박해로 2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약 80년의 세월이 흐른 1925년에 동료 순교자 78명과 함께 시복되었고, 그로부터 다시 59년의 세월이 흐른 1984년, 한국의 동료 순교자 102명과 함께 시성 됐다. 임해군과 광해군 형제의 외조부인 해녕부원군 김희철의 동생 김희현의 9대손이다. 집안 대대로 가톨릭 집안인데 그의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신앙을 이어왔고 증조할아버지(김진후), 큰할아버지(김택현), 아버지(김제준)가 순교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김진후도 마찬가지로 세례명을 받았는데 '비오'. 아버지 김제준은 이냐시오이다. 충청도 솔뫼(지금의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은 순교한 앵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제3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된 페레올 주교와 함께 상하이에서 라파엘 호를 타고 충청남도 강경을 거쳐 입국했으며 입국 후에는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미사와 고해성사 집전 등을 수행하였다. [3]
  • 김대건은 조선 후기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천주교 사제이다. 김대건의 집안은 1784년경 증조할아버지 김진후가 '내포의 사도'라 불리던 이존창(李存昌, 세례명 루도비코)에게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음으로써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1821년 아버지 김제준(세례명 이나시오)과 어머니 우르슬라 사이에서 태어난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되었다.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첫 번째 한국인 천주교 사제가 되었으며, 1846년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김대건은 첫 한국인 사제로서, 동시에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로서 일찍부터 공경을 받았다. 처형 후 한강 새남터에 버려져 있던 김대건의 시신은 조선 신자들에 의해 옮겨져 경기도 안성 미리내에 안장되었다. 이렇게 모셔진 유해는 박해가 끝난 후 김대건이 복자품과 성인품을 받으면서 국내외의 성당과 성지에 모셔져 특별히 공경을 받고 있다. 김대건은 한국인으로서 외국에서 서양의 학문을 체계적으로 배운 첫 인물이다. 김대건이 라틴어, 한문, 한글로 쓴 22통의 편지가 남아 있는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김대건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의 가톨릭 대학교 성신 교정 대성당에 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매년 7월 5일을 김대건 신부의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인 2021년의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4]

김대건의 생애

  • 김대건은 1836년 조선교구 설정 후 신부 모방(Maubant, P.)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 최방제(崔方濟)·최양업(崔良業)과 함께 15세 때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巴里外邦傳敎會東洋經理部)로 가게 되었다. 그 곳 책임자인 신부 리부아(Libois, N.)의 배려로 마카오에서 중등 과정의 교육을 마친 뒤 다시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 뒤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주교 페레올(Ferreol, J. J .J. B.)의 지시로, 동북국경을 통하는 새로운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남만주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땅에 잠입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그동안에도 꾸준히 신학을 공부하고, 1844년에 부제(副祭)가 되었다.
  • 1844년 말에 서북국경선을 돌파하고, 1845년 1월 10년 만에 귀국하였다. 서울에 자리 잡은 뒤 박해의 타격을 받은 천주교회를 재수습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완당신학교(萬堂神學校) 교회에서 주교 페레올의 집전하에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고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1845년 8월에 주교 페레올, 신부 다블뤼(Daveluy, M. N. A.)와 서울에 돌아와서 활발한 전교활동을 폈다. 1846년 5월 서양성직자 잠입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문초를 통하여 국금(國禁)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임이 밝혀졌다. 이에 정부는 그에게 염사지죄반국지율(染邪之罪反國之律)을 적용,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선고하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의 시체는 교인들이 비밀리에 거두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했다.
  • 한국 천주교회의 수선탁덕(首先鐸德: 첫번째의 성직자라는 칭호)이라 불리는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여의 단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한국인 성직자의 자질과 사목능력을 입증하여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투철한 신앙과 신념으로 성직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大主保)로 삼고 있다. 1925년 로마교황 비오11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고,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19년 11월 유네스코는 제40차 총회에서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확정했다. 또한 옥중에서 정부의 요청을 받아 세계지리의 개략을 편술하였고, 영국제의 세계지도를 번역, 색도화(色圖化)해서 정부에 제출하였다.

김대건에 대한 평가

  • 김대건 신부가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됐다. 2019년 11월 14일, 유네스코는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제40차 총회를 열고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확정했다. 2021년은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유네스코는 김대건 신부의 삶과 업적이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부합한다는 점을 들어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 충남 당진시는 2019년 6월에 프랑스, 베트남, 필리핀 등 3개국으로부터 지지 선언을 확보한 뒤 유네스코에 세계기념인물 지정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에 따라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2019년 10월 17일 제207차 회의에서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김대건 신부를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할 것을 권고했다. 유네스코는 2004년부터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가 일치하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 명사의 기념일을 유네스코 연관 기념행사로 선정해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2년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과 2013년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이 유네스코 기념의 해로 선정된 바 있다.

김대건 신부 성상

  • 김대건 신부 성상은 바티칸 산피에트로 대성당(San Pietro Basilica)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의 조각상이다. 2023년 9월 16일, 전 세계 로마 가톨릭교회의 총본산인 바티칸시국(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의 산피에트로대성당(San Pietro Basilica, 성 베드로 대성당) 외벽에 설치되었다. 김대건 신부 성상은 유럽 수도회 설립자들의 성상 옆자리에 세워졌는데, 이곳 외벽에 수도회 창설자가 아닌 성인의 성상이 설치된 것은 바티칸 교회 역사상 처음이며, 동양인 성인의 성상이 세워진 것 역시 처음 있는 일이다.
  • 대리석을 재료로 한 높이 3.70m, 가로 1.83m의 전신상으로, 한진섭 조각가가 2년에 걸쳐 제작하였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 등 한국의 전통의상을 입고 두 팔을 벌려 모든 것을 포용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김대건 신부 성상의 설치는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인 유흥식 추기경이 2021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성상 봉헌 의사를 전달하면서 결정되었다. 이후 김대건 신부 성상이 공개된 날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지 177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시성 되었다.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신부 유적

  •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신부 유적(唐津 솔뫼마을 金大建神父 遺蹟)은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 있는 신부 김대건의 생가지이다. 우강면 송산리에 위치한 2,000㎡가량의 이 터는 한국 최초의 신부인 안드레아 김대건이 출생한 곳이다. 국내 제1의 가톨릭 성지로서 가장 명성 높은 이곳은 솔뫼성지라 불리며, 김대건의 순교정신을 추모하고 가톨릭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가톨릭 신자는 물론 전국에서 찾아온 순례객이 기도하는 곳이기도 하다. 생가지에는 김대건의 추모탑과 동상·추모비 등이 있다.
  • 1925년에는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김대건이 복자(福者)로 선포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 후 이곳은 역사적·종교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유적이 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기념비는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망성면(望城面)에 있고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陽城面) 미산리(美山里)에 있다. 묘소가 있는 미산리 일대는 미리내성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98년 7월 28일 충청남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9월 26일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동영상

각주

  1. 김대건 (金大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김대건〉, 《위키백과》
  3. 김대건 안드레아〉, 《나무위키》
  4. 김대건〉,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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