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여운형(呂運亨)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정치가이다.
개요
- 여운형은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양서면(楊西面) 신원리(新院里) 묘곡(妙谷)이라는 곳에서 출생하였다. 초당의숙(草堂義塾)을 세우고,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발기하였다.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하여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이어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몽양(夢陽)이다. 그의 조부 여규신(呂圭信)과 종조부 여규덕(呂圭德)은 동학에 가담하였는데 몽양에게 끼친 영향이 컸다. 하지만 부친 여정현(呂鼎鉉)은 조부와 달리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계급주의를 신봉했으며 몽양은 이러한 부친을 자신의 성장기에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회고하였다. 몽양은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촌 관계였던 족숙(族叔) 여병현(呂炳鉉)의 도움으로 서울로 갔으며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기독교를 접했고, 흥화학교(興化學校)를 거쳐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전신(電信)기술을 공부하여 통신원 기술자가 되고자 하였다. 하지만 통신원이 일본 소유로 넘어가자 취업을 거부하였다. 1906년 부친이 사망하자 집안의 노비를 모두 불러모아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워 그들을 해방시켰다. 덴마크체조를 국내에 보급한 체육인이기도 하였으며, 광복 후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 제11대(1946∼1947) 회장을 지냈다.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된 데 이어 2008년 2월 2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되었다.[1]
-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겸 저술가였다.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45년 8월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냈다. 구한 말 평등 사상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교육·계몽 활동을 하다가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사후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 2008년 다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여운홍의 친형이고, 철학자 박찬기의 외삼촌이다. 경기도 양근군(현재의 양평군) 출신이며, 호는 몽양(夢陽)이다.[2]
- 여운형은 한반도의 독립유공자, 통일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체육인이다. 몽양(夢陽)이라는 아호와 '3.1 운동의 기획자'로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최순위권에 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 정치적 입지를 가진 혁명가이자 정치인이었다. 독립운동에 있어서는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 참여했고 언론 활동, 민족 문화 사업, 체육 활동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이 가까워지던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구성하여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계를 시도하였으며 8.15 광복 직후 조선건국동맹의 조직을 확대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혼란 정국을 예방하였으나 미군정이 건준을 인정하지 않자 여운형은 미군정기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에 미군정의 한반도 문제 개입을 반대하고 조선민족이 자력으로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친일파를 제외한 좌우 세력 모두가 공평하게 참여한 연대를 통해 통일 국가를 이룩하자고 주장하였다. 정치 성향은 중도좌파로 김규식, 안재홍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주장한 김구나 중도 세력에 비우호적이었던 박헌영, 이승만, 한국민주당 등의 세력과는 거리를 두었다. 연합군정기의 주요 정치인들 중에서는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서 가장 포용적인 입장이었던 동시에 일반 대중과 국론 통합을 우선시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오래전부터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한 지식인이었기에 민중 사이에서 인기는 높았으나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에는 좌우 대립이 격해지면서 중도 세력의 입지는 좁아져 갔다. 1947년 7월 19일 극우파로 추정되는 한지근(본명 이필형)에게 암살당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하게 된다.[3]
- 여운형은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절 신학문을 공부하고 계몽운동에 나섰으며, 1910년 국권 상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192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된 후 언론과 체육계에서 활동하면서 식민지 말에는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만들어 독립을 준비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중도적 좌파의 입장에서 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한 좌우합작운동에 나섰다. 1947년에 들어와 그동안 중단되었던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릴 가능성이 커지자 여운형은 1947년 1월 말 공식적으로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1947년 5월부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여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던 여운형은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위하여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이라는 정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이후 미국은 소련과의 대화를 포기하고 한국 문제를 유엔에 넘겼다. 그리고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던 1947년 7월 19일, 좌우합작과 미소공위 성공에 온 힘을 기울였던 여운형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청년들에 의해 해방 이후 12번째 테러를 당하고 파란만장했던 62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이후 여운형은 오랫동안 대한민국 사회에서 좌파 정치인으로 규정되어 잊힌 정치인이 되었으나,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여운형의 생애
- 여운형은 1907년부터 서울 종로에 있었던 승동교회(勝洞敎會)에서 선교사 보조원 생활을 했었고 같은 해 양평 고향집에 기독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향리의 청년들을 계몽하는데 앞장섰다. 1910년 선교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강릉에 초당의숙(草堂義塾)을 세워 평등사상과 신학문을 가르치는데 전념하였다. 하지만 총독부에 의해 학교는 1년만에 폐쇄되고 말았다. 국권이 피탈되고 학교가 폐쇄되자 승동교회로 돌아와 평양신학교를 다녔다. 또한 그는 스포츠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팀인 YMCA 야구부(황성기독교청년회 베이스 볼 팀)의 주장으로 활약한 것으로 추측되며 1912년 11월 2일 와세다대학의 초청을 받아 일본까지 원정경기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직접 목격한 신문물과 조선유학생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깨우치고 선교사 클라크를 따라 서간도(西間島: 퉁화)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견학하였고 이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1914년 겨울 중국으로 건너갔다.
- 여운형은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추천장을 받아 장로교 선교회가 운영하는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몽양의 중국 유학은 그의 가치관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1916년 상하이(上海)로 가 협화서국 서점(Shanghai Mission Bookstore)에 취업하였으며 선교사, 인성학교 교사, 여행대행업 등을 했다. 1918년 상하이에서 장덕수(張德秀)를 만나면서 여운형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몽양은 정치와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김규식(金奎植)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고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발기하였다. 이 일은 국내 독립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이 되었는데, 일본정부는 이를 자치운동(自治運動)으로 회유하고자 1919년 11월 그를 도쿄(東京)로 초청하였으나 오히려 장덕수(張德秀)를 통역관으로 삼아 일본의 조야(朝野) 인사들에게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 여운형은 1920년 5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하였는데, 국제공산당 위원인 보이틴스키(Grigorii Voitinsky)가 조선의 독립을 지원할 수 있다는 제안에 공산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볼셰비키정부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제공한 자금을 이동휘, 김립이 가로채 독단적인 처리하자 고려공산당은 분파되어 와해되고 말았다. 1921년 이르쿠츠크(Irkutsk)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원동(遠東)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고비사막을 횡단하고, 바이칼호수를 건너는 고난한 여행으로 도착하였으나 대회 장소는 모스크바로 변경되었다. 1922년 1월 7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으며 조선의 사정을 논의하였다. 중국 상하이로 돌아와 쑨원과 중국공산당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1925년부터는 중국혁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1927년 장개석(蔣介石)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 축출로 몽양이 믿었던 소련의 지원과 국공합작체계의 정치적 모델이 무너지고 말았다. 낙담한 그는 체육부 코치로 생활하면서 싱가포르에서 인삼사업을 모색하다 1929년 7월 10일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는 혐의로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 여운형은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국내로 압송되었는데 국내 언론에서는 그의 압송이 대서특필되었으며 중국에서 실패한 공산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허망한 날을 보냈으나 국내에서는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재판 결과 독립운동을 전개한 죄목으로 4년간 복역하였다. 1933년 출옥하자 그는 민족의 영웅으로 추대되었고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경영난으로 어려웠던 신문사는 그의 명성에 힘입어 번창하였다. 하지만 베를린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1936년 신문이 일제에 의하여 폐간되자 사임한 후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8·15광복을 맞아 안재홍(安在鴻), 정백(鄭栢) 등과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지사들과 대립되었고 건준위 조직 내부 박헌영이 주도하는 극좌익세력과 정치투쟁 내분에 휩싸였다. 1944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하였다. 1946년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을 결성하였으나 정책 노선이 명확하지 못해 조직을 장악하지 못했고 반대파 좌익세력에게 밀려 탈퇴하였다. 또,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 한지근(韓智根)에 의하여 1947년 암살되었다.
건국동맹
- 건국동맹(建國同盟)은 1944년 8월 10일 일본의 패망과 조국 광복에 대비하기 위해 국내의 사회주의자 일파들이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하여 국내에서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불문(不文)·불언(不言)·불명(不名)의 3대 원칙과, ① 각인·각파는 대동단결하여 건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의 모든 세력을 구축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② 반추축제국(反樞軸諸國)과 협력하여 대일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것, ③ 건설부면에 있어서 일체 시정을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동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등의 강령을 내세웠다.
- 건국동맹은 조동호(趙東祜)·현우현(玄又玄)·황운(黃雲)·이석구(李錫玖)·김진우(金振宇) 등이 참가하였으며, 이들은 전국적으로 조직을 넓혀, 농민동맹, 부인동맹 등을 조직하고 일본군 후방을 교란하고 군대를 건립할 목적으로 군사위원회를 준비하기도 했다. 옌안(延安)의 독립동맹(獨立同盟)과도 연계하여 조선의용군과의 협동작전을 모색했다. 1945년 8월 초 여운형 등 몇몇 간부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나 곧 광복을 맞아 출옥, 조선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에 편입되었고, 뒤에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의 주체가 되었다.
몽양 여운형 생가기념관
- 몽양 여운형 생가기념관(夢陽呂運亨生家紀念館)은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을 기리는 공립 기념관으로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1886~1947)의 삶과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2011년 생가를 복원, 전시관과 함께 11월 27일 개관했다. 지하 1층, 지상 1층 건물로, 건물 총면적 1,055㎡, 부지면적 2,579㎡의 규모이다. 2012년 국가보훈처에 의해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 몽양 여운형 생가기념관 지상 1층은 복원된 여운형의 생가이며, 지하 1층은 기념관으로 이용된다. 함양 여씨가 양평에 입향한 1715년(숙종 41년) 지어진 생가는 여운형이 출생한 곳으로, 부친 탈상 후 서울로 이사한 1908년까지 살았으며, 해방 전후에도 종종 내려와 지낸 장소이다. 6·25 전쟁 중 소실되었다가 2001년 생가터가 정비되고 2002년 기념비가 건립되었으며, 2008년 여운형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것을 계기로 2011년 복원되었다. 1930년대 이후 여운형이 살았던 서울 계동 집에 있던 가구들을 후손이 기증하여 복원된 생가에 전시되어 있다.
서울 여운형 묘소
- 서울 여운형 묘소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소재한 여운형의 묘소이다. 2013년 2월 21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다. 1920년대부터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 및 외무부 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5년 8월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같은 해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하여 좌·우익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를 반대하는 좌·우익 양측으로부터 십여 차례 테러를 당하였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저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여운형의 묘소는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에 안치되었는데 위치는 강북구 수유동에서 멀지 않은 솔밭공원 근처이다. 여운형은 항일독립운동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본 묘소는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릴 수 있는 상징적 장소로서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높다. 2013년 2월 21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인민당
-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은 8·15광복 직후 여운형(呂運亨)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중도좌파 정당. 1945년 11월 12일 여운형이 고려국민동맹·인민동지회·일오회(一五會) 등 군소정파들을 흡수하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직을 모체로 하여 창당하였다. 위원장은 여운형이 맡고, 부위원장에는 장건상(張建相)이 선임되었다. 창당선언에서 "조선의 현실적 과제인 완전독립과 민주주의국가의 급속한 실현을 그 당면임무로 하면서 기본이념인 전(全)근로대중의 완전한 해방까지 혁명적으로 추진할 것을 결의한다"라고 천명하고, 강령(綱領)으로서 "계획경제제도를 확립하여 전민족의 완전해방을 기한다"라고 밝혔다. 이것은 바로 대중정당이 아니라 계급정당의 성격을 띠는 중도좌파의 정치노선을 지향함을 밝힌 것이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는 1945년 8·15광복 후 여운형(呂運亨)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이다. 약칭하여 건준(建準)이라고도 한다. 1945년 8월 초 일본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협상 대상자로 한국의 민족지도자를 찾았다. 이때 건국준비를 위한 민족의 대표기관과 정치세력 형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여운형이 그에 동조함으로써 협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44년 8월 10일 비밀리에 '건국동맹'이 조직되었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절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그 후 해외 독립운동지도자들이 귀국하고 이승만이 주석 취임을 거절하는 한편 미군정청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의 승인을 거절하는 포고를 발표하자 조선인민공화국은 자연 해체되었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여운형〉, 《위키백과》
- 〈여운형〉, 《나무위키》
- 〈여운형/일생〉, 《나무위키》
- 〈여운형(呂運亨,1886.5.25.~1947.7.19)〉, 《두산백과》
- 신복룡 기자, 〈"여운형 죽이자" 임정 발칵…김구 측근은 권총 빼들었다〉, 《중앙일보》, 2024-08-15
- 현동민 기자, 〈(오늘의 역사) 몽양 여운형 타계 77주기 암살 배후와 진상 여전히 의문〉, 《인천투데이》, 2024-07-19
- 국가보훈부, 〈서울에서 여운형 선생의 흔적을 따라 걷다〉, 《네이버블로그》, 2021-08-18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