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각
누각(樓閣, many storied building)은 조망을 위하여 여러 층으로 짓는 동아시아 전통의 건축물이다. 정자보다는 크다. 누각은 궁궐ㆍ관아ㆍ성곽ㆍ사찰ㆍ서원 등에 행사나 놀이를 위해 사방이 탁 트인 상태로 높다랗게 지은 집이다.
개요[편집]
누각은 누와 각을 일컫는 말로서 층고가 높은 건물 또는 중층의 건물을 말한다.
- 누(樓) : 문과 벽이 없이 경치를 볼 수 있도록 높게 지은 다락 건물. 대표적으로 조선시대 경복궁 경회루(慶會樓) 등이 있다.
- 각(閣) : 석축이나 단상 위에 지어진 양식을 말한다. 정자(亭子)와 비슷하지만 형태, 마루 높이, 단청 유무에서 다르다. 조선 시대에는 궁궐과 관청 건물에만 단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관청 누각에는 단청이 되어 있지만 민가 누각에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다.
누각은 연회나 유흥을 즐기는 데에 쓰이는 건물이기 때문에 휴식을 용도로 하는 정자보다는 규모가 넓다.
사찰의 주불전과 마주하는 곳에는 보통 누각이 세워져 있다. 누각의 좌우에는 마당을 둘러싸고 요사채가 배치되어 있다. 즉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사찰의 배치는 원래부터 이러한 형식이 아니었다. 고대의 절터를 발굴하여 보면 금당이 사찰의 중심에 자리잡고 뒤로는 강당이 앞에는 출입문인 중문(中門)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건물은 회랑으로 빙 둘러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의 가람배치와는 달리 주불전인 금당을 중심으로 회랑에 의해 폐쇄되어 있다. 고대 절터는 주로 평지에 위치해서 회랑으로 구획된 경역을 이루었다. 고대 절터에서의 중문은 구산선문(九山禪門) 등의 개창을 시발로 절이 산속에 입지하면서 누각의 형태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누각은 글자 그대로 이층의 다락집 형태이다. 누각의 기능은 출입 통로로서의 역할, 불전사물의 봉안 장소, 수장고 및 대법회가 있을 경우 불전에서 행할 행사를 준비하게 된다. 부석사(浮石寺)의 안양루(安養樓)는 누각의 전형적인 예이다. 안양루는 높이 차이가 나는 지형에 걸쳐 있기 때문에 누하부로 출입을 하고 있다. 누상에는 마루를 깔고 주위에는 난간을 둘러 여타 세간의 정자와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좋은 전망을 확보하고 있다. 비슷한 예로 안동 봉정사(鳳停寺)의 덕휘루(德輝樓)를 들 수 있다. 덕휘루도 경사진 지형의 석축에 걸쳐 있으며 누하부의 기둥 사이를 출입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누하부 출입은 경사진 지형을 처리하는 방법인 동시에 구도자가 누하부의 계단을 통해 중정에 올라서면서 극적으로 전개되는 공간의 효과적 연출기법이기도 한다. 이런 공간을 통과한 구도자는 더욱 종교적 경외심을 갖게 된다. 완주군 화암사(花巖寺)의 누각인 우화루(雨花樓)는 경사진 대지에 걸쳐 세운 중층의 누각이기는 하나 누하부를 출입 통로로 사용하지 않고 누각의 옆에 따로이 출입문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우화루가 부석사의 안양루와 다른 점은 누상에 난간을 돌리고 사방에 판문을 달아 폐쇄한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편집]
최초의 누각으로 짐작되는 것은 상나라의 중옥(重屋)으로, 중옥은 하늘과 통하는 곳이라고 믿어졌다. 춘추 전국 시대에는 바깥은 나무로 짓고 안쪽은 흙으로 짓는 고대광실(高臺廣室)이 있었는데 이는 초기 형태의 누각이다. 전한 시대까지 제후들은 누대(樓臺, 대사, 臺榭)를 앞다투어 높게 지어 세력을 과시하였다. 하나라 걸왕은 요대(瑤臺)를, 상나라 주왕은 녹대(鹿臺)를, 주나라 문왕은 영대(靈臺)를 세웠다. 또 문왕은 몇 층으로 쌓아 올린 중루(重樓)에서 자신이 치세하는 국토와 적국을 바라보았다. 초나라의 장화대(章華臺)는 흙으로 다진 대 위에 목조 대와 이층짜리 목조 누각을 올린 건축물이었다. 누대는 주변을 조망할 수 있으면서, 연회를 벌이고, 활쏘기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바람이 잘 통하고 홍수에도 떠내려가지 않아 견고하였다.
지금처럼 높게 짓는 누각은 한나라 때 도가가 발달하면서부터 등장하였다. 《사기》에 의하면 당시에는 신선들이 누각을 좋아한다고 믿었으며, 연나라와 제나라에도 사람이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올라 구름 위로 솟은 누각에서 영생할 수 있다는 믿음인 육체불사론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전한 무제는 신선이 누각에 산다고 한 공손경의 말을 믿고 통천대(通天臺), 신명대(神明臺), 정간루(井幹樓) 등 대와 누각을 짓게 하였다. 신선을 불러와 신선과 만나고, 무제가 영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누각의 높이는 하늘에 닿을 수 있음을 상징하였다. 한나라 시대 고분에서 누각 모양의 부장품인 도루(陶樓)가 종종 발견된다. 도루는 2~3층에서 7층 정도로 만들어졌다. 도루가 망루, 창루, 희루, 수사 등 다양한 종류로 만들어졌음을 고려하면 누각은 당대에 익숙한 건축양식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중국 북방에서는 흙벽과 함께 나무를 가로질러 층층이 쌓아 지었고, 남방에서는 건물 전체를 나무로 하여 지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경쟁적으로 누대를 짓는 풍조가 사라지고, 대신 실용적인 단층 건물을 지었다. 남조에서는 누각을 사찰에 딸린 정원에서나 많이 지었다. 당나라에 와서 누대를 군사적 목적과 풍경을 조망하기 위한 목적으로 짓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는 누각으로 야요이 시대부터 굴립주건물(掘立柱建物) 형태의 망루가 존재하였던 것이 확인된다. 이것은 제전(祭殿)으로도 쓰였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이후 일본의 누각은 덴슈라는 독특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입지[편집]
누각은 자연이 아름다운 곳에, 또는 풍류를 즐기기 위해 세웠다. 궁궐에서 누각은 단독으로 배치되는 건물이나 궁성의 문루로 지어졌다. 중국 정원(원림), 별서 등 정원에서 누각은 잔치를 베풀고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었다. 이때 비록 누각은 인공으로 만든 정원에 두었지만, 정원은 그곳이 자연인지 인공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자연에 동화되도록 만드는 공간이었기에 누각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자연 그 자체와 같았다.] 정원의 연못가에는 누각을 정자와 함께 여러 채 짓기도 하였다.
사찰에서는 누각을 문루이자 불교 행사의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간혹 신분 높은 사람들이 풍경을 바라보는 데에도 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특별히 산사에서는 안마당에 불전, 승방, 강당, 누각 등 네 동의 건물만 두는 배치를 한 경우가 많았다. 누각은 안마당과 같은 높이, 또는 조금 높은 높이로 지어 올렸고, 양 옆으로 다른 행각을 지어 연결시켰으나 17세기부터는 누각만 단독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산사의 안마당에 누각을 갖춘 결과, 산사로 올라올 때 높은 누각과 마주침으로써 얻는 공간감이 생겨났다.
한국의 3대 누각[편집]
한국 전통 건축의 백미(白眉)가 누(樓)와 정(亭)과 대(臺)다. 누정(樓亭)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툭 트인 건물을 말하는데 층수에 따라 구분된다. 정은 1층이며 누는 2층이다. 누를 누각(樓閣)이라고 하는 것은 1층의 각이 2층의 누를 지탱하기 때문이다. 누정과 비슷한데 다른 게 대(臺)다.
대는 건물을 이르기 이전에 높은 지대의 평평한 땅을 말한다. 강릉 경포대나 남한산성의 수어장대를 보면 그 말뜻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땅에 남아 있는 누 가운데 구분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한국의 3대 누각'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남쪽의 경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평양의 부벽루다.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 제일의 명승(名勝)이다. 전쟁 때에는 장졸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평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다. 고려 고종28년(1241년) 창건된 이래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10년(1618년)에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중건했다. 1948년 국보로 지정된 바 있으나 1950년 6·25 동란으로 다시 불탔으며,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 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중건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의 누대이다. 촉석루란 이름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아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며 남장대 또는 장원루라 부르기도 했다. 촉석루가 유명해진 것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 절대 열세인 병력을 이끌고 거둔 진주성 대첩과, 의기(義妓) 논개가 적장(敵將)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린 일 때문이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진주성 건너편에 서면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 속 촉석루가 그림같이 빛을 밝힌다.
밀양 영남루는 신라 경덕왕 때 '영남사'라는 절이 폐사되자 고려 공민왕 때 당시 밀양군수 김주가 신축한 뒤 영남루라 불렀다. 조선 세조 5년(1459년) 밀양부사 강숙경이 규모를 늘렸으나 임진왜란 때 불탔다. 인조 때 중건했고 순조 때 다시 불탔으나 현종 10년(1844년) 개창한 것이 지금 남아 있다.
전국에는 3대 누각에 버금갈 만한 누들이 많이 남아 있다. 전북 남원의 광한루는 인조 16년(1638년) 재건한 조선을 대표하는 누각이다. 원래 조선 초에 지어진 이 건물은 1419년 남원으로 유배 온 명재상 황희가 세워 광통루라 불리던 것을 1434년 정인지가 중건하며 광한루라 이름을 바꿨다. 정인지는 광한루를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했는데, 광한청허부는 달나라의 옥황상제가 사는 궁전을 뜻한다.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누각으로 칭하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만듦새가 빼어나다. 이 밖에도 전국의 서원·사찰에 유명한 누각들이 많다.[1]
평양 부벽루는 북한 국보유적 제17호이다. 부벽루에 올라서면 청류벽 아래 유유히 흐르는 맑은 대동강물과 강 건너로 펼쳐진 들판, 멀리 크고 작은 산들이 보이는 전경이 매우 아름답다. 외부에서 본 부벽루는 비단 자락을 펼쳐 놓은 듯한 맑고 푸른 물과 푸르른 녹음,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조화를 이루어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이러한 풍광을 보고 고려시대의 유명한 시인 김황원(金黃元)은 시심(詩心)을 일으켜, "장성일면용용수 대야동두점점산(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긴 성벽기슭으로는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넓은 벌 동쪽에는 점점 산이 있네)"이라는 시를 지었지만 이 글귀 뒤로 더 이상의 시구가 떠오르지 않자 통곡하며 붓대를 꺾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부벽루는 낮 경치도 좋지만 밝은 달이 뜬 밤 경치도 아름다워 "부벽완월(浮壁玩月: 부벽루의 달구경)"은 일찍부터 ‘평양8경’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3대 누각[편집]
황학루[편집]
황학루는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시(武汉市, 무한시) 창강(长江) 가의 서산(蛇山, 사산, 일명 黃鶴山)에 있는 누각이다. 우한시의 황학루는 후난성 웨양시(岳阳市, 악양시)의 악양루(岳阳楼), 장시성 난창시(南昌市, 남창시)의 등왕각(滕王阁)과 함께 강남 3대 명루의 하나이다. 원화군현도지(元和郡县图志)에는 삼국시대 오(吴) 황무(黄武) 2년(223) 손권(孙权)이 군사적 목적으로 성을 쌓고 황학루(黄鹤楼)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황학루(黄鹤楼)와 관련해서 많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그 중 극사록(极恩录)의 기재 내용에 따르면 신씨(辛氏)가 개설한 주점(酒店)에 선인(仙人)이 지나가다가 벽에 한 마리 학(鹤)을 그렸는데, 그 모양이 춤을 추듯 아름답다고 알려지면서 이곳의 장사도 날로 번창하였으며 10년 후 선인이 다시 와 학을 타고 구름위로 날라 가자 신씨가 그걸 보고 황학(黄鹤)과 도사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누각을 짓고 이름을 황학루(黄鹤楼)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제해지(齐谐志)에는 선인 왕자안(王子安)이 황학(黄鹤)을 타고 이곳을 지나 근처의 산으로 올라가 산 이름이 황학(黄鹤)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후대에 사람들이 산정에 누각을 만들어 황학루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당 영태(永泰) 원년인 765년에 황학루(黄鹤楼)는 이미 그 규모를 구비하고 있었으나 전쟁과 화재가 빈번하여 수차에 걸쳐 파괴되었으며 명청 양 대에만 7차에 걸친 훼손과 10여 차례에 걸친 중건과 수리가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동치(同治) 7년(1868) 재건되었다가 광서 10년(1884) 다시 훼손되어 청대의 건축물 중 동주루(铜铸楼)만 남아 있다가 1981년 우한시(武汉市) 정부가 중건을 결정하고 1985.6 낙성(落成)하기에 이르렀다.
황학루(黄鹤楼)는 북송 시대부터 20 세기 50년대에 이르기까지 도교의 명산성지로 이용되었으며 또한 역대의 저명한 시인 최호(崔颢, 704~754),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772~846), 가도(贾岛, 779~843), 육유(陆游, 1125~1210), 양신(杨慎, 1488~1559), 장거정(张居正) 등의 작품으로 인해 천하절경으로 평가되어왔다.
이 중 당대 최호(崔颢)의 작품인 황학루(黄鹤楼)로 인해 더욱 더 알려지게 되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천보(天宝) 3년에 이백이 황학루(黄鹤楼)에 올라 즐기고 있다가 최호(崔颢)의 시를 발견하고 찬탄을 금하지 못하였으며, 창강(长江, 장강)의 그림 같은 풍경을 시로 쓰고자 하였으나 최호(崔颢)의 경지를 뛰어넘지 못함을 탄식하며 붓을 씻어 버리고 배를 타고 강남으로 떠났다고 전한다. 1927년 마오쩌둥이 우창(武昌, 무창) 방문 시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2007.5 국가 66개 5A급 여유경구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등왕각[편집]
등왕각(滕王阁, téngwánggé)은 중국 장시성(江西) 난창(南昌)시를 대표하는 누각으로 난창을 동쪽과 서쪽으로 구분하는 장시성의 젖줄, '감강(赣江)'의 동쪽 강가에 위치하고 있다.
당의 고조(高祖) 이연(李渊)의 아들인 등왕 이원영(李元嬰)이 영휘(永徽) 4년인 653년에 처음 건립하였으며 장시성(江西省) 난창시(南昌市, 남창시) 서남쪽, 장강의 지류인 간강(赣江, 감강) 동안, 둥후구(东湖区, 동호구)에 위치하고 있다.
최초 건립 후 20여 년 후 후임 홍주도독(洪州都督)이 이를 재건하고 문인들로 하여금 시문을 짓게 하였는데 그중 왕발(王勃)이 지은 등왕각서(滕王閣序, Preface to the Pavilion of Prince Téng)가 유명하다. 이후 송(宋), 원(元), 명(明), 청(清)에 걸쳐 수십 차례의 중건 및 복구를 거쳤으며 이에 따라 건물의 형태가 변화되었다. 현재의 등왕각(縢王閣)은 높이 57.5m의 9층, 내부면적 13,000㎡의 위용으로 1989.10월 복원되어 난창시(南昌市, 남창시)의 상징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다.
악양루[편집]
악양루(岳阳楼)는 중국 후난성(湖南省) 웨양시(岳阳市, 악양시)의 웨양고성(岳阳古城, 악양고성) 서문(西门) 위에 있는 누각이다. '동정천하수(洞庭天下水), 웨양천하루(岳阳天下楼)'라는 영예를 지니고 있다.
악양루의 전신은 삼국 시기 동오(东吴)의 명장 노숙(鲁肃)이 건립한 군루(军楼)로 동한(东汉) 건안(建安) 20년(215) 손권(孙权)과 유비(刘备)가 형주(荆州)를 놓고 다툴 때 노숙(鲁肃)이 전략적 요충지인 파구(巴丘)에 주둔하면서 둥팅호(洞庭湖, 동정호)에서 군사를 훈련시키며 둥팅호(洞庭湖) 인근에 파구성(巴丘城)을 건립하고 수군(水军)의 검열을 위한 열군루(阅军楼)로 건설한 것이 현재 악양루(岳阳楼)의 전신이다. 양진(两晋)과 남북조(南北朝) 시기에 이 열군루(阅军楼)는 파릉성루(巴陵城楼)라고 개명되었으며 군사적 중요성으로 장대한 모습으로 중건되었고 시인들이 시를 짓기 시작하였다.
당대에 파릉성루(巴陵城楼)는 악양루(岳阳楼)라고 칭해지기 시작하였으며 당 개원(开元) 4년(716) 중서령(中书令) 장설(张说)이 악주(岳州)로 부임하여 문인들을 이곳에 오르게 하고 시를 짓게 하였다. 뒤를 이어 장구령(张九龄), 맹호연(孟浩然), 가지(贾至), 이백(李白), 두보(杜甫), 한유(韩愈), 유우석(刘禹锡), 백거이(白居易, Bái Jūyì : 772~846), 이상은(李商隐) 등이 무수한 시와 글을 남겼으며 두보(杜甫)의 등악양루(登岳阳楼)는 이 중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악양루의 명성이 세상에 크게 알려진 것은 북송 때 등자경(滕子京)이 중수하고 범중엄(范仲淹)을 초빙하여 악양루기(岳阳楼记)를 쓴 이후부터이다.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악양루는 청 광서 6년(1880) 중수된 누각을 1983년 후난성(湖南省) 인민정부가 대규모의 보수를 실시하여 3층 구조의 높이 20.35m, 점유 면적 251㎡로 되어있으며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고 악양루-둥팅호 풍경명승구(岳阳楼-洞庭湖风景名胜区)에 속해 있다.
각주[편집]
-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KOREA WATCH 한국의 누각(樓閣)〉, 《월간조선》, 2017-06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누각〉, 《나무위키》
- 〈누각〉, 《위키백과》
- 〈누각〉, 《문화원형 용어사전》
- 〈누각〉, 《대한건축학회 건축용어사전》
- 〈부벽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황학루〉, 《중국 국가급풍경명승구총람》
- 〈악양루〉, 《중국 국가급풍경명승구총람》
- 〈등왕각〉, 《중국 국가급풍경명승구총람》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