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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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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대교(漢江大橋, Hangang Bridge) 야경
한강의 다리

한강대교(漢江大橋, Hangang Bridge)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에 있는 용산구 한강로3가동작구 본동 사이를 잇는 총연장 1,005m의 길이의 교량(다리)이다. 한강에 놓인 최초의 도로 교량으로, 제1한강교라고 불렸다. 1917년 개통된 뒤 몇 차례의 수난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다리 아래로는 노들섬이 있다. 과거에는 국도 제1호선이 이 다리를 통하여 서울로 연결되었었다.

21번 서울특별시도로 지정되어 있으며, 1917년에 준공된 구교(노량진 방면)는 2020년 9월 19일, 서울특별시 시도등록문화재 1호로 지정되었다.

상세[편집]

한강대교는 서울 도심에서 인천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다. 한강 최초의 인도교이니만큼 도심에서 노량진-영등포를 거쳐 인천으로 향하는 핵심 간선로 역할을 해 왔으며, 지금도 직진만 하면 용산-서울역-시청-광화문까지 바로 이어진다. 하지만 도심권에서 영등포-인천을 잇는 길은 마포대교서강대교를 이용하는 것이 최단거리가 되면서 기존의 역할은 많이 줄어든 반면, 동작구와 관악구를 도심과 최단거리로 이어주는 역할이 강화되었다. 상도터널-양녕로 또는 상도터널-상도로를 통해서 상도동, 봉천동, 서울대입구를 잇는 입구이기 때문에 다리 남단으로 상습정체가 발생한다. 현재는 21번 서울특별시도로 지정되어 있으나, 과거에는 1번 국도와 47번 국도 구간의 일부이기도 했다.

한강대교 남단에는 서울 지하철 9호선 노들역이 위치하고 있으며, 노량진로와 상도터널이 있는 양녕로와 연결된다. (흑석동 방향은 하단에 기술함.) 북측에는 서울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과 수도권 전철 1호선과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이 있는 용산역이 있으며 이 근처에 '용던'이라고 불리는 용산 전자상가가 있다. 남단측에서 강을 따라 상류로 가는 흑석동 방면 차도 진입은 상도터널 위쪽 어깨길로 우회하거나 노량진로를 통하여 P턴하듯 노들고가를 타야 한다. 또한 남단측에서는 노들길 김포공항방향(하류쪽)으로 바로 합류가 가능하나 상류측 합류는 불가능하며, 88올림픽강변대로로는 합류하는 길이 없으므로 노들길 혹은 흑석로를 경유하여 진입해야한다. 북단측에는 강변북로 진입로도 이어져 있으며 동향(상류쪽) 서향(하류 인천쪽) 모두 쉽게 합류가 가능하다.

정식 명칭이 과거 제1한강교, 현재는 한강대교임에도 '한강 인도교'라는 명칭이 많이 익숙한데, 이는 한강홍수통제소의 수위 관측지점 명칭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여름철 홍수 때마다 잠수교와 함께 뉴스에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명칭이 한강대교로 변경되었다.

겨울이면 한강이 얼어붙었다는 판정을 내리는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한강 결빙 관측지점은 노량진 방향 2번째와 4번째 교각 사이다. 상류 쪽으로 100m 부근의 남북 간 띠 모양 지점이 얼었는지에 따라 결빙 여부를 판정한다. 이 기준은 한강 결빙 여부를 처음으로 판정하던 1906년 당시 한강대교 부근 노량진이 한강의 주요 나루 가운데 하나이고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에 결빙 관측 기준점으로 지정한 데서 유래했다. 통상적으로 1년 중 가장 추운 1월 중순 쯤에 한강 결빙 소식이 전해진다.[3]

양 옆으로는 자전거도로가 놓여있는데다 올림픽대로 및 강변북로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없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 다만, 고속터미널 및 서래마을 등 신반포로 일대에서 용산, 서울역 방면으로 이동하기 위해 억지로 한강대교로 갈 생각은 하지 말 것. 한강대교 타기 위해 이수교차로에서 현충로 방향으로 우회전하는 순간 도로구조상 이유로 바로 자라니가 되는데, 현충원 방향 차로가 최상위 차로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이 경우 자전거는 동작대교를 경유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정 한강대교를 타고 싶으면 처음부터 사평대교 ~ 이수고가차도를 경유한 뒤 1개 차로만 횡단하면 자전거로 안전하게 한강대교로 진입할 수 있다. 이수교차로에서 한강대교 쪽으로 자전거로 가는 길이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신반포로에서 출발한다면 동작대교로 우회하라고 설명하기 위해 여기에도 기술하였다.

과거에는 북측에도 남측에도 모두 고가차도와 크로스 되었었기에 다리에 진입하는 지역 근처의 조망이 좋지 않았으나, 2010년 전후로 모두 철거하여 현재 시야가 좋아진 상태. 남측의 경우 노량진역과 연결되는 고가는 정화사업으로 철거되었고, 노량진북고가차도는 2020년 철거 예정이나 일부 구간을 존치하여 보행 육교로 활용할 예정이다. 2021년 완공을 목표로 한강대교 위에 보행교를 놓게 된다. 보행교는 노량진 방향으로는 2020년에 철거될 노량진북고가차도의 존치 구간, 노들섬 쪽으로는 보행육교와 연결된다. 남단의 아치 구조를 이용해 기존 차도 사이 상층부 공간에 노량진과 노들섬을 잇는 길이 500m, 폭 10.5m의 보행교를 놓는다. 뉴욕의 브루클린 대교처럼 1층은 차도, 2층은 보행로로 운영된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 교량 중 대표적인 자살 명소로 악명을 떨치던 곳이었다. 따라서 미끄럼 장치 설치 및 윤활유 바르기 등 자살 방지 대책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2013년, 이곳에도 마포대교에 이어 서울특별시와 삼성생명이 함께 자살방지 캠페인으로 생명의 다리를 설치했다. 하지만 수년 운영중에 몇가지 사회적 이슈와 함께 2015년 5월부로 삼성생명이 계약을 연장하지 않아 모두 철거될 예정이다.

수위가 10.5m에 달하면 홍수경보가 발령되는데, 1990년 9월과 1995년 8월에 발령된 적이 있다. 2020년 8월 6일 오전 11시 폭우로 인해 홍수주의보가 발령되었다. 2011년 7월 홍수주의보 이후 9년만이다.

역사[편집]

을축년 대홍수가 일어나기 전 노량진에서 찍은 한강인도교의 모습.

지금의 한강대교가 있는 위치는 옛날 노들나루가 있던 곳으로, 강의 유속이 느리고 강폭이 좁아 포구가 형성되기 좋은 곳이었다. 숭례문을 지나 남쪽으로 쭉 내려오면 바로 이 나루터에 낳았는데, 여기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 부평, 제물포 방면이나 김포, 강화도 방면, 수원 방면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있었다. 정조가 수원에 있는 융릉으로 행차할 때 나룻배를 엮어 부교를 놓아 건넜다는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구한말에 들어 인천항이 개항하고 경부선이 개통하면서 경인간의 교통망은 급진적으로 발전하였다. 한강철교는 1900년에 이미 가설되어 열차가 오고 갔지만, 한강을 자동차로, 혹은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다리는 그 후로도 한참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본래 한강철교를 가설할 때에 대한제국 정부가 미국인 J.모스(Morse)에게 경인선 철도의 부설권을 부여할 당시에는 한강철교에 '보행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길 한쪽 또는 양쪽에 보도를 시설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으나 모스로부터 철도부설권을 가로챈 일본은 공사비를 절감한다는 이유로 보도 가설조건을 이행하지 않았다. 또, 당시만 해도 민간용 차량이 존재하지 않았고, 여객과 화물의 운송은 대부분 철도와 수운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교 가설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하고 강을 건너려는 수요가 증가하면서 수운으로는 한계에 다다랐고, 조선총독부는 제1기 치도사업의 일환으로 1916년 3월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1917년 10월 7일에 준공하였다. 이때 노량진 쪽에는 경간 60m인 7연의 한강대교와 용산측에 경간 60m인 3경간의 한강소교를 설치하고 양쪽다리 중간은 401m의 둑을 쌓아 연결하여 준공하였다.

이때 최초로 가설된 인도교는 중지도∼노량진 간의 7경간 440m의 대교와 중지도∼한강로간의 3경간 188m의 소교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차도는 4.5m, 좌우 보도는 각각 1.6m였다. 이 교량은 한강철교의 낡은 자재를 이용하여 가설하였으므로 폭이 좁고 중앙차도 4m, 좌우측 보도는 각 1m(상기 수치와 비교, 0.5m정도의 오차 가능)에 불과하였다. 교통량의 증가로 인해 교량 가설 10년 후에는 협소한 인도교 하나로 그 교통량을 처리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더군다나 1925년에는 을축년 대홍수가 일어나, 7월 19일 오후 1시 30분 경에 중간둑이 유실되면서 소교 부분이 완전 유실되는 등 큰 손상을 입었으므로 유실된 소교를 길이 459m, 너비 18m로 확장하여 재건하고 전차궤도도 부설하는 공사를 1927년 5월에 시작하여 1929년 9월에 준공하고 18일에 도교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소교에 비해 대교 부분의 폭이 협소하여 차량 소통 등에 불편이 누적되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1934년 8월 신교 건설에 착수하여 2년 후인 1936년 10월 23일에 현재의 규모와 거의 같은 교량을 준공하였다. 같은 기간에 2번째의 인도교인 광진교도 건설되었다. 그로부터 이 한강교는 서울과 강남을 연결하는 단 둘뿐인 통로로서 서울의 간선도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철교 및 인도교의 개통으로 영등포와 노량진 일대가 급격히 도시화되었고, 이 다리 북단의 신용산역~삼각지역에 이르는 지역이 번화하게 되었다.

6.25 전쟁이 일어난 지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광진교, 한강철교와 함께 한강대교 구간의 2, 3, 5번째 경간을 폭파했다. 이때 한강교량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던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폭사 및 익사하였으며 50여대의 차량도 함께 파괴되었다. 그 후 타이드아치 3경간이 파괴되었던 것을 9.28 수복 직후 우선 1차선만 복구하여 차량 통행을 재개하였고 1957년 1월에 복구공사를 착수하여 1958년 5월 15일에 준공하였다.

1950년 6월 28일 6.25 전쟁으로 인해 폭파되어 다시 유실되었으며, 9.28 수복 직후 부교 및 가교의 형태로 우선 1차선만 복구하여 차량 통행을 재개하였다. 1958년 5월 15일, 폭파된지 8년이 지나서야 다시 세워졌다. 이때까지 8년 동안을 강북과 영등포의 차량 통행은 이 1차선 부교 따위를 통하여 간신히 이루어졌던 것이다. 1965년, 지금의 양화대교가 제2한강교라는 이름으로 건설될 즈음에 이 다리도 한강인도교에서 제1한강교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로, 한강대로 남단 교차로는 한때 경부고속도로의 임시 종점이었던 적이 있다. 1968년 12월 서울 - 수원 간 부분개통 당시 투기꾼들로 인해 한남IC ~ 반포IC 구간의 토지를 확보하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해당 구간을 1년 뒤인 1969년 12월에 한남대교와 함께 개통하고, 최초 개통 시에는 임시로 반포IC에서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방면으로 꺾인 선형의 도로를 건설했다. 즉 현재의 현충로와 사평대로가 1년간 경부고속도로 구실을 하였다.

서울의 인구와 교통량이 크게 증가함으로 인하여 1979년 1월에는 4차선 교량을 8차선 교량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시작되어 1981년 12월 24일에 준공하였는데, 기존 교량과 같은 규모의 설계에 의하여 중지도∼한강로의 소교 구간(북측)은 기존교량의 동쪽을, 중지도∼노량진의 (남측) 대교 구간은 기존 교량의 서쪽을 확장하였다. 종전의 폭을 20m에서 40m로 확장하여 쌍둥이 교량으로 탈바꿈하였으며 1984년에는 한강종합개발사업에 따라 한강대교로 개칭하였다.

기존 제한속도 60km/h이었으나 2019년 12월 20일, 서울 중앙버스전용차로의 안전속도 5030 정책 시행으로 지금의 50km/h로 하향되었다. 한강대교는 중앙버스전용차로는 아니지만 남북단 모두 중앙버스전용차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연혁
  • 1912년: 교량가설계획 수립
  • 1916년 03월: 착공
  • 1917년 10월: 준공
  • 1925년 07월: 홍수로 인해 소교 (용산 측) 유실
  • 1929년 09월 18일: 소교 재개통, 폭 18m로 확장
  • 1935년 10월: 대교 (노량진 측) 재건축 후 개통, 전차궤도 부설
  • 1950년 06월 28일: 한국 전쟁으로 인해 폭파
  • 1950년 10월: 임시 복구됨, 1차선 운행
  • 1958년 05월 15일: 한강 인도교 완전 복구
  • 1982년 02월 27일: 한강대교 신교 부설, 개통 (4차선에서 8차선으로 확장)
  • 1996년 07월 01일: 국도 노선 변경으로 인해 국도 제1호선 지정 해제
  • 2020년 09월 10일: 서울특별시의 시도등록문화재 제1호로 등록됨

한강대교 폭파[편집]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6월 28일 국군이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한 사건이다.

당시 육군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북한군의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폭파를 명령한 후에 시흥으로 향하였다. 그 전날인 27일 오후부터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육군공병학교의 작업조는 공병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3개의 철교와 1개의 인도교를 폭파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 한강 인도교 철교에 하늘을 훤하게 밝히는 거대한 섬광이 일어나고 동시에 다리의 일부 상판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강으로 추락하였다. 대교 구간의 2, 3, 5번째 경간이 폭파되어 사용불능 상태가 되었다.

특징[편집]

하중도인 노들섬을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구분된다.

하중도인 노들섬을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구분된다

한강대교는 중간지점에 하중도인 노들섬이 위치해 있으며, 노들섬을 기준으로 북측은 거더교, 남측은 아치교로 건설되었다. 하류쪽에 건설된 한강철교처럼 교각의 높이가 높은편은 아니므로 태풍이나 장마 등의 영향으로 한강의 수위가 높아질 경우 한강대교 아래를 통과하는 올림픽대로 구간이 침수되어 통제되기도 한다.

한강대교를 경유하는 버스 노선[편집]

  • 서울 버스 150
  • 서울 버스 151
  • 서울 버스 152
  • 서울 버스 500
  • 서울 버스 501
  • 서울 버스 504
  • 서울 버스 506
  • 서울 버스 507
  • 서울 버스 605
  • 서울 버스 742
  • 서울 버스 750
  • 서울 버스 752
  • 서울 버스 6211
  • 서울 버스 N15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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