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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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본(인도네시아어: Kota Ambon)는 인도네시아 암본섬에 위치한 도시로, 말루쿠주의 주도이자 가장 큰 도시이며 인구는 약 35만 명이다. 인도네시아의 음악 도시로 알려진 암본은 2019년에 유네스코 음악 도시로 인정된 동남아시아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1]
개요[편집]
암본은 말루쿠주를 구성하는 섬들 중 하나인 암본섬에 위치한 도시로, 주도이자 주 최대 도시이다. 도시는 다섯 개의 행정 구역(케카마탄)으로 나뉘어져 있다. 1609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이래 1945년 독립할 때까지 350년 동안의 식민지 시절, 이 도시는 네덜란드인들의 집단 거주지였고 말루쿠 제도를 통치하는 군사령관이 주재하던 장소였다. 좁고 긴 암본만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해항(海港)으로 옛날부터 향신료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해왔고, 현재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양항으로 근해어업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1999년 1월 암본 시내에서 기독교도인 버스운전사와 이슬람교도인 승객 사이에 사소한 시비가 붙은 것이 발화점이 돼서 촉발된 종교분쟁이 몰루카 제도 전체로 확대되었고 이때 약 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2년 2월 유혈사태를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양 교도 간의 뿌리 깊은 반목은 계속되었다. 2004년 4월에도 종교분쟁의 진원지인 이 도시에서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가 충돌하여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현재 분리 독립 성향이 강한 주에 속한 도시이며 미승인국이었던 남 말루쿠 공화국의 수도 역할을 하기도 한 역사가 있다. 암본시는 현재 관광으로 먹고 사는 도시이며 주민들 또한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다. 스노클링, 스쿠버 다이빙, 해수욕하기 좋은 바다를 가진 섬이기도 하고 발리보단 사람이 적어서 좋다. 그래도 아직 개발이 덜 되었다.[2]
지리 및 기후[편집]
암본 지형 대부분의 토지 면적은 언덕이 많거나 가파른 경사로 분류될 수 있으며, 17%의 토지 면적은 평평하거나 얕은 경사로 분류될 수 있다.
암본은 쾨펜 기후 구분에 따라 [[열대]우림 기후]](Af)를 경험하며, 실제 건조한 계절이 없다. 가장 건조한 달은 11월로 총 강수량이 114mm(4.5인치)이며, 가장 습한 달은 6월로 총 강수량이 638mm(25.1인치)이다. 적도 근처에 위치해 있어 연중 기온이 일정하다. 가장 더운 달은 12월로 평균 기온이 27.2°C(81.0°F)이며, 가장 시원한 달은 7월로 평균 기온이 25.0°C(77.0°F)이다.[3]
역사[편집]
암본은 1526년에 포르투갈에 의해 식민지화되었고, 포르투갈-몰루카 총독 산초 데 바스콘셀로스에 의해 설립된 노사 세뇨라 데 아눈시아다(Nossa Senhora de Anunciada)로 처음 명명되었다. 포르투갈은 1605년에 네덜란드에 의해 쫓겨났다. 짧은 기간 동안의 영국 통치를 제외하고, 이 섬은 1945년 인도네시아 독립 때까지 네덜란드의 통치 하에 있었다.
네덜란드 시대 동안 암본은 몰루카 제도의 네덜란드 거주자와 군사 사령관의 본부였다. 이 도시는 빅토리아 요새에 의해 보호되었으며, 1911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를 "넓은 거리와 잘 가꾸어진 깨끗한 작은 도시"로 묘사했다. 인구는 두 계급으로 나뉘었는데, 오랑 부르거(시민)와 오랑 네그리(마을 사람)로, 전자는 옛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의해 조상에게 부여된 특정 특권을 누리는 원주민 계급이었다. 네덜란드인 외에도 일부 아랍인, 중국인 및 몇몇 포르투갈 정착민이 있었다. 암본은 기독교 선교 활동의 중심지였으며, 암본과 주변 섬들은 대부분의 인도네시아에서 지배적인 무슬림뿐만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들도 있었다.
1902년 12월 22일, 네덜란드 뉴기니의 사도적 교구가 이 도시에 설립되었고, 이후 암보이나 교구로 승격되었다.
인도네시아 군대가 암본에서 난민을 대피시키고 있다. 암본섬은 주요 네덜란드 해군 기지가 있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다. 1941년, 네덜란드군은 호주군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공격을 예상하여 암본을 강화했다. 일본군은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 공격의 일환으로 암본을 공격했다. 강력한 방어에도 불구하고, 암본은 1942년 2월 3일 4일간의 전투 끝에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함락되었다. 전투 후, 일본군은 라하 비행장에서 300명 이상의 네덜란드 및 호주 포로를 처형하는 등 수많은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
1950년 암본은 남몰루카 공화국의 자칭으로 인해 인도네시아 통치에 대한 반란의 중심지였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암본 침공 중에 도시를 침략하여 몇 달 만에 통제권을 다시 확립했다. 빅토리아 요새(APRMS 주요 기지)와 같은 많은 중요한 건물들이 대치 중에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1958년 4월과 5월에 북술라웨시에서 발생한 페르메스타 반란 동안, 미국은 반군을 지원하고 공급했다. 대만에 기반을 둔 CIA 전선 조직인 민간 항공 운송의 조종사들이 CIA B-26 인베이더 항공기를 타고 암본 주변의 목표물을 반복적으로 폭격하고 기총 소사를 했다. 4월 27일, CIA의 공습으로 군사 지휘소, 연료 저장소 및 로열 더치 쉘 단지가 불탔다. 쉘에 대한 공격은 의도적이었다. CIA는 외국 상업 이익을 타격하여 인도네시아에서 외국 무역을 몰아내고 경제를 약화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다음 날, 같은 CIA 조종사는 보르네오의 동칼리만탄 발릭파판에서 쉘의 이익을 폭격하여 쉘이 그곳에서 유조선 서비스를 중단하도록 설득했다.
1980년대 이주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수하르토 정부는 대부분 무슬림인 많은 이주민들을 인구 과밀 상태인 자바에서 재배치했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암본은 말루쿠 제도 전역에서 종파 갈등의 중심지였다. 2011년에도 종교적 폭력이 발생했다.[4]
경제[편집]
2014년 암본 시의 경제 성장률은 5.96%였다. 2014년 현재 시장 가격과 고정 시장 가격 모두에서 지역 총생산(GDRP)은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2013년 현재 시장 가격과 비교했을 때, 현재 시장 가격에서 GDRP는 12.76% 증가했고, 고정 시장 가격에서는 5.96% 증가했다. 2014년 암본의 현재 시장 가격에서 GDRP는 9.9조 루피아였으며, 2010년 고정 시장 가격에서는 7.77조 루피아였다.
2014년 암본의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은 현재 가격 기준으로 8.3% 증가했으며, 고정 가격 기준으로는 1.7% 증가했다. 2014년 암본 시의 1인당 GDP는 25.16백만 루피아(미화 1,836.43달러)였다. 암본 시의 빈곤율은 4.42%로, 말루쿠 주에서 가장 낮은 빈곤율을 기록했다.
2014년 암본의 모든 21개 경제 부문은 GDRP에서 긍정적인 성장을 보였다. 현재 시장 가격에서 GDRP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부문은 전기 및 가스 부문으로 34.2%를 차지했으며, 가장 낮은 기여를 한 부문은 인간 건강 및 사회 복지 활동으로 6.61%를 차지했다.
암보이나 사건[편집]
17세기 유럽에서는 동방에서 수입되는 후추와 향신료 등으로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동방무역의 선점했던 포루투갈이 쇠퇴하자 네덜란드가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며 해상무역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영국은 동방으로 진출하여 향신료 무역에 나서고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또한 자국에서 생산되는 모직물을 동방으로 수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네덜란드와 영국이 동방해상무역에 가장 적극적이었는데 두나라 간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두고 충돌이 예상되고 있었다. 특히 동방의 암본섬은 향신료의 중심적인 재배지였기 때문에 네덜란드와 영국이 사활을 건 각축장이 되었다.
1605년 네덜란드가 1512년 이래 이 지역을 지배하였던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내자 영국도 이 곳에 상관(商館)을 설치하여 양국 세력은 이 지역에서 극단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또한 두 나라간의 경쟁으로 현지에서 생산되는 향신료의 가격이 오르자 영국과 네덜란드는 협정을 맺어 향신료의 구입 비율과 가격을 조율하기로 했다. 하지만 협정과는 반대로 네덜란드와 영국 두나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1621년 동방무역의 책임자인 네덜란드의 얀 피텔스존 쿤은 영국인들을 쫓아내고 현지인에 대해 폭압적인 태도로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고자 시도했다. 또한 1623년 2월 네덜란드는 영국측이 네덜란드가 개발한 향신료 재배지역인 암본 섬(몰루카 제도 인근에 있는 섬)을 습격하려는 음모가 드러났다는 핑계로 영국인과 일본 용병(傭兵)을 불잡아 처형하였는데 이 사건을 암보이나 사건이다.
이 사건은 네덜란드가 영국을 배제하고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고자 의도적으로 일으킨 조작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와 영국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양국 간에 맺어진 협정은 무효가 되었다. 이후 영국은 향신료무역에서 배제되고 네덜란드는 동방에서 유럽으로 가는 향신료 무역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1652년 네덜란드와 영국간 해상전쟁이 시작되었고 3차에 걸져 전쟁이 계속되었다. 1차 전쟁은 네덜란드가 영국에 배상금을 지불함으로써 일단락되었지만 2차, 3차 전쟁으로 영국에 밀리면서 동방무역에서 점차 쇠퇴하였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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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암본〉, 《위키백과》
- ↑ 〈암본(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Ambon, Maluku", Wikipedia
- ↑ 〈말루쿠 주 암본〉, 《요다위키》
- ↑ 〈암보이나 사건(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암본〉, 《위키백과》
- "Ambon, Maluku", Wikipedia
- 〈말루쿠 주 암본〉, 《요다위키》
- 〈암본(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암보이나 사건(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동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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