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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임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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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임
만하임 위치

만하임(Mannheim)은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서 슈투트가르트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인구 약 32만 명으로 독일에서 21번째로 큰 도시이다. 쿠어팔츠의 옛 수도였던 이 도시는 오늘날에도 라인-넥카 메트로폴에서 경제,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라인란트팔츠주의 도시인 루드비히스하펜과는 라인강을 사이에 두고 접해 있다.[1]

개요[편집]

만하임은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북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라인강과 네카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도시가 형성되었다. 라인강이 도시의 서쪽 경계를 이루며 남북으로 흐르고 시내 한복판을 네카강이 동서로 가로지르다가 만하임 서쪽 끝에서 라인강과 만난다. 1900년 이래 만하임은 중요한 산업과 상업,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독일내 두 번째로 큰 열차편성역(Rangier-Bahnhof)과 유럽의 중요한 연결 항구들이 그 토대가 되고 있다. 또한 만하임은 독일어 연구원(Institut für Deutsche Sprache)과 두덴(Duden) 출판사가 소재한 독일어 연구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만하임은 중요한 근대 발명품의 고향이기도 하다. 최초의 자전거를 1817년 카를 드라이아스(Karl Drais)가 만들었고, 1886년 카를 벤츠(Carl Benz)가 자동차 첫 도로주행을 했으며, 1921년에는 트랙터가 만들어졌다. 최근에는 활발한 음악공연이 명성을 얻고 있다. 만하임에는 만하임 대학교, 만하임 음대 등 많은 대학들이 있다. 도시 구조가 격자 모양으로 설계돼 '정사각형의 도시'라는 별명이 있다. 도시 중심 프리드리히플라츠 광장에 서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급수 타워인 바서투름(Wasserturm)이 시의 상징물이다. '유네스코 음악의 도시'로 지정됐다.[2]

지리 및 기후[편집]

만하임은 라인강 중상류, 라인강과 네카강 합류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만하임은 라인-넥카 메트로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라인넥카군(Rhein-Neckar-Kreises), 헤센주라인란트팔츠주와 접하고 있다. 가까운 대도시로는 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m Main)가 있고, 남동쪽 약 95km 지점에 슈투트가르트(Stuttgart)가 있다.

만하임은 독일에서 가장 더운 지역 중 하나이다. 여름에는 기온이 35°C 이상 오르기도 한다. 2015년 8월 7일 최고 기온은 39.8°C로 기록되었다. 여름에는 평균 온도가 약 25°C로 북유럽에서는 높은 편이다. 독일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여름에 습도가 높아 불쾌지수가 높다. 추운 겨울에도 눈이 내리는 경우는 드물고 연간 강우량은 충분한 편이다.

역사[편집]

만하임 마을은 766년 역사서 로르셔 코덱스(Lorscher Codex)에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오랫동안 중요하지 않은 어촌이었던 만하임은 1284년 팔츠 영주의 영지로 편입되었다. 1349년 라인강 통행료를 징수하기 위한 성인 아이헬하임이 들어섰다. 1415년에 지기스문트 황제의 명령에 따라 폐위된 교황 요한 23세를 이곳에 감금하기도 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 폰 데어 팔츠가 1462년 제켄하임 전투에서 뷔르텐베르크 영주와 바덴 영주 그리고 메츠 주교의 연합군을 격파함으로써 오베르라인의 주인이 되었다. 1566년 만하임은 인구 700으로 하이델베르크 행정구역 내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1607년 만하임은 도시특권을 인정받았고,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Friedrich IV. von der Pfalz)에 의해 프리드리히스부르크(Friedrichsburg) 요새가 건립되기 시작했다. 이 당시 도로망이 직각으로 계획되어 요새와 성을 연결하면서 현재의 정방형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622년 30년 전쟁 중에 가톨릭 측의 틸리(Tilly)에 의해 처음으로 파괴되었고, 1689년 팔츠 상속 전쟁때에 프랑스군에게 다시 한번 희생되었다가 재건되었다.

1720년 선제후 카를 필립은 수도를 하이델베르크에서 만하임으로 변경하고 만하임 성을 짓기 시작했다. (1760년 예수교회와 함께 완성됨). 만하임은 쿠어팔츠의 수도가 되면서 짧지만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인구는 2만5천 명에 이르렀다. 쿠어팔츠는 영주는 미술과 음악, 학문과 상업에 많은 후원을 해서 괴테와 실러, 레싱, 모차르트 등이 만하임에 머물렀다.

1778년 영주 카를 테오도르가 바이에른을 상속받게 됨에 따라 수도가 뮌헨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문화적, 학문적 출현을 겪게 된다. 1795년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또 오스트리아군이 재점령하게 된다. 1803년 최종적으로 정치적 위치를 잃게 된다. 쿠어팔츠는 제국대표단회의에서 해체되고 만하임은 바덴에 속하게 된다. 지리적으로 바덴의 북쪽 변방에 위치하게 되어 변경도시로 변하게 된다.

경제적 번성에 따라 만하임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1828년 라인항이 개항하고, 1840년에는 바덴의 최초의 철로인 만하임-하이델베르크 철도가 개통된다. 만하임은 1848년 혁명의 중심적 역할을 한다. 1865년 프리드리히 엥겔호른(Friedlich Engelhorn)에 의해 BASF(Badische Anilin- und Soda-Fabrik)가 창설된다. 이 회사는 염색공장에 시작한 회사로 현재 세계 최대의 화학회사이다. 현재는 라인강 건너 편인 루드비히스하펜으로 옮겨갔다. 1886년에는 카를 벤츠가 가솔린 기관 자동차 특허를 받았다. 1차대전 후 하인리히 란츠 주식회사는 불독이라는 트랙터를 최초로 생산했다. 1922년에는 만하임 발전소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만하임어 라인샨체에서 함께 출발한 자매도시 루드비히스하펜과 함께 인구 38.5만명에 이르게 됐다.

제3제국 하에서 약 2000명의 만하임의 유대인이 추방되었고, 공중폭격으로 도시는 거의 다 파괴되었으며 1945년에는 미군이 점령하였다. 많은 노력끝에 도시가 재건되는 과정에 만하임성과, 급수탑(Wasserturm)은 복원되고 국립국장은 자리를 옮겨 신축되었다. 1967년에 만하임에 대학이 들어섰고 1975년에는 루이젠 공원과 헤르쪼겐리트 공원에서 연방 정원쇼를 개최하였다. 이 과정에 방송송신탑과 제2 라인강 다리가 만들어졌고, 플란켄이 보행자 전용구역으로 변경되었고, 로젠가른텐을 준공했다. 1980-90년대에도 플라네타리움, 예술관 확장, 유대교사원, 이슬람사원, 기술 노동박물관, 칼 벤츠 스타디온이 만들어졌다. 최근 만하임은 산업분야의 일자리가 감소하고 있다. 이에 시당국은 공업지구와 서비스기업부지 설정을 통해 반전을 시도하고 있다. 그 예가 만하임 최고층 건물인 빅토리아 빌딩(Victoria-Hochhaus, 2001)의 건축이다. 2007년 도시 400주년을 기념해서 2000년부터 많은 건물들이 만들어지고 수리되고 있다.[3]

만하임 대학교[편집]

만하임 대학교(Universität Mannheim)는 독일의 대학교이다.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만하임에 위치하며 1907년 시립 상과대학으로 설립되었고 1967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 독일의 젊은 대학 중 하나로 여겨진다. 만하임 성을 본관으로 사용하면서 1763년에 설립된 쿠어팔츠 한림원(Kurpfälz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독일 내에서 경영학으로 가장 우수한 대학교로 알려져 있으며 유럽 내에서도 비즈니스 교육을 선도하고 있다.

법경학부, 경영학부, 사회과학부, 문학부, 경영정보 ・ 수학부의 다섯 학부로 구성되어 있다. 2005년에는 만하임경영대학원이 추가적으로 개설되었다. 2007년에 설립된 경제사회과학대학원(GESS)은 독일 연방교육연구부(BMBF)와 독일연구협회(DFG)의 우수대학육성사업(Exzellenzinitiative) 1기에 선정되어 재정 지원을 받았으며 2기에도 선정되어 2012년부터 계속해서 지원을 받게 되었다. 만하임은 학제적 접근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사회과학, 컴퓨터공학, 법학, 인문학 등 여러 분야의 전공을 주전공으로 선택하더라도 심도있는 경제, 경영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법학사(LL.B.) 과정으로, 3년간 법학 및 경영학사 학위를 취득하여 이후 경영학 석사 혹은 법학 석사 과정으로 진학할 수 있으며 동시에 사법시험의 중간단계로서 인정이 된다.

만하임 대학교는 역사적으로 경제·경영학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대학의 뿌리는 1907년에 만하임 시민들의 주도로 설립된 시립 상과대학(Handelshochschule)에 있다. 1930년대까지 젊은 상업가들을 양성하던 대학은 상공회의소의 지원을 통해 고등 교육의 중심지로 변모하였고, 경제·경영학 분야의 강의 외에도 철학, 역사, 예술 및 자연과학 분야의 강의도 제공되었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에는 심리학 및 교육학 연구소와 통역학과가 추가로 설립되었다.

1933년, 학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흡수 합병되었다. 이전 상과대학에 있었던 14명의 유대인 강사 가운데 오직 3명만이 나치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다. 희생양 가운데에는 심리학 연구소의 소장이자 대학의 학장이었던 오토 젤츠(Otto Selz)도 포함되었다. 대학을 둘러싸고 동쪽으로 이어지는 오토 젤츠 가(街)는 명망있는 인지과정 연구자였던 그를 기리게 한다.

1946년, 대학은 국립 상경대학(Wirtschaftshochschule)으로 새롭게 설립되었으며 1960년대 초에는 쾨니히스베르크 상과대학(Handelshochschule Königsberg)의 승계권을 얻었다. 전후 시기로부터는 만하임 시와의 긴밀한 관계를 상징하는 대학교의 인장이 유래한다. 인장을 둘러싼 "IN OMNIBUS VERITAS"라는 표어는 카를 테오도어의 지령에서 온 것으로, 이로써 1763년 쿠어팔츠 한림원이 설립되었다. 1967년부터 공식적으로 종합대학으로 지정되면서 학생 수와 전공 과목의 수가 크게 성장하였다. 현재는 5개의 학부에서 학문적인 고등교육과 평생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4]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만하임〉, 《위키백과》
  2. 만하임〉, 《네이버 지식백과》
  3. 만하임〉, 《요다위키》
  4. 만하임 대학교〉,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국가
서유럽 도시
서유럽 지리
지중해
서유럽 문화
서유럽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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