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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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콘강(라틴어: Rubico/Rubicon)은 이탈리아 북부의 길이 80km의 작은 강에 대한 라틴어 이름이다. 아리미눔과 카이세나 사이에서 아드리아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라틴어 명칭 rubico는 형용사 rubeus "붉다"에서 기원했는데, 진흙 침전물에 의해 강물이 붉은 빛깔을 띠었기 때문이다.[1]
개요[편집]
루비콘강은 이탈리아 북동부를 동류하여 아드리아해에 흘러들어가는 작은 강으로 로마 공화정(共和政) 말기, 이탈리아와 속주(屬州)인 알프스 내륙 쪽 갈리아주(州)와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강이다. 로마 공화국이 기원전 이탈리아반도 중북부의 에트루리아 계통의 도시국가를 복속시킨 이후로는 군사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고대 로마 집정관이 해외 원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자신이 이끌던 군단들을 이 루비콘강에서 해산시키고, 단신으로 로마로 돌아오는 풍습이 생겼다. 그리고는 차기 집정관 선거를 나갈 준비를 해야만 했고, 자신이 이끌던 군단들은 로마로 돌아와 자신의 사령관에게 표를 행사할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집정관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넌다면 그건 바로 반란을 의미하였다. 그 당시 로마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관습대로 루비콘강에서 군대를 해산하고 단신으로 올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로마에서 원로원에게 암살당할 것임을 아는 카이사르는 관습을 지키느냐 아니면 반란을 일으키느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강을 도하해 로마의 공화정을 끝장내면서 루비콘강이란 이름을 일반인들의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중세 초기 몇 세기 동안 라벤나 와 리미니 사이의 해안 평야는 여러 차례 물에 잠겼다. 루비콘강은 이 지역의 다른 작은 강들과 마찬가지로 이 기간 동안 종종 수로를 바꿨다. 이러한 이유로 중세 말 농업 부흥 이후 밭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14, 15세기에 또 다른 홍수를 예방하고 하천을 조절하기 위해 수력 시설을 건설했다. 이 작업의 결과로 이 강들은 오늘날처럼 직선으로 흐르기 시작했다.[2]
주사위는 던져졌다[편집]
본래 루비콘강은 로마 제국 당시 파견된 장군 및 군사들이 전쟁/훈련 등으로 파견나간 뒤 돌아오는 길에 루비콘강을 건너야 할 경우 로마에 충성한다는 서약의 뜻으로 항상 무장을 해제한 다음에야 루비콘강을 건널 수 있는 일종의 전통과 법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장을 하고 이 루비콘강을 건넌 다는 것은 곧 로마에 대한 반역을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 전통을 먼저 깬 사람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기원전 49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하고는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갈리아 원정을 함께했던 군사들과 함께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한다. 물론 당시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는 것은 로마에 대한 반역을 의미했다. 하지만 당시 로마에는 카이사르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적이었던 폼페이우스 및 로마 원로원들이 카이사르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무장을 해제한 채 루비콘강을 건너는 일은 곧 이러한 정적들에 의한 죽음을 뜻한다는 것을 카이사르는 알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갈리아 원정 당시 카이사르의 집정관 재임 기간 연장과 관련된 분쟁도 한몫을 했다. 갈리아 전쟁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집정관 재임 연임기간이 끝나고 있어서 원로원에게 연임을 요청하나 원로원들은 집정관 연임을 막으면서 문제가 된 것이다.
이들은 카이사르가 로마에 돌아오면 로마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카이사르에 의해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입지가 줄어들 것이라 생각해 카이사르가 무장을 하고 루비콘강을 건너면 집정관 연임을 어긴 것을 관련지어 적당한 죄명을 넣어서 죽일 궁리를 했었기에 카이사르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루비콘강을 건너다."라는 표현은 되돌아 갈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쓰는 말이 생긴 것이다.[3]
율리우스 카이사르[편집]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틴어: Gai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년 7월 12일 ~ 기원전 44년 3월 15일) 또는 줄리어스 시저는 로마 공화국의 정치가, 장군, 작가이다. 그는 로마 공화국이 로마 제국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으로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노선에 섰다. 기원전 60년대 말에서 5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소위 제1차 삼두 정치라는 초법적 정치 연대를 이루어 수년간 로마 정계를 장악하였다. 이들 파벌은 자신들끼리 권력을 분점하고자 하여, 원로원 내에서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등 벌족파의 반대를 받았으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에 가세하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기원전 58년 ~ 52년)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북해까지 넓혔으며, 기원전 55년에는 로마인 처음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공훈 덕분에 카이사르는 강력한 세력가로 입지를 굳혀 폼페이우스를 위협하게 되었으며, 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의 두 정치가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이렇듯 로마 정계가 재편되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대치하게 되었으며,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대의를 내세웠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으로 하여금 루비콘강을 건너게 하는 결단을 내려 기원전 49년에 내전이 일어났으며, 파르살루스 전투, 탑수스 전투 등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등극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뒤 그는 로마의 사회와 정치에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공화정의 귀족 정치를 고도로 중앙집권화하였으며, 급기야 자신을 종신독재관으로 선언하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Idus Martias)에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전날 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라는 어느 '해방자'로부터 모종의 음모에 대해 어렴풋이 전해 들었으며,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여 포룸 계단에서 약간 떨어져서 카이사르 앞으로 갔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마르스 광장에 있는 폼페이우스 극장을 지날 때 원로원 의원 무리가 그를 가로막더니 동쪽 주랑 현관에 붙은 방으로 그를 이끌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다다랐을 때, 원로원 의원인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베르가 추방당한 자신의 형제를 귀환시켜달라며 청원을 하였다고 한다. 다른 음모자들이 킴베르를 지지하면서 카이사르를 둘러쌌다. 이때 카스카가 단검을 빼내 들어 단번에 독재관의 목을 내리찔렀다. 카이사르는 재빨리 뒤돌아보며 팔로 카스카를 잡았다. 순식간에 브루투스를 비롯한 모든 암살자들이 칼을 들어 독재관을 공격하였다. 카이사르는 도망치려 하였으나, 피 때문에 분별을 잃고 발을 헛디뎌 넘어졌으며 주랑 현관 아랫 계단에 무방비로 쓰러지자, 암살자들은 그를 계속 찔러댔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를 암살하는 데 6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가담하였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23번 칼에 찔렸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나중에 의사가 부검하기를, 그의 가슴에 두 번째로 찔린 상처 그 하나가 치명적인 일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났으며, 결국 카이사르의 양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영속적인 전제정을 성립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은 지 기원전 42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신으로 축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후 그의 공식명칭은 신격 카이사르가 되었다(Divus Caesar). 또한 그 이후부터 로마 황제가 죽었을 경우 후임자가 그를 신격화시키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카이사르는 생전에 로마에서 훌륭한 웅변가이자 산문 작가로 인정받았으며, 키케로도 카이사르의 수사와 문체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카이사르의 대표작인 갈리아 전쟁기가 "알몸과 같고 순수하며 의복과 같은 미사여구를 죄다 벗어 던져버렸을 때 생겨나는 매력으로 충만해있다"며 이어 "카이사르는 역사를 쓰려는 자들에게 사료를 제공할 작정으로 썼을지 모르나, 그 은혜를 입는 자들은 군더더기를 덧붙여 화려하게 장식한 역사를 쓰는 바보들뿐이고, 사려 깊고 현명한 이들에게는 역사를 쓸 의욕마저 꺽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라고 평가했다. 그의 유명한 작품 가운데는 마리우스의 아내인 아주머니 율리아의 장례 연설과, 키케로의 소 카토 회고에 대응하여 카토를 비난한 글인 안티카토네스(反카토)가 있다. 불행히도 그의 글과 연설문 상당수는 유실되었다.가장 큰 원인은 그의 사후에 그가 신격화 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등 몇몇 문서들을 제외한 그와 관련된 글과 연설문들의 전량 회수 및 폐기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회고록으로는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가 있는데, 전자는 갈리아 전쟁 당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벌인 군사 작전을 기록하였으며, 후자에서는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가 죽은 직후에 일어난 내전을 다루었다. 또 각각 알렉산드레이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행한 전투에 대해 쓴 알렉산드리아 전기(De Bello Alexandrino), 아프리카 전기(De Bello Africo), 히스파니아 전기(De Bello Hispaniensi) 이 세 저작도 역사적으로 카이사르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저자 여부는 불투명하다. 이러한 저서의 줄거리는 당시 전쟁 중이나 직후에 "전선에서 급송한 공문서"로서, 1년 단위로 써서 출간되었다. 카이사르의 저서는 문체면에서 분명하게 단순하고 직설적이나, 사실은 대단히 복잡하고 그의 정치적 주장을 선전하는 방향으로 미묘하게 편향되어 있고 특히 로마나, 이탈리아, 속주의 평범한 소귀족 독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4]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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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