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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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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

박혁거세신라의 시조(재위 BC 57 ~ AD 4)이다.

개요[편집]

  • 박혁거세는 '朴赫居世'의 '赫’과 '朴'은 둘다 'ᄇᆞᆰ'(밝다)의 뜻을 반복하여 쓴 것이다.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기원전 69년~4년 음력 3월, 재위: 기원전 57년~4년)은 신라의 초대 군주이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왕 혹은 귀인의 칭호라 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혁거세 거서간이 백마가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나 사소부인(娑蘇夫人)이 혁거세 거서간을 낳았다는 전설도 함께 전하고 있다. 혁거세의 출생과 사망, 역사는 한국의 오래된 신화로 기록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신라 박씨 족보는 혁거세 거서간의 장남 박특(朴忒)을 신라 개국공신으로 기록하고 있어 혁거세 거서간의 출생이 사료의 기록(기원전 69년)보다 이를 것이라 추측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각종 박씨 관련 보학 자료들이 조선 중기 또는 후기 이전에 소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일단은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13세기 편찬된 《삼국유사》의 내용을 정설로 보고 있다.[1]
  • 박혁거세는 성은 박(朴)이고 이름(諱)은 혁거세(赫居世)이며 불구내(弗矩內)라고도 한다. 왕호(王號)는 거서간(居西干, 居瑟邯이라고도 한다)인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거서간이 진한(辰韓) 지역에서 왕이나 귀인(貴人)을 가리키던 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비(王妃)는 사량리(沙梁里) 출신의 알영(閼英)으로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재위 4~24)과 아로(阿老) 등의 자녀를 두었다. 혁거세는 13세 때인 기원전 57년에 6부 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나라를 세웠다. 나라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徐耶伐)이라고 하였는데, 서벌(徐伐)이나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라고도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왕도(王都)가 길이 3,075보(步), 폭 3,018보에 이르렀으며, 35리(里), 6부(部)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기원전 37년(혁거세 21)에 궁성을 쌓고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혁거세는 용(龍)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알영(閼英)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용이 알영을 낳은 일이 기원전 53년(혁거세 5)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알영이 혁거세와 같은 날에 태어났으며 죽은 때도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2]
  • 박혁거세는 신라의 초대 국왕이자 시조.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슬한이었다. 한국이나 기타 재외동포를 포함한 모든 박씨들의 시조 즉 박씨들의 공통조상이다. 신라의 왕위는 훗날 김씨, 석씨 등 다른 성씨에게 전해지기도 하였으나, 혁거세는 단순히 부계 혈연 개념에 입각한 조상이 아니라 건국자로서 성씨에 관계없이 공통으로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었다. 신라에서 전왕이 승하하면 후임자가 일단 왕위를 물려받은 뒤, 즉위 다음 해 1~2월에 신라 고유 제사 시설인 시조묘(이후 신궁)에서 제사를 거의 반드시 직접 지냈다. 이는 신라의 일종의 관례적인 즉위식 개념이었다. 현재 전하는 박혁거세라는 이름은 朴赫居世라는 한자 표기를 현대 한국어로 음만 따서 읽은 것이나, 신라에서는 한자를 읽고 쓸 때 일본어와 같이 음독과 훈독을 섞어 썼다. 赫居世(혁거세)에서 赫(붉을 혁)과 世(누리 세)는 본래 뜻으로 읽었기 때문에 赫居世의 실제 발음은 '불거누리'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삼국사기》에 "이명으로 弗矩內(불구내)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순우리말 '붉은 누리'를 한자로 음사하여 표시한 것으로 추정되며 赫居世와 弗矩內는 같은 단어를 한자 표기만 다르게 쓴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혁거세의 성인 박(朴) 역시 원래는 성이 아니라 赫의 발음을 강조하기 위해 앞에 붙인 표기라는 분석도 존재한다. 한편 이름의 뜻이 '누리의 붉은 햇님'인 이진아시와의 연계가 지적되기도 한다.[3]
  • 박혁거세는 신라를 건국한 임금이다. 신기한 탄생 설화를 지니고 있으며, 신라를 건국한 후 덕으로 다스리며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혁거세의 탄생설화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기이편에 실려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따르면 혁거세가 탄생하기 전부터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살면서 6촌(후에 6부로 발전)을 이루었는데, 그 중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의 촌장이었던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의 나정(蘿井) 옆에서 말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 가까이 가보니 말은 사라지고 큰 알이 하나 있었다. 알에서는 갓난아이가 나왔는데, 그가 바로 혁거세이라는 내용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탄생설화도 『삼국사기』와 유사하다. 다만 조금 다른 점도 보이는데, 『삼국사기』에서는 조선의 유민들이 6촌을 형성했다고 하였지만 『삼국유사』에서는 6촌의 조상들이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고 한 것이나, 『삼국사기』에서는 소벌공이 우연히 알을 발견한 것처럼 서술하였으나 『삼국유사』에서는 6촌의 촌장들이 모여서 나라를 세울 일을 논의하다가 함께 알을 발견한 것으로 한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아이의 몸에서 광채가 나서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의 혁거세(赫居世)라 하였다는 내용과 '불구내(弗矩內)'라는 다른 이름, 혁거세가 서술성모(西述聖母)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내용도 보인다. 서술성모는 선도성모(仙桃聖母)라고도 하는데,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도 신라본기 경순왕조 말미에 쓴 사론에서 선도성모 설화를 언급하고 있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도 김부식과 유사한 입장을 보였다. 조선 시대 실학자인 안정복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신라 건국에 관한 부분을 서술하면서 혁거세의 탄생에 관한 내용을 생략하였다. 그러면서 별도로 건국 설화를 괴이한 이야기로 여겨 그 내용을 변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조선 유민들이 삼한 지역으로 남하해 왔다는 내용이나, 6촌이 신라 건국의 모체가 되었다는 내용 등 건국신화가 반영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은 신라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박혁거세의 신화[편집]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혁거세의 출생에 관해 공통의 설화가 전해진다. 진한 땅에 고조선(古朝鮮)의 유민(遺民)들이 산골 사이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개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를 진한의 6부(六部)라 하였는데,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사량부(沙梁部) 정씨(鄭氏)의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모량부(牟梁部, 漸梁部라고도 한다) 손씨(孫氏)의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자산(觜山) 진지촌(珍支村, 干珍村이라고도 한다),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재위 BC 73~BC 49) 때의 연호인 지절(地節) 원년(기원전 69년)에 6부의 촌장들이 알천(閼川)에 모여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을 삼아 나라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기슭의 나정(蘿井) 부근에서 기이한 기운이 비추면서 백마(白馬)가 꿇어앉아 절을 하는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에 가니 자주색의 알이 놓여 있었고, 그 알을 깨자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나고 천지가 진동하며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고 하였는데, 《삼국유사》에는 그 이름이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로 '불구내(弗矩內)'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가 태어난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해서 그의 성을 '박(朴)'이라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야기의 개요는 같지만 고허촌의 촌장인 소벌공(蘇伐公)이 알을 발견하고 아이를 거두어 길렀으며,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었다고 되어 있다.

박혁거세의 업적[편집]

  • 박혁거세와 알영은 하늘에서 내린 두 성인(聖人)으로 주변 국가들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기원전 50년(혁거세 8) 왜인(倭人)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혁거세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갔으며, 기원전 28년(혁거세 30) 낙랑(樂浪)도 신라를 침범하려다가 스스로 퇴각하였다. 기원전 41년(혁거세 17) 혁거세는 왕비와 함께 6부를 순행하며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기도 했다. 이러한 박혁거세의 통치기에 신라는 마한(馬韓)과도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정도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기원전 39년(혁거세 19) 변한(卞韓)의 일부가 신라에 항복해왔으며, 기원전 5년(혁거세 53)에는 고구려의 압박을 받은 동옥저(東沃沮)가 사신과 말 20필을 보내며 수교를 청해오기도 했다.
  • 박혁거세는 기원후 4년(혁거세 61)에 사망했으며, 담암사(曇巖寺, 曇嚴寺라고도 한다) 북쪽의 사릉(蛇陵)에 매장되었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이 되던 해에 하늘로 올라갔으며 7일 후에 유체가 땅에 흩어져 떨어지고 왕비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나라의 사람들이 이들을 한데 모아 매장하려 하자 커다란 뱀이 나타나 방해를 하는 바람에 흩어진 시신을 다섯 개의 능(五陵)에 제각기 매장하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박혁거세가 죽은 뒤에 그의 적자(嫡子)인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위를 이었다. 《삼국사기》에는 남해차차웅이 기원후 6년(남해 3) 혁거세 거서간의 사당을 세우고 사계절마다 제사를 지냈으며, 친누이인 아로(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의 '감통(感通)' 편 '선도성모 수희불사(仙桃聖母 隨喜佛事)' 조에는 혁거세와 알영이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인 사소(娑蘇)가 낳은 성자(聖子)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숭덕전[편집]

  • 숭덕전(崇德殿)은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에 있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의 제향을 받드는 제전(祭殿)이다. 1992년 7월 18일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신라오릉보존회에서 소유, 관리한다. 1429년(세종 11)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0년(선조 33)에 중건하였다. 그 뒤 1694년(숙종 20)에 수리하였으며 1723년(경종 3) 묘호를 숭덕전으로 고치고 참봉 3인을 두어 봉수(奉守)하였다. 경내에는 1759년(영조 35)에 세운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을 새긴 신도비가 있다.
  • 숭덕전은 신라오릉 옆에 있으며 숭덕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향축실, 전사청이 있고 남쪽 숙경문을 지나면 상현재, 서재 및 영숭문이 있다. 상현재 남서쪽 협문으로 들어가면 숭성각이 있고 영숭문 남쪽으로 조흥문이 있다. 서재 옆 협문을 통과하면 안마당이 있고 남쪽에 고자실 및 포사가 위치하며 북쪽에 추보헌이 있다. 추보헌 뒤쪽으로는 알영각이, 안마당 동쪽에는 동행각이 위치하고 그 뒤로 예빈관이 있다. 이곳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박씨 시조 박혁거세의 건국신화가 전해지고 숭덕전 알영왕비의 탄생지인 알영정 터가 있다. 세종이 삼국 시조들에 대한 사당을 지으라는 조서를 내려 세운 제전이므로 국가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부터 박씨문중에서 관리 및 행사 전반을 주관한다. 현재 춘분과 추분에 제향을 봉행한다.

경주 나정[편집]

  • 경주 나정(慶州 蘿井)은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에 있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강전설이 깃든 우물이다. 1975년 11월 2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오릉(五陵) 남동쪽 소나무숲 속 시조유허비(始祖遺墟碑) 옆에 있다. 보호면적은 7,328㎡이다. 이곳에는 박혁거세를 기리는 유허비를 비롯하여 신궁터로 추정되는 팔각건물지, 우물지, 담장지, 부속건물지, 배수로 등이 잘 남아 있다. 특히 팔각건물지는 한 변의 길이가 8m나 되고 네모난 담장을 두른 것으로 보아 신라의 신궁터로 추정된다.

신라[편집]

  • 신라(新羅)는 기원전 57년부터 기원후 935년까지 고구려, 백제와 함께 고대 한반도의 삼국 시대를 이끌고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구성하였던 국가로,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된 왕국 중 하나이다. 진한에 소속된 성읍국가 중 하나인 경주 지역의 사로국(斯盧國)이 그 시초이며, 혁거세 거서간이 나라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왕(王)이라는 왕호(王號)를 쓰기 전에는 군주를 방언으로 거서간, 마립간과 같이 간(干)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고, 이사금이라는 호칭 또한 잠시 사용되었다. 서기 503년(지증왕 4년) 왕호를 확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국호를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 (德業日新 網羅四方)라는 의미의 신라(新羅)로 확정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혁거세 거서간〉, 《위키백과》
  2. 박혁거세(朴赫居世,BC 69~AD 4)〉, 《두산백과》
  3. 혁거세 거서간〉,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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