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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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영어: Valletta, 아랍어: فاليتا, 문화어: 왈레따)는 몰타의 수도이며 인구는 약 6000명이다. 몰타섬 동부 연안에 위치하며 발레타는 유럽 최남단의 수도로 면적은 불과 0.61km²로 유럽연합에서 가장 작은 수도이다. 발레타는 1980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인정되었고 2018년에 유럽 문화의 수도로 선정되었다.[1]
개요[편집]
발레타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에서 남쪽으로 93km 떨어져 있으며 지중해의 한가운데에 있는 몰타에서 가장 큰 섬인 몰타섬에 있으며 남동부지방 남부하버지구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인구는 6,000명에 불과하지만 주변 도시권을 합한 인구는 40만 명에 이르며 몰타 인구가 53만 명임을 감안하면 그냥 몰타인 대부분(95% 이상)이 발레타 도시권에 산다고 봐도 무방하다. 천연항 중 하나로 해발고도 56m 높이의 시베라스산(Mount Sciberras)이 만들어낸 시베라스 반도(Sciberras peninsula) 위에 위치한다. 동남쪽으로 그랜드항(Grand Harbour)과 북서쪽으로 마르삼세트항(Marsamxett Harbour) 사이에 위치한다. 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연결하는 주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여 과거 페니키아와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제국, 비잔틴제국,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565년 몰타 공방전이 종식된 이후에 몰타 기사단 총장을 역임하고 있던 장 파리조 드 라 발레트(Jean Parisot de La Valette)가 새로운 도시 건설을 명령하면서 형성되었으며 도시 이름은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공습으로 큰 피해를 받기도 했다. 시내에는 몰타 기사단과 관련된 건축물, 바로크 건축, 매너리즘 건축, 근대 건축,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을 띤 건축물 다수가 남아 있다. 1864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영국의 함대가 상주였으며, 1979년 영국이 철수한 이후에는 어업과 관광객들을 위한 크루즈선 항구로 이용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공군의 폭격으로 많은 역사 건축물들이 파괴되었으나, 남아 있는 옛 유적과 온화한 기후로 매년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성채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로, 공항이나 기차역이 없으며, 공항은 몰타 중남부 도시 루카(Luqa)에서 약 5㎞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발레타 시내는 거주자의 차량 등 허가받은 차량 이외에는 진입할 수 없고 관광 목적으로 버스만 운행된다. 중심가는 스케베라스산에 면한 킹스웨이이며, 시내에는 16세기의 대성당, 18세기의 왕립(王立)대학, 영주의 저택 등의 사적이 있다. 1980년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2]
발레타는 상업 및 행정 중심지이며, 예술적 · 문화적 유물과 전통으로 관광의 명소이다. 진기한 카페와 와인 바가 즐비하며, 영어를 사용하는 극장에서부터 오페라 가수들의 콘서트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문화 행사를 주최한다. 이 도시에 1573~1578년 세워진 세인트존 공동 대성당이 있다. 이전에는 호스피탈러 교단에 속하는 수도원의 교회였던 이 성당은 임디나에 있는 대주교 성당과 거의 동등한 지위에 있다. 몰타 대학의 발레타 캠퍼스는 구 대학 건물에 위치해 있다. 발레타에는 세인트 알버트 더 그레이트라는 교회 학교도 있다. 발레타는 지중해성 기후를 보인다. 여름(6~8월)은 대체로 건조하고 봄 · 가을(10~3월)에 비가 많다. 여름철 평균 기온은 28.5~31.8°C이고, 겨울철 평균 기온은 9.4~11.6°C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596mm이며, 일조시간은 연간 2954시간이다. 해수 온도는 2월에 15~16°C이며, 8월에는 26°C이다. 버스를 이용하는 몰타의 대중교통 시스템은 주로 발레타를 오가는 노선으로 운행된다. 시내 관문 바로 바깥에 중앙 종착역이 있다. 일부 주요 도로는 완전한 보행자 구역이어서 차량 통행이 제한된다. 발레타는 전기택시단을 운영한다.[3]
역사[편집]
발레타의 역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명은 1565년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몰타섬을 지키는 데 성공한 요한 몰타 기사단장 장 파리소트 데 발레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발레타가 위치한 반도는 아랍 지배 시절 알네위야로 불렸다. 반도의 맨 끝은 셰브이르라스(셰브포인트)로 불리는데, 이 이름은 이 지역에 있는 등대에서 유래했다.
발레타를 소유한 지주는 시베라스 가문으로 언제부터인지 반도 전체가 시베라스로 불리게 됐다. 당시 반도의 유일한 건축물은 1488년 지어진 포르미아의 에라스무스(세인트 엘모)에게 봉헌된 작은 망루뿐이었다. 이 반도에 도시를 건설한다는 구상은 1524년 몰타 기사단에 의해 제안됐다. 1552년 아라고나이트 감시탑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더 큰 세인트엘모 요새가 세워졌다.
1565년 오스만 제국의 대공성 당시 세인트엘모 요새는 함락됐지만, 요한몰타기사단은 시칠리아 증원군의 도움으로 결국 승전했다. 이에 장 파리소트 데 발레트 기사단장은 몰타에서 기사단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반도에 요새화된 도시를 새로 건설하기로 했다.
승전으로 위상이 올라간 기사단장 발레트는 유럽의 왕과 왕자들에게 도움을 청해 지원을 약속받았고, 교황 비오 5세는 자신의 군사건축가인 프란체스코 라파렐리를 보내 새로운 도시를 설계하도록 했다. 1566년 나중에 승리의 성모 교회가 된 곳에 발레트가 도시의 초석을 놓았다. 이처럼 발레타의 16세기 건물들은 요한몰타기사단에 의해 지어졌다.
발레트 기사단장은 1568년 사망해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건축가 프란체스코 라파렐리는 기존 불규칙한 구불구불한 길과 골목의 중세 건축에서 직사각형의 격자 무늬로 새 도시를 설계했다. 또 시티 게이트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내려다보는 세인트 엘모 요새까지 이어지는 넓은 직선 도로도 설계했다. 1570년 라파렐리가 죽은 후 조수인 몰타의 건축가 지롤라모 카사르가 직접 도시 건설을 감독했다. 발레타는 1570년대 초반 대부분 완성됐고, 1571년 3월 18일 비르구의 세인트 안젤로 요새에 거처하던 몰타 기사단장 피에르 데 몬테가 발레타에 있는 기사단장 궁전으로 옮겨오면서 발레타는 몰타의 수도가 됐다.
안토니오 데 파울레의 통치 기간에는 발레타를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더 건설하기로 했고, 이들을 설계한 마세라타의 건축가 피에트로 파올로 플로리아니의 이름을 따서 플로리아나 라인으로 명명됐다. 안토니오 마노엘 데 빌헤나 통치 기간 중 발레타와 플로리아나 라인 사이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는 발레타 교외에서 플로리아나로 연장됐다.
1798년 프랑스가 섬을 침략해 기사단을 추방했다. 1800년 영국군에 항복할 때까지 프랑스 군대는 발레타와 주변 항구 지역을 점령했다. 영국이 지배한 후 성문 확장, 구조물 철거 및 재건, 새로운 주택 확장 등 발레타 재건 프로젝트가 추진됐다. 1883년 발레타와 림디나를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됐다. 이 철도는 버스가 대중교통수단이 된 1931년에 폐쇄됐다.
1939년 이탈리아와 근접해 해군 지중해 함대사령부가 발레타에 설치되었다. 이후 2년간 도시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공격 대상이 됐다. 1943년 이탈리아 함대가 발레타에서 연합군에 항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도시 전체, 특히 로열 오페라하우스가 크게 파괴됐다. 1964년에 몰타가 몰타 공화국으로 독립한 이후로는 몰타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도시는 마니에리즘, 네오클래식, 현대적 건축 요소를 갖춘 바로크 도시로 1980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2018년에는 유럽 문화 수도로 지정되었다.[4]
유네스코 세계유산[편집]
몰타의 수도 발레타에 있는 옛 시가지 유적은 198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된 면적은 56ha이며, 성당 25개를 포함하여 약 320여 개의 기념물이 남아 있다. 이 지역은 현대 유럽의 정신적 힘이자 위대한 군대 유산의 하나인 성 요한 기사단과 관계가 있으며, 발레타라는 지명도 당시 기사단장이었던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Jean Parisot de Valette)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몰타의 수도인 발레타는 고대의 특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면서 지금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도시 유적지이다. 이곳은 예루살렘의 성 요한 기사단 등의 군사 유산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오랜 역사 동안 페니키아인·그리스인·카르타고인·로마인·비잔틴인 및 성 요한 기사단의 지배를 받았다. 도시는 1798년, 성 요한 기사단에 의해 버려진 후부터는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지중해에서 가장 매력적인 자연경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발레타는 도시 전체가 성벽과 보루로 둘러싸여 있다. 발레타는 그랜드 하버(Grand Harbour)와 마르삼세트 하버(Marsamxett Harbour)로 나누어져 있으며, 도시의 가로망과 16세기~18세기에 지어진 도로 주변의 건물들이 잘 정비되어 있다. 직교상(直交狀) 도시계획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발레타는 1565년, 튀르키예의 포위 공격을 막아낸 후, 이탈리아인 건축가 프란체스코 라파렐리(Francesco Laparelli, 1521~1570)의 설계에 따라 1566년부터 건축되기 시작했으며, 그후 지롤라모 카사르(Girolamo Cassar)가 이어받아 지금의 도시가 완성되었다. 발레타의 요새화 및 도시계획의 통일성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건축 원리, 도시 이론가들의 미적 고려와 당대 도시계획의 기술들이 결합된 것이다.
성 요한 성당(구 수도원 성당, 1573), 기사단 장의 궁전(16세기 말), 오베르주 드 캐스틸레(Auberge de Castille et Leon, 1574), 오베르주 드 프로방스(Auberge de Provence, 1571~1575), 오베르주 이탈리(Auberge d'Italie, 1574), 오베르주 아르곤(Auberge d'Aragon, 16세기 말) 및 수도회 병원(Infirmary of the Order, 16세기 말) 등의 건물은 보호 구역 안에서 열을 지어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며 통합되어 있다.
승리의 성당(Our Lady of Victory, 1566년), 성 캐서린(St Catherine, 1576) 및 일 제수(Il Gesù, 1595)와 같은 위대한 종교 건축물들도 마찬가지이다. 18세기의 건축가 및 군사 기술자들은 이러한 조화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한 단계 더 진보한 모습을 보여 주는 오베르주 드 바비에르(Auberge de Bavière), 성 바울 난파 교회(Church of the Shipwreck of St Paul), 도서관 및 맨틀 극장(Mantel Theatre) 등의 건축물을 남겼다.
촘촘하게 짜인 도시 조직은 매우 우수하며, 과거를 반영하는 건축물 역시 어떠한 변화나 개조 없이 잘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9세기와 20세기는 영국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시기로, 이러한 영향력이 구 지역의 건축물들과 놀라운 방식으로 결합함으로써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건축물을 낳았다. 새로운 건축물 중에는 도시 환경과 잘 어울리는 내닫이창을 가진 좁은 집들이 있다. 발레타의 우수한 건축 유산들은 뛰어난 보존 상태 덕분에 그 빛을 더 발하는데, 이 덕분에 발레타는 역사 보존의 모범 도시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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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발레타〉, 《위키백과》
- ↑ 〈발레타(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발레타(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 ↑ 〈발레타〉, 《요다위키》
- ↑ 〈발레타(유네스코 세계유산)〉,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발레타〉, 《위키백과》
- 〈발레타〉, 《요다위키》
- 〈발레타(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발레타(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 〈발레타(유네스코 세계유산)〉,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