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살로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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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살로니키(그리스어: Θεσσαλονίκη) 또는 테살로니카, 데살로니가(Thessalonica), 살로니카(Salonica)는 아테네에 이어 그리스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이자 그리스령 마케도니아 지방과 중앙마케도니아주의 주도이다. 이 도시는 명예 지명으로 그리스의 '공동 수도'(Συμπρωτεύουσα)라고 부르며 비잔티움 제국 때에는 '공동 황제 수도'(συμβασιλεύουσα)라 부르기도 하였다.[1]
개요[편집]
테살로니키는 에게해의 북서쪽에 있는 테르마이크만에 자리잡고 있는 항구 도시로 아테네와의 거리는 520km다. 테살로니키의 동남쪽은 코르티아티스산이 감싸고 서쪽으로는 바르다르강(악시오스)의 삼각주와 접한다. 테살로니키는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그리스 북부의 중심지이다. 테살로니키의 면적과 인구는 19㎢, 32만 명이고 테살로니키 도시권의 면적과 인구는 112㎢, 80만 명이다. 보통 테살로니키 시라고 하면 테살로니키 도시권을 가리킨다. 테살로니키는 기원전 315년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 왕에 의해 건설되었고 도시명은 부인 테살로니케(Thessalonike)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마케도니아왕국 하에서 자치권과 의회를 유지하며 마케도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항구 도시이자 상업,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대도시로 발전함과 동시에 기독교 전파를 위한 초기 전초기지 중 하나가 되었는데,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일부인 성 데메트리우스 교회(Church of Saint Demetrius) 등이 5세기경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4~15세기의 오랜 기간에 걸쳐 건축된 교회들은 비잔틴 시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역사적인 유형들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후 테살로니키는 지속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가장 부유한 도시로 발전하였다. 테살로니키 자체만 본다면 국경선에 가까운 데다가 그리스 북동부에 너무 치우친 감이 있어서 중심지가 된 것이 신기할 수 있지만, 지정학적으로 발칸 반도 남부에 위치한 국가들이 터키가 지배하고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거치지 않고 직접 지중해로 선박을 보내기 딱 좋은 곳이라서 그리스의 항구이지만 다른 나라들의 화물이 집중되는 곳이다. 그래서 국제 항구의 성격을 띄고 있다.[2]
테살로니키는 바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 여러 기후 양상이 교차하는 위치이기 때문에 아열대습윤기후, 지중해성기후, 반건조기후의 특징을 모두 보인다. 여름은 꽤 건조하고 더운 날씨를 보이는데, 보통 최고 기온이 30°C를 넘어간다. 겨울도 건조한 편으로 눈이 이따금 내리지만 며칠 이내로 다 사라지며 겨울 평균 기온은 약 7~8°C이다. 경제, 상업 및 산업, 정치의 중심지이며 테살로니키항(Port of Thessaloniki)을 통해 그리스와 남동부 유럽을 잇는 운송 허브이기도 하고 인접한 발칸 국가 및 지중해 도시로의 이동이 용이하다. 해안지대는 50km 정도이며 2014년 부둣가를 산책과 사이클 등에 적합한 도시 생활 공간으로 새로이 조성하였다. 도시 내에 20여 개의 박물관과 10여 개의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 있다. 현재 테살로니키는 남동부 유럽에서 중요한 무역과 비즈니스 허브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테살로니키 항은 에게해에서 가장 크고 활발한 항구 중 하나이다. 많은 남동부 유럽 학생들이 모이는 젊음의 도시, 교육 도시이기도 하여 2014년에는 '유럽 젊음의수도'(European Youth Capital)로 선정되기도 하였다.[3]
지리 및 기후[편집]
테살로니키는 에게해의 북서쪽에 있는 테르마이크만에 자리잡고 있는 항구 도시다. 아테네와의 거리는 520km다. 테살로니키의 동남쪽은 코르티아티스 산이 감싼다. 서쪽으로는 바르다르(악시오스)강의 삼각주와 접한다. 지중해성 기후로 온난하며 여름에 건조하고 겨울 강수량이 여름보다 더 많다. 연평균 기온은 15.3℃이고 가장 더운 7월은 평균 25.9℃, 가장 추운 1월은 평균 5.3℃다. 7월의 최고기온 평균은 31.9℃, 1월의 최저기온 평균은 1.4℃다. 연간 강수량은 422mm이며, 12월에 평균 49mm로 가장 많이 내리고 8월에는 18mm로 가장 적게 내린다. 중세 이후 여러 차례 강한 지진을 맞았다. 그 중 1759년, 1902년, 1978년, 1995년의 충격이 컸다. 1978년 지진의 리히터 강도는 최고 6.5를 기록했다.
역사[편집]
테살로니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여동생의 이름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매제, 즉 테살로니키의 남편인 카산드로스 왕이 BC 316년에 이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아내 이름을 붙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타계 후 왕자와 왕세자를 제거하고 BC 317년에 왕좌에 올랐다. 테살로니키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BC 168년에 멸망한 이후에도 로마 제국의 주요 대도시로 번성했다. AD 50년 경에 초기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두 번째 선교 여행에서 이 도시의 유대교 교회당을 방문해 기독교 신앙의 씨앗을 뿌렸다. 이후 사도 바울은 이곳의 첫 교회에 편지 두 통을 보냈다. 이 편지는 신약성서에 포함되었고, 데살로니카 전서와 데살로니카 후서라고 불린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서로마와 동로마,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로 부유한 도시였다. 동로마 제국은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유럽, 아랍, 슬라브, 불가리아 등에 시달렸지만 테살로니키는 계속 번성했다. 동로마 제국 때 이 도시의 인구는15만명에 달했다. 1423년 이후 베네치아의 통치를 받았다. 1430년에 오스만 제국으로 넘어갔다. 이후 1912년까지 5세기 가까운 시기에도 다문화 대도시라는 특성을 유지했다. 종교-문화는 큰 변화를 겪어, 대다수 기독교나 가톨릭 시설이 모스크로 바뀌었다. 모스크가 새로 지어졌고 종교 학교가 들어섰으며 실내 시장과 목욕탕이 도시 생활의 중심 시설이 되었다. 이 시대 기독교 교회는 장방형 건물로 낮은 박공 지붕에 주랑이 있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다. 1500년에 스페인으로부터 유대인 난민이 이주해오면서 테살로니키의 다종교-다문화 특성이 더 풍부해졌다. 이 시기에 제조업과 해운업도 발달했고 사업의 주도권은 그리스인이 장악했다. 무역에서는 유대인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라고도 불렸고, 현재의 터키로 이어졌다.
터키를 몰아내기 위해 발칸반도의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가 발칸동맹을 결성하고 1912년에 제1차 발칸전쟁을 일으켰다. 패전한 터키는 유럽의 영토를 모두 잃었다. 터키로부터 빼앗은 영토 분배를 놓고 발칸동맹 사이에 갈등이 격화됐고 결국1913년에 제2차 발칸전쟁이 발발했다. 세르비아와 그리스 등의 동맹은 불가리아를 상대로 승리해 마케도니아를 넘겨받았다. 이에 따라 테살로니키는 그리스에 속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연합군 파견 부대가 이곳에 기지를 조성했다.
대화재가 1917년에 도시를 삼켰다. 8월 18일 한 부엌에서 번진 화마가 32시간에 걸쳐 중심가의 대부분을 파괴했다. 인구 27만여명 중에 집을 잃은 인구가 4분의 1 가까운 7만2000명이나 되었고, 그중 약 5만명이 유대인이었다. 경제도 막대한 타격을 입어 실업자가 70%에 달했다. 시 당국은 도시를 서둘러 복구하는 대신 영국의 토머스 모슨 등 건축가로 하여금 유럽풍의 도시계획을 수립하게 한 뒤 그에 따라 도시를 재건했다.
그리스가 터키와의 전쟁(1919~1922)에서 패배한 뒤 오스만 제국이 나뉘면서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주민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전 오스만 제국의 소아시아와 동 트라키에 거주하던 그리스인 16여만명이 테살로니키로 왔다. 반대로 이 도시의 무슬림 약 20만명이 터키로 이주했다. 이에 따라 인구 구성에서 그리스인이 지배적이게 되었다. 유대인은 14세기 이후 처음으로 소수 집단으로 축소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이탈리아로부터 공습을 받았고, 1941년에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다. 나치는 유대인 거주자들을 철로 옆 게토에 수용했다가 1943년에 아우슈비츠 및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로 추방했다. 추방된 유대인 약 4만5000명 중 4%만 살아남았다. 전후 테살로니키는 새로운 기반시설이 갖춰지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재건되었다.[4]
교통[편집]
테살로니키의 마케도니아 공항에서는 국제선과 국내선이 운영된다. 국제선은 유럽 도시로 연결된다. 마케도니아 공항은 2016년에 600여만명이 이용했다. 국내선 중 아테네 노선은 약 180만명이 이용해 유럽의 10위 노선으로 랭크되었다. 이 공항은 도심의 남쪽 약 15km에 자리잡고 있다. 테살로니키 항구는 에게해 여객 운송의 허브다.
관광[편집]
테살로니키는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매거진은 2013년에 테살로니키를 톱 관광지 리스트에 올렸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2014년에 FDI(외국인직접투자) 매거진에 인적 자본과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미래의 유럽 도시를 선정했는데, 중규모 도시 리스트에 테살로니키를 포함했다. 도심 시가지가 아름다워 거리 사진가들한테 인기가 높다.
로마 유적 중에 테라스가 둘이고 2층 주랑을 갖춘 포럼이 유명하다. 포럼은 건축 용어로는 광장과 인근 건물을 아우르는 건축물을 가리킨다. 이 포럼에는 목욕탕 2곳과 작은 극장이 있다. 극장에서는 검투도 벌어졌다. 포럼은 로마 이전에도 조성되었다가 로마 시대인 2세기에 확장되었다. 포럼과 극장은 6세기에도 활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테살로니키 포럼은 1960년대에 우연히 발굴되었다. 4세기 초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의 궁전도 주요 유적이다. 궁전의 팔각형 부분은 왕좌가 있는 알현실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양한 모자이크가 남아 있다. 이 궁전은 11세기까지도 황제의 거처로 쓰였을 것이라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궁전 근처에 있는 갈레리우스 황제의 개선문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개선문과 연결된 건축물이 갈레리우스 황제의 영묘로 지어진 것으로도 추정되는 로툰다(지붕이 둥근 원형건물)이다. 직경이 24.5m인 로툰다는 벽의 두께가 6m에 달하고 그 덕분에 여러 차례의 지진에도 손상이 되지 않았다. 갈레리우스 황제 서거 후 로툰다는 수십 년 동안 비어 있었다. 테오도시우스1세는 4세기 말에 로툰다를 기독교 교회로 개조하도록 했다. 당시 장식된 아름다운 모자이크의 일부가 남아 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분열되었던 로마를 통일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황제이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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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테살로니키〉, 《위키백과》
- ↑ 〈테살로니키〉, 《나무위키》
- ↑ 〈테살로니키(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테살로니키〉, 《요다위키》
- ↑ 〈테살로니키(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테살로니키〉, 《위키백과》
- 〈테살로니키〉, 《나무위키》
- 〈테살로니키〉, 《요다위키》
- 〈테살로니키(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테살로니키(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