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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겐(노르웨이어: Bergen)은 노르웨이 서남부, 호르달란주에 있는 도시이다. 수도 오슬로(Oslo)에서 서북쪽으로 400km 떨어져 있으며 노르웨이에서 오슬로 다음으로 큰 제2의 도시이다.[1]
개요[편집]
베르겐은 노르웨이 서부 해안에 위치하며 수도 오슬로부터는 서북쪽으로 약 400km 떨어져있다. 깊게 침식된 피오르 사이에 위치하여 높은 산이 둘러싼 지형을 띠고 있으며, 약 15km의 뷔피오르(Byfjorden)를 사이에 두고 도시가 형성되어 ‘피오르의 도시’(the city fjord)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베르겐은 또한 시를 둘러싼 7개의 높은 산들로 인해 7개의 언덕이 있는 로마에 빗대기도 한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으로 시와 외곽은 4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북해에 흩어진 여러 섬이 시의 행정구역에 포함된다. 1070년 노르웨이의 울라프 퀴레(Olav Kyrre) 왕이 도시를 건설하고 ‘산으로 둘러싸인 녹초지’라는 의미에서 베르겐이라는 지명을 붙였다. 베르겐은 13세기부터 노르웨이의 수도가 되었고 13세기 말엽에는 당시 북유럽의 경제적 네트워크인 한자동맹을 관리하는 조직이 설립될 정도로 번성하였다. 오슬로에 비해 해양 접근성이 좋아 수백 년 동안 노르웨이의 최대 도시 자격을 유지하며 번창하였다. 1789년까지 베르겐은 노르웨이의 해외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보유하여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그러나 1830년 수도가 오슬로(Oslo)로 변경되면서 베르겐의 경제적 입지는 축소되었다. 베르겐은 여전히 노르웨이의 산업 중심지로서 농업, 조선, 석유 및 해양자원 개발 등에서 경쟁력을 갖추었고 관광과 금융업도 활발하다. 또한 베르겐 항구(Bergen Port)는 여전히 노르웨이의 해상 물류와 여객운송의 관문으로 통한다. 북위 60° 22′의 고위도에 위치하나,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기후가 온화하여 겨울철에도 평균기온이 영상이며, 지형적인 영향으로 연평균 강수량이 2,000mm 이상으로 유럽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곳 중 하나이다. 반면 눈은 노르웨이에서는 적게 오는 곳에 속한다.[2][3]
역사[편집]
베르겐은 1070년 성립된 도시로 12세기경에는 노르웨이의 수도이기도 하였다. 베르겐의 역사는 1070년 노르웨이의 올라프 3세 국왕이 건설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 후 성곽이 생기면서 노르웨이에서 중요한 곳이 되었으며, 12∼13세기에는 이 나라 수도였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한 후 영국 선원들이 들어오면서 무역항으로 중요해졌다. 중세(中世)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중에서는 최대의 항구이며 무역의 중심이었다. 또한 이때 한자 동맹에 가입하여 스칸디나비아의 서해안의 무역을 지배하며 수백년 동안 크게 번창하였다. 19세기까지도 노르웨이의 최대 도시였다가 크리스티아나(현재의 오슬로)에 그 자리를 빼앗겼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점령을 겪으며 다소 쇠퇴하였다. 현재는 베르겐 내부의 브뤼겐 역사 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4]
문화[편집]
19세기에는 베르겐을 강타한 대화재와 크리스티아나의 발전으로 다소 침체했으나, 그 후 다시 서해안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대화재를 계기로 목재 건축은 금지하고 있으나, 한자동맹 시절의 중심가에는 독특한 목재 건물들이 남아 있으며, 역사 지구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피오르식 해안관광의 출발점인 베르겐은 화려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각종 미술관, 박물관이 있는 문화 도시이다.
한자 박물관(Hanseatisk Museum)은 베르겐시가 항구 도시로서, 예부터 어업과 해외무역이 발달, 14세기에는 한자동맹에 가세하여 더욱 발전을 거듭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박물관이다. 시장 북쪽 브리겐 거리에 위치하며, 1702년 건립된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마리아 교회(Mariakirken)는 브리겐 거리 북서쪽에 위치한 베르겐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내부에는 바로크풍의 선교단이 있다. 트롤하우겐(Troldhaugen)은 노르웨이의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의 집이다. 트롤은 보는 사람에 따라 선인과 악인으로 변하는 숲속의 요정으로 트롤하우겐은 트롤이 살고 있는 언덕이란 뜻이다. 그리그가 사용했던 피아노, 악보, 가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베르겐 수족관(Bergen Aquarium)은 노르네스 반도 서쪽 끝에 있는 노르웨이 최대의 수족관으로, 9개의 큰 수족관과 42개의 작은 수족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다표범, 해수어, 펭귄, 바다새를 볼 수 있다. 판토프트 통널 교회(Fantoft Stavkirke)는 베르겐 교외의 판토프트(Fantoft)에 있는 독특한 통널 교회이다. 1150년에 처음 송네피오르드에 세워졌던 것인데, 보존을 위해 1883년 이곳으로 이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97년 6월 6일 재건축했다. 지붕이 5층으로 되어 있는 독특한 건물이다.
베르겐 대학교[편집]
베르겐대학교는 노르웨이 베르겐에 있는 공립 종합대학교이다. 노르웨이에 있는 8개 대학 가운데 하나이다. 7개의 학부로 구성되어 있다. 베르겐대학교 도서관과 박물관은 학부와 같은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 2023년 유에스뉴스&월드리포트의 글로벌대학순위에서는 세계 199위, 유럽 80위, 노르웨이 대학 중 2위를 기록했다. 베르겐대학교는 해양연구와 기후 및 에너지 변화, 지구의 환경도전 등 3가지의 전략적 분야에 중점으로 두고 교육과 연구를 하고 있다. 베르겐대학교의 동문으로 ‘철의 에르나’로 불리는 보수당 출신의 전 노르웨이 수상 에르나 솔베르그(Erna Solberg)와 전 노르웨이 법무부장관 모니카 맬란드(Monica Mæland), 언론인이자 작가인 한스빌헬름 슈타인펠트(Hans-Wilhelm Steinfeld), 전 UNCTAD 사무총장 무키사 키투이(Dr. Mukhisa Kituyi), 철학자 라르스 굴레(Lars Gule) 등이 있다.
베르겐대학교의 전신으로 1825년에 세워진 베르겐 박물관을 꼽을 수 있다. 후에 베르겐 박물관대학으로 불렸다. 박물관대학은 검사였던 빌헬름 프리만 크리스티와 주교 야코프 노이만에 의해 설립됐다. 이 박물관대학은 과학에 특화한 연구와 교육의 중심지가 됐다. 이곳에서 미하엘 사르스와 다니엘 코르넬리우스 다니엘센, 프리드쇼프 난센 등과 같은 저명한 연구자들이 일했다. 베르겐에는 1153년 베르겐 가톨릭학교가 설립되었고, 1817년 왕립 노르웨이해군학교가 세워지는 등 오랜 학문적 전통이 내려오고 있다. 베르겐에는 1917년 지구물리학연구소와 1930년 자연과학 · 기술학과 소속의 크리스티안 미켈센 개발연구소, 1936년 노르웨이경제대학이 세워지는 등 고등교육과 연구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946년 이들 연구소와 고등교육기관들이 합쳐져 베르겐대학교가 탄생했다. 크리스티안 미켈센 개발연구소는 북구에서 가장 큰 연구개발센터가 되었다.[5]
교통[편집]
베르겐선의 종착점으로, 통근 열차 및 오슬로 중앙역행 열차가 운행된다. 다만 베르겐선이 단선이고 고속화가 힘들어 최속편이 6시간 반이라는 소요시간을 자랑한다. 도로도 딱히 좋다고 볼 수 없어 비슷한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베르겐 공항에서의 항공편 이용이 많다. 물론 악천후 대비나 관광용도, 화물 운송용으로의 철도의 역할은 중요하기 때문에 계속 존치되고 있다.
브르겐[편집]
브뤼겐(Bryggen)은 노르웨이 호르달란주(Hordaland), 베르겐(Bergen)의 옛 부두이다. 14세기~16세기 중기에 브뤼겐은 한자동맹이 이룩한 해상무역 제국을 이루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곳에는 매우 독특한 목조 가옥들이 모여 있는데, 당시의 번영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브뤼겐의 건축물은 1702년 화재 이후 복원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주변 환경에 잘 조화되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브뤼겐은 한자동맹 상인들이 활동했던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브뤼겐은 북유럽의 상관(商館)으로서 뤼베크(Lübeck)와 노브고로드(Novgorod) 지역보다 더 왕성하게 활동했던 곳이다. 베르겐 시의 브뤼겐은 북유럽에서 오래된 큰 규모의 무역항으로 전통적인 목조 가옥이 많아 옛 도시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브뤼겐은 한자동맹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당시의 모습을 도시 내 경관으로 잘 간직하고 있다.
베르겐 항구는 1070년경 올라브 퀴레(Olav Kyrre) 왕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이 항구는 해상무역 독점권을 가지고 있던 노르웨이 귀족 가문의 소유였다. 스베르(Sverre, 약 1180년) 왕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에도 나오는 베르겐 항구는 귀족 상인들의 근거지로 묘사되어 있다. 1350년경 한자동맹 소속 상인들이 베르겐에서 활동하였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겐에서 식료품 포장 무역을 시작했다. 브뤼겐 지역은 독일 이주자에게서 그 외관을 본떴는데, 부두를 향해 나란히 뻗은 좁은 거리를 따라 세워진 건물들이 특징이다. 가옥들은 정원(gård)을 중심으로 들어서 있다. 이러한 구조는 몇몇 3층 목조 가옥에서 흔한데, 박공지붕의 파사드와 측벽 및 지붕을 덧댄 널빤지가 특징이다. 정원의 뒤쪽으로는 화재에 대비하여 주변을 보호할 수 있는 석제 창고나 저장고(kjellere)가 있다. 이 같은 구조는 한자동맹 무역항 거점에 이주자들의 거처를 지을 때 반복적으로 채택되었다. 독신의 독일인 상인은 나무로 지은 작은 집에서 겨울을 지냈으며, 사람들은 저장실을 개인용이나 마을 공용으로 이용했다. 브뤼겐에 한자동맹 상인들이 들어온 이래로, 상인들은 브뤼겐에서 준치외법권을 누렸다. 브뤼겐에서의 준치외법권은 1754년 독일인 어부들과 선주들의 주도하에 노르웨이의 무역 거점이 창설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14세기까지의 역사적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브뤼겐 지역은 수세기에 걸쳐 훼손되었는데, 1406년과 1702년에 발생한 화재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이 같은 피해에도 불구하고, 브뤼겐은 애초의 설계도면에 따라 전통적인 기법으로 재건축되어 중세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955년 브뤼겐 지역에 발생한 화재는 도시의 ⅓을 파괴하며 도시 전반에 피해를 남겼다. 이 마지막 화재 이후로 남아 있는 58채의 가옥에 대해 세심하게 복원이 이루어졌고, 체계적인 발굴 조사를 통해 12세기~18세기의 다양한 모습을 복원하였다. 이를 계기로 변화 없는 내륙과 달리 역동적이었던 당시 해안 거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6]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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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바르나〉, 《위키백과》
- 〈베르겐〉, 《나무위키》
- 〈베르겐〉, 《요다위키》
- 〈베르겐(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베르겐대학교(세계의 대학)〉, 《네이버 지식백과》
- 〈브뤼겐(유네스코 세계유산)〉,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