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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1일 (목) 13:30 판

장면

장면(張勉)는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를 지낸 정치인이다. 1960년 4.19 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장면이 국무총리로 실권을 ㅈ장악했으나 이듬해 박정희가 주도한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실각했다.

개요

장면은 1950년 11월 30일부터 1952년 4월 24일까지 제2대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1960년 8월 19일부터 1961년 2월 17일까지 제7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1948년 UN 총회에 대한민국의 승인을 요청하는 한국 대표단의 수석대표로 회의에 참석하여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냈고, 한국 전쟁 때는 UN과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여 지원을 이끌어냈다. [1]

생애

장면은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 적선동, 삼군부(三軍部) 건물 뒷골목 근처의 외가에서 죽정(竹亭) 장잠(張潛)의 후손인 장기빈과 황 루시아의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본가가 있는 인천에서 성장하였다. 그래서 그를 인천 출신으로 보기도 하고 그의 아버지가 평남 출신이기 때문에 평남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초명은 장지태(張志兑), 아호(雅號)는 운석(雲石), 세례명은 요한(Johan), 영문명은 John Myeon Jang·존 면(John Myeon), 일본식 이름은 다마오카 쓰토무(玉岡 勉).

일제강점기에는 천주교 선교 사목 활동과 언론 활동, 용산신학교, 동성고등학교, 계성국민학교, 혜화유치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광복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1946년 민주의원 의원,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1948년 대한민국의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48년 12월 7일부터 12월 12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제3차 UN 총회에 한국당대표단 수석대표로 파견되어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냈다.

1948년 제3차 UN 총회 한국 대표단 부수석대표와 1951년 10월 제6차 UN 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다녀왔으며, 대통령 바티칸특사를 거쳐 제1대 주미 한국대사 등을 지내고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미국군과 UN군의 한국전 참전을 호소하여 성사시켰다. 1950년 8월과 9월 UN 안보리에서 '한국 전쟁은 내전이며 미국과 남한의 북침'이라는 소련 측의 주장을 논파하기도 하였다.

1946년 과도입법의원 의원 재직 중에는 국대안(국립대학교 설치안)을 발의하여 성사시켰고, 공창제 폐지를 주창하여 가결시켰다. 호헌동지회의 조직과 민주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4·19혁명 후 제5대 민의원(民議員)을 거쳐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집권 후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는 정책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게 되어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총리 취임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그 후 정치정화법(政治淨化法)에 묶여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한때 이주당(二主黨)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66년 6월 4일에 자신의 거주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서 간장염과 당뇨병의 합병증으로 인하여 66세로 급서한 장면은 청렴하고 깨끗한 정치가라는 평가가 자자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포천(抱川) 가톨릭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199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장면의 신앙

1920년 3월 경성 중앙기독교 청년회관(YMCA) 영어과를 졸업하고 장면은 대학교 진학을 위해 미국 유학을 추진하였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천주교회를 설립하고 전교활동을 하던 메리놀 선교회에 그의 딱한 처지가 알려져 메리놀 선교회의 후원하에 그의 동생 장발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되었다. 1920년 10월 장면은 한국 천주교 청년회 대표 자격으로 미국으로 유학, 6개월간 메리놀 신학원에서 영어 실력을 다듬었다. 이곳에는 한국에서 천주교 전교 활동을 벌였던 패트릭 번(한국명 방일은) 등이 강사로 있었고, 패트릭 번 신부는 영어담당 교사였다. 1921년 1월 4일 메리놀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대학교 진학 예비과정(비정규 고등학교 과정)인 버나드 고등학교(Bernards High School)에 입학하였다. 1921년 9월 미국 뉴욕의 맨해튼 대학교 영문학과(英文學科)로 진학해, 영문학 외에 부전공으로 교육학(敎育學)을 전공하였다.

집안으로부터 조금씩 도움을 받기는 하였지만 학비와 밥값을 벌어들이기 위하여 방학 기간과 여가를 이용하여 막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용돈을 조달하였으며, 또 비용을 절약하기 위하여 자취생활을 하였다. 2학년 재학 중 발병하여 병원에 입원하여 1년간 휴학하기도 했으며 이후 다시 복학하여 학업을 마쳤다. 1925년 6월 맨해튼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6월 30일 이탈리아에 도착해, 7월 5일에 로마 바티칸 시티에서 열린 '한국인 79위 순교자' 시복식에 한국인 신자 대표로 참석하고, 7월 6일 당시 교황이었던 교황 비오 11세를 알현한 후 지중해와 인도양을 거쳐 40일의 항해를 마치고 8월 29일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 후 평안남도 소재 메리놀센터 하우스의 어학교수로 부임하였고, 1927년부터는 메리놀신학원 당시 은사였던 패트릭 번 신부가 있던 평양성당에 근무하며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활동하였다. 1928년 평양 천주교회청년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1928년 12월 미국 맨하탄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9년 10월 평양 시내 서포역전 평양천주교구 관리사무소에서 근무하였으며, 11월 영·한 천주교회 용어 사전인 ‘The Summary of Religious Terms‘를 탈고, 출간하였다.

표현의 자유

장면은 1960년 8월 19일의 방송 인터뷰에서 장면은 정치인에 대한 풍자의 자유를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과거 자유당 정권의 언론 탄압 외에도 1960년 6월 1일에 대학교 총장배척운동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동아대학교 학생 1천여명이 부산일보사를 습격하여 난장판을 만든 이후 4.19나 학생운동권, 상이군인 등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보도한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약탈이 계속되었다. 장면은 이는 비민주적인 사태라고 규정하고 취임 초기부터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선언했다.

1960년 11월 18일 자 국제신보 특종 보도로 장경근 도피 사건이 폭로되었다. 자유당 말기 내무장관을 지냈고 3.15 부정선거의 주범 가운데 하나인 자유당 간부 장경근은 검찰 구속 중 병보석으로 서울대부속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자신의 애첩 강만순과 함께 11월 13일에 사라졌는데, 얼마 후 그는 일본에 밀항한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 일일신문은 면이와 경근이 때문에 창피해서라는 설명과 함께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만평을 실었다. 장씨종친회라는 제목의 이 만평은 장면과 장경근을 한데 엮어서 비난한 것이었다. 부패사범을 잡지 못한 수사기관의 무능력을 꼬집은 풍자였다.

외교 성과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대한민국 중심의 통일의지를 표명하였다. 1950년대 장면의 통일관은 이승만의 멸공통일, 승공통일론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나, 1960년 초의 통일방안에 있어서는 무력을 배제한 평화적 통일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61년 3월 북한의 총리 김일성이 제시한 연방제 통일안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김일성이 연방제 통일안을 내놓자 이를 부정하였고, 외무장관 정일형을 통해 이를 반박하게 했다.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천명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에는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과 미 국무성, 국제 사회를 대상으로 설득하여 한국 전쟁 시 미군과 유엔 다국적군의 참전을 적극 이끌어냈다. 한국 전쟁 이후에도 미국과의 적극적인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미국 원조의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 유지해 나갔다. 한때 미국에서는 이승만을 강제퇴진 시킨 뒤 그를 한국의 통치자로 세울 것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친미 정책이 미국 의존정책이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병존한다. 강준만은 그를 지독한 숭미주의자라며 혹평을 내리기도 했다.

제1공화국 기간 중에 이승만 정권의 강경한 반일 외교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었고,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의 대가로 일본과의 재수교 압력을 받으면서 제2공화국 초반부터 일본과의 회담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본과의 무리한 협상 노력은 극우와 극좌 양측으로부터 친일파, 친일 정권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한일 외교 재개의 대가로 장면 내각에서 보상금을 28억 5천만 달러를 요구하자 일본이 거절함으로써 장면 내각의 한일 협정은 무산되고 말았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 시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승인을 설득하여 성사시켰다. 공산권 국가의 반발과 제3세계 국가들의 냉담한 반응 속에 그는 미국과 프랑스, 영국을 비롯한 각국의 UN 총회 대표자들을 찾아다니며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여 승인을 얻어냈다. 그의 유창한 영어 실력 외에 그의 참여로 교황청과 각국의 천주교 인사들의 협력과 승인 부탁이 작용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의 상원과 하원 및 미국 국무부를 설득, UN과 국제사회에도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줄 것을 호소하여 한국 전쟁 파병을 이끌어냈다.

서울 명륜동 장면 가옥

서울 명륜동 장면 가옥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가옥이다. 2007년 10월 1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제2대 국무총리를 지낸 운석(雲石) 장면(張勉)이 거주했던 집으로 1937년 건립되었다.

대지 403.3㎡에 단층 건물 4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를 비롯해 사랑채, 경호원실, 수행원실로 사용되던 건물들이 한식과 일식 그리고 서양식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천주교의 교육운동과 문화운동을 이끌었고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건국에 일익을 담당하였던 역사적 인물의 발자취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1930년대의 주거양식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동영상

각주

  1. 장면〉,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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