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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0일 (월) 15:02 판
무덤은 사람의 사체를 매장한 시설물이다. 묘·분묘라고도 한다. 사체를 땅에 묻어 처리하는 시설이며, 인간적 지성과 감성이 결합되면서 기념적 형상물로 발전했다. 동양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무덤 흔적이 나타난다. 무덤을 유택이라 하여 사자가 저승에서 사는 집이라는 생각이 자리하면서 무덤을 지키고 가꾸는 조형과 조경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무덤의 형식도 다양해졌다. 우리나라는 선사시대의 지석묘, 삼국시대 중기까지 이어진 순장 풍습, 고려 초기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풍수도참사상이 특징을 이룬다. 명당을 찾는 풍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무덤에는 묘비를 세워서 그 사람을 추모한다. 모든 민족이나 문화에서 무덤이 사용되는 것은 아닌데, 힌두교에서는 사체를 화장한 후에 갠지스강에 흘려 보내기도 했고,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부활에 대한 신앙에 따라, 동굴 무덤에 시체를 모셨다가 유골이 남으면 유골함에 모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그리스도를 빈 무덤에 모셨다. 또 티베트에서는 무덤을 만들 부드러운 지대가 없었기 때문에 시체를 독수리 같은 맹금류가 파먹도록 땅 위에 올려놓는 조장(鳥葬)을 치르기도 했다.
무덤은 꼭 땅 위에 묻힌 것만을 칭하지는 않는다. 신라의 문무왕은 물 속에 묻었는데, 이런 경우는 수중묘(水中墓)라고도 했다.
개요
무덤은 송장이나 유골을 땅에 묻어 놓은 곳. 즉, 죽은 사람이 묻히는 장소. 흙으로 둥글게 쌓아 올리기도 하고 돌로 평평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대개 묘석을 세워 누구의 것인지 표시한다.
한자로는 묘(墓), 묘지(墓地), 구묘(丘墓), 구분(丘墳), 구총(丘塚), 만년유택(萬年幽宅), 분영(墳塋), 유택(幽宅), 총묘(塚墓) 또는 분묘(墳墓)라 한다. 묘가 대량으로 모여 있는 지역을 공동묘지라 부른다. 세는 단위는 장, 기(基), 자리 등이다.
무덤은 어원적으로 볼 때 '묻다[埋]'라는 동사의 어간 '묻'에 명사화 접미어 '엄'이 맞춤법의 규정에 따라 '무덤'으로 표기된 것으로서 '죽[死]+엄'이 '주검'으로 표기되는 것과 같은 예이다.
무덤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그 기원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대개 두 가지로 집약된다. 그 하나는 사체의 처리물이라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기념적 형상물이라는 관점이다.
사람이 죽으면 며칠 사이에 부패하기 시작하여 악취가 풍기고 보기에 흉측하므로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처리방법의 하나로 무덤이 생겼다는 것이 전자의 견해이다.
사체 처리의 방법은 생활환경에 따라서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체를 바위나 나무 위에 얹어놓음으로써 금수에게 처치를 맡기는 풍장(風葬), 강변이나 해변에서 물속에 가라앉힘으로써 물고기에게 처치를 맡기는 수장(水葬), 열대지방에서 급속히 진행되는 사체의 부패에 대처하기 위하여 화장을 하는 것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무덤은 그러한 사체 처리의 한 방법으로서 땅을 파고 묻어버리는 매장의 결과로 생긴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공동생활의 일원이 죽으면 슬픈 감정이 우러나고 그리운 정이 생기므로 사자 대신에 그를 추모할 어떤 기념적 형체로서 무덤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후자의 견해이다. 그러나 이 두 견해 사이에는 시간적 선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물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시대는 단순한 사체 처리의 한 방법으로서 무덤을 만들다가 차차 인간적 지성과 감성이 열리게 되면서부터 단순한 사체 처리에 어떤 기념적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리할 수 있다. 사체 매장으로 무덤을 만들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전기 구석기시대도 이런 풍습이 행해졌으리라고 추측은 되지만,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동양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그 흔적이 나타난다.
중국의 경우, 북경(北京) 부근의 주구점(周口店) 상정동유적(上頂洞遺蹟)은 약 1만8000년 전의 것인데 1933∼1934년의 조사 때 7인분의 화석 인골이 동구(洞口) 상실(上室)의 지하 제4층에서 석기 · 골각기 · 동물의 뼈 등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것이 동양에서 발견된 가장 오랜 무덤인데, 이것으로 미루어 당시의 인간들은 생활공간의 한 구석을 간단히 파고 사체를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
무덤은 그 형태나 재료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로 갈라지는데, 이것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봉분의 형태에 따른 분류: 방형분(方形墳) · 원형분 · 전방후원분.
② 봉분의 재료에 따른 분류: 토장묘(土葬墓) · 지석묘(支石墓) · 적석총(積石塚) · 석총 · 토총 · 전축분(塼築墳).
③ 유구(遺構)의 재료에 따른 분류: 석관묘 · 석곽묘(石槨墓)돌덧널무덤 · 목관묘 · 목곽묘 · 옹관묘 · 도관묘(陶棺墓) 등과 같이 세 가지 유형에 15가지 정도의 종류로 갈라진다.
무덤의 기능
인류 초기의 무덤이 시체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 신앙과 정치가 생겨나고 사상과 철학이 자리를 잡으면서 이 개념은 아주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그래서 이후에 형성된 무덤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은 ① 지하에 저승이 있다는 신앙에 따라, ② 사자(死者)를 겁내 관계를 끊기 위하여, ③ 움집[竪穴住居] 생활의 유풍에서, ④ 단순히 위생적인 면에서, ⑤ 이곳에 주검을 묻어두었다는 표지를 남겨두어 알아보기 쉽도록 등의 해석이 있다.
이 중에서 ②, ④, ⑤의 의미가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퍼져 있다고 한다. 특히 ②의 경우, 시체를 단단히 묶어서 굽혀묻기{屈葬)를 하거나 바로펴묻기(伸展葬)를 한 위에다 무거운 돌로 눌러놓은 것은, 죽은 자가 복귀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막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⑥ 시체를 보존하여 훗날에 대비하고자 하는 신앙적인 필요성을 더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이집트에서 미라를 만들어 피라미드에 안치해온 데서부터 기독교의 부활사상에 바탕을 둔 매장 등에 이르기까지 그 신앙적인 배경을 이해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에 제시된 이유만으로 우리 선사 시대의 커다란 고인돌(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부른다)이나 경주의 왕릉은 물론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진시황릉과 같은 장엄한 무덤을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 주변의 호화 분묘들을 더하면 한층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여기서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⑦ 기념 또는 과시용으로서의 기능이다. 다시 말해 죽은 자를 추모하는 상징이거나 어떤 힘을 과시하기 위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기능은 큰 돌로 만든 비석을 더해야 비로소 그 의미가 완성된다. 마지막으로 비록 우리나라와 중국 등에 한정된 것이지만, ⑧ 죽은 자의 영험한 힘을 받아 후손들이 발복(發福)하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다는 것, 즉 풍수지리적인 요소도 소홀하게 다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소 미신적인 면이 있다손 치더라도, 산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또한 무덤의 기능 가운데 하나로서 우리 정신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지역별 인식 차이
죽음, 혹은 시신을 상징하는 무덤은 영 좋지 않은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을 것 같지만, 의외로 많은 문화권에서 무덤을 딱히 혐오시설로 인지하지 않는다. 물론 한국에서도 반드시 무덤을 멀리 떨어뜨려 놓고 기피하는 풍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교에서는 죽은 사람을 가까이해서도 안 되고 멀리 해서도 안 된다는 원칙이 있어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나 바로 옆에 묘지를 조성하지 않지만, 그래서 이 기준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가까운 마을 뒷산 같은 곳에 묘를 많이 썼다. 산 곳곳에 중구난방식으로 산소가 조성된 경우가 보통이다. 이 경우 산소조성 당시에는 길이 닦여 있어도 수십, 백여 년 지나면 수풀이 우거져서 길이 사라지는 일도 흔해서 꽤나 찾아가기 힘들어진다. 한국에서는 직계 조상의 묘(무덤)를 따로 산소(山所)라 한다. 山이라는 한자가 우리가 흔히 아는 산의 뜻이 아닌 무덤을 뜻하기도 하고 산에 묘를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 요즘도 한국 농촌에 있는 주택들을 차 타고 지나가다 보면, 아예 묘지가 집 바로 뒷쪽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걸 가끔 볼 수 있다.
죽은 조상을 추모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조상의 무덤이 가까이 있는 것을 선호하는 문화권도 꽤나 있다. 심시티 4에서는 도시가 어느 정도 커지면 공동묘지를 지을 수 있는데, 한국인들은 당연히 주택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무덤을 건설했지만, 나중에 공략에 따르면 주택 가까이 있는 곳에 지어야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수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실제로 유럽, 일본,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전 세계에도 주택가 옆에 떡하니 공동묘지가 있는 경우가 꽤나 있다. 이 경우는 무엇인가 하면 먼 과거에 마을이 작았던 시절에는 이 공동묘지가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마을이 커지면서 나중에는 마을이 공동묘지를 감싸버린 형태가 된 것이다. 좀비물에서 공동묘지에서 좀비가 깨어나면 얼마 뒤 도심 한복판이 좀비로 가득 차는 게 이상한 게 아닌 것.
사실 유럽의 경우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문화권이고, 중세 이래로 마을들이 그 마을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마을 주민이 사망할 경우 교회 묘지에 묻히는게 당연한 것이었다. 마을의 중심이 되는 본당이 동네 한복판에 있는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그 때문에 아직도 공동묘지가 거주지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무덤이 거의 대부분 평평하게 되어 있는데, 산악 지대가 별로 없고 평야 지대가 많아서 많은 흙과 풀들을 쉽게 구해올 수 없기 때문에 봉분 없이 무덤을 만든다. 그러나 미국의 부유층들은 자기 조상님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함과 동시에 자기 조상님들의 시신 훼손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거금을 들여 돌과 콘크리트를 사용해서 무덤을 크게 만들기도 한다. 보통 공동 묘지라면 비석이나 추모 석판이 숙연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나라는 생각과 달리 무덤을 중심으로 주위에 산책로가 준비된 공원같은 분위기인 곳도 많아서 마을 주민의 조깅 코스가 되기도 한다. 다만 이것은 유럽 문화의 직접적 영향이 강한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역 한정이며, 미국도 대다수 지역은 인구 밀집지대와 무덤이 멀리 떨어진 경우가 많다. 개신교와 유대교도 무덤을 부정한 공간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산악 지대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그 많은 흙과 풀들을 쉽게 구해올 수 있기 때문에 봉분을 충분히 쌓아 무덤을 만든다. 또 중국의 경우 미국보다 역사가 훨씬 오래된 나라이다보니, 새 왕조들이 세워질 때마다 역대 군주들의 시신을 모신 무덤을 훼손당하지 않도록 일부러 묘지를 매우 크게 만들어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도록 했다.
프랑스의 경우 더 심해서, 파리의 몽파르니스 지역을 비롯해 여러 곳이 공동묘지를 공원 비슷하게 운용한다. 역병이 창궐하던 시절 죽은 선인들의 뼈를 깨끗하게 씻은 뒤 본래 고대 로마 시대에 탄광으로 사용됐던 지하 통로를 공동묘지로 용도변경하여 차곡차곡 쌓아뒀는데, 이게 현대 시점에서 상당히 그로테스크 하다.
호주 사람들도 묘지를 혐오시설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유인즉슨 묻힌 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인데, 유령이 되더라도 도움을 줬지 해를 끼치진 않을 거라는 것. 하지만 이러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도 무덤을 완전히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덤은 기본적으로 죽음과 맞닿아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관련된 괴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다만 워낙 오랜 기간 동안 무덤이 마을과 주변에 형성된 것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분위기가 있는 것. (+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특별히 비참한 죽음이 아닌 이상 '죽음 자체'가 무서운 일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도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천수를 다 누리고 자연사하는 비율이 오히려 적었고, 더 이전엔 맹수의 습격이나 당시 기준의 불치병 등 끔찍한 죽음이 자연사보다 오히려 더 흔했음을 생각하면.)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흔히 모스크 옆에 위치한 무덤들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쪽 동네에서는 왕이나 성자, 고위 성직자의 무덤을 아예 집처럼 지어서 그 안에 관을 안치하는 식으로 만들기도 하며 여기에서 기도하려는 방문객으로 붐비기도 한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죽은 이에 대한 기도를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했지만 시아파가 성자 숭배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을 깊게 받은 터키, 이집트 쪽은 그냥 신경 안 쓰는 중. 터키에서는 오히려 죽은 이를 참배하기 편하다며 모스크 안에 공동묘지를 만들기도 하고, 지금도 고인이 죽은 날에는 고인의 무덤을 찾아서 꽃다발을 바치고 죽은 이에게 쿠란을 읽어주거나, 짤막한 기도를 올리는 풍습이 있다. 물론 튀르크 민족 고유의 풍습이라, 이를 우상숭배로 간주하는 제도권 이슬람에서는 썩 달가워하는 전통은 아니다. 당장 잘랄 웃 딘 루미를 비롯한 성인의 무덤에 가면 터키 종교부 이름으로,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거나, 묘소의 나무에 소원쪽지를 매달거나, 맑은 물을 떠놓고 기도하거나, 동전을 던지는 행위는 우리 종교의 전통이 금지하는 우상숭배 행위이자 미신이므로 엄격히 금합니다." 라고 써놓은 공지들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래도 할 사람들은 한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무덤이 가까이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도 보면 알겠지만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시신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하게 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동굴에 넣고 바위로 막아서 부정타지 않게 했을 정도며, 현재도 이스라엘의 공동묘지는 외딴 사막지역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특징 때문에 비상시에는 훌륭한 도피처가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매장을 했지만, 불교의 영향력이 강력해진 ]]고려시대]]에는 주로 화장을 많이 하였다. 그러던 것이 유교의 영향이 강해진 조선시대에는 다시 매장으로 바뀌고, 풍수지리의 영향 역시 강하게 받으면서 무덤의 위치가 산으로 올라가게 된다. 무덤의 위치 자체가 으슥한 곳으로 바뀌고 일상 공간에서 먼 곳으로 변경된 점이 무덤에 대한 공포심을 증가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한국 불교에서는 아직도 승려가 죽으면 화장을 한 후 부도(승탑)를 만들어 절의 입구 같은 곳에 안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대중들이 별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인식에 달린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무덤이 무서워서 멀리 떨어진 건지, 무덤이 멀리 떨어지다 보니 무섭게 된 것인지는 연구해 봐야 할 일. 이후 일제강점기에 화장이 다시 생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매장이 대세였고 대한민국에서도 1990년대까지는 유교와 개신교의 영향으로 매장이 대세였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다시 화장이 대세가 되었다.
한국에서 무덤이 영 좋지 않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 중 하나가 경부고속도로의 영락IC. 영락공원 설립당시 지역주민들의 집값 하락 피해를 막기 위해 경부고속도로로 직접 연결되는 도로를 냈다. 이에 따라 부산영락공원으로 들어가는 차량진입로도 자동차전용도로 취급을 받는 편. 보행자와 이륜자동차는 팔송에서 금정도서관로를 통해 들어갈 수 있지만 장례 관련 차량들은 무조건 고속도로를 타고 들어가야 된다.
북한은 2019년 이전까지는 매장이 대세였으나 김정은이 묘지 부족을 사유로 매장 금지령을 내려서 2021년 현재 화장만 가능하다.
어떤 나라든 무덤을 이전하거나 국가적 사료가치로 인하여 발굴할 때는 유족이나 국가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한국같은 경우는 무덤을 발굴 할 때는 발굴을 시작하기 이전에 제를 올려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을 치른 다음 발굴을 시작한다.
과거에는 무덤에 부장품을 묻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은 무덤에 부장품을 묻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료적 가치
고대사에서는 오래된 무덤인 고분(古墳)이 지역사, 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각종 권력자들이 자신이 죽을 때 자신의 소지품 혹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같이 묻었기 때문이다. 중,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대 변화에 따른 무덤 양식(묘제)의 변화를 지겹게 외웠던 것도 사실 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연히 이런 무덤엔 각종 비싸고 희귀한 물건도 많이 묻혀있고, 무덤을 파서 이런 물건을 훔치는 사람을 도굴꾼이라고 한다. 특히 무덤에 묻혀있는 물건들이 굳이 귀금속같이 엄청 비싼게 아니어도 그곳에 묻혀있는 과거의 편지나 의복 등은 왕릉같이 호화로운 왕족이나 귀족의 삶이 아닌 당시의 서민들의 생활상을 제일 밀접하게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예컨데 요즘 조선시대의 무덤을 발굴할 때 조선 중기나 근세 때의 한글편지가 발굴되어 한글창제 이후의 한글의 변천과정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장례식을 어떤 형식으로 했는지 당시 입던 옷이나 당시의 풍습을 확인할 수 있다. 편지같은 경우, 양반이나 좀 부유한 서민 무덤에 한정된다. 왜 그런가하면 보통 백성들은 거의 몸만 묻어주는 게 많다보니 글이 적혀진 기록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그렇다고 보통 백성 무덤은 무시당하는 것도 절대 아니다. 당시 옷재질이 어땠는지 죽은 시신을 부검하여 그땐 뭘 먹었는지 그 시대 생활상 연구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특히 무덤을 만들 때 주위에 생석회를 들이부어 만드는 조선시대 이후 묘제에서는 석회가 물과 반응하면서 고열이 나서 관속을 멸균하는 효과가 나고, 시신이 수백년을 썩지 않고 버티는 미라 상태가 되기도 한다. 400년 이상 된 파평윤씨 유해(미라)가 유명하다.
다른 이야기인데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미라 같이 된 시체가 발굴되었는데 약 4, 5천 년 전 쯤에 누구에게 활을 머리에 맞고 살해당한 남성의 시체였다. 이런 시체조차도 부검을 통하여 당시 버섯에서 여러 식물과 새고기 같은 것을 먹었고 신을 묶는 끈이라든지 소지품으로도 당시 생활상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적어도 몇백 년 된 무덤의 가치는 상상하는 것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묘제는 그 문화권의 사후 세계관을 보여 주는 것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생활상은 서구화되었지만, 무덤의 형식만큼은 여전히 전통적인 봉분이며 화장, 수장, 빙장 등 자연장의 전파도 그다지 빠르지 않다. 세계화된 현대도 그런데 고, 중세라면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무덤의 양식과 그 부장품은 고고학적으로도 그 문화의 계통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무덤의 등급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무덤을 지칭하는 명칭은 형태와 성격에 따라 분(墳), 능(陵), 총(塚), 묘(墓) 등으로 나뉜다.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경우에는 능, 원, 묘로 구분하며, 알 수 없는 경우 총, 분으로 구분한다.
-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의미한다. 조선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무덤인 영릉이 그 예다.
- 원(園)은 왕의 친척(왕세자, 부모, 후궁 등)이 묻힌 무덤을 의미한다. 조선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의 무덤인 순강원 등이 있다.
- 묘(墓)는 그 외의 사람이 묻힌 무덤을 의미한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무덤을 김유신묘라고 일컫는다.
- 총(塚)은 주인을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무덤을 말한다. 경주에 위치한 천마총 등이 있다.
- 분(墳)은 주인도 알 수 없으며,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고 하기 어려운 무덤을 말한다. 나주 송제리 고분 등이 있다.
중국에서는 '림(林)'도 있는데, 공자나 관우 같이 성인(聖人)격으로 보는 인물의 무덤을 공림(孔林), 관림(關林)으로 부른다. 한때 중화제국 황제를 칭했던 원세개의 무덤도 원릉이라고 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원림'(袁林)으로 타협을 봤다. 그리고 일부 정치 지도자들의 무덤도 능, 또는 능원이라 부르는데 손문의 중산릉, 장개석의 자호능침(慈湖陵寢), 화국봉의 화릉(華陵) 등이 그 예다.
일본에서는 '원(園)'의 등급이 없고 황태자를 포함한 황족의 무덤은 일괄 '묘(墓)'다.
동영상
참고자료
- 〈무덤〉, 《나무위키》
- 〈무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무덤〉, 《위키백과》
- 〈무덤의 기능은?〉, 《장례의 역사》
- 김성아 기자, 〈생의 마지막에 만나는 또 다른 공간, 무덤〉, 《홍대신문》, 201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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