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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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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마을은 고유한 민속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을 말한다. 전국에는 안동하회마을, 성읍민속마을(제주), 경주양동마을, 고성왕곡마을(강원), 아산외암마을(충남), 성주한개마을, 영주무섬마을, 영덕괴시마을 8곳 민속마을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민속촌 민속마을에서는 지역과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 가옥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강원도너와집, 제주도돌담집, 울릉도투막집도 한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외에도 옛 지방 행정 기관이었던 관아를 비롯하여 교육 기관이었던 서원과 서당, 의료 기관이었던 한약방, 토속 종교 건축물이었던 서낭당 등을 볼 수 있다.

민속마을 소개

안동하회마을

안동하회마을(安東河回마을)

하회마을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 성마을이며, 와가와 초가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된 곳이다. 특 히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류운룡 선생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류 성룡 형제가 자라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고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 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해당하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327m의 화산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 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삼신당 느티나무가 있는 지역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삼신당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들의 집들이 정남 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와가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 도 특징이라 하겠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 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 생활문화와 고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하회마을은 2010년 7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우리나라의 열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2010. 7. 31) 되었다. 유네스코는 등재 결의안에서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양동'은 주거 건축물과 정자(亭子), 정사(精舍), 서원(書院) 등 전통 건축물들의 조화 와 그 배치 방법 및 전통적 주거문화가 조선시대의 사회 구조와 독특 한 유교적 양반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이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하게 지속되고 있는 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문집, 예술작품과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 및 문화적 성과물과 공동체 놀이, 세시풍속 및 전통 관혼상제 등 주민 들의 생활과 신앙에 관계된 무형유산이 세대를 이어 전승되고 있는 점 도 높이 평가하였다.

하회마을의 세계유산 등재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생활공간이며,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살아있 는 유산(Living Heritage)으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한국인 들의 삶 자체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성읍민속마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 있는 민속마을이다. 1984년 6월 12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유형·무형의 여러 문화재와 옛 생활의 자취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마을 뒤쪽으로는 영주산이 있고, 근처에는 천미천이 흐른다. 마을에는 목초지와 억새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제주도를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의 세 지역으로 나뉘어 통치하였는데, 1423년 지금의 성읍민속마을에 현청(縣廳)이 들어선 이래 한말까지 약 5백년 동안 정의현(旌義縣) 소재지 구실을 했으며 마을에는 성곽을 비롯하여 동헌으로 쓴 일관헌(日觀軒)과 향교에 딸린 명륜당(明倫堂)과 대성전(大成殿)이 남아 있다.

성곽의 크기는 객사 대문을 중심으로 지름이 대략 250보(步)이며 성곽은 가로 60첩(堞), 세로 50첩 규모로 세웠다. 살림집은 대체로 안거리와 밖거리 두 채로 이루어지며 ㄱ자 또는 ㄴ자 모양으로 배치되었다.

제주 성읍마을 내에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들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제주 성읍마을 고평오 고택, 제주 성읍마을 고창환 고택, 제주 성읍마을 객주집, 제주 성읍마을 대장간집, 제주 성읍마을 한봉일 고택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박수머리 또는 무성목으로 불리는 돌하르방 12기가 있다. 제주도 다른 지역의 돌하르방에 비해 얼굴이 둥글넓적하고 눈썹이 그려져 있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신수를 관장하는 '안할망당', 부인들의 부인병을 관장하는 '광주 부인', 가축의 질병과 양육을 관장하는 '쉐당' 등 다양한 민간신앙이 남아 있으며, 마을제인 포제가 해마다 열린다.

경주양동마을

양동 민속마을은 조선시대 전통문화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최대 규모의 마을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으며 1984년 12월 24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경주 손씨(慶州 孫氏)와 여주 이씨(驪州 李氏)의 두 가문에 의해 형성된 유서 깊은 양반마을이다. 15세기 중반 조선시대 문신 손소(孫昭)가 양동으로 이주하고, 이번(李蕃)이 손소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정착하면서 오늘과 같은 양성 씨족마을의 틀이 갖추어졌다. 이러한 배경으로 '외손마을'이라는 별칭이 있다. 마을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조선중기 중앙의 관직을 두루 역임한 손중돈(孫仲暾)과 사후 동방5현의 한 분으로 종묘와 문묘에 동시에 배향된 재상이자 성리학자 이언적(李彦迪)이 있다.

마을 북쪽으로는 설창산이, 남쪽에는 약 100m 높이의 성주봉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양동천이 흐른다. 서쪽 산 너머에는 양동마을의 경제적 토대였던 안강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마을은 안계(安溪)라는 시내를 경계로 동서로는 하촌(下村)과 상촌(上村), 남북으로는 남촌과 북촌의 4개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지형적인 특성으로 인해 마을 바깥에서는 마을의 전체적인 규모나 가옥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우나, 한자로 ‘말 물(勿)’자를 거꾸로 놓은 형상이라고 전해진다. 즉, 마을 북쪽에 위치한 설창산의 산줄기가 물(勿)자 모양으로 내려와 능선을 이루고, 능선이 이루는 세 골짜기에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손씨와 이씨의 양 가문은 각각 서로 다른 골짜기에 자신들의 종가와 서당, 정자 건물을 두고 있다. 신분의 차이에 따라 지형이 높은 곳에 양반가옥이 위치하고 낮은 곳에 외거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듯 형성되어 있다.마을 가옥의 대부분은 ㅁ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부엌은 ㄱ자형, 서당은 ㅡ자형이 많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돌담길이 이어지며,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1984년 12월 24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로 지정된 경주 양동 무첨당, 경주 양동 향단, 경주 양동 관가정, 손소 초상 등과 국가민속문화재 12점과, 도지정문화재 8점이 있다. 원나라 말기 법전인 지정조격의 세계 유일본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과거 노비들이 살았던 초가집도 보존되어 있다.

2010년에는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줄다리기와 연날리기 등 다양한 전통놀이가 마련되어 있다. 주변 명소로 이언적이 거주하였던 독락당(獨樂堂)과 사후에 그를 배향한 옥산서원(玉山書院), 손중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동강서원(東江書院)이 있다.

고성왕곡마을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에 있는 민속마을이다.

19세기 전후에 건립된 북방식 전통한옥과 초가집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밀집·보존되어 있어 1988년 전국 최초로 전통건조물 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 2000년에는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마을은 동쪽의 골무산, 남쪽의 호근산과 제공산, 서쪽의 진방산, 북쪽의 오음산 등5개의 산봉우리와 송지호(松池湖)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와 차단된 골짜기 형태의 분지를 이룬다. 다섯 개의 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고 하여 오봉(五奉)으로 이름 붙여졌다.이러한 지형 덕분에 한국전쟁 당시 마을에서 불과 40km 떨어진 지역에서 격전이 지속되었으나 대부분의 집이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따르면 이곳은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다'는 풍수의 의미에 충실한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의 역사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14세기 말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의 최측근이었던 함부열(咸傅說)이 이성계의 조선왕조 건국에 반대하여 마을 근처에서 은거하였고, 그의 차남이 이곳으로 옮겨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오늘날까지 약 600년 동안 그의 후손인 양근 함씨(강릉 함씨라고도 함)와 강릉 최씨가 주를 이루어 거주하고 있다.

19세기 말 인구가 증가하면서 마을은 금성(錦城), 왕곡(旺谷), 적동(笛洞)의 세 마을로 분리되었다가 일제 강점기 때 다시 합쳐서 오봉(五奉)이라 불렸다. 이곳은 19세기 말 동학(東學)의 활동과 관련이 깊다.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崔時亨)이 1889년 이곳에 머물며 포교활동을 하였고, 1894년 동학혁명 당시에는 관군을 피해 함일순가옥에서 지내며 전력을 재정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는 '동학의 빛 왕곡마을'이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마을 내 대부분의 가옥은 관북지방에서 볼 수 있는 북방식 전통한옥이다. 안방과 사랑방, 마루, 부엌을 한 건물 안에 배치하고 부엌에 마구간을 연결한 'ㄱ'자 형의 겹집구조를 보인다. 가옥에는 대문과 담이 없어 앞마당이 개방적인데 이는 햇볕을 충분히 받고 폭설로 인한 고립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반면에 뒷마당은 비교적 높은 담장으로 되어 있어 폐쇄적인 구조를 띄는데 이는 뒤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을 막기 위한 용도이다. 또,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 특성상 지붕에 쌓이는 눈의 무게를 지탱하고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붕 뒤쪽(북쪽)에 두꺼운 나무를 자재로 사용하였다.

또한 외양간 지붕으로 마을 내 집들을 구분할 만큼 외양간 지붕이 가옥마다 달리 되어있는 점이 특징이다. 'ㅅ'자 모양의 맞배지붕과 지붕이 한쪽으로만 경사져 있는 가적지붕 등 이곳의 외양간 지붕은 한옥의 다양한 지붕 형식을 가지고 있다.

마을에서는 어머니의 제사를 반드시 차남이 모시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고려 말 함부열의 차남이었던 함치원(致遠)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음력 1월 14일에는 오곡밥 아홉 그릇을 먹고 나무 아홉 짐을 하는 풍습이 전해진다.

아산외암마을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있는 마을이다. 약 500년 전부터 형성되어 온 외암민속마을은 충청도의 고유 격식인 반가의 고택과 초가 돌담이 보존되어 있다. 2000년 1월 7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마을은 북쪽 설화산(雪華山)을 주봉으로 그 남쪽 경사면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서쪽이 낮고 동쪽이 높은 지형 조건으로 주택은 거의 서남향 또는 남향이다.

마을 곳곳에 냇물이 흐르며 입지가 좋고 일조량이 많으며 겨울에 북서계절풍울 막아 주는 등 지형적 이점이 있어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500여 년 전에는 강씨(姜氏)와 목씨(睦氏)가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이정(李挺) 일가가 낙향하여 이곳에 정착하면서 예안이씨(禮安李氏)의 후손들이 번창하고 인재를 배출하여 반촌(班村)의 면모를 갖추고 반가(班家)의 가옥이 생겨났다.

그 뒤 이정의 6대손이며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이간(李柬:1677~1727)이 설화산의 우뚝 솟은 형상을 따서 호를 외암(巍巖)이라 지었는데 그의 호를 따서 마을 이름도 외암이라고 불렀으며 한자만 외암(外巖)으로 바뀌었다.

마을 입구에는 밤나무를 깎아서 세운 남녀 장승과 열녀문이 있고, 곳곳에 조선시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물레방아, 디딜방아, 연자방아 등이 보존되어 있다. 마을에는 조선시대 이정렬(李貞烈)이 고종에게 하사받아 지은 아산 외암마을 참판댁(국가민속문화재)을 비롯해 영암댁, 송화댁, 외암종가댁, 참봉댁 등의 반가와 그 주변의 초가집들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 있는데 전통가옥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영암댁은 회화나무와 수석이 어우러진 정원이 아름답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 등 문화유산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성주한개마을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한옥 보존마을이다. 2007년 12월 31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영취산 아래 성산이씨가 모여 사는 전형적인 집성촌으로 조선 세종 때 진주 목사를 지낸 이우가 처음 자리잡은 후 대를 이어 살아왔으며 현재 월봉공 이정현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100여 채의 전통 고가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각 가옥들이 서로의 영역을 지켜가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풍수지리설로 보아 영남 최고 길지로 꼽히며,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장헌세자)의 호위무관을 지낸 이석문, 조선 말의 유학자 이진상 등 명현을 많이 배출하였다.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조물과 민속자료 등이 많이 있는데. 월봉정, 첨경재, 서륜재, 일관정, 여동서당 등 다섯 동의 재실이 있고,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그리며 북쪽으로 사립문을 냈다는 북비고택, 이진상이 학문을 닦던 한주종택, 20세기 초 목조 건축인 월곡댁,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교리댁 등이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주변에 동방사터 칠층석탑, 법수사터, 금당터 돌축대, 청암사, 수도암, 가야산국립공원 등의 관광지가 있다.

영주무섬마을

‘육지 속의 섬마을’로 불리는 영주무섬마을 주민들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옛 모습을 재연하는 축제의 한 장면. 영주시 제공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있는 전통마을이다. 2013년 8월 23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무섬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 원래 이름이다.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乃城川)이 동쪽 일부를 제외한 3면을 휘돌아 흐르고, 내 안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모래톱 위에 마을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풍수지리학상으로는 매화 꽃이 피는 매화낙지, 또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蓮花浮水) 형국이라 하여 길지(吉地) 중의 길지로 꼽힌다.

이곳에 사람이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으로 여겨진다. 반남박씨(潘南朴氏) 입향조(入鄕祖)인 박수가 처음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뒤, 그의 증손녀 사위인 선성김씨(宣城金氏) 대(臺)가 영조 때 다시 무섬에 들어왔다. 이 무렵부터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함께 세거(世居)해 오늘날까지 두 집안의 집성촌으로 남아 있다.

모두 48가구(2004)에 1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가옥 가운데 38동이 전통가옥이고, 16동은 100년이 넘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그야말로 마을 전체가 고택과 정자로 이루어져 있고, 안동 하회마을과 지형적으로도 비슷해 천혜의 자연조건을 자랑한다. 하회마을과 달리 일반에 그리 알려지지 않아 옛 선비고을의 맛을 흠씬 맛볼 수 있는 것도 무섬마을만이 가진 특징이다.

문화재도 많아 김규진가옥(金圭鎭家屋), 김위진가옥(金渭鎭家屋), 해우당고택(海遇堂古宅), 만죽재고택(晩竹齋古宅) 등 9점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와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2013년 8월 23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영덕괴시마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 있는 조선시대 전통마을이다. 2021년 6월 21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영해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800m쯤 가면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탄생지이자, 조선시대 전통가옥들로 둘러싸인 고색창연한 마을 괴시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원래 이름은 호지촌(濠池村)인데, 목은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자신의 고향이 중국의 괴시(槐市)와 비슷하다 하여 괴시로 부르면서 명칭이 굳어졌다. 아직까지 호지골·호지마을·호지촌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다.

1260년(고려 고종 46)경 함창(咸昌)김씨가 처음 터를 잡은 뒤 수안(遂安)김씨, 영해신씨를 거쳐 1630년(인조 8) 무렵 영양(英陽)남씨가 정착하면서 영양남씨 집성촌이 되었다. 마을은 주봉인 동쪽의 망월봉(望月峰) 아래 여덟 팔(八)자 형국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전체 100여 호에 3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이 가운데 30여 호가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주민 역시 100여 명이 영양남씨다. 마을 앞에는 동해안의 3대 평야 가운데 하나인 영해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어, 이 마을이 예부터 세도가들의 터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의 전통가옥들은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 남아 있는 고택들은 모두 200여 년 전에 지어진 것들로, 'ㅁ'자형 구조이다. 뜰을 마주보고 서 있는 사랑채 뒤에 안채를 숨겨 안팎을 완전히 분리하는 사대부가의 건축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30여 호의 가옥 가운데 괴정(槐亭), 영해 구계댁(邱溪宅), 영해 주곡댁(注谷宅), 물소와서당(勿小窩書堂) 등 국가 및 도 문화재자료만도 14점이나 된다.

조선시대 후기 경북 지역 사대부가의 주택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학자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2003년부터는 2년마다 5월에 이곳에서 목은문화제가 열린다.

낙안읍성 민속마을

양반마을이 아닌 대다수의 서민들이 살아왔던 옛 그대로의 모습을 담고 있는 민속 고유의 전통 마을이다.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위치해 있다.

낙안읍성 안에는 번듯한 기와집의 관아 건물이 있긴 하지만, 낙안읍성은 무엇보다도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이어서 더욱 정감이 가는 민속마을이 있다.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을 통해 전국의 초가집들이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전통 한옥의 부속채에서나 일부 그 모습을 찾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지만, 이곳 낙안읍성의 경우 마을 전체에서 초가집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서민가옥인 초가집에 대해 보고 배우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이제 낙안읍성을 빼놓고 생각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낙안성 민속마을에서는 우선 경직된 기와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지붕의 곡선과 담들의 우아한 선을 마음껏 보고 느낄 수 있다. 지붕이며 담들의 선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동화 속에 등장하는 정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로운 광경들을 목격하게 된다. 더러 주춧돌에 놓인 하얀 고무신이라도 보게 되는 날에는 금방이라도 안채에서 다듬이질 소리가 날 것 같은 생각이 들 만큼 정겨워진다. 잘 생긴 우물마루 널이 아닐지라도 투박한 대청마루 널은 세월이 묵을수록 결이 그대로 느껴져서 고풍스런 느낌도 나고 초가집과 잘 어울리면서 소박한 멋도 있다.

민속마을 가운데 이곳 낙안성처럼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에서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면서 예전과 같은 생활 모습이나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곳도 드물다. 읍성(邑城)이 여기처럼 잘 보존되어 있고, 또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곳도 없다. 특히 이 마을은 성벽을 따라 초가집이 안과 밖으로 형성되어 있어 성벽 위를 걸어가면서 마을의 풍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봄에는 봄대로 여름에는 여름대로 초가 마을의 돌담과 어울려 피고 지는 각양 각종의 꽃과 풍경은, 시간이 이 마을에서 정지해 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토성민속마을

지방기념물 제24호인 토성민속마을 토성은 우리나라에서 드문 평탄한 곳에 점토를 재료로 정방형으로 성축된 특이한 성이다. 성내의 넓이는 62.500㎡의 큰 성이었다.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에 위치한 토성민속마을은 마을의 뒤쪽에 덕령산을, 마을의 앞쪽에 화강을 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의 조용한 마을이다. 약 160여 가구 500여명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촌마을이며, 청정오대쌀과 무공해 채소, 인삼 등을 재배한다. 토성민속마을은 농경지 한가운데 토성이 있다. 점토를 재료로 정사각형으로 축성되었다. 현재 성벽의 삼면은 없어졌고 일면의 성곽만이 남아 있다. 성곽의 크기는 길이 70m, 높이 6m, 위폭 4m이다. 삼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강원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성내에서 당시 주거했던 흔적과 선사시대 유물들인 민무늬토기와 석기류 등 생활 용구들이 출토된바 있는 귀중한 문화자산이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인 지석묘 역시 이 마을 내에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탁자식과 바둑판식으로 구분하는데, 지석묘는 탁자식으로, 화강의 강변을 따라 덕령산 협곡의 소분지 등에 같은 형, 같은 방향, 일정한 간격으로 일직선상에 분포되어 있다. 본래 7기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2기만 남아있다.

토성민속마을에는 마을의 문화적 특성이자 자랑거리인 토성농악이 있다. 철원 토성농악은 두레농악으로까지 발전해온 곳이기도 하다. 명절 때는 오락농악으로, 마을 행사 때는 연희농악으로 발전해온 전통이 뚜렷한 농악이며, 가락이 변형되지 않은 강원농악의 특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제식민지 시절, 탄압으로 인해 두레공동체가 무너지면서 토성농악이 겨레의 문화로 성장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이후 규모는 축소되고 변형되었으나 아직도 토성민속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날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농악놀이를 하면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주민의 농사가 부디 풍년이기를 기원한다.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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