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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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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김규식(金奎植)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다.

개요[편집]

  • 김규식부산 동래(東萊)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지성(智性)이 동래 부사 막료로 재직 중일 때,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 대하여 상소하였다가 그 일로 귀양을 갔다. 그 후 1887년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6세 때 고아(孤兒)가 되었다. 마침 선교사로 와 있던 선교사 H.G.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한경[H.H. Underwood] 박사의 아버지)가 그를 보호하게 되었다. 그 아래에서 서양교육과 기독교교육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미국으로 유학하여 1903년 로노크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04년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05년 귀국하여 경성청년회 총무·경신학교 교감·연희전문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엘리자베스시대의 연극입문》(1940)과 시집 《양자강의 유혹》(1945) 등이 남아 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1]
  • 김규식은 대한제국의 학자·종교인·교육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정치인·학자·시인·사회운동가·교육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종교인이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60년대 후반 관련 서적 출간 이후 1970년대 후반 이후 재조명 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한에 납치된 독립운동가 포상을 결정한 대통령 노태우의 결정에 의해 포상되었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1991년 11월 21일 광복회는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선열제단에 그의 위패를 모셨다. 1991년 12월 31일 우사연구회 발기인총회가 열리고 우사연구회가 창립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규식이 미군정에 의해 수립된 민주의원과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직에 있을 때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지만, 그의 소중함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그를 소위 '애국열사릉'에 안장했다.[2]
  •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 독립운동가 중 누구보다 현실을 냉정히 통찰했던 당대의 엘리트로 손꼽힌다. 무려 9개 국어를 유창하게 회화할 수 있었던 '어학의 천재'로도 알려져 있다.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지만 광복 이후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로 꼽힐 정도로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1881년 경상도 동래도호부(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동래부사 종사관 김지성(金智性)과 경주 이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본래 노론 벽파로서 김상로, 김치인, 김종수 등을 배출한 명문가였으나, 순조대 이후 노론 벽파가 정치적으로 일망타진되면서 그의 가문 역시 몰락했다. 1950년 6.25 전쟁 중 9.28 서울 수복 직전인 9월 26일 밤 조선인민군에 납북되어 평양을 거쳐 북쪽으로 계속 끌려가던 중 1950년 12월 10일 자강도 만포군 만포면 별오동(현 자강도 만포시 별오동)에 있던 군 병원에서 지병인 천식을 비롯해 뇌출혈, 동상 등 이런저런 병명으로 병사했다. 수백만 명이 슬퍼하며 장례가 치러진 김구의 죽음이나 여운형의 죽음에 비교하면 그의 죽음은 한참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이승만 정부와 이후의 군사 정권에서는 외면받아 오다가 1989년에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3]
  • 김규식은 일제강점기 때,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의 탄원서를 제출하였고, 해방 이후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안에 반대하며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한 학자 · 정치인 ·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 부산 동래 출신. 중방파(仲房派) 23세손으로 1881년 김지성(金智性)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교육가와 학자로서의 활동은 상해 푸탄대학(復旦大學)에서의 영문학 강의(1923), 모교인 로노크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취득(1923), 톈진(天津) 북양대학(北洋大學)의 생활(1927∼1929), 난징(南京) 중앙정치학원(中央政治學院) 교수(1933), 쓰촨대학(四川大學) 강의(1936) 등과 같은 강단 생활을 하였으며, 1950년에 6 · 25전쟁이 일어나면서 납북되어, 1950년 12월 10일 만포진 근처에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저서로는 『엘리자베드시대의 연극입문』(1940), 중국 근대 비극시 『원용사(婉容詞)』의 영문번역(1943), 『실용영문작법』(1944) · 『실용영어』(1945), 그리고 시집으로 『양자유경(揚子幽景)』(1945) 등이 남아 있다.[4]

김규식의 생애[편집]

  • 김규식은 1923년 모교인 로노크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1935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민족혁명당을 창설하는 한편, 1940년에는 베이징(北京)·난징·쓰촨(四川)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1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약소민족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직을 맡아 파리강화회의에 전권대사로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침략을 규탄하였다. 1919년 학무총장·구미위원부 위원장을 겸임하였다. 파리에서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 조선공보국을 설립하여 회보를 발간한 뒤, 조선의 독립의지를 알리고 홍보를 하였다. 한편,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탄원서를 작성,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세우고, 1927년에는 그 회장직을 맡아 기관지인 『동방민족』지를 창간하였다.
  • 1935년에는 중국에 일본군의 진격이 예상되자, 중국에 있는 한국인의 통일독립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5개 독립운동단체 대표들과 남경에 모여, 신익희(申翼熙)·조경한(趙擎韓)·양기탁(梁起鐸) 등과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의용대원을 모집하는 한편, 기관지 『민족혁명』,『우리의 길』 등을 발행하였다. 1943년 1월 중경(重慶)에 들어갔으며, 1944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이 되어 김구(金九) 주석과 함께 광복군 양성에 힘썼다.
  • 1945년 8·15광복 후 귀국하여 우익 진영 지도자가 되었으며, 모스크바3상회의(1945. 12)에서 신탁통치에 관한 의견이 전해지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섰다. 미·소공동위원회(1946~1947)가 실패로 돌아가자, 중도 우파로서 민족자주연맹 위원장, 입법의원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에는 국제연합에 의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김구(金九)와 함께 북한에 가서 남북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그 후 정치활동에서 은퇴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拉北)되었다가 만포진(滿浦鎭)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규식의 사상[편집]

  • 김규식은 자신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배경에는 한국인의 민족성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국인의 민족성은 온유하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자체가 잔인한 사상이지만 한국인은 민족성이 온유한 민족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보았으며 그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을 극도로 미워하였다. 그는 박헌영을 극도로 혐오하였고, 박헌영과 절친하게 지냈던 조봉암 역시 미워하였다.
  • 허정 등이 임정 요인에게 인사하러 경교장을 방문했는데, 임정 요인들 옆에서 김진동은 흡연을 했는데 아무도 그가 담배 피우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허정에 의하면 아들 김진동은 아버지 김규식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했다. 허정은 '나는 지금도 그때의 임정 요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위엄이 넘치는 김구 선생, 서양 신사와 같은 풍채의 김규식 박사, 체구가 작으면서도 퍽 늠름해 보이는 이시영 선생은 퍽 인상적이었다. 이시영 선생은 임정 요인들 중에서는 가장 나이 많은 분이었지만, 피로의 기색이나 늙은 티가 조금도 없었고 눈이 번쩍번쩍 빛나 위엄이 있었다.'며 '나에게 기이한 느낌을 갖게 한 것은 김규식 선생의 아들 김진동이 아버지 옆에서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광경이었다.'고 했다. 몸이 병약하면서도 애연가였던 김규식은 아들 김진동이 자신의 앞에서 담배를 피우도록 허락하였다. 당시의 한국 사람들은 그런 김규식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격했고 국제사회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확신했던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의 실패 이후 미국프랑스, 영국, 독일 등에 대한 혐오감과 냉소를 갖게 되었다. 파리강화회의의 실패 이후 그는 도덕적 이상주의를 버리고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따라 약소국을 이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서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 열강이 동아시아 전체를 공동으로 착취하기 위해 결탁'했다, '미국은 영국·프랑스·일본 등 악명 높은 3대 흡혈귀 국가와 가증할 4강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자신의 가면을 벗어던졌다.'며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 뒤 그는 임시정부 시절과 미군정기를 통해 미군정 및 미국과도 친하게 지내며 친미인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민중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연설을 기피하였으며,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인을 경멸하였다.
  •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외면당한 뒤 그는 미국, 영국, 프랑스를 제국주의 집단이자 '흡혈귀'라고 비판하였다. 구미위원부를 거쳐 상하이로 돌아온 김규식은 1918년에 만난 여운형 등을 통해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을 소개받았고, 1920년부터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과도 교류한다.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을 무렵 그는 공산당 후보당원으로도 명단이 올라 있었다.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독립운동가나 지식인들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오해받았던 김원봉과도 연대해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에는 반대하였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집권을 반대하였다.

김규식과 민족의 통합[편집]

  • 김규식(金奎植)은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외교뿐만 아니라 민족의 미래를 위해 온몸을 바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다. 그의 독립운동과 정치적 역정은 민족의 통합을 지향하였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에도 독립운동 단체들의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김규식은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처음에는 김구와 함께 반탁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극한적인 반탁운동을 벌이고 있던 김구와 다른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 김규식은 신탁통치에는 여전히 반대하였지만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른 임시정부의 수립이 급선무라고 하면서 이를 실천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이후 그는 더 나아가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946년 10월 좌우합작 7원칙을 도출해 내는데 성공하면서 당시 정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 결과 1946년 12월 미군정의 입법기관이었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에 선임될 수 있었다. 하지만 좌우합작을 위한 그의 노력은 곧바로 난관에 봉착하였다. 전후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협력에서 대립으로 급격히 바뀌면서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았다. 이후 양국은 극한적으로 대립하면서 남북한에 각기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김규식은 이러한 정세변화에 위기의식을 느껴 입법의원 의장직을 사퇴하고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 김규식은 1948년 2월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제안하였으며 4월 21일에는 협상을 위해 직접 평양을 방문하여 4자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하지만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한 그의 납북협상 노력은 끝내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는 5월 10일에 실시된 단독선거에 반대하지도 않지만 참가하지도 않겠다는 성명을 내고 정계에서 은퇴하고 말았다. 그가 우려했던 대로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그도 이 전쟁의 와중에 불행하게도 목숨을 잃고 말았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김규식(金奎植,1881.1.29.~1950.12.10)〉, 《두산백과》
  2. 김규식〉, 《위키백과》
  3. 김규식〉, 《나무위키》
  4. 김규식(金奎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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