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봉
한석봉(韓石峯)은 조선 중기의 서예가이다.
개요
한석봉은 김정희(金正喜)와 쌍벽을 이루는 서예가이며 해(楷) ·행(行) ·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능했다고 한다. 《서경덕신도비》, 《행주승전비》 등 비문이 주로 남아 있다. 본관 삼화(三和). 자 경홍(景洪). 호 석봉(石峯) ·청사(淸沙). 개성 출생.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익혀 해(楷) ·행(行) ·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1599년 사어(司禦)가 되었으며, 가평군수를 거쳐 1604년(선조 37) 흡곡현령(歙谷縣令) ·존숭도감 서사관(尊崇都監書寫官)을 지냈다.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등이 모간(模刊)되었고, 친필은 별로 남은 것이 없으나 그가 쓴 비문(碑文)은 많이 남아 있다. 글씨로는 《허엽신도비(許曄神道碑)》(용인) 《서경덕신도비(徐敬德神道碑)》(개성) 《기자묘비(箕子廟碑)》(평양) 《김광계비(金光啓碑)》(양주) 《행주승전비(幸州勝戰碑)》 《선죽교비(善竹橋碑)》 《좌상유홍묘표(左相兪弘墓表)》 등이 있다.[1]
한석봉의 생애
한석봉은 1543년 11월 15일에 경기도 개성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언공이고 어머니는 백인당(白忍堂) 백씨(白氏)이며, 할아버지는 병조정랑 한세관이다. 그가 태어나자 한 점술가가 말하기를 옥토끼가 동방에 태어났으니, 낙양(洛陽)의 종이 가격이 높아지겠다.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이름날 것이다(玉兔生東, 高洛陽之紙價)라는 예언을 했다 한다.
한석봉의 아버지는 생전에 관직이 없었고 사후에 한석봉이 원종공신에 녹훈된 공로로 증 호조참판 겸 의금부동지사에 추증되었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에게 글을 배웠으나 15세에 조부까지 여의었다. 이후 집안의 살림이 매우 가난하였다. 12세에 영계 신희남(瀯溪 愼喜男)의 문하에 들어가 글을 배웠다. 나중에 신희남은 한석봉을 자신의 스승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휴암 백인걸(休庵 白仁傑)에게 추천, 성수침의 문하와 백인걸의 문하에 출입하며 20세까지 글과 성리학 학문을 배웠다.
1567년(명종 22) 25세 때 식년과 진사시(進士試)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후 그는 1583년(선조 16) 와서별제(瓦署別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고, 통례원 인의(引儀), 사포서사포(司圃), 북부 사도(北部司䆃), 사재감 주부, 사헌부 감찰(監察), 한성부 판관, 호조(戶曹)ㆍ형조(刑曹)ㆍ공조(工曹)의 정랑(正郞), 종친부 전부(典簿), 찬의(贊儀) 등을 역임했다. 그는 글씨를 잘 쓴다 하여 미암 유희춘의 추천을 받기도 했다. 1572년(선조 5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원접사(遠接使)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수행원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1년 주청사의 수행원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귀국 후 1582년(선조 15년) 율곡 이이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 다시 수행원으로 선발되어 명나라 연경을 다녀왔다. 1601년 차역(差役)과 세금 징수를 잘 처리하지 못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 임금이 추고하고 무마시켰다. 1601년 명나라에 동지사가 파견될 때, 서장관 이정귀의 수행원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귀국 후 흡곡현령(谷縣縣令)으로 부임했으며, 1604년 공신 녹권(錄券)을 필사할 때 한성부로 소환 녹권 필사를 맡았으나,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내고 고의로 글씨를 잘못썼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04년 11월 존숭도감 서사관(尊崇都監書寫官)이 되어 존숭 도감(尊崇都監)의 글씨를 필사한 공로로 아마(어린 말) 1필을 선물로 받았다. 1605년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같은 날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1605년 7월 1일에 사망하였다.
한석봉의 글씨를 탐내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덕형(李德泂)의 수필집 《죽창한화(竹窓閑話)》에 의하면 그의 아들, 형제 중 그의 필적을 가진 자가 있으면 타인에게 빼앗겼다 한다. 원종공신에 책록되어 사후 증직으로 증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황해도 금천군 안신리(현, 황해북도 토산군 석봉리) 석봉산 해좌원에 매장되었다. 묘비문은 월사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글씨는 이진검(李眞儉)이 썼는데 현재 존재하는 비석은 1716년(숙종 42년)에 세워진 것이며 6대손 한탁의 글씨로 썼다.
한석봉에 대한 평가
한석봉(韓石峯)은 조선의 서예가이다. 본명은 한호(韓濩)지만 호인 석봉이 더 유명한 탓에 현대에는 한석봉이라고 불린다. 조선 서예계에서 추사 김정희와 함께 가장 유명한 서예가. 다만 둘은 분야가 조금 달라 김정희는 동시대 박지원이나 정약용만큼 다방면에 두루 재주가 뛰어났고, 한석봉은 서예 하나에 치중되어있다. 물론 그 면에서는 당대에 가장 뛰어나 이후 그의 글씨체가 정석이 되었다.
한석봉은 왕희지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혔으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뛰어난 평필가들의 필법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 등에 모두 뛰어나게 되었다. 석봉 서체의 특징은 그가 조송설(趙松雪)체를 쓰면서도 자기 독특한 체풍(體風)을 세운 데 있다. 그렇게 한호는 그때까지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풍조를 깨뜨리고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여 석봉류의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만들어냈다.
엄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은 〈필담(筆談)〉에서 석봉의 글씨를 가리켜 '성난 사자가 바위를 갉아내고, 목마른 천리마가 내로 달리는 것같이 힘차다.'라고 했으며, 명나라 한림 주지번(朱之番)은 '석봉의 글씨는 능히 왕우군(王右軍)·안진경(顔眞卿)과 어깨를 겨눌 만하다.'라고 하였다. 선조도 그의 대자(大字)를 보고 '기(奇)하고 장(壯))하기 한량없는 글씨'라고 찬탄하면서 중사(中使)를 보내어 그 집에 연회를 베풀었다. 이어 선조는 한벽(閑僻)한 고을 군수에 임명하면서 '필법을 후세에 전하게 하고자 하니 권태로울 때는 구태여 쓰지 마라. 게을리도 말고 서둘지도 마라.'라고 타일렀으며, 선조 친필로 〈醉裡乾坤 筆奪造化(취리건곤 필탈조화)〉의 8자를 써 주었다.
한속봉은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조선 초기의 4대 서가(四大書家)로 꼽힌다. 또한 한호의 글씨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친필 진본이 거의 없으나 석봉서법이라든가 석봉천자문과 같은 책이 모간본으로 전해지고 있어 그의 흔적들 더듬어 보게 한다. 그러나 그의 글씨로 비문이 많이 남아 있어 탁본으로 유행하고 있다. 작시(作詩)에 능한 차천로, 작문에 능한 최립과 함께 송도삼절로 불린다.
한석봉증유여장서첩
한석봉증유여장서첩은 한호 필적이라고도 한다. 1596년(선조 29) 당대의 명필 석봉 한호(韓濩)가 친구인 유여장을 위해 써서 기증한 서첩. 1991년 7월 1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첩장본(帖裝本, 29장)으로 크기는 가로 24.8cm, 세로 35.8cm이다, 표지는 황색 비단에 배접(背接)이다. 필사기(筆寫記)에는 “萬曆 二十四年 丙申 臘月至日石峯 濩書於西學寓舍寄贈柳汝章南還”이라 씌어 있어, 시기와 필자, 쓴 장소와 쓴 목적을 밝히고 있다. 즉 임진왜란이 일어난 4년 후인 1596년 12월 서학의 우사(寓舍)에서 친우 유여장의 남환(南還)을 기념하기 위해 다른 친우 몇 사람과 베푼 술자리에서 글을 써서 기증한 것이다.
서첩은 왕발(王勃)의 <등왕각서(藤王閣序)>, 한무제(漢武帝)의 <추풍사(秋風辭)>,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의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란의 고달픈 삶 속에서 나누는 우정과 인생에 대한 무상함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을 시대상을 엿보게 하는 서첩이다.
한석봉서천자문
한석봉서천자문(韓石峯書千字文)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서예가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가 1578년 부사과(副司果)로 있을 때 왕의 명을 받아 쓴 천자문. 활자본. 1책. 1601년(선조 34) 간행. 이 대본은 31년(인조 9) 신미중간본(辛未重刊本)인데, 천자문을 해서(楷書)로 쓰고, 한글로 훈(訓)과 음(音)을 달았다. 특히 여기에 씌어진 한글은 임진왜란 이전의 구(舊)철자에 의한 것으로 국어학 연구의 자료가 된다. 책머리에는 오시복(吳始復)의 서(序)가 있다.
동영상
각주
- ↑ 〈한호(韓濩,1543~1605)〉, 《두산백과》
참고자료
- 〈한호(韓濩,1543~1605)〉, 《두산백과》
- 〈한석봉〉, 《나무위키》
- 〈한호〉, 《위키백과》
- 옥당북스, 〈한석봉이 일했던 조선 관청, 승문원〉, 《네이버포스트》, 2024-11-13
- 의성군, 〈한석봉 친필이 있는 의성의 아름다운 보물 '만취당'〉, 《네이버블로그》, 2024-09-13
- 자연사랑, 〈한석봉과 어머니〉, 《네이버블로그》, 2023-11-05
- 미소가, 〈명필 한석봉〉, 《네이버블로그》, 2019-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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