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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와 한국과의 교역은 2000년대에 이르러 대폭 확대되었다. 2018년 기준 한국에 대한 이탈리아의 수출액은 약 63억 달러였고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액은 약 44억 9천만 달러로 약 18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보였다. 이탈리아는 한국의 제 15위 무역 상대국이고 유럽연합 내에서는 세 번째 교역 상대국이다. 이탈리아는 1990년대 말까지 한국과의 무역에서 적자를 유지해 오다가 1998년을 기해서 흑자로 돌아섰다. 이탈리아에 대한 한국의 주요 수출품목은 자동차, 합성수지. 열연강판, 냉연강판, 금속절삭가공기계 등이며, 이들 제품에서는 한국이 무역흑자를 보고 있다. 한국의 주요 수입품목은 가방, 신발, 의류, 의약품, 장신구 등이며 이 분야에서는 한국이 큰 폭의 무역적자를 보고 있다. 한국은 이탈리아에 2018년 약 5,600백만 달러를 투자하였는데, 주로 제조업, 금융, 부동산에 집중되어 있다. 로마에는 대사관(영사관 포함) 및 한국문화원이 위치해 있고, 밀라노에는 총영사관이 위치해 있다. | 이탈리아와 한국과의 교역은 2000년대에 이르러 대폭 확대되었다. 2018년 기준 한국에 대한 이탈리아의 수출액은 약 63억 달러였고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액은 약 44억 9천만 달러로 약 18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보였다. 이탈리아는 한국의 제 15위 무역 상대국이고 유럽연합 내에서는 세 번째 교역 상대국이다. 이탈리아는 1990년대 말까지 한국과의 무역에서 적자를 유지해 오다가 1998년을 기해서 흑자로 돌아섰다. 이탈리아에 대한 한국의 주요 수출품목은 자동차, 합성수지. 열연강판, 냉연강판, 금속절삭가공기계 등이며, 이들 제품에서는 한국이 무역흑자를 보고 있다. 한국의 주요 수입품목은 가방, 신발, 의류, 의약품, 장신구 등이며 이 분야에서는 한국이 큰 폭의 무역적자를 보고 있다. 한국은 이탈리아에 2018년 약 5,600백만 달러를 투자하였는데, 주로 제조업, 금융, 부동산에 집중되어 있다. 로마에는 대사관(영사관 포함) 및 한국문화원이 위치해 있고, 밀라노에는 총영사관이 위치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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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0일 (화) 22:4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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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Italy)는 남유럽과 지중해의 반도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정식 명칭은 이탈리아공화국(Repubblica Italiana)이며 수도는 로마이다.
반도의 모양이 장화와 비슷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스와 함께 유럽문명의 기원지이다. 5세기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국토가 분열되었다가 1861년 사르데냐 왕국에 의해서 통일되었다. 1946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이 된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이 남겨놓은 문화유산과 미술, 음악 등이 발달한 문화 강국이다.
개요
이탈리아는 본토와 지중해의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시칠리아 및 사르데냐로 이루어진 단일 의회 공화국이다. 북쪽 알프스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대한민국과 같이 반도이다. 주변 바다로는 동쪽의 아드리아해, 남쪽의 이오니아해, 서쪽의 티레니아해와 리구리아해가 있다. 이탈리아의 영토 안쪽에는 위요지 국가인 산마리노와 바티칸 시국이 접하여 있으며, 스위스 영토 안쪽에 이탈리아의 월경지 영토인 캄피오네디탈리아가 있다. 국토 면적은 301,340 km²이며, 온대 기후대에 속한다. 인구는 60,200,000여 명으로, 유럽에서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고, 전 세계 기준으로는 23위이다. 주요 도시로는 수도인 로마를 비롯하여 밀라노, 나폴리, 제노바, 피렌체, 토리노, 베네치아 등이 있다.
오늘날 '이탈리아'로 알려진 이 땅은 에트루리아나 고대 로마 등 유럽의 여러 문화와 민족의 요람이었다. 수도 로마는 옛 로마 제국의 수도이기도 하였으며 수 세기 동안 서구 문명의 정치문화적 중심지였다. 로마가 몰락하자 이탈리아는 롬바르드족과 동고트족 같은 게르만족과 몽골족, 사라센 등 오랫동안 타민족의 침입에 시달렸다. 수 백년 뒤 이탈리아에서는 이후 유럽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르네상스가 탄생하였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탈리아는 수많은 왕국(사르데냐 왕국, 양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 등)과 도시국가들(베네치아 공화국 등)로 분열되었다가 1861년에 이르러서야 "리소르지멘토"라는 격변기를 겪으며 통일을 이루었다. 19세기 말부터 양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이탈리아는 식민지를 거느리게 되어 리비아, 에리트레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에티오피아, 알바니아, 로도스섬, 도데카니사 제도, 중국 톈진까지 지배하였다. 원래 군주제 국가였으나(이탈리아 왕국)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면서 1946년에 공화정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1957년 유럽 공동체(EC)의 창립 회원국이었으며, 1993년에 유럽 공동체는 유럽 연합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1999년에 유로화를 채택하였다.
오늘날의 이탈리아는 민주 공화국이며, 이코노미스트지 조사에서 삶의 질 세계 8위를 기록했다. 이탈리아는 높은 생활 수준을 구가하며, 2010년 인간 개발 지수는 24위였다. G7과 G20 소속이며, 2022년 기준으로 이탈리아의 GDP는 세계 10위다. 이탈리아는 오늘날 유럽 연합의 창립 회원국으로, 1957년 로마 조약이 체결된 나라이기도 하며,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원년 회원국이다. 그 밖에도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와 세계 무역 기구(WTO), 유럽 평의회, 서유럽 연합의 일원이다. 이탈리아의 군비 지출은 세계 8위이며,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핵 공유에 참여하고 있다.
이탈리아(특히 로마)는 정치와 문화 면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데, 식량 농업 기구(FAO),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세계 식량 계획(WFP)의 본부가 이 곳에 위치한다.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와 더불어 유럽의 정치, 사회, 군사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주요 지역 강국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높은 교육 수준과 풍부한 노동력을 보유한 세계화된 나라이며, 2009년 국가 브랜드 순위에서 6위를 차지하였다. 또 이탈리아의 기대 수명은 뉴질랜드와 버뮤다 다음 세계 19위로 길다. 또 관광 대국인 이탈리아는 해외에서 4,370만 명이 방문하여 세계에서 5번째로 관광객이 많은 나라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분에서 보여지듯(44곳)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대학 졸업자의 첫 연봉은 2010년 기준으로 약 23,000유로이다. 이탈리아의 대표 음식으로는 피자, 젤라또, 파스타 등이다.
국가 상징
국호
공식국호는 이탈리아 공화국(Repubblica Italiana)이다. 시라쿠사의 안티오코스(기원전 5세기)에 따르면, 원래 '이탈리아'라는 명칭은 이탈리 사람들이 살던 칼라브리아 지방에만 쓰였다. 과거 신화에서는 헤라클레스가 도망친 소를 찾으러 시칠리아를 지나 칼라브리아 남부까지 왔다가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소를 비툴루스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나중에 이곳을 추억하며 비툴리아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이곳을 통합하고 다스린 이탈루스 왕자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으며, 이곳 사람들이 수소에 대한 토테미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후 로마 제국이 이곳을 지배하게 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현 이탈리아의 북부 지방인 알파인 지역까지 포함한 반도 전체로 뜻이 확장되었고, 로마 제국이 기원전 1세기 무렵 사비네족, 삼니테족 등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부족들을 통칭하여 이탈리아인이라 표현하였다.
서로마 멸망 이후 이탈리아라는 이름은 지리적으로만 쓰이다가 리소르지멘토를 계기로 민족적 함의를 지니게 되었다. 1861년에 반도의 통일을 이루면서 국호로 이탈리아 왕국(Regno d'Italia)을 채택했다. 1948년에 공화국이 되어서도 이탈리아라는 국명을 유지하고 있다.
한자 음차 명칭은 이태리(伊太利)이다. 비공식 음차 국명 중 일상생활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 불란서와는 달리 이태리는 이탈리아보다 짧아서인지 은근히 자주 쓰이는 편이다. 그 외에 이태리아(伊太利亜), 의대리(意大利, 義大利) 등이 있다. 한 글자로 줄여 부를 땐 '이'(伊) 라고 한다.
국기
이탈리아의 국기는 일 트리콜로레(Il Tricolore)로 초록, 하양, 빨강의 세로선으로 된 삼색기이다. 국기 자체는 1848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현재의 국기 틀은 1946년에 제정되었는데 2003년에 색상을 처음으로 표준화 한 뒤, 2006년에 현재의 색상 톤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른다.
초록, 하양, 빨강의 3색기로 왼쪽에 파랑을 사용하는 프랑스의 3색기와 구분하기 위해 이탈리아 3색기라고 부른다. 초록, 하양, 빨강의 색깔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자유, 평등, 박애라고 보기도 하고 이탈리아의 삼림과 국토의 초록, 알프스의 눈과 평화의 하양, 애국과 열혈의 빨강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백인들의 벽안 눈동자, 눈자위, 피를 상징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국기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만들어준 것이다. 나폴레옹은 1796년부터 정복한 이탈리아 반도 내의 영토들을 프랑스의 종속국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고, 이탈리아 북부에 치살피나 공화국(Repubblica Cisalpina)을 만들었다. 이 국가의 국기가 프랑스의 국기를 본따서 만든 초록, 하양, 빨강의 삼색기였다. 초록은 당시 밀라노 민병대의 제복 색깔이었고 하양, 빨강은 비스콘티 가문이 지배하던 시절 밀라노 공국의 국기(성 조지의 십자가)에서 따왔다.
당연하지만 오늘날 이탈리아는 이렇게 해석하지는 않는다. 국가의 자존심이 있지, 사이가 안좋은 옆나라의 황제가 자국의 국기를 만들어줬다고 말하면 좋아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1848년 이탈리아 통일을 시작할 당시 사르데냐 왕국의 군대는 이 삼색기에 사보이아 가문의 문장을 삽입한 국기를 군기로 채택하였다. 이 때 삼색기는 처음의 통일 대상이자 밀라노가 있었던 롬바르디아 사람들을 뜻하였는데 의미가 확장되어 전 이탈리아를 상징하게 되었다.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된 후에도 이것을 국기로 채택하였으나 1946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으로 개헌한 이후 사보이아 가문의 문장을 삭제하였다.
3색을 이탈리아 요리에 빗대서 바질, 모짜렐라 치즈, 토마토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이 농담은 피자 마르게리타에 엮인 전설에서 나온 것인데, 이야기에 따라 다르지만 이탈리아 국기에서 따와서 마르게리타 왕비를 위해 만들어졌다고도 하고 반대로 마르게리타 왕비가 이탈리아 국기의 3색으로 이뤄진 피자라 좋아했다고도 한다. 이탈리아 통일주의자들도 국기가 연상되는 색 때문에 피자 마르게리타를 가장 선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설과 별개로 피자 마르게리타가 등장한 것은 이탈리아 통일보다 훨씬 전이다. 이 전설 때문인지 외국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등에서도 이탈리아 국기가 게양되거나 무늬가 그려져 있기도 하다. 특히 이탈리아식 정통 피자를 표방하는 피잣집에서 자주 그런다.
국장
이탈리아의 국장은 1948년 5월 5일에 제정되었다.
국장 가운데에는 톱니바퀴가 그려져 있으며 톱니바퀴 위에는 빨간색 테를 두른 하얀 별이 그려져 있다. 국장 왼쪽을 올리브 가지가 감싸고 있으며 국장 오른쪽을 참나무 가지가 감싸고 있다. 국장 아래쪽에는 빨간색 리본이 올리브 가지와 참나무 가지를 묶고 있으며 리본에는 이탈리아의 공식 명칭인 "이탈리아 공화국"("REPVBBLICA ITALIANA")이 쓰여져 있다.
톱니바퀴는 노동자를 상징하며 별은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상징이다. 올리브 가지는 평화를, 참나무 가지는 이탈리아 국민의 역량과 존엄을 상징한다.
국가
이탈리아의 국가는 마멜리 찬가(Inno di Mameli)다. 공식 명칭은 '이탈리아인들의 노래'(Il Canto degli Italiani)이며 다른 이름으로는 '이탈리아의 형제들'(Fratelli d'Italia)도 있다. 고프레도 마멜리(Goffredo Mameli, 1827-1849)의 시에 미켈레 노바로(Michele Novaro, 1818-1885)가 곡을 붙였다.
리소르지멘토 운동이 한창이었을 때 널리 보급된 노래지만, 이탈리아 통일 직후인 1861년에는 이 곡이 아니라 사보이아 가문의 공식 행진곡이었던 '왕의 행진곡(Marcia Reale)'이 공식 국가로 선포되었다. 간혹 조비네차가 공식 국가 아니었나 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니다. 이탈리아 왕국에서는 1943년부터 피아베 강의 전설[2]이라는 노래가 쓰였다가 공화정으로 전환되면서 폐지되었다. 하지만 마멜리 찬가도 일종의 애국가로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곡으로 애창되었는데, 주세페 베르디의 경우 1862년에 개최된 런던 국제 박람회를 위해 작곡한 '여러 민족의 찬가(Inno delle Nazioni)'라는 칸타타에 왕의 행진곡이 아닌 이 곡의 선율을 사용한 바 있다.
1943년에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에서도 사용했었지만 사회 공화국은 조비네차가 정식 국가였다.
1946년에 왕정이 폐지된 후 공식적으로는 아니었지만 사실상 국가로 지정되었고, 2005년에 이탈리아 헌법이 개정될 때 공식 국가로 공표되었다.
지리
영토의 대부분은 지중해로 뻗은 장화 모양의 반도와 알프스 이남 평야, 시칠리아 섬과 사르데냐 섬으로 구성된다. 주변 바다를 부르는 명칭은 다음과 같다. 북동쪽 이탈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를 아드리아 해라고 부르며, 아드리아 해의 남쪽이자 이탈리아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 알바니아와 그리스 사이에 있는 바다를 이오니아 해라고 한다. 이탈리아 반도 서부에 있고, 사르데냐 섬과 프랑스의 코르시카 섬 사이에 있는 바다는 티레니아 해라고 한다. 코르시카 북쪽 및 이탈리아 북서부에 있는 바다는 리구리아 해라고 한다. 섬들을 포함하여 이탈리아는 8,000km가 넘는 해안선을 자랑한다.
한반도를 태백산맥이 관통하는 것처럼 이탈리아 반도 역시 아펜니노 산맥이 척추처럼 관통한다. 아펜니노 산맥은 북서쪽에서 알프스 산맥과 맞닿는다. 알프스 산맥은 북서쪽과 북쪽에서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형성한다. 이탈리아 북부에는 충적으로 형성된 거대한 포-베네치아 평원이 있어 물은 포강과 알프스 산맥, 아펜니노 산맥, 돌로미티 산맥 등에서 흘러내리는 수많은 지류로 흘러든다. 포 강 외에 잘 알려진 강에는 테베레강, 아디제강, 아르노강 등이 있다. 또한 가르다 호, 코모 호 등 빙하호가 발달되어 있다.
해발 4,810m의 몬테비안코산(프랑스어로 몽블랑)이 가장 높은 지점이지만 이탈리아 하면 떠오르는 산은 나폴리 근처의 휴화산 베수비오산과 시칠리아의 활화산 에트나산 이 두 화산이다.
이탈리아는 알프스-히말라야 조산대 중 유라시아판과 아프리카판의 경계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지진 위험 국가 중 하나이고 특히 중앙을 가로지르는 아펜니노 산맥을 중심으로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큰 지진이 한 번 일어나면 그 지역은 많은 피해를 입는데 특히 이탈리아는 대부분 벽돌 건물이어서 규모에 비해서도 피해가 크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발생하는 지진은 일본에 비해 규모는 다소 작지만 상대적으로 진원의 깊이가 더 얕아 진동이 극심한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규모만 놓고보면 대지진으로 보기 어려운 6점대 강진도 진도가 X~XI이고 사망자도 수 천~수 만을 상회한다. 아래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역사적으로 숱한 지진과 화산 폭발로 인해 상당히 많은 규모의 희생자가 발생해 왔다. 그나마 조금 다행인 점은 이탈리아의 지진은 대개 시칠리아 섬과 아펜니노 산맥에서 발생해 로마, 피렌체, 밀라노 등 주요 대도시들은 지진 다발 지역에서 다소 벗어나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 나폴리 정도를 제외한 이탈리아 주요 대도시들은 역사적으로 지진에 의한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적이 거의 없다.
- 기원전 1450년 규모 7.1, 최대 진도 X인 지진이 고대 도시 Lacus Cimini(라쿠스 키미니)에서 발생했다.
- 79년 08월 24일 규모 6.9, 최대 진도 X인 지진이 나폴리에서 발생했다. 이날 베수비오 화산이 대폭발을 일으켰고, 그 영향으로 폼페이가 사라졌다.
- 1065년 01월 21일 규모 6.8, 최대 진도 X인 지진이 시칠리아에서 발생했다. 사망자 975명.
- 1456년 12월 5일 규모 6.3, 최대 진도 XI인 지진이 아벨리노, 나폴리를 중심으로 발생했다. 사망자 30,000여명.
- 1570년 11월 17일 규모 5.5의 지진이 페라라를 중심으로 발생했다. 사망자 125명.
- 1693년 01월 11일, 규모 7.4, 최대진도 XI의 대지진이 시칠리아에서 발생했다. 사망자는 60,000명.
- 1908년 12월 28일 규모 7.1, 최대진도 XI의 대지진이 시칠리아 섬 메시나에서 발생했다. 사망자 수가 75,000-82,000명으로 비슷한 시기 관동대지진의 피해 규모에 필적한다.
- 1915년 01월 13일 규모 6.7, 최대진도 XI의 대지진이 아베차노에서 발생했다. 사망자 29,978~32,610명.
- 1980년 11월 23일 규모 6.9, 최대 진도 X인 지진이 이르피니아에서 발생했다. 사망자 2,483-4,900명.
- 2009년 04월 06일 규모 6.4, 최대 진도 VIII인 2009년 라퀼라 지진이 발생했다.
- 2016년 08월 24일 규모 6.2, 최대 진도 IX인 2016년 이탈리아 중부 지진이 발생했다.
- 2016년 10월 30일 규모 6.6, 최대 진도 IX인 2016년 이탈리아 페루자 지진이 발생했다.
- 2022년 11월 09일 규모 6.1, 최대 진도 VI인 지진이 발생했다.
기후
이탈리아 북부의 기후구는 포 평원을 중심으로 기온의 교차가 큰 것이 특색이다. 연교차는 일반적으로 23℃ 이상이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24℃ 이상이 된다. 겨울철의 평균기온은 낮아서 빙점 이하로 떨어지며 동결되는 때가 많다. 강렬한 열방사(熱放射)에 의해서 냉각된 공기는 무겁게 되어 낮은 곳으로 집적되기 때문에 포 평원의 최저부는 한랭하다. 따라서 이 최저부에서 주위의 산지로 올라가면 기온의 역전현상(逆轉現象)이 나타난다.
알프스 산록의 호수지대는 호수의 조절작용과 북풍(北風)에 대한 보호 외에, 기온의 역전현상으로 유리한 기후를 나타낸다. 포평원의 여름철은 기온이 높은 편으로 7월의 평균기온이 24℃에 달한다. 또 코모 호안(湖岸)의 카를로타의 1월 평균기온은 3.1℃로 밀라노의 2.4℃보다는 높지만 여름에는 반대로, 카를로타의 7월 기온이 21.5℃로 밀라노의 24.6℃보다 낮다.
연평균 강수량은 600∼1000mm이며 북부(알프스 방향)로 갈수록 강수량은 증가한다. 비는 가을에 많으며 계절적으로 비교적 균등하게 분포하여 한발(旱魃)의 피해는 거의 없다. 눈은 겨울에 집중해서 내려 철도교통에 커다란 방해가 된다. 또 지방풍으로는 알프스 및 아펜니노에서 불어내려오는 푄이 있다. 중부의 기후구는 반도부의 중앙 이북의 기후구로 특색은 저지와 고지의 기온차가 현저하다는 것이다. 해안과 평야의 저지에서는 지중해성 기후로 온화하나 같은 저지일지라도 내륙의 피렌체 분지 등은 겨울에 기온이 내려간다. 또 티레니아 해안과 아드리아 해안에서는 지중해성 기후가 지배적이다. 불모의 고지는 강한 열방사로 인해서 기온의 일교차가 크게 나타나며 겨울에는 저지보다 춥고 여름에는 서늘하다.
리구리아 해안은 산맥에 의해서 북풍으로부터 보호받으며 동시에 지중해에 면하기 때문에 겨울은 상당히 온화한 편이다(1월 평균기온 7∼9℃). 따라서 이 해안은 겨울철에 요양지대를 이룬다. 강수량은 여름에 적은 것이 특색이며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이 특색은 더욱 현저하다. 로마는 평균적으로 3년마다 7, 8월에 거의 비가 오지 않는다. 겨울은 우계(雨季)로 구름낀 날이 많지만 여름에는 비가 소나기 형태로 갑작스럽게 내렸다가 갠다. 특히 고지는 저지보다 비가 많아 하천의 물은 마르지 않으며 연강수량은 해에 따라 다르다.
남부 기후구는 중부 기후구와 명확하게 구별할 수는 없지만, 두 기후구는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서 점이(漸移)되고 있다. 반도의 해안지대 및 시칠리아섬에서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나며 아열대 기후에 가깝다. 온난다우한 겨울과 고온건조한 여름이 교차하며 여름이 길다. 여름에는 소나기 같은 비가 일시에 내리기 때문에 농작물과 교통에 손해를 자주 끼친다. 또 하상(河床)은 말라서 사력의 벌판으로 변하는데, 이 현상은 남쪽으로 갈수록 현저하다. 겨울은 구름 낀 날과 비오는 날이 많으며 기온도 꽤 내려간다. 나폴리에서는 1월 최저 -1℃가 되어 얼음이 얼게 되며 팔레르모에서는 최저 4℃이나 로마의 최저 -5℃에 비하면 높은 편이다. 산지의 기후, 특히 에트나의 고봉에서는 저지와는 달리 기온이 아주 낮으며 특히 겨울에 더욱 낮아 만년설이 덮여 있다.
역사
이탈리아의 역사는 선사 시대인 85만년 전 무렵에 살았던 구석기인의 유적인 몬테포기올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 또한 4만 3천년 전 무렵부터는 크로마뇽인이 거주 하였다. 기원전 6000년에서 5500년 사이 이탈리아에서도 유럽의 신석기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의 청동기는 대략 기원전 1500년 무렵 인도유럽어족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시작되었고 철기 시대를 맞이하여 이탈리아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고전기 이전의 이탈리아는 여러 갈래의 문화로 나뉘어, 북부에는 켈트족이, 중부에는 에트루리아인이, 그리고 남부에는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고대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부족들 가운데 라틴족은 라티움을 중심으로 확장하였고, 그들이 사용하던 라틴어는 로마의 이탈리아 정복에 따라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 로마 공화정과 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 시기에 이탈리아 반도뿐만 아니라 지중해 연안과 유럽의 상당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4세기 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5세기 말 고대 후기에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할되었으며, 분할 이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 일어났다. 랑고바르드인은 이탈리아 북부를 정복하고 568년 랑고바르드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남부와 동부 연안은 11세기까지도 여전히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774년 랑고바르드 왕국은 프랑크 왕국에 정복되었으며, 이후 중세 기간 동안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명목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으나, 사실상 독립적인 도시국가로서 해양 공화국으로 발전였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걸쳐 있었던 이탈리아 전쟁의 결과, 이탈리아는 근세 유럽의 열강이었던 합스부르크 가의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 지배 되었으며,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 제1제국 시기에는 프랑스의 속령이 되었다. 한편, 8세기에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한 단신왕 피핀이 교황에게 영지를 기증한 것이 기원인 교황령은 19세기 후반까지 성좌의 지배를 받았다.
19세기에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족 국가 사상이 번졌고, 19세기 말 이탈리아 왕국이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면서 통일 되었다. 1861년 성립된 이탈리아 왕국은 신속한 근대화와 함께 리비아와 아프리카의 뿔 지역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각지와 지중해의 요충지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아 이탈리아 제국을 형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탈리아의 숙적이 되었고, 사라예보 사건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는 협상국의 일원으로 독일 오스트리아와 맞섰다.
1920년대에 들어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사이 이탈리아 파시즘은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주의를 확대하고자 하였다. 무솔리니는 나치 독일과 손잡고 추축국이 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을 벌였고, 1945년 이탈리아 파시즘은 연합국에게 격퇴되었다. 2차 대전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3년 부렵부터 이탈리아에서는 내전이 일어났다. 이탈리아 파르티잔과 바돌리오 정부에 쫓겨 파시즘 망명 정부를 세운 무솔리니는 1945년 춘계 이탈리아 공세에서 패한 뒤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46년 이탈리아 국가형태 국민투표 결과 이탈리아는 공화국이 되었다. 1946년 6월 2일 새 공화국이 출범한 뒤 이탈리아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이탈리아 경제 기적이라 불리는 급속한 경제 성장과 근대화를 이루었다.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한 이탈리아는 서유럽의 일원이 되었고, NATO와 G7 그리고 경제 협력 개발 기구의 회원국이 되었다. 오늘날 이탈리아는 경제, 종교, 군사, 문화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고대시기
이탈리아 반도에는 구석기 시대인 약 85만 년 무렵부터 중북부의 몬테 포지올로(Monte Poggiolo)와 중남부의 이세르니아(Isernia) 산악지역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약 1백만 년 전 스페인에 정착한 사람들이 이동해 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약 60만 년 전부터 10만 년 전까지는 하이델베르그인들이, 20만 년 전부터는 네안데르탈인들이 살았다. 인류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인 크료마뇽인이 살기 시작한 것은 후기 구석기 시대인 약 4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 사이라고 추정한다.
고대 이탈리아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철기시대인 기원전 1,200년경 이후부터였다. 이탈리아 반도에는 북부의 인도유럽어족 켈트족(Celts)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탈리아계로 불리는 라틴족(Latins), 사빈족(Sabines), 움브리안족(Umbrians)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비인도유럽어족 부족으로는 중북부 지역에서 에트루리안족(Etrurians)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리스의 식민도시로 개발된 남부에는 그리스계 부족들이, 사르데냐에는 훗날 누라기 문명을 완성한 부족들이 존재했다. 이들 이외에도 수많은 부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 부족 중 가장 강력한 문명을 형성한 부족은 에트루리아였다. 이들은 한 때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장악할 정도로 큰 세력을 형성했지만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고 그들이 사용한 언어도 아직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다신교 신앙을 바탕으로 일부일처제 사회였던 에트루리아는 고대 카르타고 및 그리스 식민도시들과 경쟁하면서 성장하였다. 특히 그리스와 교역하면서 그리스 문화를 빠르게 흡수해 자신들의 문화로 만들었다.
로마제국
로마는 기원전 753년, 테베레강 인근에 세워진 도시국가로, 이후 244년간 라틴과 사비니 계통의 왕정을 유지하다가 나중에는 에트루리아 출신의 왕들이 연달아 즉위하였다. 이후 7명의 왕들이 즉위하여 로마를 통치하다가, 기원전 509년에는 로마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쫓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이후 로마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귀족정으로 변모하였다.
이후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가 확장함에 따라 에트루리아, 켈트, 그리스인들을 정복하며 로마의 통치하에 편입되었다. 정복된 이탈리아의 부족들 대부분은 로마로 매우 성공적으로 융화되었으며, 나중에는 로마가 아예 서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를 대대적으로 정복할 때에 든든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뛰어난 장군이 등장하였으며, 그는 로마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사실상 로마의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꾸어놓았다. 시간이 흐르자 로마 제국은 브리튼섬에서 페르시아까지 이르는 거대한 대제국으로 성장하였으며, 지중해 전체를 자신의 영향권 내부에 넣으며 막대한 국력을 과시하였다. 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기나긴 황금기의 서막을 열었으며, 이후 현명한 명군들이 연이어 즉위하며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 불리는 200여 년에 달하는 번영기를 맞으며 크게 번성하였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 반도는 제국의 수도인 로마가 위치한 곳으로 제국의 최고 중심지라는 영예를 안았으며, 심지어는 '렉트리스 문디', 즉 세계의 여왕이라 불리며 화려하게 문명의 꽃을 피웠다.
이 시기 로마 제국은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선두에 서있는 나라들 중 하나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들 중 하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 하의 로마 제국은 5백만 제곱 킬로미터의 영토를 거느렸으며, 제국의 문명은 이후의 서구 문명들에게까지 깊숙한 영향을 미쳐 가히 서양의 토대를 놓았다 할 정도로 서구인들의 정신적, 물질적 세계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로마의 달력, 수 체계, 언어, 문자 등이 모두 다른 나라들에게까지 전래되었으며 로마의 국교였던 기독교가 서양의 중심 종교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 시기 로마는 저 멀리 있는 인도와도 무역을 전개하였으며, 폼페이에서 상아로 만든 여신 락슈미의 조각상이 발견될 정도였다.
이토록 번영한 로마 제국마저 쇠퇴의 흐름을 피할 수 없었기에, 기원후 300년 경에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열하였으며, 이들 중 이탈리아 반도가 속해있었던 서로마 제국은 지속되는 야만족들의 침략을 견디지 못하고 게르만족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쫓아내며 멸망하고 말았다. 다만 동로마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은 번영을 이어가 이후 1,000여 년을 더 지속할 수 있었다.
중세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이탈리아 반도는 오도아케르가 세운 왕국의 통치를 받다가 나중에는 동고트족의 손에 떨어졌다. 6세기 경에는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다시 이탈리아 반도를 재정복하는 데에 성공하며 다시 로마 제국의 세력권에 다시 들어갔으나, 게르만 부족인 랑고바르드족이 대거 밀려오면서 동로마 제국은 라벤나 총독부와 같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시 이탈리아를 뺏기고 물러나야만 하였다. 이 때 이후로 이탈리아 반도는 약 1,300여 년 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국가로 쪼개져 분열하게 된다. 야만인들이 끊임없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와 약탈을 저질렀기에 이 시기를 암흑기라고 부른다. 랑고바르드인들이 세운 랑고바르드 왕국은 8세기 후반 경 카롤루스 대제가 세운 프랑크 왕국에 흡수되었는데, 이 때 프랑크 왕국은 종교적인 정통성을 획득하고 교황과의 친밀도를 올리기 위하여 로마를 포함한 그 주변지역을 교황령(Papal State)로 떼어 주었다. 이후 교황 레오 3세는 이에 화답하여 카롤루스 대제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바쳤으며, 이때부터 신성로마 제국이 성립되었다. 이때부터 13세기까지는 이탈리아의 정치는 대부분 신성로마 제국과 교황 사이의 협력과 갈등 관계를 다루는데, 이 두 권력이 다툴 때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편을 든 쪽을 기벨린, 교황의 편을 든 쪽을 구엘프라고 부른다.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은 함께 중세 유럽의 최고 권력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한 하늘에 두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양쪽은 누가 더 세속적인 권위에서 우월한 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다투었고 왕, 추기경, 귀족들을 임명하는 문제에서 서로를 무시하고 갈등을 겪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로 인하여 기벨린과 구엘프 사이에서 내란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서 황제와 중앙의 영향력이 약해지며 여러 도시국가들이 독립하여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워낙 황제와 교황이 치열하게 대립하며 전쟁을 끊임없이 반복하였기에 치안은 위협받았고 그 어디도 안전한 곳이 없었다. 이 때문에 여러 도시들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나서야 했고, 치안과 경제를 스스로 책임져야 했던 것이다. 1176년에는 이 도시들이 모여 만든 롬바르디아 동맹이 레그나노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1세의 군대를 이기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의 도시들 대부분이 황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떨어져 나갈 수 있었다.
독립한 도시 국가들 중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와 같은 도시들은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은행업과 대부업 등이 새롭게 갈라져나왔으며,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도 크나큰 발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편 이탈리아의 해안과 남부 지역에서는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한 해양 공화국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여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동방으로의 교역로를 통제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어내었다. 이들은 한때 동로마 제국이 통치했던 지역들에서 새롭게 설립된 공화국들로, 모두 도시 국가의 형태를 띠고 독립적인 자율을 누렸다. 이처럼 다양한 국가들의 성립은 학문적, 예술적인 성취를 이루어냈고, 이 시기에 가장 잘 알려져 있던 해양 공화국들에는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아말피 등이 있었다. 이 국가들은 지중해의 섬들을 서로 따로따로 통치하였으며, 지중해의 해역들을 크기에 따라 나누어 가지며 그 영유권을 독점하였다. 이들은 심지어 중동이나 흑해, 북아프리카까지 식민지들을 개척하였으며, 가장 세력이 강했던 베네치아는 17세기 중반까지 키프로스, 그리스, 달마티아 등의 지역에 막대한 크기의 영토를 소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동방으로 향하는 유럽의 주요 길목이었으며, 유리 산업의 중심부였다. 한편 피렌체는 비단, 양모, 은행, 보석업이 성행하였으며 이 산업들로 엄청난 자금을 벌여들였다. 이처럼 막대한 자금들이 이탈리아 내부로 유입되자, 자연히 사람들은 예술과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공화국들은 서로 원정과 전쟁들을 앞다투어 벌였으며, 주로 이 전쟁들을 통하여 교역로들을 차지하고 경쟁국들의 국력을 깎아보고자 노력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아시아로 향하는 마르코 폴로를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주기도 하였다. 대학들이 세워졌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신학자들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며 문학을 발전시켰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탈리아 반도를 신성로마제국의 문화적, 경제적 중심으로 만들었으며 피렌체에서는 자본주의와 은행업을 기반으로 한 유력 가문들이 떠올랐다. 피렌체에서는 단테나 조토 디 본도네 등의 대예술가들이 1300년대에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 남부의 시칠리아에서는 9세기 경에 무슬림들이 침입하여 시칠리아 토후국을 세웠다. 이 토후국은 11세기 경에 이탈리아 노르만 족들이 랑고바르드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영토와 함께 멸망당했다. 이후 남부 이탈리아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점차 하나의 세력 밑에 결집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호엔슈타우펜 왕가, 나중에는 앙주의 카페 왕가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5세기부터는 아라곤 가문이 주도권을 쥐었다. 또한 사르데냐 지방에서 한때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도시들이 독립하여 주디카티를 형성, 따로 번영하였으며, 고도의 자치를 누렸다. 다만 몇몇 섬들이 제노바나 피사의 영역권으로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의 주디카티들은 15세기에 아라곤 가문이 합병하기 전까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1348년 즈음에 닥친 흑사병은 이탈리아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를 사망시키며 엄청난 공포와 인명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이후 이탈리아 반도는 전염병으로부터 빠르게 회복하였고, 도시들과 경제가 부흥하며 인본주의와 르네상스의 꽃봉오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근대
이탈리아는 13세기와 14세기에 일어난 유럽의 문예 부흥 운동인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이 르네상스 시기를 중심으로 유럽의 중세기와 근대기를 나누며, 신과 교회에 편중되어 있던 사회에서 벗어나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급속도의 발전을 이룩하고 서양이 본격적으로 번영하기 시작한 시대로 본다. 이 때의 이탈리아 반도는 서로 다른 독립적인 도시 국가들로 쪼개져 귀족들이 통치하였으며, 이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사실상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이들은 무역과 행정을 담당하였으며, 부와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예술과 과학자들을 후원해주었다. 유명한 귀족 가문들로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과 스포르자 가문, 제노바의 도리아 가문, 베네치아의 모체니고 가문과 바바리고 가문, 페레라의 에스테 가문, 만투아의 곤자가 가문 등이 있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이러한 귀족 가문들의 비호 아래 상인들이 막대한 부를 이탈리아 내로 축적하였으며, 이들의 후원을 받아 여러 예술가들이 두각을 드러내었다. 이 예술가들은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는데, 가장 유명한 자들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브루넬레스키,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도나텔로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레온 바티스티 알베르티, 안드레아 팔라디오, 도나토 브라만테 등의 건축가들이 두각을 드러내었다.
서방 교회의 분열이 일어난 이후, 교황들은 아무래도 베드로가 순교한 로마가 더 정통성 있는 교황좌라고 판단하여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가 3년 간의 여행을 거쳐 다시 로마의 교황령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르티노 5세는 이 3년 간의 여정 동안 여러 이탈리아 도시들을 거쳤고, 이탈리아 반도를 서방 기독교의 최고 중심부로 다시 재건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시기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교황에게 공식적으로 자금을 대거나 돈을 빌려주기 시작하였고, 교황과의 돈독한 관계를 바탕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주요 정치 세력으로 급부상하기도 하였다. 르네상스 시기,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인 콘클라베와 같은 행사들은 이탈리아에서의 지배권과 서방교회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얻어내기 위한 유력 가문들 사이의 암투로 전락하였으며, 수많은 비밀 거래들과 약조들이 이 사이에서 오고 가곤 하였다. 1439년에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코시모 데 메디치가 중재한 피렌체 공의회에서 만나 동서 교회의 화합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1453년에는 교황 니콜라오 5세가 군대를 파병하여 오스만 제국의 군대로부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수성하게 돕기도 하였는데, 결국 오스만 제국군의 막대한 포력을 견디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이 곳에 살던 그리스 학자들이 터키를 피하여 서방 세계로 이주하였다. 이 때에 오랫동안 잊혀졌던 고대 그리스 세계의 인본주의가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하였으며, 교황 피우스 2세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 같은 인본주의자들이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이상적인 인본주의 세계를 건설하려 우르비노나 피엔자 등의 도시들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와 같은 철학자는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을 집필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하여 설파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르네상스 인본주의의 최고봉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에 사학자 레오나르도 부르니는 인류 역사를 고전기, 중세기, 근대기로 나누며 며 최초의 현대적인 역사학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유럽에 대항해시대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의 탐험가들과 항해가들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기존의 무역로를 장악한 오스만 제국을 피하여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서양 국가들에게 접근하여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주겠다고 약속하였고, 이에 설득당한 국왕들이 이들에게 배와 선원들을 후원해주고 대대적인 해상 탐험 원정이 일어나며 본격적인 대항해 시대의 서막이 올랐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례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스페인의 후원을 받아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인 개척지를 건설하는 것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이이다. 1497년의 존 카봇은 영국의 후원을 받았으며, 처음으로 '새로 발견된 땅'을 인지하고 북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기도 하였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사실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이 아시아나 인도가 아니며, 지금까지 사람들이 몰랐던 제 4의 대륙이라고 주장하며 완전히 새로운 '신세계'의 개념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현재 '아메리카 대륙'의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프랑스의 후원을 받은 조반니 데 베라차노는 아메리카 대륙의 대서양 연안 지역을 1524년에 최초로 조사한 유럽인이기도 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이후, 롬바르디아 전쟁이 종결되었으며 서로 맞서 싸우던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 즉 베네치아, 나폴리, 피렌체, 밀란, 교황령은 서로 모여 이탈리아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때 피렌체의 로렌조 데 메디치가 이탈리아 동맹의 가장 큰 권력가였으며, 또한 르네상스 시기 가장 열성적으로 예술가들을 지원하여 준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파치 음모 사건과 투르크의 침략을 견뎌 내고 이탈리아 동맹을 유지하며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해오자 이 이탈리아 동맹은 무너지고 말았고, 결국 이탈리아에서는 발루아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에서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문에 1500년대에 이탈리아는 유럽 각국들이 간섭하며 전쟁이 일어나고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르네상스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하며 유럽의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로 번영하기도 하였다. 로마의 교황들도 이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 다 달랐는데, 율리오 2세의 경우에는 최대한 외국 군주들의 간섭을 줄이려 한 반면 바오로 3세는 외국 군주들 사이를 중재하여 평화를 이끌어내고자 한 경우도 있었다. 이 때 메디치 가문에서 선출된 레오 5세나 클레멘스 7세 등의 교황들은 가문의 입맛에 맞추어 신교 세력들을 적대하였으며 가문과 개인의 부를 늘리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전쟁이 끝났을 무렵, 이탈리아 북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남부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에 떨어져 있었다.
이때까지도 교황령은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반종교개혁을 실시하여 신교 세력들의 비판을 무마하고 천주교회를 개혁해 보려 하였다. 이 때 발생한 주요 사건에는 트렌트 공의회, 엘리자베스 1세의 파문, 레판토 해전 등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그레고리 천문대의 건설, 그레고리 달력 반포, 마테오 리치를 파견하여 중국에 예수회 선교사들을 보낸 사건, 프랑스 종교 전쟁, 투르크와의 장기전, 조르다노 브루노의 화형, 교황령의 린체이 아카데미(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속해있었다.)의 설립, 30년 전쟁, 대튀르크 전쟁 동안 교황 인노켄티우스 6세의 주도 하의 마지막 신성 동맹의 결성과 같이 유럽사와 세계사적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매우 많이 일어났다.
이탈리아는 1500년대의 영광을 뒤로 하고, 1600년대와 1700년대에는 대서양의 노예 무역에서 소외되며 점차 경제가 쇠퇴하였다. 18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왕위 계승 전쟁 이후에 이탈리아 남부는 스페인 부르봉 가문에게, 북부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로레인 왕가에게 지배당했다.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과 전쟁을 치를 때에, 상대적으로 프랑스에 가까웠던 이탈리아 북부는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하여 여러 자매공화국들로 찢어졌고, 나중에는 프랑스 제1제국의 하위 국가인 이탈리아 왕국이 들어섰다.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 지방에서는 나폴레옹과 혈연 간이었던 조아킴 뮈라가 나폴리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통치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쇠퇴하자 이같은 권력구도도 무너졌고, 빈 회의에서 이탈리아의 정치 지형을 다시 18세기 후반으로 되돌리기로 결정하였다. 허나 나폴레옹 통치기에 뿌려진 자유와 평등과 같은 혁명의 유산들은 뿌리뽑을 수 없었고, 이 때문에 19세기 초에 이탈리아는 다시 혼란기에 돌입하게 된다.
통일
이탈리아는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몇 천년 동안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쪼개져 있었는데, 결국 1800년대 들어서야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과 사보이아 왕가가 힘을 합쳐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이탈리아 왕국이 설립되었다. 1815년의 빈 회의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통일의 움직임이 사회적으로 급부상하였고 외국의 통치를 받는 지역들을 모두 독립시켜, 하나의 국가 아래에 통일시키자는 의견이 떠올르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가장 대표적인 급진주의자가 바로 주세페 가리발디였는데, 그는 비밀 결사조직 카르보나리 당의 일원이자 1830년대에 떠오른 청년 이탈리아당의 창립자였다.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통일한 공화정을 만들고 싶어하였으며, 리소르지멘토를 주도하였다.
주세페 가리발디는 청년 이탈리아당에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매우 많았고, 이들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통일 분위기를 조성하며 가리발디의 뜻을 충실히 따랐다. 이 때 이탈리아 북부를 통치하던 사르데냐 왕국의 사보이아 왕가와 사르네냐 왕국 정부를 이끌던 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 백작도 통일 이탈리아 국가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1848년에 유럽을 휩쓸은 1848년 혁명의 열기를 이어 처음으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1차 독립전쟁을 선포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855년, 사르데냐 왕국은 크림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편을 들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카보우르 백작의 통일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강대국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사르데냐 왕국은 1859년에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2차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롬바르디아를 오스트리아에게서 해방시켰다.
1860년과 1861년 사이, 가리발디는 나폴리와 시칠리아 지방을 통일하였으며, 사보이아 왕가는 로마와 교황령 일부를 제외한 이탈리아 중부를 완전히 점령하여 통일하였다. 1860년 10월 26일, 테아노에서 사보이아 왕가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가리발디가 역사적인 회담을 가졌고, 합의가 이루어져 마침내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 전체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가리발디는 본디 공화정을 바랐던 자신의 꿈을 접고 사보이아 왕가를 지지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될 수 있었다. 카보우르 백작도 가리발디가 통일한 이탈리아 남부를 1861년 3월 17일에 샤르데냐 왕국에 편입시키는 것에 동의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1861년 3월 17일에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왕국의 첫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왕국의 수도를 피렌체로 옮겼다. 이 때 이탈리아 왕국의 수립에 기여한 4명의 인물들(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가리발디, 카보우르 백작, 마치니)를 건국의 아버지라 부른다.
왕정기
새롭게 수립된 이탈리아 왕국은 수립 직후 강대국의 지위를 획득했다. 샤르데냐 왕국의 헌법이 이탈리아 전역에 확대되어 적용되었으며, 시민들에게 자유와 평등에 대한 보장을 일부 하였으나, 선거권을 빈자들과 교육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주지 않는 등 나름대로 문제도 있었다. 새로운 왕국은 입헌군주정이었으며, 진보적인 세력이 장악한 의회에서 국정을 맡아 처리하였다. 한편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는 산업화가 일어나 급속도로 발전하였으나, 중부와 남부에서는 여전히 산업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며 농촌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이 때문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북부로 이주하였으며, 이러한 사회적 혼란을 틈타 이탈리아 사회당이 기존의 진보와 보수 정당들에 도전하며 점차 힘을 키워갔다.
19세기 초반, 이탈리아는 소말리아와 에리트레아를 식민지화하며 식민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899년 11월에서 1901년 9월까지는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에 8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1901년 9월 7일에는 청나라가 강제로 이탈리아에게 톈진의 조계를 할양하였으며, 1902년 6월에는 공식적인 이탈리아 영토로 포함되어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1913년에는 모든 성인 남성들에게 선거권이 주어졌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이탈리아에서는 지오반니 지올리티 총리가 1892년과 1921년 사이에 5번이나 연임하며 이탈리아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인 현대화를 본격적으로 이끌었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삼국 동맹을 맺었으나, 1915년에 영토를 확장시켜준다는 조건으로 변절하여 연합 세력에 동참하였다. 이후 이탈리아는 미국, 영국, 프랑스와 함께 연합국의 주요 4개국으로 떠올랐고, 전쟁 승리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세계 대전의 과정은 상당히 고난하였는데, 이탈리아 군대가 알프스 산맥에서 교착전에 빠져 막대한 인명, 물적 피해를 보며 더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된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이후 군대를 재조직하고 대대적인 모병을 거치며 전열을 가다듬었고, 그라파산이나 피아베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1918년 10월에는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결국 이탈리아 전선에서 승리하며 전쟁을 일단락지었다. 이로 인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치명타를 입고 몰락하였으며, 2주 후에는 세계 대전도 종결되었다.
이탈리아는 세계 대전 동안 65만 명에 달하는 군인과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왕국은 재정적으로 파산 위기에 이르렀다. 이탈리아는 세계 대전의 승전국으로서 국제 연맹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영구적으로 얻어내고 국제적인 위상도 어느 정도 올랐으며 전쟁 이전 요구했던 영토들도 상당수 얻어내었으나, 달마티아 지방을 얻어내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전쟁이 '실패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사회는 불신에 휩싸였다. 다만 이탈리아는 전쟁 막바지에 헝가리의 영토였던 리예카를 원래 자신들에게 약속된 영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격하여 자국 영토로 편입하기도 하였다.
파시즘 독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사회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졌고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급진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의견들을 내세우며 군중들을 부추겼다. 실례로 1919년 3월에 북이탈리아 공업지대에서 러시아 혁명을 본받아 노동자의 공장 운영, 거리투쟁, 공장 생산 거부 등의 강력한 행동이 개시되었는데, 이는 남부 농업지역에도 파급되어 노동자층의 계급투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민중들의 단결을 두려워한 지주, 군벌과 전통적인 자유주의 세력들은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자고 주장하며 국가주의를 내세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을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1922년 10월, 파시스트당의 검은셔츠단이 로마 진군을 실시하였고,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 쿠데타 시도는 무위로 돌아갈 뻔 하였으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솔리니를 결국 수상으로 임명하면서 성공하였다. 이후 권력을 잡은 무솔리니는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정치적 단체들을 불법으로 규정하였으며 개인의 자유도 심각하게 제한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무솔리니의 행보는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고, 결국 후에 히틀러의 나치당과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에 영감을 주는 참사를 낳았다.
1935년, 무솔리니 주도 하의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입하였고,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설립하였다. 이 행동은 국제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이탈리아는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말았다. 이후 이탈리아는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시스코 프랑코를 지지하며 국제적인 행보를 넓혀갔다. 1939년에는 알바니아를 합병하였으며, 이후 약 몇십여년 동안 사실상 보호령으로 두었다. 이탈리아는 1940년 6월 10일에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령 소말릴란드, 이집트, 발칸 반도, 동부 국경으로 군대를 투입하였다. 허나 이탈리아 군대는 동아프리카, 북아프리카, 소련 국내에서 패배하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체결된 빌라 주스티 정전 협약으로 이탈리아는 유고슬라비아 지방을 합병할 수 있었다. 파시즘 기간 동안, 무솔리니는 이 유고슬라비아 지방을 '이탈리아화'시키려 하였으며 슬라브어, 학교, 정당, 문화를 철저하게 억압하였다. 이탈리아는 전쟁 기간 동안 초법적인 살인 만행을 저질렀으며, 유대인과 슬로베니아인 등의 민족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을 이탈리아 강제수용소로 보내어 인종 청소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다만 독일과는 다르게 이탈리아의 전쟁 범죄는 전후 상대적으로 적게 기소되었고, 처벌도 훨씬 적었다. 연합국 군대는 1943년 7월부터 시칠리아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본격적인 이탈리아 본토 침공이 시작되자, 무솔리니는 얼마 가지 못하고 실각하였으며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파시즘 대평의회 의원들 대다수의 동의를 얻어 권좌에서 쫓겨났다. 9월 8일에는 카시빌레에서 연합국과의 휴전 협정을 조인하였는데, 이 직후 이탈리아 파시스트 당의 도움을 받은 나치 독일 군대가 빠르게 국경 내부로 들어와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를 장악하였다. 이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세계 대전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북중부를 장악한 나치 독일과 남부에서부터 서서히 밀고 올라가는 연합국 군대 사이에서 전쟁이 계속되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독일이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세웠고, 무솔리니를 구출해내어 이 공화국의 대표로 세움으로써 나치 독일의 괴뢰국으로 변질시켜버렸다. 남부 지방에 있던 몇몇 이탈리아 군대들은 이탈리아 공동교전군을 조직하여 연합국의 편에서 싸웠다. 다만 상당수의 이탈리아 군대는 여전히 무솔리니와 독일에게 충성을 바쳤고,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편에서 연합국에 대항하여 전투를 계속하였다. 결국 이탈리아는 내전 상태에 돌입하였는데, 이때 이탈리아에서는 휴전 협정 이후부터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사회 전반적인 반파시즘 분위기가 점차 강해지고 있었기에,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게릴라전을 펼치며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군대와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1945년 4월, 독일과 히틀러의 패색이 만연해지자 무솔리니는 북쪽으로 도주하여 목숨을 건지려 하였으나, 결국 잡혔고 코모 호수 인근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시신은 이후 밀라노로 옮겨졌고, 공공장소에서 거꾸로 매달린 채로 대중들에게 전시되며 자신의 죄악에 대한 대가를 일부나마 치르었다. 1945년 4월 29일에는 이탈리아에 주둔하던 독일 군대가 마침내 항복하며 공식적인 교전은 모두 끝났다. 이 전쟁에서 50만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 국민들이 사망하였으며, 이탈리아 경제는 파탄 수준에 이르러 1944년의 1인당 GDP는 20세기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공화정
이탈리아는 1946년 6월 2일 국민 투표를 통해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으며, 1948년 1월 1일 새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후 이 날을 공화국의 날로 제정하고 기념하고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아들인 움베르토 2세는 왕위에서 퇴위하도록 강요당했고, 사보이아 왕가는 이탈리아에서 쫓겨났다. 1947년에 이탈리아 평화 협정이 맺어졌으며, 이로 인하여 베네치아줄리아가 다시 유고슬라비아에게 돌아갔으며 이탈리아가 해외에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도 모두 빼앗기면서 이탈리아 식민 제국이 종말을 맞았다. 1950년에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가 1960년 7월 1일까지 이탈리아의 행정력 아래에 국제 연합의 신탁통치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돌입한 냉전 시기에서, 특히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은 이탈리아가 선거를 통하여 다시 극단적인 파시스트나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닌가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두려움은 중도적인 성향의 기독교민주당의 알치데 데 가스페리 총리가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며 소멸되었다. 1949년에 이탈리아는 NATO에 가입하였으며, 이후 미국의 마셜 플랜의 도움을 지대하게 받아 1960년대 후반까지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보이며 '경제 기적'을 일구어냈다. 1957년에 이탈리아는 유럽 경제 공동체의 창립 회원국으로 참여하였으며, 이 것이 나중에 발전하여 1993년에 유럽 연합으로 성립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이탈리아는 납의 시대를 겪었다. 이 시기에는 특히 1973년의 석유 파동 이후의 경제적인 위기와 광범위한 사회적 갈등,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 냉전의 격화에 따른 미국과 소련 사이의 갈등으로 이탈리아 전체가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납의 시기는 기독교민주당의 정치인이자 총리였던 알도 모로가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되었다가 암살당하며 그 정점을 찍었고, 또한 네오 파시스트들이 볼로냐 대학살을 일으키며 85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는 1945년 이래 처음으로 기독교민주당이 여당의 지위를 빼앗기며 타 정당들에게 주도권을 내주었다. 하나는 공화당의 조반니 스파돌리니 총리였고, 나머지 하나는 이탈리아 사회당 출신의 베티노 크락시 총리였다. 다만 기독교민주당은 여전히 의회 다수당의 지위를 유지하였고, 정국의 최대 주도 세력이기도 하였다. 크락시 총리의 재임기에 이탈리아는 다시 경제가 회복세를 띠기 시작하였고, 세계에서 5번째가는 산업 국가로 발돋움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G7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허나 크락시 총리는 지나친 정부 확장 재정 정책을 운용하였고, 이로 인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의 빛은 GDP의 100%를 넘기고 말았다.
1992년과 1993년 사이, 이탈리아 정부는 이전에 시칠리아의 마피아들을 집단으로 처벌한 막시 재판의 후폭풍을 호되게 겪었다. 마피아들은 이에 앙심을 품고 여러 테러 공격을 일으켰으며, 이때문에 정부는 반테러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1992년에는 2번의 주요 폭탄 공격으로 판사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1993년에는 로마, 밀라노, 피렌체 등 이탈리아의 주요 대도시의 관광지들에 일부러 폭탄 테러를 시행하기도 하며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혔다. 이로 인하여 10명이 사망하였으며, 93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역사적인 문화재들도 다수 피해를 입었다. 이 때 천주교회는 공개적으로 마피아를 책망하였는데, 직후 교회 2곳이 테러를 당했고 반마피아 성향의 성직자들이 로마에서 죽은채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초, 이탈리아는 정치적 극단화, 막대한 공공부채, 엄청난 부정부패 등에 실망한 국민들이 대대적인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 때 부정부패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은 정당들이 없었으나, 그 와중에도 특히 50년 동안 이탈리아의 주요 정치세력이었던 기독교민주당이 특히 부정부패가 심했다. 결국 기독교민주당은 여러 분파들로 쪼개졌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결성하였으며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중심의 중도 우파 세력과 로마노 프로디 중심의 중도 좌파 세력이 연정을 만들어 정부를 운영하였다.
한편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2008년부터 시작된 경제 침체기의 여파로 인하여 결국 2011년에 사임하였고, 그가 이끌던 보수 정부는 마리오 폰티 중심의 진보 정부로 대체되었다. 2013년 총선 이후, 이탈리아 민주당 부대표였던 엔리코 레타가 조르조 나폴리타노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우파, 좌파를 모두 참여시킨 대연정 정부를 구성하였다. 다만 2014년에 새로운 민주당 당대표 마테오 렌치의 도전을 받고 결국 사임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마테오 렌치가 총리직으로 올랐고, 이탈리아 상원을 폐지하거나 선거법을 개정하는 등 개헌과 같은 개혁적인 조치들을 추진하였다. 다만 이 개혁 조치는 12월 4일에 국민투표에서 부결되고 말았고 마테오 렌치 총리는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이후 파올로 젠틸로니 외무장관이 대신 새로운 총리에 올랐다.
2010년대 유럽은 점차 난민들의 유입으로 골머리를 썩기 시작하였는데, 이 난민들 상당수의 최종 목적지가 바로 이탈리아였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이탈리아는 70만 명이 넘는 난민들을 수용하였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아프리카 사하라 지방에서 온 자들이었다. 이는 이탈리아 대중들의 크나큰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정계에서 극우 세력들이 득세하고 유럽 연합 탈퇴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2018년 총선에서는 포퓰리스트 정당인 오성운동과 극우 계열의 북부동맹이 크게 약진하였고, 이로 인하여 대학 교수였던 주세페 콘테가 새로운 총리에 당선되었다. 주세페 콘테 총리는 이 두 정당을 모아 포퓰리스트 연정을 구성하여 내각을 이끌어나갔다. 허나 14개월 이후 북부동맹은 주세페 콘테 총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고, 이로 인하여 오성운동은 어쩔 수 없이 중도 좌파 세력들과 연정을 이루어 국정을 계속 담당하였다.
2020년, 이탈리아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 직격탄을 맞았고, 주세페 콘테 총리는 3월부터 5월까지 국가 격리 정책을 내려 전염병의 전파 속도를 늦추려 하였다. 이 정책은 대중적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나, 한편 이탈리아 건국 이후 최대의 인권 제한 조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탈리아는 35,000여 명의 사망자를 내며 세계에서 가장 코로나 19로 사망자를 많이 낸 국가라는 불명예를 안았으며, 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히며 이탈리아 경제를 침체의 늪에 빠뜨렸다.
정치
이탈리아는 의원내각제,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다. 1946년 왕가를 국민투표로 쫓아낸 이탈리아는 1948년에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을 제정한 이래 공화국이며, 헌법 139조에 '공화정체는 헌법 개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
이탈리아의 대통령(Presidente della Repubblica Italiana)은 국가원수로 이탈리아의 국가 통합과 이탈리아 헌법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대통령의 임기는 7년이며, 중임 제한은 없다.
대통령은 총리 임명권, 총리가 구성한 내각에 대한 거부권, 법안 서명권, 1/3의 헌법재판관 지명권 등의 권한을 가진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이탈리아에서는 본래 상징적인 역할만을 맡았지만, 1990년대 이탈리아가 양당제에서 다당제로 변화하여 정치 위기가 잦아진 이후로는 거국내각 수립, 장관 후보자 거부 등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대통령은 상원과 하원, 지역 대표가 합동으로 선출한다. 이탈리아의 20개 주(region)에서 선출된 58명과 320명의 상원의원, 630명의 하원의원이 선거인단이 되어 이들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한다. 이들은 비밀투표를 통해 대통령 후보 중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며, 여기서 2/3 이상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있으면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그렇지 않으면 투표를 다시 치른다. 이렇게 3번 치러도 뽑히지 않으면 그 때부터는 과반의 득표를 얻은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과반이 없으면 계속 반복. 1971년 대선에서는 23번이나 다시 선거를 치르기도 했다. 길고 모호한 과정,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을 할수록 당선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점에서 콘클라베에 비유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재선된 대통령은 조르조 나폴리타노와 세르조 마타렐라뿐이다. 이는 이전 대통령들이 재선하지 않는 것을 관례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나폴리타노 역시 재선을 원치 않았는데 당시 정국 혼란이 심해 다른 대통령 후보들이 계속 유효표를 충족하지 못한 관계로 그나마 과반 득표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던 나폴리타노가 어쩔 수 없이 재출마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사임했다. 이는 마타렐라도 마찬가지로 후임 후보들의 유효표가 안나오자 어쩔 수 없이 다시 맡게된 경우이다.
대통령은 퀴리날레 궁에 거주하며 집무를 수행한다.
의회
Parlamento italiano. 이탈리아의 의회이다.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양원제는 다른 양원제 국가에 비하면 매우 이질적인 양원제인데, 거의 완전하게 동일한 권한을 가진 입법부를 2개를 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차이는 선출 지역이 전국이냐 주냐, 그리고 피선거권의 연령, 상원의 대통령지명권 정도밖에 없고, 상원이든 하원이든 마음껏 입법과정을 거치고 반대쪽에게 견제를 받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제도를 완전양원제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양원제라고 하면 영국식 신분의회나 연방국가의 지역대표/국민대표의 구별이나, 내각책임제 국가의 이권분립에서 나타나는 내각의 폭주를 견제하기 위해 상원이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여긴 그냥 의회가 2개다. 비효율적인 국회운영 때문에 2016년에 마테오 렌치 내각이 상원의 정원과 권한을 크게 줄이는 사실상의 단원제 개헌안을 꺼내들기도 했지만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다.
그 외에도 의석수가 OECD 평균(0.97명)보다 많다며 1983년 이래 총 7차례 의원 수 감축 시도가 있었다. 2020년 국민투표에서 찬성 69.95%(투표율 50.18%)를 얻음에 따라 통과시 총선 있는 2022년부터 적용한다.
의회해산이 없다는 가정 하에 상원과 하원의 임기는 모두 5년이며 총선은 상하원 동시에 치러진다.
- 공화국 원로원(상원)
Senato della Repubblica
총 320석. 한국의 국회의원 총선처럼 1인 2표제로, 116석은 소선거구제를 통해, 193석은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통해 선출되는데 20개 주(region)마다 선거구가 나뉘어진 권역별 비례대표제이다. 나머지 6석은 해외 거주 이탈리아인들을 위한 의석으로 거주지별로 선거구를 나눠 불구속명부식 비례대표제로 선출된다. 봉쇄조항은 일반적인 정당의 경우 전국 단위에서 3%, 정당연합의 경우 전국 단위에서 10%, 특정 언어권 지역(쥐트티롤 독일어권 지역 등)을 대변하는 정당의 경우 해당 지역에서 20%이다.
그 외에도 종신 상원의원들이 5명 있는데 이들은 대통령이 지명하며, 주로 사회 각 계층에서 존경을 받는 명망가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들과는 별도로 직전 대통령 역시 당연직 종신 상원의원이다. 지금도 전임 대통령 조르조 나폴리타노(Giorgio Napolitano)가 상원의원으로 재직해 있다.
2023년 이후로는 국민투표에 따라 200석으로 줄어든다.
의사당은 마다마 궁(Palazzo Madama)이다.
- 대의원(하원)
Camera dei deputati
총 630석. 상원처럼 1인 2표제로, 232석은 소선거구제를 통해, 386석은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통해 선출되는데 상원과 달리 전국구 비례대표제이며 봉쇄조항은 전국 단위에서 3%. 나머지 12석은 해외 거주 이탈리아인들을 위한 의석으로 거주지별로 선거구를 나눠 불구속명부식 비례대표제로 선출된다.
2023년부터 400석으로 줄이기로 했다. 개편 후에는 국내 의석 392석과 해외 거주자 의석 8석으로 알려졌다.
의사당은 몬테치토리오 궁(Palazzo Montecitorio)이다.
정당
이탈리아는 전형적인 다당제 국가이다. 지역정당을 포함해 약 100여개 이상의 정당이 극좌부터 극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냉전시대까지는 기민당(PD), 사회당(PSI), 공산당(PCI) 등 세 당이 경쟁했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는 절대적 우위를 보이는 정당이 없이 수많은 정당들이 정당연합을 통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1994년 선거법 개정을 통해서 순수비례대표제를 폐지하고 단순다수대표제와 4% 이상을 획득한 정당이 참여하는 비례대표제를 혼합한 결과이다.
1990년대 이후 각 정당은 주로 정당연합을 통해 선거에 참여하고 있다. 중도우파의 경우 1994년 자유의 기둥(Polo delle Libertà), 1996년 자유를 위한 기둥(Polo per le Libertà), 2001년 자유의 집(Casa delle Libertà), 2006년 자유의 집(Casa delle Libertà), 2008년 자유의 인민(Il Popolo della Libertà), 2013년 자유의 인민(Il Popolo della Libertà), 2018년 중도우파연합(Center right Coalition)의 이름으로 중도우파 정당들이 연합해 선거에 나섰다. 반면 중도 좌파의 경우 1996, 1998, 2001년 울리보(L'Ulivo), 2006년 유니온(Unione), 2008, 2013, 2018 민주당 주도 좌파연합 등의 이름으로 선거에 참여했다.
현재 활동중인 주요 정당은 우파 정당의 경우 전진이탈리아(Forza Italia), 북부동맹(Lega Nord), 이탈리아 형제들(Fratelli d'Italia) 등 이 있다. 전진이탈리아당은 1994년 선거를 위해 기업가 베를루스코니가 기존의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당 세력을 끌어 모아 급조한 정당이다. 이해에 따라 만들어진 정당이기 때문에 보수정당이지만 명확한 보수 이데올로기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 분파들이 떨어져 나가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1994년부터 현재까지 우파연합을 이끌고 있다. 북부동맹의 정식명칭은 파다니아 독립을 위한 북부동맹(Lega Nord per l'indipendenza della Padania)이지만 일반적으로 동맹(Lega)라고 부르고 있다. 1991년 북부 지역의 정당 연합체로 설립된 동맹은 보시(Umberto Bossi)의 지도력 아래 성장했다. 동맹은 연방주의를 주장하지만 때때로 북부의 분리독립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민 문제 등에 단호한 입장을 보이는 강력한 우파정당이다. 북부 지역에서는 가장 큰 정당이고 2018년 선거에서 오성운동과 민주당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정당으로 성장했다. 이탈리아 형제들 정당은 민족주의 우파정당으로 파시스트 정당이었던 이탈리아 사회운동(Movimento Socialista Italiano)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1995년 민족동맹(Alleanza Nazionale)의 이름으로 우파연정에 참여했고 2009년 해산하고 자유의 인민 연합체에 들어갔으나 2012년 다시 분리되어 나왔다. 주로 남부 지역에서 지지를 얻고 있다. 중도좌파 정당으로는 민주당(Partito Democrazia)이 있다. 사회민주당 계열의 정당으로 이전에 중도좌파연합에 참가했던 다양한 좌파정당들이 모여 2007년 형성되었다. 2018년 선거에서 두 번째 큰 정당으로 성장했다. 마지막으로 오성운동(Movimento 5 Stelle)는 코메디언인 그릴로(Beppe Grillo)에 의해 2009년 설립된 포퓰리즘 정당이다. 기존 체제, 특히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비판하는 그릴로의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2013년 선거에서 정당 중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었지만 선거법 때문에 109명의 하원의원만을 배출하였다. 2018년에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정당이 되었으나 당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모호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법부
전반적으로 유럽 안에서 이탈리아의 정치는 평가가 좋지 못하지만 그나마 사법부는 절대중립을 유지하고 있다.
이탈리아 법 집행 중 가장 두드러지는 사건이 1992년에 있었던 바로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 운동이라고 불리는 사건으로, 정치, 경제에 종사하는 관료들의 비리를 밝혀내어 3200명을 기소하였던 적이 있었다. 이 큰 사건으로 기독교민주당, 사회당 등의 기존 거대정당들이 한순간에 몰락해버렸고, 넓어진 정치공백은 신흥 정치가였던 베를루스코니가 야금야금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역시 부패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이 아니었고, 마니 풀리테 수사팀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성역없이 수사하여 부패혐의로 철창행시켜버렸다. 그런데 철창 안에서 당선되었다. 국민이 뽑아줬는데 검찰과 법원이 아무리 집어 쳐넣어봤자... 그리고 베를루스코니가 언론재벌이라서 언론은 이미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우린 끝났어라고 말할 정도... 여러모로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일들이 많다.
이탈리아 사법이 이처럼 부패에서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검찰이 행정부 소속이 아니라 사법부 소속이라는 점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검사가 기소한 사건에 대해서만 법원의 판결이 가능하기 때문에, 법원이 아무리 공정하게 판결하고 싶어도 검찰이 어깃장을 놓으면 제대로 된 판결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서, 한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들은 검찰이 행정부의 법무부 소속인데 비해, 이탈리아는 검찰이 사법부 소속이기 때문에 행정부 혹은 입법부 소속인 정치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수사할 수 있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반부패 지수가 높은 덴마크 등 적지 않은 수의 유럽 선진국들이 법원 밑에 검찰이 있으며, 예외적인 경우가[1] 아니면 법원이 일정 부분 검찰의 통제를, 또 검찰은 수사권 통제를 한다. 또한 미국 일부 주도 법원 밑에 검찰이 부치된 것은 아니지만 검사를 판사들이 지정하게 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게 있다.
유럽 연합은 검찰 제도를 포함해서 사법 제도에 대해 논의하는 회의를 갖고 어떻게 해야 인권 우선의 사법 절차가 마련되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서 나온 결론 중 하나는 사법권은 정치적 입김(행정부 산하)에서 벗어나 독립적이야 한다는 의결을 한 전례가 있다. 한국에서는 이 체제를 규문주의라고 잘못 규정하여 비판하기도 하는데, 원님재판이라고 불리는 규문주의는 사건에 대하여 한 인물이 재판관(판사)과 소추관(검사)을 동시에 하는 것을 말하지, 재판관과 소추관이 한 기관에 속해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피아들은 한때 자신에게 가혹한 판결을 내리는 판사를 암살 하는등 강하게 저항했으나 이후 무자비한 공권력의 탄압을 받고 지금은 사법권에 도전하는 행태는 크게 볼 수 없다.
2021년에 중범죄가 아닌 경우 항소심은 2년 이내, 상고심은 1년 이내에 끝내야 하고, 테러·마피아 활동·마약 밀매·성폭력 등 중범죄 사건은 각각 5년과 2년 6개월의 기한으로 단축하는 개혁안을 통과했다.
일반 민·형사사건의 최종심 법원으로 대법원(Corte Suprema di Cassazione)을, 행정사건의 최종심 법원으로 국사원(Consiglio di Stato)을 두고 있으며, 그 외에 독립한 법원으로서 회계·재정 관련 재판을 담당하는 회계감사원(Corte dei Conti)과 군사 재판을 담당하는 군사법원(Tribunali Militari) 등이 있다. 참고로 일반 민·형사사건은 3심제지만 행정사건의 경우 지방행정법원에서 항소하면 바로 국사원인 2심제로 운영되고 있다.
이탈리아에는 헌법재판을 담당하는 헌법재판소도 있는데, 대통령, 양원합동회의, 법원에서 각 5인씩 지명하는 총 15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된다. 재판관의 임기는 9년이고 연임할 수 없으며, 재판관 중에서 임기 3년의 헌법재판소장을 호선한다. 헌법재판소는 위헌법률심판, 권한쟁의심판, 탄핵심판, 국민투표허용성심판을 관장하며,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와 같은 헌법소원심판권이나 정당해산심판권은 없다.
이탈리아 최고사법위원회(Consiglio Superiore della Magistratura)는 대통령, 대법원장, 검찰총장, 사법관 중에서 호선된 16명의 사법관, 의회에서 선출된 8명의 법학교수 혹은 변호사, 총 27명으로 구성되며 사법관(판사+검사)의 임명 및 승진, 배치 등 각종 인사에 관여한다.
외교
이탈리아는 외교를 통해 통일을 완성한 국가이다. 이탈리아는 현실주의적 정책을 외교정책에 적용함으로써 현실적 국가이익을 취하여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나라라고 불리며, 반도국으로서의 외교정책인 시계추주의(Pendolism)를 펼쳐왔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강대국들의 권력관계, 특히 영국, 프랑스, 독일 사이의 권력관계를 이용해서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구축했다. 제 2차 세계대전에 추축국(독일, 일본, 이탈리아)으로 참여해 패전국의 멍에를 쓸 수 있었지만 조기 항복과 외교를 통해 파리 강화회의에서 패전국 지위를 면할 수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다양한 국제기구에 적극적으로 가입했다. 이는 전쟁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탈리아가 국제적 지위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전후 이탈리아 외교정책의 핵심은 유럽 및 미국과의 관계 강화였다. 반공정책 기조 속에서 이탈리아는 1947년 마샬플랜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고,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설립멤버가 되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서 1955년 유엔(UN)에 가입하였다. 또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역시 중시하여 이탈리아는 전후부터 줄곧 유럽통합에 대한 가장 열정적인 지지국으로 자리잡았다. 1949년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1950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현 유럽연합의 전신인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장 먼저 가입했으며 이후에도 유럽의 초국가적 통합에 가장 적극적인 국가이다. 또한 이탈리아는 지중해 국가로서 지중해 국가들과 자원외교를 펼치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 산유국들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쳐왔다.
이탈리아는 다자간 국제정치를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UN, NATO 및 EU 뿐만 아니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무역기구(WTO), 관세 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7개국 재무장관회의(G7) 등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 이탈리아 외교정책의 관심사는 중동부유럽과 중동 지역의 정치적 안정이다. 이는 외교안보적 측면뿐만 아니라 불법 이민자들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보다는 평화유지 활동에 더 많은 중점을 두고 있다. 이탈리아는 1996년 알바니아, 2006년 이라크, 레바논, 이밖에 소말리아, 모잠비크, 티모르, 보스니아, 코소보, 알바니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UN과 함께 평화유지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 대한관계
1956년 11월 24일 한국과 단독수교를 맺었으며 상호 상주공관이 설치되었다. 북한과는 유럽 국가 중 최초로 2000년 1월에 수교하였으며 이후 많은 유럽 국가들이 이를 따랐다. 주한국 이탈리아대사관에서 겸임한다.
한국과의 협정체결 현황은 1961년 3월 특허권·상표권 보호에 관한 각서교환, 1965년 3월 무역·문화협정, 1975년 사증 및 사증수수료 면제에 관한 각서 교환, 1982년 5월 경제협력협정에 합의하였다. 이어 1984년 2월 과학 및 기술협력협정, 1989년 1월 투자증진 및 상호보호 협정, 이중과세 및 탈세방지 협약, 2000년 3월 관광협력협정, 2005년 3월 한·이 사회보장협력협정에 합의하였다.
이탈리아와 한국과의 교역은 2000년대에 이르러 대폭 확대되었다. 2018년 기준 한국에 대한 이탈리아의 수출액은 약 63억 달러였고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액은 약 44억 9천만 달러로 약 18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보였다. 이탈리아는 한국의 제 15위 무역 상대국이고 유럽연합 내에서는 세 번째 교역 상대국이다. 이탈리아는 1990년대 말까지 한국과의 무역에서 적자를 유지해 오다가 1998년을 기해서 흑자로 돌아섰다. 이탈리아에 대한 한국의 주요 수출품목은 자동차, 합성수지. 열연강판, 냉연강판, 금속절삭가공기계 등이며, 이들 제품에서는 한국이 무역흑자를 보고 있다. 한국의 주요 수입품목은 가방, 신발, 의류, 의약품, 장신구 등이며 이 분야에서는 한국이 큰 폭의 무역적자를 보고 있다. 한국은 이탈리아에 2018년 약 5,600백만 달러를 투자하였는데, 주로 제조업, 금융, 부동산에 집중되어 있다. 로마에는 대사관(영사관 포함) 및 한국문화원이 위치해 있고, 밀라노에는 총영사관이 위치해 있다.
국방
2023년 기준 세계 군사력 순위는 10위로, 유럽에서 러시아, 영국, 프랑스 다음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전에는 징집제 국가였지만 2005년부터는 모병제를 시행하면서 지속적으로 군 병력을 축소하고 있다. 2018년 기준 육군 99,950명, 해군, 30,000명, 공군, 41,000명과 군대에 준하는 약 11만 명의 카라비니에리(Carabinieri)를 보유한다. 카라비니에리는 평시에는 경찰 보조업무와 군사업무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육군에 비해서 해군과 공군 병력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탈리아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는 대통령이며 최고정책은 대통령이 주재하는 최고국방회의에서 심의한다.
구소련과 동구권의 붕괴 후, 군의 임무와 역할이 국내 치안과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북대서양조약기구)의 일원으로서 공동임무 수행, 세계 평화유지 활동으로 바뀌었다.
이탈리아제 무기 중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군수업체인 베레타제 개인화기들과, 차륜형 장갑차에 전차형의 포탑을 장착한 센타우로(B1 Centauro), 아구스타社의 망구스타 전투헬기, AW101 멀린 다목적헬기, AW139 다목적헬기, 오토멜라라社의 76mm 함포가 유명하다.
행정구역
이탈리아의 행정구역은 레조네(Regione), 프로빈차(Provincia) 및 치타 메트로폴리타나(Città Metropolitana), 코무네(comune)의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어 공식명칭은 레조네는 주(州), 프로빈차는 도(道), 치타 메트로폴리타나는 광역시(廣域市), 코무네는 시(市).
레조네는 광역 행정구역으로 20개가 있다. 그 중에서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트렌티노알토아디제, 발레다오스타, 사르데냐, 시칠리아의 5개는 자치 레조네(regione autonoma)다. 자치 레조네는 상대적으로 소수 민족이 많다는 이유 등으로 다른 레조네보다 더 많은 자치권을 갖는다. 레조네의 중심 도시는 대부분 명성이 있던 도시 국가의 수도여서 관광지로 유명하다.
레조네는 107개의 프로빈차로 나누어진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주요 도시와 주변을 포함한 일부 프로빈차가 치타 메트로폴리타나가 되어서 볼로냐, 제노바, 밀라노, 토리노, 베네치아, 로마, 피렌체, 레조칼라브리아, 나폴리, 바리, 칼리아리, 카타니아, 메시나, 팔레르모의 14개의 치타 메트로폴리타나가 만들어졌다. 일부 프로빈차는 중심 도시의 규모와 주위에 미치는 영향력이 작거나 주변 도시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광역시로 지정된 프로빈차보다 인구가 많은데도 치타 메트로폴리타나가 되지 않았다.
프로빈차는 7,960개의 기초 자치 단체인 코무네로 나누어진다. 코무네는 프로빈차의 통제를 많이 받는다.
- 20개주
- 북부 이탈리아
대체적으로 이탈리아 북부는 북부 아펜니노 산맥 위쪽에 위치한 평야지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비슷한 위도에 있는 토스카나와 에밀리아로마냐가 각각 중부랑 남부로 구분되는 이유.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이탈리아 반도보단 유럽대륙의 연장선상에 있다.
- 에밀리아로마냐(중심 도시: 볼로냐): 과거 교황령의 주요 지역에 속하기도 했던 지역으로 포 강 하구의 비옥한 농업 지대가 있어 과거에 크게 번창하였다. 라벤나, 볼로냐, 페라라, 모데나, 피아첸차 등의 오래 전부터 내려온 유서깊은 도시이자 도시 국가였던 지역이 많은 지역이다. 1088년에 현대 대학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교가 세워졌다. 에밀리아는 포 강 유역을 가로지르는 로마 가도인 아이밀리아 가도에서 유래되었으며, 로마냐는 동로마 제국을 뜻하는 것으로 동로마의 라벤나 총독부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중심 도시: 트리에스테): 과거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에 속했으나 대부분이 오스트리아에 넘어갔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가 점령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이스트리아와 트리에스테 인근 지역을 유고슬라비아에 넘겨 주었다. 오스트리아가 지배했기 때문에 슬라브계와 독일계의 비중이 높으며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이다.
- 리구리아(중심 도시: 제노바): 제노바가 속해 있으며 제노바 공화국의 본토가 있던 지역이었다. 이탈리아 무역의 중심지다.
- 롬바르디아(중심 도시: 밀라노): 서로마 말기 게르만족의 대이동 당시 침입한 랑고바르드족의 이름을 딴 지역으로 북쪽은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삼고 남쪽은 포 강으로 둘러싸인 비옥한 곡창 지대인 롬바르디아 평원이 넓게 펼쳐 있다. 밀라노 공국 등이 있던 밀라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발전한 도시며, 농업 생산력이 뛰어나 치즈와 포도주 등이 유명하다.
- 피에몬테(중심 도시: 토리노): 북서쪽에 위치한 비옥한 평야 지대로, 이탈리아의 주요 농업, 공업 지대다. 사르데냐 왕국의 중심지로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한 지역이기도 하다. 산업 도시인 토리노가 위치해 있고 자동차 회사인 피아트 사의 본사가 위치하고 있다. 유벤투스의 연고지기도 하다.
- 트렌티노알토아디제(중심 도시: 트렌토): 이탈리아어권인 트렌티노와 독일어권인 알토아디제(쥐트티롤)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의 일부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으로 이탈리아령이 되었다. 북부 이탈리아 답게 생활 수준이 매우 높은 지역이다.
- 발레다오스타(중심 도시: 아오스타): 알프스의 프랑스와 스위스 프랑스어권 지역에 근접해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거주하고 있고 남쪽과 동쪽은 피에몬테와 접하고 있다. 척박한 산악 지형이고 면적이 작아서 인구가 적은 편이지만 프랑스, 스위스와 접경하여 철도와 도로 등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부유한 지역에 속한다. 알프스에 있어서 관광업, 농업, 목축업이 발달하였다. 프랑스 국경 지역에는 몽블랑 산이 있다.
- 베네토(중심 도시: 베네치아): 과거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주요 지역에 속했다. 베네치아는 1년에 수천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관광의 중심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주요 전장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산업이 발달하여 생활 수준이 높다. 이탈리아에서 외부 이민자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지역 중 하나다.
- 중부 이탈리아
- 아브루초(중심 도시: 라퀼라)
- 라치오(중심 도시: 로마): 라틴어 단어 라티움(Latium)이 유래로 라틴인들의 발생지, 로마 제국의 발생지, 교황령의 핵심 지역이었던 가톨릭의 중심지,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가 위치한 이탈리아의 수도권이다.
- 마르케(중심 도시: 안코나): 산악 지형으로 교황령의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남동쪽에는 과거에 나폴리 왕국이 있었다.
- 토스카나(중심 도시: 피렌체): 고대에는 에트루리아인들의 영토였고 로마 제국 이후엔 시에나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이, 나중에는 토스카나 대공국이 생겨난 지역이다. 피사, 시에나, 피렌체 등의 르네상스의 중심 도시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어서 문화가 발전했던 이탈리아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으며, 관광업과 와인이 유명하다. 단테 알리기에리 등의 시인은 토스카나어로 글을 썼고 이것은 후세에도 영향을 미쳐 토스카나어는 현대 이탈리아어의 기초가 되었다. 르네상스의 중심지답게 유명 인물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니콜로 마키아벨리,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 당대의 르네상스인들이다.
- 움브리아(중심 도시: 페루자): 산악 지형으로 아펜니노 산맥 가운데 있다. 산간 지대와 테베레 강 유역의 분지로 이루어져 있다.
- 남부 이탈리아
- 바실리카타(중심 도시: 포텐차)
- 칼라브리아(중심 도시: 카탄차로): 가난한 지역으로 수십년 전까지 움집이 있었다.
- 캄파니아(중심 도시: 나폴리): 관광업과 마피아로 유명한 지역으로 치안이 안 좋은 지역으로 유명하다. 과거 나폴리 왕국의 중심지였다.
- 몰리세(중심 도시: 캄포바소)
- 풀리아(중심 도시: 바리): 이탈리아 최대의 해군 기지가 위치해 있는 타란토가 있다.
- 사르데냐(중심 도시: 칼리아리)
- 시칠리아(중심 도시: 팔레르모): 마피아로 유명한 지역이다.
경제
IMF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이탈리아의 GDP는 세계 10위다. 이탈리아는 2018년 기준 2조 달러의 GDP와 1인당 GDP는 34,000달러를 기록한 경제 선진국이다.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유산이 워낙 큰 관계로 관광업을 주요 산업으로 생각하는 국내 사람들의 인식과는 달리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산업은 기계, 화학을 포함한 중화학 공업이다. 조선 산업은 유럽 1위이다.
이탈리아는 자본주의 혼합 경제 체제로, 유로존에서 3번째로 거대하며 세계에서는 8번째로 거대한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는 G7, 유로존, OECD의 창립 회원국이며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국가들 중 하나이자 세계의 수입과 수출을 주도하는 나라들 중 하나이다. 이탈리아는 2005년에 전 세계 삶의 질 순위에서 8번째를 차지하며 고도로 발달된 선진국임을 입증하였고, 인간개발지수는 26위이다. 이탈리아는 특히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사업, 거대한 농업, 세계 최고급 수준의 자동차, 기계 공업, 음식, 디자인, 패션업 등으로 매우 유명하다.
이탈리아는 세계에서 6번째가는 제조업 국가로, 소수의 다국적 거대 기업들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고, 그 대신 훨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소기업들이 더 많다. 기업들은 대부분 산업지구에 모여 있는데, 이들이 바로 이탈리아 산업의 중추를 이룬다. 이탈리아 산업들은 보통 명품업과 틈새 시장에 치중하며, 양으로는 승부하기 힘든 대신에 적은 임금으로 치고 올라오고 있는 중국과 같은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에게 뛰어난 질을 내세우며 맞서고 있다. 이탈리아는 2016년에 세계의 7대 수출국이었으며, 가장 가까운 무역 상대국은 유럽 연합의 다른 국가들이고 전체 무역의 59%을 차지한다. 유럽 국가들 가운데에서는 독일이 12.9%, 프랑스가 11.4%, 스페인이 7.4%를 차지한다.
이탈리아의 자동차 산업은 가히 제조업의 핵심이라 할 정도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2015년에만 144,000여 개의 회사와 485,000여 명의 사람들이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전체 GDP의 8.5%를 차지하고 있다. 피아트 크라이슬러 오토모빌스는 세계에서 7번째가는 자동차 제조 회사이다. 이탈리아는 작은 부품에서부터 초고가 명품 자동차까지 모든 종류의 자동차 부품을 다 생산하는데, 이들 중 특히 마세라티, 람보르기니, 페라리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명품 브랜드들이 모두 이탈리아 기업들이다.
이탈리아는 유럽단일시장의 일부로서, 5억 명이 넘는 잠재 고객들을 소유하고 있다. 이탈리나는 EU의 협약을 통하여 2002년에 유로화를 도입하였으며 유로존의 멤버로서 3억 3천만 명의 시민들을 대변하고, 이탈리아의 주요 금융 정책은 유럽중앙은행이 상당 부분 통제한다.
이탈리아는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하여 크게 경제가 휘청거렸는데, 이는 단순히 국제적인 영향이 아니라 이탈리아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다. 이탈리아 경제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연 5~6%의 고도성장기를 거쳤고,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서서히 성장률이 줄어들었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완전히 정체기에 다다랐다. 정치인들과 정부는 정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막대한 양의 공적 자금을 쏟아부었는데, 이로 인하여 국가의 부채가 급속도로 증가하였으며 2017년에는 전체 GDP의 131.8%에 이르러 EU에서 그리스 다음가는 최대의 채무국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이 때문에 현재 이탈리아의 빛 대부분은 정부의 부채이며, 가계 부채는 심지어 OECD 평균보다도 낮다.
이탈리아는 남부와 북부가 경제적 격차가 매우 심하고, 이 때문에 사회적, 경제적 불안정이 일어나고 있다. 보통 북부가 더 공업화와 산업화가 남부에 비하여 훨씬 더 잘되어 있고 소득 수준도 높은데, 북부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인 알토아디제 티롤 지역은 이탈리아의 1인당 GDP의 152%를 평균적으로 벌어들이는 반면, 가장 빈곤한 지방인 칼라브리아는 61%밖에 벌어들이지 못한다. 이탈리아의 실업률은 11.1%로 유로존 평균보다 약간 더 높은데, 이마저도 북부에서는 6.6%로 낮은 반면 남부에서는 19.2%로 상당히 높다. 2018년 3월에 청년실업률은 31.7%로 매우 높은 수치를 보였고, 유럽 전역과 비교하였을 때에도 극히 위험한 수치이다.
농업
이탈리아는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과 토양을 가지고 있지만 주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산업화가 늦어 20세기 초까지 농업국가로 남아있었다. 20세기 중반까지 이탈리아의 대토지 소유자는 극소수였고, 전 국민의 1/3 이상이 소작농이거나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업생산자였기 때문에 농업생산성 또한 낮았다. 1950년 이후 농지개혁을 실시하고 농업발전 중장기 계획을 통해서 농업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농업생산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2019년 기준 이탈리아는 유럽연합 내에서 프랑스, 스페인과 함께 3위 안에 드는 농산품 생산국이다. 경제구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2019년 기준 2.1% 정도이며 농업인구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3.8% 정도로 낮아졌다. 농가수는 약 250만 가구이고 경지면적은 1320만ha로 국토 면적의 43.8%를 차지한다.
밀, 올리브유, 오렌지 등 과일, 포도주 등이 주요 생산품이다. 유럽에서는 드물게 이탈리아는 쌀 수출국인데, 이는 포강 유역의 풍부한 수량과 비옥한 토지 덕분이다. 이탈리아의 올리브유와 포도주는 특히 유명한데, 포도주의 경우 중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주에서 생산되는 키안티(Chianti)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으며 DOC/DFOP라는 자체적인 포도주 품질보증 라벨을 가지고 있다.
항공·우주
항공 우주 산업에서 프랑스, 독일이 에어버스로 유명하다면 이탈리아는 알레니아 아에르마키와 헬기 제조사 아구스타 웨스트랜드 등으로 유명하다. 밀덕들에겐 이탈리아의 군수회사 중 오토브레다와 함께 낯설지 않은 회사.
ESA의 이탈리아 지분은 독일, 프랑스에 이어 유럽 3위이며 이탈리아 우주국(ASI)은 ISS의 레오나르도 모듈(Leonardo module)을 제작하고 NASA, ESA와 함께 토성 탐사선 카시니-하위헌스 개발에 참여하는등 우주 개발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알레니아 아에르마키와 아구스타 웨스트랜드는 레오나르도 S.p.A.로 통합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세계 10위권 규모의 항공 우주 회사이다.
건축·토목
석유 메이저 중 하나인 Eni의 자회사로서 석유 및 LNG 플랜트 개발로 성장한 사이펨과 독립계 플랜트 건설사 마이레 테크니몬트, 건설 대기업인 위빌드(전 살리니 임프레질로)와 아스탈디(2020년 위빌드가 지분 65%를 인수하여 위빌드의 계열사로 편입됨), 철강 관련 시공업체 다니엘리 등이 유명하며, 세계구급 인프라, 플랜트 수주전에서 한국 건설사들과 경쟁 혹은 협업(컨소시엄 구성)으로 인해 위 업체들은 국내 언론에도 자주 오르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국내 건설업계와 동등하거나 소폭 위에 있는 모습을 보인다.(보다 많은 해외 프로젝트 수주 경험과 기술/금융 노하우를 토대로 사업 수주에 우위를 점하거나 컨소시엄 주관사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등)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국내 10위권 건설사들과 해외에서 빈번하게 경쟁하는 유수의 건설사들이 이탈리아 내에도 많이 있는 편이다.
제약
이탈리아는 제약 산업이 발달한 나라 중 하나로 제약생산액은 EU 국가 중 1위이다. 한국 식약처가 의약품 허가를 참고하는 A8 국가 중 하나이며(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독일, 스위스, 캐나다) 국내 제약 업계가 원료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상위 7개국 중 하나이다.
뇌 건강에 좋다는 글리아티린 성분을 이탈파마코 제약 회사에서 개발했다.
패션·귀금속
명품 의류, 귀금속 등 각종 럭셔리 패션 산업이 매우 발달했으며, 프랑스와 함께 이 고급 패션에서 가장 유명한 국가이다. 프라다, 구찌 등 이름만 들어도 아는 유명한 명품 브랜드들을 비롯해 로저 비비에, 몽클레르, 불가리, 다미아니, 로로피아나, 에트로, 펜디, 보테가 베네타, 페라가모, 미우미우, 발렌티노, 발렉스트라, 베르사체, 아르마니, 토즈, 미쏘니 등 수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소속되어 있는 국가이기도 하고 당연히 패션 산업에 미치는 파워가 엄청나다. 밀라노와 피렌체 같은 경우 이곳을 근거지로 하는 브랜드들이 많다. 예를 들어 발렉스트라 등 소규모의 역사있는 공방들은 이탈리아에 압도적으로 많다.
다만 최근 경제위기로 인해 많은 이탈리아의 패션 하우스들이 해외로 팔리고 있는데,
- 펜디, 불가리, 로로피아나, 에트로 - 프랑스 "LVMH"에 매각
- 구찌, 보테가 베네타, 브리오니 - 프랑스 "케링"에 매각
- 만다리나덕 - 대한민국 "이랜드"에 매각
- 휠라 – 대한민국 "휠라코리아"에 매각
- 발렌티노, 미쏘니 - 카타르 "카타르 왕실"에 매각
- 베르사체 지분 20% - 미국 사모펀드 "블랙스톤"에 매각
등이 대표적이다.
Made in Italy 자체가 고급브랜드로 자리잡으면서 하면서 일부 업체들은(심지어 럭셔리 브랜드들까지) 생산은 유럽 내 저임금 국가나 중국에서 다 해놓고 마무리만 이탈리아에서 하는 식으로 Made in Italy를 만들거나 심지어 일부 중국업체들은 공장과 더불어 중국인 노동자까지 이탈리아에 이주시켜서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탈리아 대표 섬유도시 프라토가 대표적인데 현재 프라토 섬유업체의 1/3은 중국인이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탈리아인들이 의류, 패션 산업에 종사하지 않으려 해서 한 세대 안으로 'Made in Italy'의 브랜드가치가 사라질 지도 모른다고 한다. 청년실업률도 40%에 달하는 상황이고 수만 개의 일자리가 더 낮은 임금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 버린 상태라 이탈리아인들은 패션 산업이 불안정한 일자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러면 이탈리아 내에 일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외국으로 일자리가 빠져나가고... 이런 악순환이 반복될 수도 있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하지만 이탈리아 정부가 바보는 아니라 주요 산업 중 하나인 의류 산업이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지만은 않는다. 최근에 그쪽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해고당할 경우 몇년 동안 지원금을 지원한다는 모양. 그리고 디자이너 자리가 불안정하더라도 이탈리아 내에서도 상당한 고연봉 직장이어서 아마도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이탈리아 회사들은 별로 유명하지 않지만 만년필 분야에서도 Aurora가 진출해서 아름답고 미려한 디자인에 고급지고 독특한 필기감, 그리고 감성을 바꿔먹은 내구성 문제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자동차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알아준다. 페라리, 람보르기니, 파가니, 레이싱, 모터사이클 브랜드 두카티, 아프릴리아,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등장하여 유명해진 MV 아구스타 등의 슈퍼바이크로도 유명하다. 또한 빈티지한 감성으로 20세기부터 최근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스쿠터, 베스파가 이탈리아산이다. 베스파의 빈티지 광고포스터는 소품으로도 쓰이고 엽서로도 만들어서 팔 정도로 빈티지한 감성이 폭발한다.
독일차가 조화를 이룬 완벽한 기술력과 주행감을 추구한다면 이탈리아 차는 앞서 언급했 듯 과연 감성을 추구하는 느낌이다. 최근 독일차가 중국 시장을 과도하게 인식하여 감성적인 요소가 많이 제거되어 매니아층에서는 이탈리아 브랜드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대표적으로 최근 부활한 알파 로메오나, 피아트, 란치아 등의 브랜드가 유명하다.
상용차 부분에서는 이베코가 유명하다. 실제로 페라리의 F1 트럭은 이베코를 이용한다. 람보르기니나 페라리가 각각 폭스바겐과 피아트에 인수된 이유는 경영 관련 부분도 있지만 세금 문제도 있다. 람보르기니는 제조, 경영, 개발 전과정이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진다. 2015년 이탈리아의 자동차 수출액은 140억 달러인데, 이는 세계 13위 규모로 한국의 418억 달러, 영국의 389억 달러보다는 작다.
그러나 이탈리아 자동차들이 가진 큰 문제점이 있는데, 전술 하였듯 감성과 카탈로그 스펙은 좋으나 마감, 내구성을 비롯한 품질이 전반적으로 너무 안 좋다는 것이다. 이는 피아트 같은 대중차량부터 마세라티, 페라리까지 다 이 모양이다. 오죽하면 문짝이 잘 맞으면 마세라티가 아니다라는 말까지 돌 정도. 그나마 람보르기니는 아우디와 폭스바겐의 독일제 기술이 들어가서 괜찮아진 편이나, 엑소르 산하 브랜드들은 하나 같이 마감 품질부터 신뢰성, 내구도까지 복불복이 심하다. 즉 감성하나만 보고 사면 그에 따른 유지비가 상상이상이라는 것. 이륜차도 예외는 아니라 두카티 문서의 혹평 문단의 길이만 봐도 정신이 아득해진다. 상용차인 이베코 또한 수입 트럭 중 잔고장이 제일 많으며 많은 차주들이 이베코에 대해 혹평을 내린다. 특히 2004년 서울시에서 야심차게 도입했다가 잔고장 등 문제로 애물단지가 되었던 굴절버스 역시 이베코 차량이였다.
장비·공구
농기계 제조 산업에서 선두에 있다. 엑소르 산하의 CNH 인더스트리얼은 CASE, New Holland 등 세계적인 농기계 기업을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의 농기계 제조사 존디어와 함께 농기계 시장의 양대산맥이다. 연매출 30조원이 넘는 다국적 기업으로 주로 중대형 트랙터를 생산한다.
섬유강국이다보니 방직기계도 상당히 발달해 있는데 이탈리아의 ITEMA 사가 레피어 직기에서 가장 선두에 있다. 에어제트 직기도 생산한다. 특수직물을 생산하는 데 경쟁력이 강하다.
공작기계 산업의 경우 2018년 기준 공작기계 생산액에서 중국, 독일, 일본 다음으로 4위를 차지하고 있다. 공작기계 수출액 역시 독일, 일본, 중국 다음으로 4위를 차지하고 있다. 절삭기계, 성형기계는 물론 방직, 펄프, 건설, 제철 등 온갖 분야의 기계는 다 만들며 독일, 일본 업체들과 경쟁하고 있다. 이탈리아 경제개발부가 주도하는 Industria 4.0 정책에 힘입어 내수 기계산업도 성장 중이다.
제철산업은 후진국과의 가격 경쟁에서 밀려났으나 철을 가공하여 차량용 강판, 파이프, 장척물을 생산하는 Techint 그룹이 있다. 원료부터 철강 생산, 석유시추정 설계, 플랜트 설계까지 수직 구조를 갖춘 대기업으로 연 매출은 약 30조원이다.
제철산업으로 유명했던 나라이기에 제철설비에서도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의 Danieli는 영국 Primetals Technologies, 독일 SMS 그룹과 함께 3대 제철설비 기업이다. 국내 제철소에도 Danieli가 공급한 고로가 있다.
증기터빈, 가스터빈 기술을 가진 몇 안 되는 나라이다. 이탈리아의 Ansaldo Energia는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 독일 지멘스, 일본 미쓰비시과 함께 세계 4대 가스터빈 제조사이기도 하다. 2013년 삼성과 두산중공업이 Ansaldo Energia의 인수를 시도하였으나 삼성은 중도 포기, 두산중공업은 끝까지 시도했으나 결국 인수에 실패하였다.
레저용 선박
상선 건조 중심인 동아시아의 조선업체들과 달리 이쪽은 크루즈, 요트 쪽에 특화되어 있다. 세계 1위의 크루즈 건조 회사가 이탈리아의 국영조선기업 핀칸티에리이다. 과거 STX가 노르웨이 아커야즈 사를 인수하였을 때 난리가 났다고한다. STX가 자금 사정으로 STX 유럽의 특수선 건조 자회사를 매각할 때(구 STX OSV) 이를 재빨리 사들인 것도 핀칸티에리였다. 따라서 한국 조선업체가 크루즈 산업에 진출한다고 할 때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곳이 이탈리아였다.
한국 조선업체들이 크루즈 산업에 진출하기 어려운 이유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다. 크루즈선 산업은 벌크선, 컨테이너선보다 설계가 복잡하고 전방산업 생태계가 잘 구성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후발주자가 진입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조선산업에서 기술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미쓰비시 중공업마저 크루즈선 건조에 도전했다가 척당 2조 5,000억원의 손해를 본 전례가 있다. 결국 핀칸티에리의 도움을 받아 겨우 건조를 완료했다.
히 메가 요트(Mega yacht) 건조의 경우 이탈리아가 세계 1위. 세계 시장의 45%를 차지하고 있다.
자전거
자전거계에서도 이탈리아는 역사와 전통있는 메이커들로 유명하다. 특히 로드바이크 계에서 국내에서 상당한 네임밸류를 지닌 비앙키, 피나렐로, 데로사, 콜나고 등, 그리고 자전거는 만들진 않지만 구동계와 휠 제작으로 유명한 캄파놀로, 스탬, 포크, 핸들바의 명 제조사 3T와 데다차이 모두 이탈리아 제조사이다. 안장 또한 피직과 산마르코가 이탈리아제. 이밖에도 수많은 메이커들이 모두 이탈리아에 있는 회사들이다.
비록 지금은 대만이나 미국 등의 후발주자들에게 밀려 빛이 바랬지만 네임밸류와 무엇보다 100년 가까운 역사(비앙키)를 지녀 그 네임밸류만큼은 비할 바가 못 된다. 문제는 괴리감이 심하게 느껴질 수 있는 가성비로 인해 후발주자인 대만(자이언트 등) 등에게 털렸다는 것. 다만 디자인 왕국답게 이탈리아제 자전거가 (수정: 예쁘다->)멋지다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다.
자전거 자체는 디자인도 성능도 좋은데, 이놈의 미친듯한 가격으로 인해서 털린 케이스. 그러나 하이엔드로 가면 갈수록 가격 차이는 없어진다.
전자산업
전선산업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프리즈미안(Prysmian)이 유명하다. 전선만 판매해서 연매출 15조원 이상을 달성하는 대기업이다. 일반 전선 뿐만 아니라 해저케이블이나 통신선도 판매한다. 중국이 따라잡을려고 추격 중이나 아직까진 정상권에 위치하고 있다.
세계 8위의 반도체 업체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의 전신이 이탈리아 SGS인만큼 대다수의 직원과 사업장이 이탈리아에 위치한다. 밀라노와 카타니아에 자체 팹을 갖추고 있다.
소형 가전을 중심으로 한 가전 제품도 이탈리아 브랜드들이 유명하다. 레트로한 디자인으로 나름대로 팬이 많은 가전 업체 스메그와 소형 가전 제조사 드롱기 등이 이탈리아 가전 업제다.
이탈리아 가전제품들은 감성적인 디자인을 장점으로 내세우는 편이다. 물론 자누시(Zanussi)처럼 디자인을 부각시키지 않는 가전 제조사도 있다. 원두 분쇄용 글라인더나 에스프레소 머신 같은 커피 제조기계 중에서는 이탈리아제 제품이 압도적이다. 놀이공원에서 있는 탈 것들 중에도 이탈리아 브랜드가 많다.
관광업
이탈리아는 세계에서 5번째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국가이며, 2016년에만 5,230만 명의 관광객들이 이탈리아를 찾았다. 관광업과 관계 산업이 GDP에 미친 영향은 무려 10.1%의 비중을 차지하며, 2014년에는 이탈리아 전체 인구의 4.8%가 관광업에 종사하며 1,082,000명이 관광업에 직업을 두고 있다. 이탈리아가 이처럼 관광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대 로마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문화재가 많고 자연 풍광이 아름답기 때문인데, 이탈리아는 55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이다.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는 유럽에서 3번째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도시이며, 세계적으로는 12번째이다. 로마는 2017년에 약 940만 명의 관광객들을 맞았고, 밀라노는 680만 명의 관광객들을 맞으며 세계에서 27번째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도시로 떠올랐다. 그 외에 베네치아와 피렌체도 세계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들 100순위 안에 항상 꼽히는 명소들 중 하나이다.
교통
이탈리아의 교통은 1839년 양(兩)시칠리아 왕국에서 나폴리∼포르티치 간의 7640m의 철도개통으로 시작된다. 통일 후 정부는 방대한 보조금을 주어 민간기업에 건설영업을 위임했다가 1905년에 주요노선을 매수하여 오늘의 이탈리아 국유철도가 성립되었다.
1950년대 들어 자동차의 급속한 보급과 자동차도로의 건설·정비 결과에 따라 육상수송에서 도로의 역할이 철도보다 커졌다. 이탈리아 정부는 1958년부터 자동차 전용도로의 건설을 추진하여 1970년 말까지 이탈리아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태양도로(밀라노∼나폴리) 738km를 비롯하여, 1962년 프랑스·이탈리아를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자동차전용의 몽블랑 터널(11.6km) 등 총연장 3907km를 개통시켜 자동차전용 도로망에서 독일에 이어 유럽 제2의 지위에 올랐다.
철도는 대부분 전철화되었지만 자동차수송에 눌려 실적이 저하되자 1998년에 이탈리아의 최대 공기업인 이탈리아국철(Ferrovie dello Stato)은 적자노선 철거, 인원 축소, 전철화, 디젤화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2000년에는 그룹을 여러 회사로 나누어, 이탈리아국철을 모기업으로 하는 트레니탈리아와 RFI 등 56개 자회사가 탄생했다. 2014년 기준 철도 총 연장은 2만km에 이른다.
해운은 지중해 교통이 중심이며 주요 항만은 제노바·나폴리·베네치아·트리에스테 등이다. 주요 해운회사는 국가기업 IRI(이리) 산하의 이탈리아 라인·로이드 트리에스티노 등이 있다. 항공에서는 1946년 IRI의 출자로 알리탈리아항공과 이탈리아항공의 2개사가 설립·운영되었다. 그러나 국제선을 둘러싼 세계 항공회사와의 경쟁에서 2개사의 병존이 어려워지자 1957년 양사가 합병하여 오늘의 알리탈리아 항공회사가 되었다.
인문사회
인구
이탈리아는 언어와 종교 면에서는 동질적인데 비해 문화·경제·정치 면에서는 다양하다. 이탈리아의 인구밀도는 1km²당 196명으로 면적 10,000km2 이상 국가 중 유럽에서 다섯 번째로 높다. 소수집단도 있는데 가장 큰 소수집단은 남티롤의 독일어 사용 인구(1991년 통계: 28만 7503명이 독일어 사용, 11만 6914명이 이탈리아어 사용)와 트리에스테와 그 근교의 슬로베니아어 사용 인구이다.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2012년 현재 (세계은행 추정) 1.40명이다. 합계 출산율은 1995년 1.18로 바닥을 친 이래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2020년 기준, 인구는 약 6100만 명이다.
2020년 초, 이탈리아에는 총 60,317,116명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제곱 킬로미터 당 202명이 살고 있는 인구 밀도를 가지고 있으며, 서유럽 국가들 대부분보다 더 높은 인구 밀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허나 인구 분포는 전국적으로 매우 불균형하며, 가장 인구가 심하게 몰려 있는 곳은 포 계곡과 로마와 나폴리의 도심지이다. 그를 제외한 알프스와 아펜니노 산맥 부근의 고지와 산맥, 사르데냐 섬 등은 거의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인구는 20세기 동안 거의 2배로 늘어났는데, 1950년대와 60년대에 대대적인 경제 복구가 일어나며 남부의 낙후지대에서 사람들이 북부의 공업지대로 대대적으로 이주하면서 성장이 매우 불균형하게 일어났다. 1970년대까지만 하여도 이탈리아는 높은 결혼율과 출산율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시기 이후 급격히 고령화를 시작하였다. 2010년에 이르자 이탈리아 인구의 5분의 1이 65세 이상이었으며, 현재 이탈리아는 세계에서 5번째로 고령화된 사회로 중간 연령이 45.8세에 달한다. 다만 이탈리아는 최근들에서는 성장률이 조금씩 오르고 있으며, 여성 1인당 평생 낳는 아기의 수도 1995년의 1.18명에서 2008년에는 1.41명까지 늘었다. 다만 여전히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아기 수인 2.1명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하며, 1883년에 최고치를 찍었던 5.06명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치이다. 다만 전체 출산율은 2030년 경이 되면 1.6명에서 1.8명까지 상승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
19세기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이탈리아에서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빠져나갔다. 1898년부터 1914에는 이런 디아스포라 현상이 극에 달했는데, 매년 75만 명에 달하는 국민들이 이탈리아를 탈출하여 외국으로 이민을 간 것이다. 이로 인하여 2,500만 명의 사람들이 국외로 빠져나갔으며, 동시대 최대의 이민 현상으로 기록되었다. 결과적으로 현재에 410만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인들이 해외에 살고 있으며,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등에 대략 6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탈리아계 조상을 가지고 있다.
민족
이탈리아는 라틴계인 이탈리아인이 주류를 형성하는 국가다. 하지만 북부, 중부, 남부에 따라 인종이 달라지는 편이다. 북부에 갈수록 장신, 금발, 푸른 눈동자의 인종이 많이 보이고, 남부로 갈수록 단신, 짙은 머리털에 검은 눈동자의 인종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남부에서 북부로 일거리를 찾으러 많은 이주민들이 늘어나 모두 섞인 편이다. 또 소수 민족으로 유대인과 국경지역에 프랑스인, 오스트리아인, 슬로베니아인이 살고 있다.
언어
공용어는 이탈리아어다. 현대 표준 이탈리아어는 토스카나 지방의 피렌체 방언에 기초하고 있다.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지역마다 언어가 다르다. 흔히 사투리라고 하지만 이탈리아의 여러 방언들은 현재의 표준 이탈리아어를 포함해 모두 속라틴어(Vulgar Latin)에서 파생된 것들이고 이탈리아 반도가 한 국가로 통합된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방언을 쓰는 사람은 스스로 방언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표준 이탈리아어와는 다른 언어를 쓰고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아예 표준 이탈리아어와 의사 소통이 힘든 방언들도 많다. 그리고 라딘어 등도 쓰이고 있다.
그 외에도 쥐트티롤 지방에서는 역사적 이유로 인해 독일어(극소수는 오스트로바이에른어)가 많이 쓰이며, 시칠리아나 사르데냐의 언어(시칠리아어, 사르데냐어, 카탈루냐어 알게로 방언 등)는 표준 이탈리아어와는 의사소통이 힘들 정도로 이질적이다. 이탈리아에서도 슬라브계 민족들이 일부 거주하고 있어서 슬로베니아어[15], 크로아티아어[16]도 쓰이고 있다. 이탈리아내에도 알바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어서 알바니아어[17]도 쓰이고 있다. 그 외에도 세르비아어[18]와 남부 일부 지역에서 그리스어[19]도 쓰이고 있다. 발레다오스타에선 프랑스어가 이탈리아와 함께 쓰이고 있어서 이중언어구사자가 쥐트티롤과 마찬가지로 높은 편이다. 이탈리아는 각 지방에서 쓰이는 언어들이 다양하지만,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유럽 지방 언어·소수 언어 헌장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주요 외국어는 영어지만,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도 많이 가르치고 있다.
종교
옛 로마 제국 때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가톨릭이 국교로 정해지게 된 까닭에 수도인 로마 시를 중심으로 서방교회가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 압도적인 강세에 있으며, 이탈리아의 역사 자체도 가톨릭과 거의 맥을 같이 해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도 1929년부터 1978년까지 가톨릭이 공식적인 국교였으며, 현재에도 국민 상당수가 가톨릭 신자이다. 현재는 국교가 없고, 신앙의 자유를 존중하므로 이외의 종교를 믿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개신교도 존재한다. 또한 이민자들에 의하여 이슬람교, 힌두교의 종교도 존재한다.
2017년 기준으로 이탈리아인들의 75%가 자신이 천주교인이라고 답했다. 다만 이탈리아는 1985년 이후 가톨릭을 공식 국교에서 해제하였다. 가톨릭의 최고 중추인 교황좌와 교황령이 바로 로마에 자리하고 있으며, 교황은 바티칸의 최고 수반으로 이탈리아와는 별개의 주권 국가를 다스리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성좌 자체를 ‘바티칸’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성좌는 1929년에서야 건국된 바티칸 시국과는 다른 개념이다. 2011년에 동방 정교와 같은 기독교 소수 분파들이 대략 전체 인구의 5%, 150만 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여호와의 증인이 대략 251,192명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들 중 하나가 바로 유대교인데, 유대교는 고대 로마 이래 끈질기게 로마에서 명맥을 유지해왔다. 이탈리아는 스페인 등 유럽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을 상대적으로 관용적으로 받아들였는데, 허나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 중에 이탈리아 유대인의 20%를 죽이는 대참사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탈리아에서 도망쳐 아메리카 등으로 도망쳤기에, 이탈리아에는 28,400명의 유대인들 밖에 남지 않았다. 점차 종교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무신론이 득세하며 기독교 외의 종교들이 점차 세를 얻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인도에서 전래된 시크교 신자가 7만 명 정도 있으며, 그 외의 인도계 종교를 믿는 신도들이 80만 명에 달한다고 전한다. 이탈리아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그 대신에 0.8% 정도의 종교세를 부과하여 오직 공식적으로 인정된 종교 단체들만이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한다. 개신교, 유대교, 불교, 힌두교 단체들은 기부와 세가 허가되나, 아직까지 무슬림 종교단체는 공인된 바가 없기에 공식적인 종교 활동을 하기에 제약이 있다. 종교에 돈을 기부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국가복지세를 대신 낸다.
교육
이탈리아의 교육 체계는 유치원, 초등, 중고등, 대학 등 4단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6세부터 16세까지 무상 의무교육 제도를 운영한다. 의무교육 기간에 해당하는 이탈리아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공립학교에서 무상으로 교육받을 수 있다.
인데, 보통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3년간 다니는 유치원(Asilo Nino)이 운영되며 초등학교는 5년 과정이다. 2004년까지는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시험에 합격해야 했으니 현재는 과정만 이수하면 자동으로 중학교에 입학한다.
중고등교육은 두 단계로 나뉘어져 있다. 먼저 3년 동안은 중학교(Scuola Secondaria di Primo Grado 혹은 Scuola Media)에 다니고, 이후 5년 동안 고등학교(Scuola Secondaria di Secondo Grado 혹은 Scuola Superiore)에 다니게 된다. 따라서 총 8년이 소요된다. 중학교까지는 우리나라의 중학교와 비슷하며 졸업을 위해서는 주요과목에 대해 필기시험과 구두시험을 치러야 한다.
고등학교는 우리나라의 학제와는 많이 다른데, 먼저 고등학교 5년 기간 중 첫 2년은 의무교육 기간으로 공통과목을 배우고 의무교육 이후 원하는 학생은 졸업이 가능하다. 나머지 3년은 선택으로 자신의 진로에 따라 대학진학을 위한 일반고등학교(Liceo) 혹은, 기술고등학교(Istituto Technico), 취업을 위한 직업고등학교(Istituto Professionale) 등으로 진학한다. 일반고등학교는 다시 인문고등학교(Liceo Classico), 과학고등학교(Liceo scientifico), 언어고등학교(Liceo Linguistico), 인문학고등학교(Liceo delle Scienze Umane), 예술고등학교(Liceo Artistico), 음악 및 무용고등학교(Liceo Musicale e Coreutico)로 구분된다.
고등학교를 졸업을 위해서는 졸업시험에 해당하는 국가시험인 마투리타(Maturitá)를 치러야 하며 보통 졸업하는 해의 6~7월 사이에 치러진다. 낙제 시 유급 처리된다. 대학입학을 위해서는 시험을 치러야 하지만 의대나 법대, 건축학과 등을 제외하면 특별히 중요하지는 않으며 학벌 위주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대학교 진학률이 낮다. 이탈리아의 대학은 직업을 얻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순수학문의 장으로 교양과목 등이 없이 전공과목만을 이수한다.
과거 이탈리아의 대학은 라우레아(Laurea)라고 하는 5년 단일 과정이었으며 1970년대까지는 석사 및 박사과정도 없었다. 라우레아 과정을 졸업할 경우 도또레 디 라우레아(Dottore di Laurea)라는 학위를 주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연구박사(Dottorato di Ricerca) 학위가 생겼으며 기존 이탈리아의 대학 학위제도가 유럽의 학위제도와 맞지 않아 이를 일치시키기 위해 최근 학제 변환이 있었다. 대학 수학 기간은 3년에서 6년까지 다양하다. 일반적인 대학과정의 경우 3년을 마치는 학사학위(Laurea)가 수여되고 추가로 2년을 더 수학하면 석사학위(Laurea magistrale)가 수여된다. 반면 의학, 약학, 건축학, 문화재보존학, 초등교육학 등 학과는 과거와 같이 5년 단일과정이다. 이들 학과를 졸업하면 학석사 학위를 받게 되고 박사과정에 입학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대학은 약 70여 개가 설치되어 있다. 1088년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교를 비롯해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 페루자 대학교, 토리노 대학교,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브레라 국립미술원, 밀라노 베르디 국립음악원, 보코니 대학교 등 유서 깊은 명문학교가 많은 나라다.
대중매체
이탈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정기간행물과 방송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중의 하나이다. 헌법에 표현의 자유 및 검열금지가 규정되어 있어 모든 신문과 잡지는 등록만으로 발행이 가능하다. 정기간행물은 약 6000여 종이 간행되며, 일간지는 전국신문과 지방신문을 포함해 약 88개가 발행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전국지는 1859년 창간된 라 《나지오네(La Nazione)》로 현재는 보수적 자유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가장 유명한 신문으로는 보수우파 성향의《코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 》와 중도좌파 성향의《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 》가 있다이탈리아의 대표적 통신사로는 ANSA(Agenzia Nazionale Stampa Associate), ADN KRONOS, A.G.I 등이 있다.
개인방송을 제외하고, 라디오 방송국은 1924년 시작된 이래 2000개의 채널에 달하며, TV는 1954년 첫 방송을 실시했고 2019년 기준 약 500개의 방송국이 운영중이다. 이탈리아 방송은 1970년대까지는 국영방송국인 RAI가 독점했다. 하지만 이후 민영화를 통해서 1980년대 이후 수많은 민영방송국들이 탄생했다. 현재 이탈리아의 텔레비전 방송은 국영방송인 RAI와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전 총리가 설립한 Mediaset 그룹의 방송국들로 양분되어 있다.
문화
이탈리아는 1861년의 통일 이전까지 정치적, 지리적으로 나뉘어 있었고, 이로인하여 지역적으로 매우 다른 문화들이 발전하였다. 이탈리아는 서구 문화의 역사적인 중심이었으며, 아직도 예술과 문화의 본고장으로 인정받는다. 중세와 르네상스 기간동안 수많은 귀족 가문들이 최고의 건축가, 학자와 예술가들을 이탈리아로 끌여들였고, 이들의 후원에 힘입어 이탈리아에서는 당시 유럽 최고의 걸작들이 탄생하였다. 이 가문들은 서로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고립되어있었으나, 문화적, 예술적으로는 서로 끊임없이 경쟁하며 교류하였기에 이탈리아에서는 아름다운 문화의 꽃이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55개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워낙 근대에 국민들이 해외로 많이 이민을 갔기에 그 영향으로 세계적으로도 이탈리아 문화들이 잘 보급되어 있다. 이탈리아는 10만 개가 넘는 문화유적(박물관, 궁전, 건물, 조각상, 교회, 빌라, 분수, 유적)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세계 예술품의 절반이 이탈리아에 있다고 추정할 정도로 압도적인 문화유적 수를 자랑한다.
건축
이탈리아 건축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고대 로마 시기에는 아치, 돔 등을 이용하여 건물을 지었고, 이 건축양식이 14세기 후반과 16세기 사이의 르네상스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에도 그리스로마 양식은 신고전주의 건물들에 영향을 주었으며, 신고전주의는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에서 17세기 후반과 20세기에 유행하여 귀족들과 상류층들이 주로 이 양식으로 자신들의 건물들을 짓고는 하였다. 이탈리아 초기에는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인들의 건축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이 것들이 이후 로마 양식으로 흡수되었다. 이후 고전 로마가 끝난 이후에는 르네상스에 또다시 고전 양식이 부활하고 르네상스 양식이 바로크 양식으로 바뀌었다. 기독교의 회당이자 중세 초기에 엄청나게 지어졌던 바실리카도 로마에서 처음으로 유래되었다. 바실리카는 주로 길고 직육면체로 지어졌으며, 거의 고대 로마 시대의 건물들과 비슷하게 지어져 모자이크와 장식이 풍부하다. 초기 기독교 미술과 건축도 자신들이 이교도로 불렀던 고대 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이 때문에 조각상, 모자이크, 그림들도 로마식으로 만들어 장식하였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들은 800년대에 등장하였다. 한편 동쪽에서 전파된 비잔틴 양식도 로마에서 유행하였는데, 동로마 제국에서는 당시 로마 제국의 발달된 건축 기술을 보전하고 있었기에, 고대의 기술들마저 잃어버린 중세 유럽에서는 비잔틴 양식이 훨씬 진보적인 공법이었던 것이다. 이 영향을 많이 받은 건축물에는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대성당이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800년대부터 1100년대까지 유행했으며, 이탈리아 건축에서 가장 화려하고 창조적인 건축양식들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유명한 건물로는 피사의 사탑 등 피사 대성당 등이 있다. 로마에서 물려받은 아치, 창문, 기둥들을 주로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양식의 주 특성은 바로 둥근 천장인데, 로마네스크 양식은 서구 건축에서 처음으로 둥근 천장이 사용된 예였다. 건축기술은 르네상스 들어 더욱 발전하였는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대성당의 거대한 돔을 지어 당시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규모의 돔을 짓는 것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성 베드로 대성당도 이때 지어졌는데, 16세기 도나토 브라만테가 설계하였다.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빌라와 궁전들을 설계하여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바로크 시대인 17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여러 명건축가들이 탄생하였다. 특히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사보이가의 저택 스투피니지 궁전은 바로크 후반과 로코코 양식의 걸작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이탈리아의 건축은 신고전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이로 인하여 이때 지어진 건물들 대부분이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건물들과 거의 유사한 생김새를 하고 있다. 파시스트가 호령하던 20세기에는 '노베첸토 운동'이 일어났는데,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자는 예술 움직임이었다.
그림
이탈리아 회화는 서양 예술의 토대가 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로마 예술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사실상 고대 그리스 회화의 후계로 평가받았다. 로마인들은 자신 나름대로의 예술들을 개척하여 나갔으나, 현재는 남아있는 것들이 많이 없다. 현재 전해지는 로마 그림들은 캄파니아 등에서 발굴된 빌라 등의 유적에서 찾은 벽화들 밖에 없다. 판화는 로마네스크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아 점차 유행을 타기 시작하였다. 13세기 중반, 중세 예술과 고딕 예술은 점차 대상을 더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하였으며, 부피와 입체를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치마부에와 그의 제자 조토 디 본도네가 당시 예술계를 이끌었다. 조토 디 본도네의 시대 이후, 이탈리아의 그림들은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졌고, 탈형식화되었다. 이 때문에 치마부에와 조토 디 본도네는 서구 중세 예술의 최고 거장들로 인정받기도 한다.
14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17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기간에, 이탈리아 회화는 황금기를 맞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조반니 벨리니, 파올로 우첼로, 프라 안젤리코, 마사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안드레아 만테냐, 프라 필리포 리피, 조르조네, 틴토레토, 티치아노 베첼리오 등의 명화가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였고, 인간 비례와 비율을 활용하여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들을 남겼다. 이들은 수많은 예술 기법과 공법들을 새롭게 만들기도 하였다. 미켈란젤로는 특히 1500년에서 1520년까지 활동하였으며, 다비드 상, 피에타 상, 모세 상같은 걸작들을 후세에 남겼다. 르네상스에 활동한 또다른 조각가들에는 도나텔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안드레아 델 베로치오, 로렌조 지베르티 등이 있다. 15세기와 16세기에 르네상스가 전성기를 찍었을 때에 르네상스 미술의 방식이나 형식을 계승하되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에 따라 예술작품을 구현한 예술 사조인 매너리즘이 등장하였으며, 작가들은 의심, 개인의 고뇌 등을 작품 속에 그대로 담아넣어 표현하였다. 이전 작가들의 대표 격인 라파엘로가 숭고하고, 흠없는 처녀들을 그렸다면 이후의 작가들은 당황하고 분노한 표정들을 그림 속에 그대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카라바조, 마티아 프레티, 카를로 사라체니, 바르톨로메오 만프레디 등의 화가들이 활동하였다. 18세기에는 프랑스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와 카날레토 등의 예술가들이 활동하였다. 이탈리아의 신고전주의 양식에서는 안토니오 카노바 등이 활동하였다.
19세기, 낭만주의가 득세하던 이탈리아에서는 프란체스코 하예즈, 주세페 베주올리, 프란체스코 포데스티 등이 활동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이후 인상주의 화풍이 들여왔고, 조반니 파토리, 조반니 볼디니 등이 이끌었다. 사실주의 화가로는 주세페 펠리자 다 볼페도 등이 있다. 20세기에는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미래주의가 유행하였으며, 움베르토 보치오니와 자코모 발라 등이 주로 활동하였다. 미래주의는 이후 브루노 카루소나 레나토 구토소 같은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문학
라틴 문학은 기원전 240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특히 막 흥하기 시작한 로마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틴 문학은 그 이후부터 로마 제국의 성장과 함께 전 세게적으로 퍼져나갔으며, 아직까지도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때 수많은 명연설가들과 철학자, 시인과 역사학자들이 등장하였는데, 예를 들어 대플리니우스, 소플리니우스,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프로페르티우스, 오비디우스, 리비우스 등이 대표적이다. 로마인들은 구전 전통, 시, 연극과 비극으로도 매우 유명하였는데, 13세기에 활동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첫 이탈리아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종교 작품인 '태양의 찬가'를 남기며 명성을 날렸다.
이탈리아 문학은 시칠리아에서도 발전하였다. 13세기 절반에서 시칠리아 왕국을 다스렸던 프레데릭 2세의 궁정에서는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찬가들과 시들이 훨씬 정제된 형태로 기록에 적혀졌다. 이때 적혀진 시들 중에서 소네트 양식의 선구자인 자코모 다 렌티니 등의 시들이 유명하다. 13세기에는 귀도 귀니젤리가 등장하였고, 전통적인 사랑시에다가 철학적인 사조를 불어놓었다. 이때부터 사랑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등장하였으며, 이후의 작가들은 사랑을 부드럽고 명료하게 표현하게 되었다. 이의 영향을 받은 시인들로는 귀도 카발칸티와 단테 알레기에리 등이 있다. 단테 알레기에리는 현대 이탈리아어의 기초를 놓았으며, 중세 유럽 문학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신곡을 남기며 이름을 크게 떨쳤다. 14세기에 등장한 작가들 중에는 페트라치와 지오반니 보카치오 등이 있는데, 고전 작품들을 재분석하고 모방하며 자신들만의 문학풍으로 재탄생시켰다. 페트라치가 남긴 시 모음집은 이후 수백년 동안 후대 작가들의 모델로 인정받았으며, 보카치오가 지은 데카메론과 같은 유명한 작품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기에는 수많은 문학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키아벨리가 집필한 군주론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학, 현대 철학 저술이며, 추상적인 개념들보다 ‘현실’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사회 안정에 대한 이론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에 나온 명작들 중에는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올란도 퓨리오소, 마테오 마리아 보이아르도의 미완성 로맨스작 올란도 인나모라토 등이 있는데, 기사시들 중에서는 최고작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가 작성한 궁정론은 완벽한 신사숙녀들의 예의범절들을 집대성해 놓았으며,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지오반니 프란체스코 스트라파롤라와 지암바티스타 바실레는 유럽에서 첫 동화집을 발표하였다. 17세기 초에는 잠바스티나 마리노가 쓴 신화시 르'아도네가 출판되었다. 이후 바로크 시대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과학적 발견이 터져나왔으며, 완벽한 철학자-사제가 통치하는 이상국가를 묘사한 '태양의 도시'가 발표되었다. 17세기 말에는 여러 사람들이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변한 문학계를 더 간단하고 명료하게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18세기에는 카를로 골도니가 여러 작품들을 발표하며 당시의 중산층과 당시 현실을 묘사하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외세에 맞서 자유와 정치적 통일을 추구하는 리소르지멘토 움직임이 본격화되며, 문학에도 낭만주의적인 사조가 불어닥쳤다. 19세기 초 이탈리아 작가들은 낭만적인 풍의 작품들을 쏟아냈고, 특히 비토리오 알피에리, 우고 포스콜로, 자코모 레오파르디 등의 작품들이 유행하였다. 이탈리아 낭만주의의 상징 격인 알레산드로 만초니는 이탈리아 통일과 애국주의의 상징처럼 떠올랐고, 그의 소설인 ‘약혼자들’은 기독교의 정의와 평등이라는 가치에 경의를 표한 내용의 첫 이탈리아 역사 소설이었으며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유명한 이탈리아 소설로 칭송받았다. 19세기 말, 사실적인 문학풍이 유행하였으며, 사이언스 픽션 계열의 소설들도 유행하였다. 1883년에 카를로 콜로디는 피노키오의 모험을 출간하였으며, 이탈리아 작가가 쓴 최고 아동문학이라는 명예를 거머쥐었다. 20세기 초에는 미래주의 사조가 유행하였는데, 이 시기의 문학작품들은 미래의 빠른 역동성, 속도, 그리고 기계들의 힘을 찬미하는 내용들이 많다. 현대 문학의 경우, 198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움베르토 에코, 그리고 풍자가이자 극작가인 다리오 포가 199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음악
이탈리아의 음악은 가히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시절부터 서양의 음악 중심지들 중 하나였다. 피아노와 바이올린과 같은 악기들이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졌으며, 교향곡, 소나타와 같은 음악 형식들도 16세기와 17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원형이 만들어졌다.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작곡가들에는 르네상스 시기의 작곡가인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카를로 제수알도 등이 있으며, 바로크 시기에는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아르칸젤로 코렐리, 비발디 같은 명작곡가들이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후 고전기에는 조반니 파이시엘로, 파가니니 등이 활동하였으며, 낭만주의 시대에는 베르디와 푸치니 등이 활동하였다. 현대에 들어서는 루치아노 베리오, 루이지 노노 등의 작곡가들이 전자 음악을 발전시켰다. 이와 동시에 고전 음악들도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수많은 오페라 하우스들이 아직도 성업 중이며 전세계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 등이 이탈리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탄생지로도 유명하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17세기 초 즈음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베네치아나 만투아 같은 도시들에서 처음 공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세기와 20세기에 로시니, 벨리니, 도니제티, 베르디, 푸치니 같은 작곡가들이 나오며 전국적인 인기와 명성을 얻게 되었고, 이에 힘입어 전유럽으로 뻗어나간 것이다. 밀라노에 위치한 ‘라 스칼라’ 오페라 하우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격이 높은 오페라 하우스로 유명하기도 하다.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오페라 가수에는 엔리코 카루소와 알레산드로 본치 등이 있다.
1920년대에는 재즈가 이탈리아로 유입되었는데, 당시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파시스트들의 반외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국민 음악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현재 이탈리아의 재즈 음악 중심지에는 밀라노, 로마, 시칠리아 등이 있다. 이후 1970년대에 이탈리아는 락 음악과 팝 음악의 중심지로 떠올랐으며, PFM, 고블린, 푸, 방코 델 무투오 소코르소, 레 오르메 등의 밴드들이 활동하였다. 동시기에 극장들도 다양화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영화 산업이 급성장하자 엔니오 모리꼬네, 아르만도 트로바졸리, 피에로 피치오니, 피에로 우밀리아니 등의 영화 음악 작곡가들도 탄생하였다. 1980년대 초에는 힙합 문화가 떠올랐으며, 불의 랩소디, 엘븐킹, 포가튼 툼, 플래시갓 아포칼립스 등 여러 헤비메탈 락밴드들이 출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디스코 음악과 전자 음악도 크게 유행하였는데, 세계 전자 댄스의 선구적인 국가들 중 하나라는 평을 듣는다. 1988년부터는 전자 음악이 이탈로 하우스와 같이 전통 춤과 음악에 동화되어 여러 다른 장르들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또한 2021년 열린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이탈리아의 록 밴드 모네스킨이 우승하기도 했다.
패션
이탈리아는 세계 패션의 수도라고 불릴 정도로 전세계적인 패션을 선도하고 있는 국가이다. 밀라노, 피렌체, 로마 등의 대도시들은 이탈리아의 패션 수도라고 불리며, 2013년에 작성된 글로벌 패션 수도 랭킹에 의하면 로마는 세계 6위를, 밀라노는 세계 12위를 각각 기록하였다. 구찌, 아르마니, 베르사체, 프라다, 발렌티노, 돌체앤가바나, 미쏘니, 막스마라, 트루사디, 펜디, 모스키노 등의 명품 브랜드들은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며 최고의 명품 브랜드로의 명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이탈리아에서 발행되는 패션 잡지인 보그 이탈리아(Vogue Italia)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패션 잡지로 평가받는다.
이탈리아는 패션 뿐만 아니라 디자인 면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데, 특히 건축 디자인, 산업 디자인, 도시 설계 등에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탈리아는 지오 폰테, 에토레 소트사스 같은 가구 디자이너들을 배출하였으며, 이탈리아 단어인 '벨 디세그노'나 '리니아 이탈리아나'는 가구 디자인의 용어로 아예 공식적으로 통용될 정도이다. 이탈리아는 이뿐만 아니라 전자 제품들도 함께 설계하며, 세탁기나 냉장고 등도 디자인하여 수출하고는 한다. 에토레 소트사스는 밥 딜런의 곡에서 영감을 받아 포스트모던 느낌의 책장을 만들어 유명해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밀라노와 투린, 이 두 도시가 각각 이탈리아의 건축 디자인과 산업 디자인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밀라노에는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디자인 기업인 피에라 밀라노가 입주해있기도 하다. 밀라노에서는 이외에도 '퓨오리 살론'이나 '살로네 델 모바일' 같은 디자인 행사들을 개최하기도 하며, 브루노 무나리, 루치오 폰타나, 엔리코 카스텔라니, 피에로 만조니 같은 디자이너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음식
이탈리아 요리는 기원전 4세기부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며, 이후 에트루리아, 고대 그리스, 로마, 동로마 제국, 유대인들의 요리의 영향을 받으며 급격히 발전하였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감자, 토마토, 고추, 옥수수 등이 들어왔고, 18세기 들어서 이 식재료들이 대량으로 수입되기 시작하며 이탈리아 요리들도 크게 바뀌게 되었다. 이탈리아 요리의 특징에는 지역적 특색, 맛의 풍부함 등이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들 중 하나로 전세계에 뻗어있다.
이탈리아 요리는 지중해성 식재료들을 기본으로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이탈리아 요리인 스파게티처럼 파스타 종류의 요리가 많으며, 생선, 과일, 채소 등을 많이 사용한다. 또한 요리들의 구성 재료들이 대단히 단순한 걸로도 유명한데, 상당수의 요리들이 오직 4개에서 8개 정도의 재료들로 만들어진다. 이탈리아 요리의 조리법 등은 전문 셰프 등이 전수해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가정 내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 요리가 해외에서도 성공한 이유들 중 하나는, 전통적인 재료들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했다는 것인데, 주로 치즈, 와인 등을 사용하며 대다수의 레스토랑에서는 EU 법에 따라 오직 정부에서 지정한 농장이나 사육장에서 생산한 식재료들만을 취급한다. 이탈리아 디저트도 매우 유명한데, 피스타치오, 아몬드 등을 주로 사용하며 리코타 치즈, 마스카포네 치즈와 같은 달콤한 치즈와 함께 초콜릿, 바닐라, 계피 같은 이색적인 향도 잘 쓴다. 유명한 이탈리아 디저트 종류에는 젤라토, 티라미수, 카사타 등이 있다.
스포츠
이탈리아인이 가장 즐기는 스포츠는 축구이다. 이탈리아 전체 인구는 5,700백만 명에 불과하지만 축구협회에 가입된 클럽은 대개 2만개 가량이 되고 선수는 무려 11만 명에 이른다. 이탈리아는 영국으로부터 대략 19세기 말쯤 축구를 받아들였는데 영국과 독일 스페인과 더불어 유럽 4대 축구 강국으로 불린다.
전국에서 뽑힌 18개 팀이 맞붙은 세리에(Serie) A 경기가 열리는 날은 이탈리아 전체가 용광로처럼 들 끓게 된다. 이탈리아의 축구는 팬들에게 짜릿한 감동과 흥분, 즉 창조적인 볼거리를 제공하고, 클럽과 시, 정부, 기업에게 막대한 재원을 안겨준다. 이탈리아의 진정 굴뚝 없는 산업은 축구로서 국민적인 비즈니스로 정착했다.
축구 이외에 전국적인 인기를 모으는 스포츠로는 자전거 경주가 있다. 유명한 자전거 경주인 '지로 디탈리아 (Giro d'Italia)' 나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 에서 이탈리아 선수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따라 달리곤 한다.
이탈리아 학교에는 체육시간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이탈리아는 수영이나 펜싱은 물론 조정과 사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챔피언과 올림픽 챔피언을 적지 않게 배출했으며, 선수들 모두 스포츠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기 위하여 분투하고 있다.
관광
이탈리아는 2016년 기준 약 5,3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해 세계 5위 안에 드는 관광 대국이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풍부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어 이들을 보기 위한 관광객이 전세계에서 몰려든다. 관광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GDP의 10% 이상을 상회한다.
이탈리아는 UNESCO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54개의 문화유산을 등록하였다. 특히 이탈리아 관광의 백미는 로마제국과 르네상스의 유산이다. 테르메(Terme) 미술관이라고 불리는 로마국립박물관에는 그리스-로마시대 조각이, 캄피톨리노 광장(Piazza del Campidoglio)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으로 로마시대의 작품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피렌체 메디치가의 우피치 미술관에서는 르네상스시대의 거장 보티첼리 및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잇다. 피렌체 피티 가문의 피티미술관(Galleria Pitti)에는 라파엘로 등의 작품이 소장되어 미술과 조각을 공부하는 학생들뿐 아니라 수많은 관광객의 시선을 끈다.
밀라노, 토리노, 피렌체, 로마, 나폴리, 팔레르모 등의 대도시에는 국립도서관이나 공문서관이 소재해 유럽사를 전공하는 이들을 모은다. 로마의 오페라 극장, 밀라노의 스칼라극장, 나폴리의 산카를로 가극장, 팔레르모의 마시모 극장에서 상연되는 연극과 오페라를 보러 모여드는 관광객으로 가득찬다. 이들 이외에 야외극장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오페라가 상연되고 특히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Taormina)에서는 그리스인이 세운 야외극장에서 비극이 상연된다. 이들 공연의 개막일에는 훌륭한 사교장이 된다. 여름철 따뜻한 날씨에 야외공원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대표적인 공원으로는 로마의 보르게세(Borghese)공원, 밀라노의 셈피오네(Sempione)공원, 피렌체의 보볼리(Boboli)공원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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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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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멜리 찬가〉, 《나무위키》
- 〈일 트리콜로레〉, 《나무위키》
- 〈이탈리아/경제〉, 《나무위키》
- 〈이탈리아〉, 《위키백과》
- 〈이탈리아〉, 《두산백과》
- 〈이탈리아의 역사〉, 《위키백과》
- 〈이탈리아의 기후〉, 《두산백과》
- "Italia", Wikipedia
- 〈이탈리아/행정 구역〉, 《나무위키》
- 〈이탈리아군〉, 《나무위키》
- 〈이탈리아/정치〉, 《나무위키》
- 〈이탈리아/사법〉, 《나무위키》
- 〈이탈리아의 대한관계〉, 《두산백과》
- 〈이탈리아의 의회와 정당 및 선거〉, 《두산백과》
- 〈이탈리아의 외교〉, 《두산백과》
- 〈이탈리아의 군사〉, 《두산백과》
- 〈이탈리아의 경제정책〉, 《두산백과》
- 〈이탈리아의 농업〉, 《두산백과》
- 〈이탈리아의 교통〉, 《두산백과》
- 〈이탈리아의 대중매체〉, 《두산백과》
- 〈이탈리아/문화〉, 《나무위키》
- 〈이탈리아의 관광〉, 《두산백과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