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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철'''은 지하 철도 위를 달리는 전동차로 대도시에서 교통의 혼잡을 완화하고, 빠른 속도로 운행하기 위하여 | + | '''지하철'''(地下鐵)은 지하 [[철도]] 위를 달리는 전동차로 대도시에서 교통의 혼잡을 완화하고, 빠른 속도로 운행하기 위하여 [[터널]]을 파고 부설한 철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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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철의 역사는 19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춘철도주식회사는 현재의 서울 지하철 1호선과 거의 동일한 구간인 제기에서 동대문까지의 구간을 지하철로 건설해 경춘선과 연계하는 것을 계획했으나 총공사비 약 500만 원의 예산이 부족하여 실행되지 못했다. 그 후, 지하철 건설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이다. 1960년 센서스에 따르면, 서울의 인구는 244만 5,402명이었는데, 1970년에는 두 배가 넘는 552만 5,262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렇게 서울로의 인구가 집중된 것은 전후 베이비붐으로 인해 인구 자체가 증가했으며 농촌인구의 탈농촌화 및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은 더 많은 주택과 식수, 출퇴근과 통학을 위한 도로, 그리고 대중교통 수단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이에 1968년 서울시는 도로교통 체증이 심각해지자 서울의 전차를 없앴다. 그리고 새로운 대중교통수단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보다 많이, 보다 빠르게 사람들을 수송할 교통수단이 필요했고, 그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대중교통수단이 지하철이었다. 지하철의 잠재력에 대해 확신이 있었던 양택식 서울시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첫 시정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지하철 건설본부 설치 등 지하철 건설을 준비하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의견은 지하철 건설에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며 지하철 건설 시 오히려 서울로의 인구집중이 더 심화될 것을 우려하는 경제기획원장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렇듯 찬성과 반대의견 때문에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이후락 주일대사가 선진국의 사례를 들어 서울에도 지하철 건설이 시급하다는 의견을 내놓자 지하철 건설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에 따라 서울지하철 건설본부가 설치되었고 다각적인 조사를 거쳐 지하철 및 수도권 전철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은 서울역∼종로∼청량리를 잇는 9.8km 구간에는 지하철을 건설하고, 서울역∼인천, 서울역∼수원, 용산역∼성북 구간은 기존 철도를 전철화하여 지하철과 연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1971년 4월에 지하철 건설이 시작되었다.1호선은 국내의 토목과 건축 기술에 일본의 차량 및 신호 분야의 기술과 자본을 활용하여 건설하였다. 종로∼청량리 구간 공사에는 지상에서 땅 속으로 파들어 가는 개착식 공법을 썼는데 터널식으로 파는 것보다 공사비가 적게 들고 공사기간도 단축된다는 이점은 있었지만, 교통 혼잡을 초래하여 시민에게 큰 불편을 주었다. 난공사 구간도 여러 곳이었다. 남대문과 동대문 공사구간에는 진동으로 인한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해 수입 콜크로 방진벽을 만들었고 거의 90도로 꺾이는 광화문에서 시청쪽 방향 공구에는 특수공법이 도입됐다. 양택식 서울시장은 지하철 건설 기간 내내 공사현장을 누비고 다녀 '두더지'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공사 진척은 빠르게 진행됐고 최초 계획대로 1974년 8월 15일 청량리에서 서울역까지 서울 지하철 1호선 및 청량리에서 성북 그리고 서울역에서 인천, 수원까지 기존 철도의 전철화가 완성되었다. 1974년 첫 지하철이 개통된 이래 4호선이 건설될 때까지 서울 지하철은 실제로 대부분이 지하 구간이었기 때문에 ‘지하철’이라는 이름이 적합하였다. 그러나 지상 구간이 주를 이루는 광역철도가 빠르게 구간을 확장하면서 1994년 설립된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가 기존의 ‘지하철’이라는 명칭 대신 ‘도시철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제는 지하철, 도시철도라는 말이 같이 쓰이고 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이 힘차게 달린지 10여 년 후인 1984년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한 바퀴 도는 2호선이 개통됐다. 당초 이 노선은 서울시의 지하철 건설 및 수도권 전철화 사업계획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서울의 도심기능을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구체화되었다. 2호선에는 전동차량에 냉난방 시설이 갖춰졌다. 지하철 건설 공사는 계속돼 1985년 10월 3, 4호선이 완전 개통되어 본격적인 지하철 시대가 열렸다. 서울의 동서를 관통하는 5호선, 한강 이북 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6호선, 서울의 온수역에서 도봉산역을 지나 경기도 의정부시의 장암역을 잇는 7호선,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모란역에서 서울 강동구 암사역 구간의 8호선, 서울 강남구 일부 구간을 포함하는 9호선 등이 운행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에도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어 울산광역시를 제외한 모든 광역시에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다. 2009년 기준으로 서울 지하철의 연간 수송인원은 22억 6,000만 명으로 도쿄 29억 명, 러시아 모스크바 25억 명에 이어 세계 3위이며, 지하철역 개수 또한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에 이어 세계 3위이다. 운행거리도 312㎞로 세계 4위에 해당한다. <ref>황은주, 〈[https://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subway.do 지하철]〉, 《국가기록원》</ref> | + | 지하철의 역사는 19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춘철도주식회사는 현재의 서울 지하철 1호선과 거의 동일한 구간인 제기에서 동대문까지의 구간을 지하철로 건설해 경춘선과 연계하는 것을 계획했으나 총공사비 약 500만 원의 예산이 부족하여 실행되지 못했다. 그 후, 지하철 건설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이다. 1960년 센서스에 따르면, 서울의 인구는 244만 5,402명이었는데, 1970년에는 두 배가 넘는 552만 5,262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렇게 서울로의 인구가 집중된 것은 전후 베이비붐으로 인해 인구 자체가 증가했으며 농촌인구의 탈농촌화 및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은 더 많은 주택과 식수, 출퇴근과 통학을 위한 [[도로]], 그리고 [[대중교통]] 수단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이에 1968년 서울시는 도로교통 체증이 심각해지자 서울의 전차를 없앴다. 그리고 새로운 대중교통수단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보다 많이, 보다 빠르게 사람들을 수송할 교통수단이 필요했고, 그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대중교통수단이 지하철이었다. 지하철의 잠재력에 대해 확신이 있었던 양택식 서울시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첫 시정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지하철 건설본부 설치 등 지하철 건설을 준비하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의견은 지하철 건설에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며 지하철 건설 시 오히려 서울로의 인구집중이 더 심화될 것을 우려하는 경제기획원장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렇듯 찬성과 반대의견 때문에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이후락 주일대사가 선진국의 사례를 들어 서울에도 지하철 건설이 시급하다는 의견을 내놓자 지하철 건설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에 따라 서울지하철 건설본부가 설치되었고 다각적인 조사를 거쳐 지하철 및 수도권 전철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은 서울역∼종로∼청량리를 잇는 9.8km 구간에는 지하철을 건설하고, 서울역∼인천, 서울역∼수원, 용산역∼성북 구간은 기존 철도를 전철화하여 지하철과 연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1971년 4월에 지하철 건설이 시작되었다.1호선은 국내의 토목과 건축 기술에 일본의 차량 및 신호 분야의 기술과 자본을 활용하여 건설하였다. 종로∼청량리 구간 공사에는 지상에서 땅 속으로 파들어 가는 개착식 공법을 썼는데 터널식으로 파는 것보다 공사비가 적게 들고 공사기간도 단축된다는 이점은 있었지만, 교통 혼잡을 초래하여 시민에게 큰 불편을 주었다. 난공사 구간도 여러 곳이었다. 남대문과 동대문 공사구간에는 진동으로 인한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해 수입 콜크로 방진벽을 만들었고 거의 90도로 꺾이는 광화문에서 시청쪽 방향 공구에는 특수공법이 도입됐다. 양택식 서울시장은 지하철 건설 기간 내내 공사현장을 누비고 다녀 '두더지'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공사 진척은 빠르게 진행됐고 최초 계획대로 1974년 8월 15일 청량리에서 서울역까지 서울 지하철 1호선 및 청량리에서 성북 그리고 서울역에서 인천, 수원까지 기존 철도의 전철화가 완성되었다. 1974년 첫 지하철이 개통된 이래 4호선이 건설될 때까지 서울 지하철은 실제로 대부분이 지하 구간이었기 때문에 ‘지하철’이라는 이름이 적합하였다. 그러나 지상 구간이 주를 이루는 광역철도가 빠르게 구간을 확장하면서 1994년 설립된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가 기존의 ‘지하철’이라는 명칭 대신 ‘도시철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제는 지하철, 도시철도라는 말이 같이 쓰이고 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이 힘차게 달린지 10여 년 후인 1984년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한 바퀴 도는 2호선이 개통됐다. 당초 이 노선은 서울시의 지하철 건설 및 수도권 전철화 사업계획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서울의 도심기능을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구체화되었다. 2호선에는 전동차량에 냉난방 시설이 갖춰졌다. 지하철 건설 공사는 계속돼 1985년 10월 3, 4호선이 완전 개통되어 본격적인 지하철 시대가 열렸다. 서울의 동서를 관통하는 5호선, 한강 이북 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6호선, 서울의 온수역에서 도봉산역을 지나 경기도 의정부시의 장암역을 잇는 7호선,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모란역에서 서울 강동구 암사역 구간의 8호선, 서울 강남구 일부 구간을 포함하는 9호선 등이 운행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에도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어 울산광역시를 제외한 모든 광역시에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다. 2009년 기준으로 서울 지하철의 연간 수송인원은 22억 6,000만 명으로 도쿄 29억 명, 러시아 모스크바 25억 명에 이어 세계 3위이며, 지하철역 개수 또한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에 이어 세계 3위이다. 운행거리도 312㎞로 세계 4위에 해당한다. <ref>황은주, 〈[https://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subway.do 지하철]〉, 《국가기록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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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11일 (금) 17:15 판
지하철(地下鐵)은 지하 철도 위를 달리는 전동차로 대도시에서 교통의 혼잡을 완화하고, 빠른 속도로 운행하기 위하여 터널을 파고 부설한 철도다.
개요
지하철은 도시교통의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도시교통권역에서 건설‧운영하는 철도, 모노레일, 노면전차, 선형유도전동기, 자기부상열차 등 궤도에 의한 교통시설 및 교통수단을 말한다.도심지역의 교통 혼잡도 완화를 위해 지하철 건설이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지하철에 수송분담률이 높아졌으며 이용자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또한 많은 환승역사가 생겨났다. 환승역사의 증가는 많은 이동통로의 증가를 가져왔으나 도시의 지하철 및 지하공간의팽창과 반대로 이동통로 기능과 상업성만을 중심으로 개발되는 추세이다. 국내 지하철 현황을 살펴보면 19개의 노선이 운영되고 있으며, 다양한 노선의 접점으로 다수의 환승역이 존재한다.[1]
역사
지하철의 역사는 19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춘철도주식회사는 현재의 서울 지하철 1호선과 거의 동일한 구간인 제기에서 동대문까지의 구간을 지하철로 건설해 경춘선과 연계하는 것을 계획했으나 총공사비 약 500만 원의 예산이 부족하여 실행되지 못했다. 그 후, 지하철 건설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이다. 1960년 센서스에 따르면, 서울의 인구는 244만 5,402명이었는데, 1970년에는 두 배가 넘는 552만 5,262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렇게 서울로의 인구가 집중된 것은 전후 베이비붐으로 인해 인구 자체가 증가했으며 농촌인구의 탈농촌화 및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은 더 많은 주택과 식수, 출퇴근과 통학을 위한 도로, 그리고 대중교통 수단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이에 1968년 서울시는 도로교통 체증이 심각해지자 서울의 전차를 없앴다. 그리고 새로운 대중교통수단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보다 많이, 보다 빠르게 사람들을 수송할 교통수단이 필요했고, 그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대중교통수단이 지하철이었다. 지하철의 잠재력에 대해 확신이 있었던 양택식 서울시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첫 시정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지하철 건설본부 설치 등 지하철 건설을 준비하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의견은 지하철 건설에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며 지하철 건설 시 오히려 서울로의 인구집중이 더 심화될 것을 우려하는 경제기획원장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렇듯 찬성과 반대의견 때문에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이후락 주일대사가 선진국의 사례를 들어 서울에도 지하철 건설이 시급하다는 의견을 내놓자 지하철 건설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에 따라 서울지하철 건설본부가 설치되었고 다각적인 조사를 거쳐 지하철 및 수도권 전철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은 서울역∼종로∼청량리를 잇는 9.8km 구간에는 지하철을 건설하고, 서울역∼인천, 서울역∼수원, 용산역∼성북 구간은 기존 철도를 전철화하여 지하철과 연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1971년 4월에 지하철 건설이 시작되었다.1호선은 국내의 토목과 건축 기술에 일본의 차량 및 신호 분야의 기술과 자본을 활용하여 건설하였다. 종로∼청량리 구간 공사에는 지상에서 땅 속으로 파들어 가는 개착식 공법을 썼는데 터널식으로 파는 것보다 공사비가 적게 들고 공사기간도 단축된다는 이점은 있었지만, 교통 혼잡을 초래하여 시민에게 큰 불편을 주었다. 난공사 구간도 여러 곳이었다. 남대문과 동대문 공사구간에는 진동으로 인한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해 수입 콜크로 방진벽을 만들었고 거의 90도로 꺾이는 광화문에서 시청쪽 방향 공구에는 특수공법이 도입됐다. 양택식 서울시장은 지하철 건설 기간 내내 공사현장을 누비고 다녀 '두더지'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공사 진척은 빠르게 진행됐고 최초 계획대로 1974년 8월 15일 청량리에서 서울역까지 서울 지하철 1호선 및 청량리에서 성북 그리고 서울역에서 인천, 수원까지 기존 철도의 전철화가 완성되었다. 1974년 첫 지하철이 개통된 이래 4호선이 건설될 때까지 서울 지하철은 실제로 대부분이 지하 구간이었기 때문에 ‘지하철’이라는 이름이 적합하였다. 그러나 지상 구간이 주를 이루는 광역철도가 빠르게 구간을 확장하면서 1994년 설립된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가 기존의 ‘지하철’이라는 명칭 대신 ‘도시철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제는 지하철, 도시철도라는 말이 같이 쓰이고 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이 힘차게 달린지 10여 년 후인 1984년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한 바퀴 도는 2호선이 개통됐다. 당초 이 노선은 서울시의 지하철 건설 및 수도권 전철화 사업계획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서울의 도심기능을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구체화되었다. 2호선에는 전동차량에 냉난방 시설이 갖춰졌다. 지하철 건설 공사는 계속돼 1985년 10월 3, 4호선이 완전 개통되어 본격적인 지하철 시대가 열렸다. 서울의 동서를 관통하는 5호선, 한강 이북 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6호선, 서울의 온수역에서 도봉산역을 지나 경기도 의정부시의 장암역을 잇는 7호선,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모란역에서 서울 강동구 암사역 구간의 8호선, 서울 강남구 일부 구간을 포함하는 9호선 등이 운행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에도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어 울산광역시를 제외한 모든 광역시에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다. 2009년 기준으로 서울 지하철의 연간 수송인원은 22억 6,000만 명으로 도쿄 29억 명, 러시아 모스크바 25억 명에 이어 세계 3위이며, 지하철역 개수 또한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에 이어 세계 3위이다. 운행거리도 312㎞로 세계 4위에 해당한다. [2]
특징
- 통합교통 시스템 : 국내 지하철은 교통카드 한 장으로 모든 지하철과 버스를 환승할 수 있다. 정해진 시간안에 환승하면 요금이 무료이다. 서울지하철 요금은 10~50km까지는 5km마다 100원씩 추가요금이 발생하고, 50km를 초과하면 8km마다 100원씩 추가가 되고 있다. 그리고 버스를 이용하고 30분 이내에 지하철으르 이용하면 환승요금이 적용되어 10km까지는 무료로 이용하고, 5km마다 100원의 추가요금이 부과된다.
- 교통정보 시스템 : 3~4정거장 전부터 실시간으로 지하철의 행선을 안내하는 게시기가 있다. 지하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버스 정류장까지 언제올지 알려주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 냉난방 시스템 : 여름에는 냉방, 겨울에는 난방을 틀어준다. 약냉방칸의 경우에는 냉방이나 난방에 약학 사람들을 고려했다.
- 스크린 도어 : 역마다 설치된 안전문인 스크린도어가 있다. 다른 나라에선 쉽게 찾아보기 힘든 시스템이다.
- 승강장과 출구를 이어주는 엘리베이터 : 한국의 지하철역 중 88%는 엘레베이터만을 이용해 승강자부터 출구까지 이동이 가능하다.
- 다국어 안내시스템 : 교통카드 발매기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지원하며 모든 지하철에서 영어 안내방송이 지원된다. 서울 교통공사는 매년 2회씩 영어, 중국어, 일본어가 병기된 노선도를 제작해 277개 전역 안내센터에 배치했다.[3]
요금
지하철 승차 시에는 일회용 교통카드 또는 교통카드를 이용해야 한다. 일회용 교통카드는 지하철역에서 구입할 수 있으며 요금은 행선지까지의 정확한 요금에 환급 가능한 보증금 500원이 추가된다. 티머니(Tmoney)로 불리는 교통카드는 대부분 편의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지하철 노선 간의 환승은 무료이며 티머니 소지자의 경우 버스와 지하철 간 환승도 무료이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사용자는 서울 지하철, 메트로이드 전국 지하철 정보, 카카오 지하철 내비게이션 등 노선, 시간, 환승 정보를 영어로 알려주는 다양한 앱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
승객구분 티머니 1회용 교통카드 일반 (만19세 이상) 1,250 원 1,350 원 청소년(13~18세) 720 원 1,350 원 어린이 (만6~12세) 450 원 450 원
- 공항철도와 신분당선은 별도요금이 추가로 적용된다.
- 10~50km:5km당100원 추가
- 50km초과시:8km당100원 추가
- 티머니 소지자는 승차시마다 성인 요금에서 100원이 할인된다.[4]
승차 방법
- 지하철역 표지판은 한글 및 영어 표기와 함께 해당 노선을 상징하는 색으로 되어 있으며 각각의 출구에는 숫자가 표기되어 있다.
- 1회용 교통카드는 역내 위치한 승차권 판매기에서 구입할 수 있다. 500원의 보증금이 필요하며 이 금액은 도착역에서 카드를 반납하면 돌려받게 된다.
- 개찰구 통과 시 교통카드 단말기에 카드를 댄다.
- 환승은 역내에서 한다. 원하는 노선으로 표지판(상징색으로 식별)을 따라간다.
- 행선지에 도착하면 개찰구에 있는 교통카드 단말기에 카드를 대주세요. 1회용 교통카드를 사용한 경우 “보증급환급기”에 카드를 반납하고 보증금 500원을 돌려받는다.
- 티머니 카드 또는 1회용 교통카드의 잔액이 부족하다면 개찰구 근처에 있는 요금정산기를 이용해 금액을 추가할 수 있다.[4]
지하철 노선도
각주
참고자료
- 이근영, 정성봉, 노주희 〈도심 지하철 역사 활용 다양화 방안 연구.〉, 《한국철도학회 춘계학술대회 논문집》
- 황은주, 〈지하철〉, 《국가기록원》
- 〈외국인이 놀라는 한국의 지하철 7가지외국인이 놀라는 한국의 지하철 특징 7가지〉, 《더 코리아 타임즈》, 2017-09-29
- 〈지하철〉, 《VISITSEOUL NET》, 2019-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