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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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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관우(중국어:关羽guān yǔ)는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장수이다.

개요[편집]

자(字)는 운장(雲長)이다. 시호(諡號)는 장목후(壯繆侯, 壯穆侯라고도 쓴다)이다. 오래전부터 중국의 민간에서 충의(忠義)와 무용(武勇)의 상징으로 여겨져 무성(武聖)이나 관성제군(關聖帝君), 관제성군(關帝聖君) 등으로 숭배되었고, 줄여서 관성제, 관제군, 관제, 성제 등으로도 불린다. 《삼국지연의》에는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었고, 유비(劉備)·장비(張飛)와 함께 의형제로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때문에 미염공(美髯公)이나 관이야(關二爺) 등으로도 불린다.

관우는 오래전부터 충의와 무용의 상징으로 중국의 민간에서 각별히 숭배되었다. 송(宋)나라 이후에는 관제묘(關帝廟)를 세워 그를 무신(武神)이나 재신(財神)으로 모시는 등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도교에서는 그를 협천대제(協天大帝)·복마대제(伏魔大帝)·익한천존(翊漢天尊) 등으로 숭배하며, 유교에서도 문형성제(文衡聖帝)로 숭배된다. 불교에서도 그를 호법신(護法神)의 하나로 받아들여 가람보살(伽藍菩薩)로 숭배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우 숭배는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나라 병사들을 통해 조선에 전해지기도 했는데, 1601년(선조 34)에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왕궁 인근에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동관왕묘(東關王廟)가 세워지기도 했다. 줄여서 동묘(東廟)라고도 불리는 동관왕묘는 1963년에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1]

관우의 생애[편집]

사례 하동군 해현(河東郡 解縣) 출신으로 이곳은 중국 최대의 염호(塩湖)인 해지(解池)가 있어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한(漢) 나라에서는 소금이 국가 전매품이어서 밀매가 성행했는데, 관우는 소금 밀매에 관여하다가 염상(塩商)을 죽이고 유주 탁군(幽州 涿郡,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줘저우시(涿州市)로 도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비를 만나 장비와 함께 그의 호위관이 되었다. 유비가 평원상(平原相)이 되었을 때 관우는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어 군대를 나누어 통솔했다. 유비와 관우, 장비는 형제처럼 관계가 돈독하였다고 한다.

199년 유비는 서주자사(徐州刺史) 차주(車胄)를 죽이고 하비성(下邳城)을 차지했고, 유비가 소패(小沛)로 귀환한 뒤에도 관우는 남아서 하비성을 지키며 태수(太守)의 일을 맡았다. 그러나 200년 조조(曹操)가 동정(東征)에 나서 유비가 원소(袁紹)에게 투항하자, 관우는 유비의 가족과 함께 조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조조는 관우를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아 후하게 대우했으며, 관우는 백마(白馬)에서 벌어진 원소와의 전투에서 장료(張遼)와 함께 선봉으로 나서 원소의 수하장수인 안량(顔良)을 죽이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조조는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했으나 관우는 조조를 떠나 다시 유비에게 합류했다. 그리고 유비와 함께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신야(新野)에 주둔했다.

208년 유표가 죽은 뒤 형주목(荊州牧)의 지위를 계승한 유종(劉琮)은 남하한 조조의 군대에 항복했다. 그러자 관우는 유비와 함께 하구(夏口)에 주둔하던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와 합류했다. 그리고 손권(孫權)과 연합해 벌어진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형주의 남군(南郡)을 둘러싸고 벌어진 공방전에서는 조조의 원군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고, 유비가 강남의 무릉군(武陵郡)·장사군(長沙郡)·계양군(桂陽郡)·영릉군(零陵郡) 등을 차지한 뒤에는 양양태수(襄陽太守), 탕구장군(盪寇將軍)으로 임명되어 강북 지역에 주둔했다. 유비가 익주(益州) 정벌에 나섰을 때에도 관우는 형주에 남아 그곳을 지켰다.

215년에는 손권의 수하장수인 여몽(呂蒙)이 형주 공략에 나서 장사군·계양군·영릉군을 공격해오자 관우는 병사를 이끌고 출정해 익양(益陽)에 주둔했다. 그러나 조조가 한중(漢中)을 공격해오자 노숙(魯粛)과의 담판으로 다시 손권과의 화친을 이끌어냈다.

219년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된 뒤에 관우는 전장군(前將軍)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 해에 조인이 지키던 번성(樊城)과 여상(呂常)이 지키던 양양(襄陽)을 포위해 공격했다. 조조는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원병을 보냈는데, 우금(于禁)이 이끌던 원병은 범람한 강물에 갇혀 관우의 포로가 되었다. 관우의 공세로 천도를 고려해야 할 정도로 위협을 느낀 조조는 서황(徐晃)을 장수로 한 원군을 번성으로 보내는 한편, 강남의 영유권을 넘기는 조건으로 손권과 손을 잡았다. 손권은 자신의 영토인 상관(湘關)에서 관우가 쌀을 공출해간 것을 구실로 관우의 배후를 기습해 형주의 남군을 점령했고, 관우는 조조와 손권에게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게 되었다.

관우는 조조가 원군으로 보낸 서황의 군대에 패해 번성의 포위를 풀고 맥성(麥城)으로 퇴각했다. 그리고 포위를 뚫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중국 건안(建安) 24년 음력 12월에 임저(臨沮)에서 아들인 관평(關平)과 함께 손권의 군대에 붙잡혀 참수되었다. 손권은 그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고, 조조는 제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오늘날 그의 몸이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후베이성(湖北省) 당양(當陽)의 무덤은 관릉(關陵)으로, 그의 머리가 매장되었다는 허난 성(河南省) 뤄양(洛陽)의 무덤은 관림(關林)으로 불린다.

관우의 죽음에 분노한 유비는 221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정벌에 나서 당양의 그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옥천산(玉泉山)에 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유비의 아들인 유선(劉禪)은 260년 관우에게 장목후(壯繆侯)라는 시호를 주었다. 관우에게는 관평 이외에 관흥(關興)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관흥에게는 관통(關統)과 관이(關彛)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263년 촉나라가 멸망했을 때 관우에게 죽임을 당한 방덕(龐德)의 아들 방회(龐會)가 관우의 후손들을 모두 몰살시켰다고 전해진다.

《삼국지연의》에서 관우는 신장이 9척이나 되고, 붉은 얼굴에 2척이나 되는 길고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으며, 82근이나 되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휘두르고, 적토마(赤兎馬)를 탄 용맹한 장수로 묘사된다. 그리고 유비·장비와 의형제로 도원결의를 맺었고, 화타가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독화살을 맞은 어깨를 째서 뼈를 긁어내는 수술을 하는데도 태연하게 바둑을 두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관우에 대한 평가[편집]

중국 역시 삼국지를 비롯한 여러 고전 역사들에 바탕한 민족주의가 있고, 그 속에는 여러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관우는 신격화될 만큼 오랫동안 민중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유명한 위인이다. 물론 여기서의 민족 개념은 근대 이후 창안되어 통용되는 서양식의 민족 개념이라기보다는 진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전한 때 정립되었고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중국인들의 중화사상 또는 한족의 개념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옳다.

중국인들은 관우를 '관공'이라고 높이며 매우 존경한다. 사후 약 2천 년인 오늘날에도 관우는 수많은 팬들이 있으며,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국가를 따지지 않고 각종 게임, 영화, 드라마, 그리고 만화 등 여러 창작물에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중국인들은 관우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종교적으로 신봉할 정도다. 더불어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작품 곳곳에서 관우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평생에 걸쳐 고초를 겪은 끝에 마침내 천하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믿었던 아군과 동맹에게 배신당해 허망하게 목숨을 잃고 만 관우의 이름은 오히려 이천 년이 넘도록 생생히 살아남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추앙은 높아져 후대에는 공(公)에서 왕(王)을 넘어 주군 유비와 동급인 황제(帝)까지 추존되었고 급기야 신으로 모셔지기까지 했다. 보통 추존은 군주가 자신의 직계 조상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가문이 왕가가 아님에도 이렇게 후대에 격상된 경우는 굉장히 예외적이었다. 이는 단지 충(忠)을 강요하고자 하는 정치적 프로파간다 때문은 아니었다. 애당초 관우는 완전무결한 영웅이 아니었다. 전장에서는 패배하기도 했고, 적에게 항복하기도 했었다. 오만한 성품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는 화목하지 못했고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기도 했으며, 이것이 빌미가 되어 끝내 패망했다.

관우는 모든 결점을 뛰어넘을 영웅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주군 유비에 대한 그 끝 모를 의리와 이미 손아귀에 넣은 부귀영화를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내던지고 적수공권인 유비에게 돌아가는 관우의 모습은 실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유비가 모든 인재와 병력을 뽑아간 이후에도 얼마 안 되는 남은 병력만으로 사력을 다해 형주를 지켜내는 모습은 실로 처절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인간이었으며, 신념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였다.

관우는 결코 백전불패의 완벽한 명장이 아니었다. 때로는 패배했고, 때로는 실책도 저질렀으며, 최후의 순간에는 천하에 이름을 날리던 그도 일개 패장(敗將)에 불과했다. 하지만 평범한 대중이나 소시민들이 이상(理想)으로 생각한 삶의 태도를 그는 현실 세계에서 끝까지 지켜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끝내 굴복하지는 않았다. 강자에게는 도도했지만 약자에게는 너그러웠다. 그의 비극적인 삶이 마침내 종막을 고하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로 인해 관우는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관우의 신격화[편집]

도교에서는 관우를 신격화하여 전쟁의 신인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부른다.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듯이, 관우의 사당을 무묘(武廟)라 하여 관우는 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다. 관우가 황제(관성대제)를 넘어서 신으로 추대된 이후에 중국 후대 왕조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관우와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피휘(避諱)를 하였다. 중국인들이 관우를 차라리 운장이라고 부르거나 굳이 굳이 관공(關公)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관제묘가 사당 형식으로 처음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인 1594년으로, 명나라가 자신들의 임진왜란 출정 때 이긴 것을 관장군의 덕이라고 여겨서 세워져 중국 대륙 각지, 나아가 대만, 홍콩, 한국, 일본 등지에도 관제묘가 세워졌다. 우리나라에는 관왕묘나 혹은 관제묘라고 하며 주로 충청도, 경상도 지방에 몇몇 있다. 서울시 종로구에 숭인동에 위치한 "동관왕묘"가 바로 이 관왕묘 중 하나이다. 이 관왕묘에는 관우를 죽인 여몽의 성과 같은 여(呂)씨와 육손의 성과 같은 육(陸)씨가 들어오면 아무 이유없이 죽는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관우(關羽,?~219)〉,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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