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공자(중국어:孔子kǒng zǐ)는 중국 춘추 시대의 사상가이며 유학자이다.
개요[편집]
공자는 유교의 시조(始祖)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인 · 사상가 · 교육자이고, 노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였다. 흔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의 공동 선조였다. 춘추시대에 서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의 무관인 숙량흘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었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정치적으로는 삼황 오제의 이상적 정치와 조카를 왕으로서 성실하게 보필한 주공 단의 정치 철학을 지향했다. 뜻을 펴려고 전국을 주유하였으나, 그의 논설에 귀를 기울이는 왕이 없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생을 마쳤다. "공자(孔子)"의 호칭에서 "자(子)"는 성인을 부르는 존칭이다. 그 뒤 여러 번 추증되어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에 추봉되었다.[1]
공자의 가계[편집]
숙량흘과 그의 본처 시씨(施氏) 사이에는 아홉 명의 딸이 있었으나 아들이 없었고, 첩과 낳은 아들 공피(孔皮)는 다리에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이에 숙량흘이 그의 노년에 안징재를 맞아 낳은 아들이 공자이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는 아니었다. 안징재는 숙량흘의 동료 무사이자 친구였던 안양(顔襄)의 셋째 딸이었다. 숙량흘이 안징재를 만났을 당시 숙량흘은 60대 후반이였고 안징재는 16세의 소녀였다.
공자 조상은 주나라 이전 왕조인 은나라에서 봉토를 하사받은 송나라의 공족(소국의 왕에 해당)이었으며, 공자 3대 전에 노나라로 왔다. 그 집안은 송나라 왕실에서 연유한 명문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노나라에 와서 살았으며, 부친 숙량흘은 무사였다. 일설에 따르면 모친 안징재는 낮은 신분의 무녀(巫女)였다고 한다. 공자 자가 중니(仲尼)인 이유는 집안 장남인 맹피에 이은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소개하는 공자 가계는 보통 그의 부친 숙량흘과 증조부 공방숙까지 언급하나, 후대에는 보통 공자를 시조로 간주하기도 한다.
공자의 생애[편집]
공자(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는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원래 송의 귀족이었으나 노(魯)로 망명하였다. <맹자>에는 공자가 상(商) 왕가의 후손이라는 서술 있어 때로는 공자를 상 왕족의 혈통으로 여기기도 하였으나, <사기>에는 이에 대한 기록은 없고 단지 "그의 선조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공방숙(孔防叔)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는 그를 송(宋)의 후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버지의 자는 숙량(叔梁), 이름은 흘(紇)이다. 어머니는 안씨(顔氏)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徵在)이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공자는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하였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공자는 19세 때인 BC 533년 노나라 계씨의 창고 관리직이 되었다. BC 517년 삼환씨의 제가에 실패한 소공(昭公)과 함께 제(齊)로 갔다. 제에서 관직 등용에 실패한 뒤 노로 되돌아왔다. 공자는 51세 때인 BC 501년 노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었고, 56세 때 대사구(大司寇)로 재상이 되었다. 하지만 노의 정치에 실망하고 벼슬을 버리고 자신의 경륜을 펼치기 위해 주유 천하의 길을 나서 위, 조, 송, 정, 진, 채, 초를 방문하였다. 그 후 공자는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한다.
공자의 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六藝:禮·樂·射·御·書·數)에 통한 문인(門人)이 72명이라고 한다. 그가 '사람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해서는 안된다(敎人不倦)'라고 술회했던 것처럼, 공자는 이상을 미래에 건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다. 이는 그의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五經)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을 정리했다. 공자는 아들과 아끼던 제자들을 잇따라 잃고 상심에 빠진 공자는 고향인 곡부로 돌아와 후학 양성으로 만년을 보냈다.
공자는 만년 들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말하기를, "나이 열다섯에 학문의 길로 가기를 마음먹었고, 서른에 이르러 세상에 나의 존재를 알렸으며, 마흔에는 어떤 일에도 미혹됨이 없었고, 쉰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뜻을 모두 알았으며, 예순에는 모든 일에 대해 순리를 알 수 있었고,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하였다. 공자는 72세가 된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하하였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말씀들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공자의 주유천하[편집]
공자는 35세 때 소공(昭公) 25년 노나라에 '삼환(三桓, 맹손(孟孫)·숙손(叔孫)·계손(季孫) 등 당시 노나라의 권세가)의 난'이 일어나 노왕 소공이 신하인 계씨에게 쫓겨나 제나라로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다. 공자도 그의 뒤를 따라 피난, 기원전 517년에 제나라에 갔다.
공자는 제나라의 왕 경공(景公)과 신하들에게 여러모로 진리를 가르쳤다. 그는 그곳에서 음악을 논하고 경공에게 정명주의(正名主義)에 입각한 정치 이상을 말하였다. 공자의 박학다식함과 고매한 인품에 매료돼 그를 흠모하게 된 경공은 그를 자신의 정치적 고문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공자의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인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꺼린 제나라 재상 안영(晏嬰)의 적극적인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로 인해 2년 만에 귀국한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46세 무렵 노나라 왕의 측근 배신(陪臣)인 양호가 세력을 잃고 물러나게 되면서 중도재(中道宰)가 되었다. 52세 무렵에는 대사구(大司寇)로 지위가 올랐다.
제나라에서는 밀자(密者)를 파견하여 노나라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였으나 공자가 이를 꿰뚫어 보고 회의 장소에 들어가려는 의심쩍은 사내를 붙잡아 화를 미리 막고 노나라에 유리하게 강화를 맺었다. 삼환씨의 세력을 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대부(大夫)인 계환자가 제나라의 흉계에 속아 쾌락에 빠진 것을 만류하다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크게 낙담한 공자는 그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벼슬을 버린 후, 14년 동안 제자들과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위·송·조·정·진·채 등 여러 나라를 주유하였다.
공자의 사상[편집]
공자의 중심 사상은 제자들과 나눈 문답 형식의 언행집인 '논어(論語)'에 들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인간이 취하여야 할 모든 행동의 궁극적 지향점은 인(仁)에 있다. 공자의 정치사상은 인(仁)의 정치사상으로 집약된다. 공자는 백성들을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서 질서를 잡으면 백성들은 도덕적 책임감을 느끼고 스스로 올바르게 된다고 하였다<論語,爲政篇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공자가 교육에 목표로 삼은 것은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층 인사로서 인격의 완성체인 이른바 군자(君子)의 양성이었다. 당시 군자란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는 능력과 자격을 겸비한 귀족 계층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공자는 그 지위에 어울리는 도덕적 인격 · 정치적 능력 · 인문적 교양을 지닌 사람으로 뜻을 확대하여 이러한 인재의 육성을 자신의 교육목표로 삼았다. 공자는 인(仁)을 지향하고 예(禮)에 정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소인이라고 하였다. 공자는 인(仁)은 성인만이 능히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자신도 외경(畏敬)할 만큼 이루기 어렵다고 하였다.
공자의 군자교육(君子敎育)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의예지'였다.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仁)'은 하나의 문장으로서 명백히 개념이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도(道),덕(德,) 선(善)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인'은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의 도(道)와 덕(德)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인'을 터득하게 함으로써 학식과 함께 인격적인 '덕'을 겸비하는 군자가 되도록 하고, 난세를 평화적 방법으로 평정하려 했던 것이다.
공자의 영향력[편집]
공자의 사상은 생시에는 실현을 보지 못한 채 증자를 거쳐 맹자에 이르러 활기를 띠고, 이후 중국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조류가 되었다. 한국·일본 등 중국의 주변 국가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그 배경에는 중국에 선교목적으로 진출한 선교사들에 의하여 유렵에 알려진 공자는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세습귀족정치의 특권계급층을 공격하는데 자주 인용되었다. 그 결과 공자의 철학은 유럽 민주주의 이상의 발전과 프랑스 혁명의 배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프랑스의 시민평등사상을 통하여 미국 민주주의 발전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공자는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여 인의 실현을 가르치는 한편, 자기자신도 그 수양에 힘써,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고 술회할 정도의 인격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전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후에는 제자들이 각지에서 그 가르침을 전파하였으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일어남으로써 교세가 약해졌다. 이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맹자(孟子)였으며, 또 전국(戰國) 말기에 순자(荀子)가 이파(異派)의 사상도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國敎)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사실은 각 시대의 유교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자체는 이 가르침의 비조(鼻祖)로서 청조(淸朝) 말까지 계속 존경을 받았다. 한국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공자 유적[편집]
취푸의 공자 유적은 중국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의 유적.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취푸는 유교를 창시한 공자의 고향이다. 둘레 약 5.5km인 현성(縣城) 성벽 안에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큰 사당인 공자묘(孔子廟)를 중심으로 공자부(衍聖公府)와 공자 일가 역대 자손들의 무덤인 공자림(孔子林)이 있다. 공자묘는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공자묘의 총본산이다. 묘 전체의 정전인 다청뎬(大成殿)은 동서 너비 54m, 남북 안길이 34m, 높이 31.89m, 건축 면적 1,836㎡로서 청나라 때인 1730년 개축되었다. 흰 돌로 된 2중 기단 위에 노란 유리기와를 이은 2중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다청뎬 맨 뒤에는 침전(寢殿)과 성적전(聖迹殿)이 있다. 침전은 공자의 부인인 올관씨(兀官氏)를 모신 건물로서 북송 때 지은 것을 청나라 때 개축하였다. 성적전은 1592년 건설한 대전으로서, 공자의 일생에 관한 고사를 그린 총 120폭의 돌조각인 성적도(聖迹圖)가 보존되어 있다. 공자림은 공자와 그 후손들의 묘지인데, 취푸 현성 북문에서 북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 있다. 면적 3.6㎢에 이르는 경내는 나무가 울창하고 제76대에 이르는 후손들의 무덤 10만여 기와 비석들이 흩어져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공자〉, 《위키백과》
- 〈공자(Confucius,孔子,BC 551~BC 479)〉, 《두산백과》
- 〈공자〉, 《나무위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