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포구역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력포구역(力浦區域)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동남부에 위치해 있는 구역이다.[1][2]
개요
력포구역의 면적은 128.07㎢로서 시 면적의 4.95%를 차지한다. 구역 면적 가운데서 농업토지는 63.42%, 주민지구토지는 5.91%, 산림토지는 7.75%, 산업토지는 6.61%, 수역토지는 6.18%, 특수토지는 10.13%를 차지하며 인구는 82,548(2008)명이다. 대동강의 남안에 위치하며 동북쪽으로 사동구역, 북쪽으로 선교구역, 서쪽으로 락랑구역과 접하고 남쪽은 중화군과 접한다.
평양의 고구려 고분군의 일부가 이곳에 위치한다. 노기남 주교가 이곳의 룡산리에서 태어났다. 동명왕릉 등이 있다.[3]
자연환경
력포구역의 전반적 지형은 남동부가 높고 북서부로 가면서 낮아진다. 이와 같은 지형조건은 무진천이 구역 령역의 75%를 차지하면서 남동부에서 북서부 방향으로 흐르게 한다. 룡산리의 남동부에는 구역에서 제일 높은 언덕산들이 있다. 이곳에는 중화군과 사동구역을 경계하고 있는 해발높이 300m 되는 운추산 산괴가 연장된 277m의 낮은 산과 해발높이 200~180m의 언덕산들이 있다. 이 언덕산들은 동서방향의 단층선에 의하여 무진천 상류 곡지들을 사이에 두고 구역 령역에서 3~4㎞의 연장길이를 가진 짧막한 3개 줄기를 이루고 있다. 이 언덕 산들의 기반암은 점판암, 분사암에 석회암이 끼어 있는 하부고생대 황주계의 중화통암석이다. 이 언덕산들의 패임깊이는 160~120m이며 비탈면의 경사는 25° 안팎이다.
그밖에 구역의 대부분의 령역은 해발높이 70~30m의 언덕들로 되여 있다. 이 언덕들의 상대높이는 무진천의 추당리, 석정리 령역에서 40~30m, 대현동, 능금동, 류현리, 세우물리 령역에서 30~20m, 소삼정리, 소신동 령역에서는 20m안팎으로 낮아진다. 이 언덕들을 이루고 있는 기반암은 일부 류현리 령역에 있는 상부고생대 평안계층을 내놓고는 하부고생대 황주계에 속하는 탄산염암석으로 되여 있다.
구역에서 기본 지형구성을 이루는 언덕벌은 제3기의 구조적 안정기간에 풍화-삭박과정을 오래동안 받아왔으며 탄산염암석의 용식화과정과 밀접히 결합되여 있다. 그리하여 이 언덕벌은 지형비탈이 10~5°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긴 둔덕들과 접시형으로 우묵하게 낮아진 바닥(해발높이 15m 정도)들이 서로 지형적으로 이어지게 하여 준 평원면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 이 언덕들에서는 옛 대동강이 흘렀던 단구력층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은 평양벌과 대동강골짜기의 지형발달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탄산염암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력포구역에는 탄산염암석의 풍화-용식산물인 붉은색잔적점토층이 평균 6~7m 두께로 덮여 있으며 세우물리, 력포동에는 보다 두터운 점토층이 덮여 있다. 구역에는 무진천 류역과 구역의 남서부에서 중화군과의 경계로 흐르는 곤양강 우안에 제4기 충적벌이 있다. 이 벌들은 모래와 자갈층으로 되여 있으나 주변 언덕의 운전층과 생성학적으로 련관되면서 겉층은 질메흙으로 덮여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벌은 주변의 완만한 둔덕에로 뚜렷한 지형선이 미미하게 이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벌들의 해발높이는 소신동 령역에서 10m 안팎이며 보다 넓은 류현리, 석정리 령역에서는 15m 안팎, 대편동, 추당리 령역에서 20m 안팎이며 곤양강 류역의 양음리 령역에서는 15m 안팎이다.
력포구역의 한해 평균기온은 9.5℃이며 8월 평균기온은 24.3℃, 1월 평균기온은 -8.0℃로서 평균기온의 한해 변화너비는 32.3℃이다. 한해평균최고기온은 15.8℃, 8월 평균최고기온은 29.5℃, 1월 평균최고기온은 -1.8℃이다. 한해평균최저기온은 4.3℃이며 8월 평균최저기온은 20.3℃, 1월 평균최저기온은 -13.4℃이다. 하루평균기온이 0℃ 이하로 되는 기간은 101일이며 하루평균기온이 20℃ 이상 되는 기간은 91일이다. 하루평균기온이 0℃ 이상 보장되는 날수는 264일이며 적산온도는 4,000℃ 정도이고 10℃ 이상 보장되는 날수는 190일이며 적산온도는 3,630℃, 20℃ 이상 적산온도는 2,100℃이다.
력포구역 대현동에서 한해평균강수량은 967.6㎜이며 남부에서 북부로 가면서 강수량이 점차 많아지나 지역적 차이는 크지 않다. 철별로 보면 봄철 강수량은 137.5㎜로서 한해강수량의 14%, 여름철 강수량은 598.4㎜로서 한해강수량의 62%, 가을철 강수량은 180.9㎜로서 한해강수량의 19%, 겨울철 강수량은 50.8㎜로서 한해강수량의 5%이다. 력포구역도 시 안의 다른 구역과 같이 봄철에는 개인날이 많고 바람이 세므로 증발량이 많아서 가물이 자주 든다.[4]
역사
력포구역은 1960년 10월에 생긴 구역이다. 평양시 력포땅은 예로부터 사람이 살아온 고조선의 한 주민지였다. 력포구역 대현동에서 발견된 사람의 머리뼈화석과 수십가지의 짐승뼈화석 등 유적들은 10만여년 이전의 구석기전기 《력포사람》들이 남긴 것이다. 대현동유적은 그전 시기의 것인 상원군 검은모루 유적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구석기전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들이다.
력포땅은 고구려가 수도를 국내성(집안)으로부터 평양으로 옮긴(427년) 이후부터는 강대해진 고구려 수도의 한 부분이였다. 력포구역 동쪽의 룡산리에 있는 고구려의 동명왕(고주몽)묘를 비롯한 유적들은 력포땅이 당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의 한 부분이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려시기와 리조시기 등 력대로 력포땅은 서북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평양의 한 부분으로 있었다. 리조시기에 력포땅은 평안도 평양부에, 1896년부터는 평안남도 평양부의 례안부 대동강면, 률리면, 룡연면 등에 속하여 있었다.
일제는 1913년에 평양부 령역을 중심구역만으로 줄이고 력포구역을 포함한 주변지역은 대동군 등지에 넘기였다. 그리하여 해방될 때까지 력포구역 령역은 평안남도 대동군의 률리면, 룡연면, 중화군의 동두면에 속하여 있었고 장진리만이 평양부에 속하여 있었다. 해방 후에는 력포구역 령역이 평안남도 중화군(률리면, 룡연면)에 속하여 있었다.
1959년 9월에 평양시 령역을 늘일 때 력포구역 령역을 락랑구역(류현리, 소신리, 장진리, 력포리, 양음리)과 승호구역(석정리, 대현리, 당정리, 추당리)으로 갈라졌다. 1960년 10월에 력포구역이 신설되면서 락랑구역의 류현리, 소신리, 장진리, 양음리와 력포리의 일부, 승호구역의 석정리, 대현리, 당정리, 추당리가 력포구역에 속하게 되였다.
1965년 1월 장진동을 분리하여 소삼정리가 신설되고 중화군 무진리가 구역에 편입되였으며 석정리가 분리되여 사동구역 장천리로 넘어갔다. 1967년 10월에는 류현리와 력포동 일부를 분리하여 당정리에 넘기고 소삼정리가 분리되여 소신동에 들어갔으며 당정리를 분리하여 능금동과 세우물리를 내오고 당정리를 없앴다. 1972년 11월에는 장진동을 장진1동, 장진2동으로 분리하고 일부는 선교구역 무진1동에 편입시키고 선교구역 무진1동 일부가 력포구역 장진1동에 들어왔다.
력포구역은 1989년 말 현재 6개 동(소신동, 장진1동, 장진2동, 력포동, 대현동, 능금동), 7개 리(세우물리, 룡산리, 추당리, 석정리, 소삼정리, 양음리, 류현리)로 이루어져 있다.
산업
력포구역은 해방 전에 생산성이 낮은 조, 피 같은 밭작물을 기본으로 하는 메마른 농업지대로서 수공업적인 공장조차 하나 없던 매우 뒤떨어진 지역이였다. 해방 후 력포구역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그 면모를 일신하였다. 오늘 력포구역은 지난날 경제의 락후성을 말끔히 가셔버리고 전기기계공업을 비롯한 중앙공업과 구역의 원료원천에 튼튼히 의거한 지방공업, 여러모로 발전된 농촌경리를 가진 수도의 믿음직한 교외농업지역으로 전변되였다.
력포구역에는 해방 전에 자그마한 수공업적인 공장마저도 없던 곳이였다. 해방 후 구역에는 중앙 및 지방 공업 공장들이 수많이 창설되여 수도의 경제발전과 주민들의 생활향상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력포구역에서는 전후복구건설시기에 수도시민들의 생활안정과 농촌경리의 물질기술적 토대를 튼튼히 하기 위한 여러 공업부문들이 창설되였으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1958년 6월전원회의 이후 시기에는 지방의 원료원천에 의거하는 지방공업공장들이 대대적으로 건설되였다. 1970년에 들어와서는 이미 창설된 공업부문들의 기술장비를 개선하고 더욱 공고화하면서 새로운 중앙공업공장들이 창설되였다.[5]
고적
력포구역에는 고적으로서 동명왕릉, 정릉사터, 진파리1호무덤, 진파리4호무덤 등이 있다.
동명왕릉은 룡산리에 있다. 동명왕릉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무덤이다.이 무덤은 무덤칸의 짜임새와 무덤무지, 변두리의 돌시설 등으로 보아 5세기 초엽에 만든 무덤으로서 427년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 온 것이다. 동명왕릉 앞에는 고구려의 절터가 있다. 오늘 동명왕릉 일대는 우리 인민들의 훌륭한 문화휴식터로 되였다.
정릉사터는 룡산리에 있다. 정릉사터는 고구려시기의 절터이다. 정릉사는 5세기 초엽에 동명왕릉을 옮겨올 때 함께 지은 것이다.
진파리1호무덤은 룡산리에 있다. 진파리1호무덤은 6세기 후반기 고구려귀족의 무덤이다. 진파리4호무덤은 룡산리에 있다. 진파리4호무덤은 6세기 전반기 고구려귀족의 무덤이다.[6]
지도
동영상
각주
- ↑ 〈력포구역〉, 《위키백과》
- ↑ 〈력포구역〉, 《나무위키》
- ↑ 〈북한지리정보: 평양시 력포구역의 지리적 위치와 령역 및 행정구역〉, 《네이버 지식백과》
- ↑ 〈북한지리정보: 평양시 력포구역의 자연〉, 《네이버 지식백과》
- ↑ 〈북한지리정보: 평양시 력포구역의 경제〉, 《네이버 지식백과》
- ↑ 〈북한지리정보: 평양시 력포구역의 천연기념물과 고적〉,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력포구역〉, 《위키백과》
- 〈력포구역〉, 《나무위키》
- 〈북한지리정보: 평양시 력포구역의 지리적 위치와 령역 및 행정구역〉, 《네이버 지식백과》
- 〈북한지리정보: 평양시 력포구역의 자연〉, 《네이버 지식백과》
- 〈북한지리정보: 평양시 력포구역의 경제〉, 《네이버 지식백과》
- 〈북한지리정보: 평양시 력포구역의 천연기념물과 고적〉,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동아시아 같이 보기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