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아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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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반도(영어: Iberian Peninsula, 스페인어: Península ibérica, 포르투갈어: Península Ibérica, 문화어: 삐레네이 반도)는 유라시아의 제일 서쪽에 위치한 유럽의 남서쪽 끝에 있는 반도이다. 동쪽과 남쪽은 지중해, 서쪽과 북쪽은 대서양과 접해 있다. 북동쪽으로 피레네산맥으로 유럽의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지브롤터 해협 너머로 아프리카가 있다. 면적은 약 583,254Km²이고 인구는 약 5천 3백만 명이다.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반도이다.[1]
개요[편집]
이베리아반도는 서유럽과 남유럽, 대서양과 지중해를 끼고 있는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영국령 지브롤터를 포함하는 반도이다. 동쪽으로는 지중해, 서쪽으로는 대서양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아프리카 모로코와 마주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프랑스와 접해 있다. 남쪽은 산악지형으로, 시에라모레나산맥과 시에라네바다산맥 등이 있다.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 모로코의 아틀라스산맥과 마주하고 있고, 북쪽으로 프랑스와의 사이에 피레네산맥이 있다. 서유럽의 다른 지역과 풍경이 상당히 다르다. 강수량이 많은 북서부와 피레네산맥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나무 대신 밭과 농장이 있는 편으로 숲이 많은 프랑스, 독일, 영국 등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다. 스페인 남부에 있는 영국령 지브롤터는 겨울에도 평균 13도 정도로 한국의 10월 정도 날씨로 아프리카인 모로코 북부보다 덥다. 자원이 빈약한 곳이다. 반도국가의 특성상 어업도 하고 있지만 생산량이 적은 편이며, 광물도 수은을 제외하고는 풍부하지 않은 편이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금, 은 등도 풍부했다고 하는데 고갈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로마시대에 풍부한 철광석을 바탕으로 톨레도 검이 유명해지기도 했는데 현재는 철광석이 그리 풍부하지는 않다. 이베리아의 국가들을 한데 합쳐서 이베리아 연방이라는 한 나라를 만들자는 주장(Iberismo)도 꾸준히 있어 왔고 국기까지 만들었다. 이러한 이베리아 연방 운동은 생각보다 지지자가 많아서 2010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스페인 사람 31%, 포르투갈 사람 45%가 지지했다. 이베리아반도는 동으로 지중해, 서로 대서양과 맞닿아 있고 대기순환에서 저위도의 열대 기단과 중위도의 온대 기단이 만나는 하강풍 지역과 가까이 위치해 있다. 이 때문에 지역에 따라 세 가지의 기후 유형을 보인다. 이베리아반도의 북부는 대서양의 영향으로 서안 해양성 기후를 보이며 비교적 선선한 여름과 따듯한 겨울로 연교차가 작다. 대표적인 지역으로 빌바오가 있다.[2]
이베리아반도의 원주민은 이베르인이지만, 그 후에 이주한 각 민족과의 혼혈로 오늘날의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이 형성되었다. 알타미라 동굴이 발견됨으로써 구석기시대에 이미 크로마뇽인이 살던 토지였음이 밝혀졌으며, 그라나다 지방의 알메리아 문화 등 거석문화(巨石文化)를 통하여 신석기시대에 관해서도 알려진 바가 많다. 프랑스와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산맥은 중앙부의 아네토산이 최고봉이며, 그 동쪽에 조그만 독립국 안도라가 있다. 자연조건과 역사를 반영하여 이베리아 반도는 대체로 1차산업에 치우쳐 있으며 공업 등의 개발은 뒤떨어진 편이다. 과수·곡물 재배가 농업의 중심이지만, 지중해 연안 등지에는 벼농사 지대가 있다. 대서양 연안에서는 어업과 제염(製鹽)도 행해지고 있으나 생산량은 그리 많지 않다.[3]
이름[편집]
이베리아(그리스어: Ἰβηρία)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 시기에 붙여졌고 그리스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은 이후 로마 역시 이를 차용하여 히베리아(라틴어: Hiberia)라고 불렀다. 로마는 나중에 이 지역을 히스파니아로 부르게 되는데 이는 오늘날 에스파냐(스페인어: España)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베리아라고 부른 곳은 두 곳이다. 하나는 지금의 이베리아반도이고 다른 하나는 동쪽의 이베리아 왕국으로 오늘날 캅카스 지역에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 보다 먼저 지중해를 통해 이베리아반도에 도달한 사람들은 페니키아였다. 그리스인들은 이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이베리아로 향하였고 기원전 5백년 무렵의 지리학자 헤카타이오스가 제일 처음 이베리아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서유럽 지역을 켈트족이 사는 곳이란 의미인 겔티케라고 불러왔다. 이를 피레네산맥을 기준으로 둘로 나눠 갈리아와 이베리아를 처음 구분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이다. 스트라본은 피레네의 "서쪽"을 이베리아로 불렀다. 스트라본은 에브로강에 접한 지역이기에 이베리아라고 부른다고 설명하였다. 고대 로마인들은 초기에 그리스에서 받아들인 이베리아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히베리아, 히스파니아가 혼용되었다. 이는 이베리아라는 이름이 에브로강에서 연원한 것과 관련이 있는데 로마인들은 이 강을 히베루스(라틴어: Hiberus)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는 서고트족을 비롯한 여러 게르만족이 이주하여 자리를 잡았다. 기원후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아미르였던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베리아를 침공하여 정복하였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의 영토가 되었고, 이후 이 지역은 알안달루스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지명인 "이베리아 반도"는 프랑스의 지리학자 장 밥티스트 보리 드 생빈센트가 1823년 《에스파냐 여행 안내서》(프랑스어: Guide du Voyageur en Espagne)에서 이름 붙인 것이다. 그 이전에 이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은 "에스파냐 반도", "피레네 반도" 등이 쓰였다.
역사[편집]
이베리아반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알타미라 동굴에 있는 벽화는 3만년 전에서 1만 3천년 전 사이에 이 동굴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려넣은 것이다. 신석기 시대의 이베리아반도에는 다양한 거석 문화가 있었다. 이 가운데 압인무늬토기 문화는 연안을 따라 지중해 북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기원전 3천년 무렵 이베리아는 동기 시대를 맞았다. 이베리아를 비롯하여 유럽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비커 문화는 구리를 이용한 도구를 제작하였다. 기원전 1800년 무렵 이베리아의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알메리아 근처에 자리 잡고 있던 동기 문화인 로스 밀라레스는 새롭게 들어선 청동기 문화 엘 아르가르에 흡수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초기 청동기 시대 이베리아의 서남단에 국가급 사회조직을 지닌 정착지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이 지역의 중심에서 청동 야금술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청동기 후기에 이르러 이베리아 남서부에 타르테소스 문명이 발전하였다. 페니키아는 이들의 언어가 동남부의 이베리아어와 다르다고 기록하였다. 이베리아 동남부에 살던 사람들은 이베리아인으로 불렸다. 기원전 1천년 무렵부터 중부 유럽에서 켈트족이 이주해왔다. 켈트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고 그 이전에 살던 선주민들은 그와는 다른 어족에 속한다. 켈트족 이후 인도유럽어족의 언어가 이베리아의 대다수 지역에서 쓰이면서 그에 속하지 않는 언어는 서서히 사라져 갔다. 오늘날 이베리아반도에서 인도유럽어족에 속하지 않는 언어로는 바스크어가 유일하다.[4]
고대 로마가 이베리아반도를 속주로 삼기 이전의 시기를 이베리아의 상고 시대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이베리아반도에는 이베리아인과 켈트족이 여러 부족을 이루며 살았다. 페니키아와 고대 그리스의 선박들이 이베리아에 당도한 것도 이 무렵이다. 페니키아인들은 타르테소스와 이베리아반도 남서부의 풍부한 광석을 거래하였고 기원전 1100년 무렵 오늘날 카디스 지역에 무역 거점 항구 식민지인 가디르(또는 가데스)를 세웠다. 기원전 8백년 무렵 페니키아인들은 아시리아 제국의 은을 들여와 광물과 교환하였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카르타고 역시 이베리아 남동부에 무역 거점 항구를 세웠다. 이 도시는 오늘날 카르타헤나가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자 게르만족이 서유럽을 거쳐 이베리아반도로 이주해왔다. 수에비족, 서고트족, 반달족, 알란족 등의 부족들이 이주해왔다. 먼저 이주해 온 수에비족이 수에비 왕국을 세웠으나 이후 이주해 온 서고트족에게 멸망 당하였다. 수에비 왕국을 정복하고 세워진 서고트 왕국은 이후 이베리아반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654년 무렵 서고트 법전을 만드는 등 중세 국가로 발전하였다.
기원후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아미르였던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베리아를 침공하여 정복하였다. 이후 이 지역은 이슬람 세계에서 알안달루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슬람의 지배 속에서 이베리아반도의 주민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물라디가 되거나 기독교 신앙을 유지한 모사라베가 되었다. 모사라베는 이슬람 세계의 비이슬람 교도인 딤미로 취급되어 신앙의 유지는 인정되었으나 세금과 사회적 지위에서 차별을 받았다. 몇 세기에 걸친 이슬람의 지배 아래서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 사이 이베리아반도 주민의 대부분은 무슬림이었다. 이들은 훗날 무어인이라 불리게 된다. 무슬림 사회는 이베리아 토착의 물라디와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아랍인, 베르베르인으로 구성되었다. 포르투갈의 레콩키스타는 1249년에 아폰수 3세가 알가르브(포르투갈어: Algarve, 아랍어: الغرب)를 점령하였을 때 완료되었다. 아폰수 3세는 ‘포르투갈과 알가르브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쓴 최초의 포르투갈 군주였다. 1492년에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에스파냐 연합왕국이 마지막 남은 이슬람 점령지인 그라나다를 정복하여 레콩키스타는 마무리된다. 그라나다를 정복한 에스파냐는 알람브라 칙령을 반포하여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무슬림과 유대인을 추방하였다.
1600년 무렵 이베리아반도는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는 곳 가운데 하나였다. 스페인의 도시 인구는 전체 인구의 약 11.4%이었고, 포르투갈의 경우엔 14.1%에 달했다. 이는 당시 유럽 평균 도시 인구 비중이 7.6%에 불과했다는 점과 크게 대조된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의 도시화와 견줄 수 있는 곳은 여러 도시 국가들이 있었던 이탈리아반도뿐이었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 이베리아반도는 사상 유래 없는 경기후퇴를 경험한다. 문제는 그 동안 이베리아반도의 발전 원동력이었던 아메리카에서 들여오는 은이었다. 1500년대 초부터 아메리카의 은광에서 은을 채굴하여 들여왔던 스페인은 1550년대에 42.6톤을 수입하며 절정을 이루었다. 그 이후 양이 크게 줄기는 하였지만 1600년대에도 여전히 연간 수 톤의 은이 유입되었다. 근세 유럽 국가의 화폐는 은본위제를 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의 공급이 늘자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가격혁명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재정은 몹시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다. 1571년 스페인이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면서 스페인의 재정은 바닥을 보였고 1585년 잉글랜드-스페인 전쟁에서 무적함대를 잃게 되자 결국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유럽의 경제 중심은 영국,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북유럽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1704년 유럽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스페인의 왕위는 부르봉 왕가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는 1931년 스페인 제1공화국 수립까지 왕위를 이었으며 프란시스코 프랑코 시기 이후 다시 현재까지 왕위를 계승하고 있다. 한편, 영국은 이 전쟁에서 지브롤터를 해외 영토로 획득하여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은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황제 즉위 이후 패권국 사이의 전쟁으로 변질되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가 왕위를 놓고 대립하자 나폴레옹이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왕으로 내세우며 왕위 쟁탈전에 개입하였다, 이로서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가 이베리아반도로 넘어오게 되었다. 1812년까지 계속된 반도전쟁으로 이베리아반도는 근대 화력전의 참상을 겪어야 하였다.
1823년 브라질이 독립하자 포르투갈은 정치 경제적 위기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 사이 포르투갈을 떠나 라틴아메리카와 미국으로 향한 이민자의 수는 2백만여 명에 이르렀다. 1910년 혁명이 일어나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경제 상황은 여전히 좋지 못하였고 정치 역시 불안하였다. 이는 결국 1933년 이스타두 노부를 표방하는 군부 독재로 이어졌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독재 체제였던 포르투갈은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을 통해 민주화되었다. 한편 스페인 역시 1873년 스페인 의회의 공화국 선언에 따라 스페인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 정치가 불안하였고 결국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1931년 우파에 대항하여 결성한 범좌파 연합이었던 인민전선의 선거 승리로 스페인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반란으로 스페인 내전이 발생하였고 이후 그가 사망하는 1975년까지 군부 독재가 계속되었다. 군부 독재 이후 스페인은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하여 다시 왕국이 되었다.[5]
지질[편집]
이베리아반도에는 원생누대에 속하는 에디아카라기의 지층부터 현대인 홀로세에 이르는 모든 지질 시대의 지층이 존재한다. 여러 광석이 풍부하여 고대 시대부터 세계적인 광산 체굴이 이루어져 왔다. 예로부터 은, 구리 등이 출토되었고 오늘날에는 유럽의 대표적인 리튬 산지 가운데 하나이다. 이베리아반도의 광석 자원 가운데는 우라늄도 있다. 이베리아반도 남부의 이베리아 피히테 벨트는 타르테소스 시기부터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광석 채굴이 이루어져 왔다. 고생대 초대륙인 로렌시아와 곤드와나에 걸친 조산대였던 이베리아단층대가 있다. 피레네산맥은 이 보다 늦게 조산운동을 시작하여 알프스 조산대와 연결된다.
해안선[편집]
이베리아반도 해안선의 총 길이는 약 3,313km이고, 지중해와 면한 구간이 1,660km, 대서양과 면한 구간이 1,653km이다. 지질학적 시간대에 따라 해안선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여 왔다. 대략 26,500년 전에서 19,000년 전 사이인 마지막 빙기의 극대기에 이베리아반도의 해수면은 지금보다 115 - 120m 정도 낮았다. 지금의 수위가 된 것은 약 4천 년 전 무렵이다. 리스본 동쪽의 해저에는 과거 해수면이 낮았던 시기에는 강이 흘렀을 해저협곡인 나자헤협곡이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퇴적층이 대륙붕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대서양 방면으로는 대륙붕이 발달하지 못하여 해저 경사면이 가파르다. 700km가량 이어지는 대서양 측의 대륙붕의 폭은 좁게는 10km 넓은 곳도 65km 정도이다. 수심 500m 정도인 대륙붕 경계면에서 벗어나면 수심은 바로 1천 m까지 떨어진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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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이베리아반도〉, 《위키백과》
- ↑ 〈이베리아반도〉, 《나무위키》
- ↑ 〈이베리아반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이베리아 반도〉, 《요다위키》
- ↑ "Iberian Peninsula", Wikipedia
참고자료[편집]
- 〈이베리아반도〉, 《위키백과》
- 〈이베리아반도〉, 《나무위키》
- 〈이베리아반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이베리아 반도〉, 《요다위키》
- "Iberian Peninsula", Wikipedia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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