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바스테르섬

위키원
(Basse-Terre에서 넘어옴)
이동: 둘러보기, 검색
과들루프 위성사진
바스테르섬 위치
과들루프 지도

바스테르섬(Basse-Terre)은 소앤틸리스제도에 있는 섬이며 과들루프의 중심 섬 중 서쪽 섬으로 이곳에 과들루프의 주도인 바스테르가 있다. 그랑드테르섬과는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다. 바스테르섬에는 소앤틸리스제도에서 가장 높은 1467m의 수프리에르산이 있다. 수프리에르산은 활동이 활발한 활화산이다.[1]

개요[편집]

바스테르섬은 대서양 카리브해서인도제도에 위치했다. 도미니카에서 북쪽으로 100km, 푸에르토리코에서 남동쪽으로 450km 떨어져 있다. 바스테르섬의 동쪽에 그랑드테르섬이 있고, 두 섬은 마치 나비가 날개를 펼친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바스테르 섬은 길이가 43km, 너비가 24km이다. 화산폭발로 생겼고, 숲이 우거진 산이 많은 섬이다. 주요 강은 고야브강이며 24km로 가장 길다. 해안선을 따라 곳곳에 만(灣)과 해변이 있어서 들쭉날쭉한 모양을 이룬다. 바스테르섬은 수프리에르산(1,484m)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열대림에 둘러싸여 있다. 바스테르 산맥에는 마호가니, 쇠나무 같은 열대림이 울창하며 커피, 카카오, 바닐라 등 작물용 수목림도 매우 많다. 해안에는 홍수림과 야자나무가 많이 자란다. 바스테르 섬의 남부에는 바나나 농장이 많이 몰려 있다. 바세테르는 열대 우림 기후와 열대 몬순 기후 사이의 과도기에 있다. 이 두 가지 기후 유형을 가진 도시와 마찬가지로 바세테르는 일년 내내 비교적 일정한 온도를 특징으로 한다.[2]

역사[편집]

1635년 세인트 네비스의 일부였을 때 탐험대는 과들루프에서 영속적인 존재의 장소를 찾고 있었다. 이 작전은 4명의 선교사들과 550명의 식민지 개척자들과 함께 샤를 리나르 드 올리브(Charles Liénard de l'Olive)와 장 뒤 플레시스 도송빌(Jean du Plessis d'Ossonville)에게 맡겨졌다. 상륙은 1635년 6월 28일 바세테레에서 멀리 떨어진 포인트 알레그르에서 이루어졌다. 1643년 샤를 후엘 뒤 쁘띠 프레(Charles Houël du Petit Pré)는 오베르를 대신하고 1649년 그는 갈리온강의 오른쪽 둑으로 가는 선착장을 떠나 요새를 건설했다. 1680년경 카푸친은 리비에르 오 에르베의 오른쪽 둑에 현재의 과들루프 성당이 위치한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에게 바치는 예배당을 지었고 이 예배 장소 주변에 두 번째 인구 중심이 되었다. 갈리온강으로 두 개의 다른 마을로 분리됐다. 1759년 1월 23일 영국 원정군이 섬을 점령했다. 과들루프는 1763년 2월 10일까지 영국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파리 조약으로 프랑스에 반환되었다. 1794년 5월 파리 전당대회에서 파견된 빅토르 위그는 식민지를 탈환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데 성공했다. 1870년부터 코뮌은 회복되기 시작했고 1899년에 시청을 개관했다. 1913년에는 과들루프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통하는 도시가 되었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 항구가 건설되었고 대로는 항구를 위해 1962년에 건설되었다. 1970년 11월 26일 1분 만에 1.5인치(38.1mm)의 비가 내렸는데, 이는 사상 최대 폭우였다. 1989년 허리케인 휴고와 허리케인 마릴린, 1999년 허리케인 레니, 2008년 허리케인 오마르 등 사이클론적인 상황이 이 도로의 개발을 거듭 파괴했다. 1976년 73,600명의 주민들이 수프리에르 화산의 높은 활동으로 인해 대피하였다.[3][4]

수프리에르산[편집]

수프리에르산(프랑스어: La Grande Soufrière)은 과들루프의 바스테르섬에 있는 화산으로 성층 화산이며 활화산이다. 높이 1,467m로 소앤틸리스 제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이 산은 유황이 매우 많기로 유명하다. 현재 과들루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총면적은 372km²이며 공원 전체가 173km²의 중심지역(Core Area), 162km²의 완충지대(Buffer Zone), 37km²의 해양보존지구(Marine Reserve)의 세 구역으로 구분된다. 1989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 식물군으로, 열대우림과 해안의 숲지대, 해안 앞바다에서 사는 맹그로브(Mangrove)가 각기 독특한 생태계를 보여준다. 과들루프제도 초창기에 무분별하게 벌어진 사냥 때문에 이 지역에 서식하는 동물은 종류나 개체수가 빈약하고 몇 개 종은 멸종되었다.[5]

과들루프[편집]

과들루프(프랑스어: Guadeloupe)는 대서양 카리브해서인도 제도에 있는 프랑스의 해외 레지옹으로 주도는 바스테르이다. 서인도제도의 리워드 제도 일각을 이루는 도서군으로 면적 1,703km², 인구는 375.693명(2021년 기준)이며 크레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유럽인(주로 프랑스인)이나 인도인, 중국인 등이 있다. 언어는 프랑스어와 과들루프 크리올을 사용하고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다수를 차지한다. 주민들의 거의 대부분은 프랑스어를 사용하지만 일부 주민들은 안틸리안 크리올이나 과들루프 크리올을 사용한다. 인구의 약 80%가 로마 가톨릭을 믿고 일부는 개신교나 여호와의 증인 등의 종교를 믿는다. 설탕과 바나나가 경제의 중심이며 관광 산업도 활발하다. 프랑스와 EU에서 엄청난 원조를 하기 때문에 과들루프 경제는 번영하고 있다. 과들루프에는 여러 공항이 있다. 대부분의 국제 항공편은 푸앵타피트르 국제공항에 있다. 주요 항구는 푸엥타피트르 항구나 저지 항구이다. 관광은 과들루프의 주요 수입원중 하나이다. 관광객은 주로 북미에서 오며 주로 유람선을 타고 온다. 과들루프는 카리브해 북서부와 대서양 서부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앤티가 바부다, 영국령 몬트세랫, 남쪽으로는 도미니카 연방과 접한다. 과들루프에서 가장 큰 2개의 섬은 서쪽에 위치한 바스테르섬, 동쪽에 위치한 그랑드테르섬이다. 그 외에 마리갈랑트섬, 라데지라드섬, 일드생트섬과 같은 적은 섬들이 과들루프를 형성한다. 바스테르섬과 그랑드테르섬은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서쪽에 위치한 바스테르섬은 화산 활동의 영향으로 인해 형성된 고지대로서 숲이 많은 편이다. 그랑드테르섬은 석회암 지대를 띠고 있는 저지대로서 백사장이 많은 편이다.[6]

역사[편집]

과들루프는 다른 카리브 섬들과 마찬가지로 4000~5000년 전, 토기 시대 이전에 처음으로 베네수엘라에서 트리니다드를 거쳐 이주해 온 주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뒤를 이어 남아메리카의 오리노코(Orinoco) 강 유역에서 이주해 온 아라와크 족(Arawak)이 거주하면서 담배와 고구마 등을 재배하였으며, 콜럼버스의 발견 당시에는 카리브 인디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카리브 인디언들은 섬을 ‘아름다운 물의 섬’ 이라는 뜻의 ‘Karukera’로 불렀다. 유럽 인 중에서 섬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콜럼버스로, 1493년 자신의 2차 항해 중에 과들루프를 발견하였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발견 당시 잠깐 동안만 상륙했었기 때문에, 과들루프가 하나의 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접한 두 개의 섬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과들루프에는 신대륙에 진출한 목적의 하나인 금이 매장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에도 유럽 인들의 주목을 그다지 받지 못하였다. 오랜 기간 동안 유럽을 왕래하는 선박들이 물과 식량을 공급받는 경유지로만 이용하였다.

콜럼버스의 상륙 이후 처음으로 과들루프에 진출하여 정착한 것은 프랑스인들로, 1635년에 샤를 리에나르(Charles Liènard de l'Olive)와 장 뒤플레시스(Jean DuPlessis d'Ossonville)가 현재의 바스테르 지역을 점유하고 정착지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이질적인 기후와 준비 부족으로 인해 초기 정착지 건설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장 뒤플레시스는 황열병과 기아로 죽음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남은 샤를 리에나르는 원주민인 카리브 인디언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야 했으며, 계속된 전투는 1660년에야 완전히 끝이 났다. 초기 정착자들은 담배와 인디고, 커피 등 여러 농작물을 시험적으로 재배하다가 브라질에서 쫓겨난 네덜란드 인들의 추천으로 사탕수수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게 되었다. 1642년에는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하기 시작하였다. 유럽 대륙에서 7년 전쟁(1756~1763년)이 벌어지는 동안에 영국은 1759년에 과들루프를 점유하고 푸앵트아피트르에 항구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1763년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에 따라 과들루프는 인근의 마르티니크(Martinique)와 함께 프랑스에 반환되었으며, 1775년에 프랑스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1789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혁명 기간은 과들루프의 역사에서도 가장 혼란한 시기였다. 영국은 1794년에 다시 섬을 점유하고 과들루프 내의 프랑스 왕정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기의 국민공회는 빅토르 위그(Victor Hugues)를 파견하여 섬을 되찾도록 하였다. 흑인 민족주의 옹호자였던 위그는 영국으로부터 섬을 되찾고 나서 과들루프의 노예를 해방시키는 조치를 실시하였다. 또한 영국군이 철수한 이후에는 플랜테이션 농장의 소유주이자 영국에 동조한 세력이었던 300명의 왕정주의자를 처단하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1,000명 이상의 주민들이 죽임을 당하는 공포 정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위그가 미국 선박을 공격해 미국이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자, 여기에 불안을 느낀 나폴레옹 1세(Napoléon Ⅰ)가 1802년 과들루프에 앙투안 리슈팡스(Antoine Richepance)를 총독으로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노예제를 복원하게 된다. 노예제 복원 이후에도 혼란은 계속되어 1848년에는 다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노예 해방은 1848년에야 다시 이루어질 수 있었다. 1853년에는 흑인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해 생프랑수아(Saint-François)에 처음으로 인도인 노동자들이 이주하였다. 1946년에 프랑스가 식민지법을 폐지하면서, 과들루프는 소앤틸리스 제도의 생마르탱(St. Martin)과 생바르텔르미(Saint-Barthélemy)를 포함하여 프랑스의 지방 행정 구역인 주(département)가 되었으며, 1983년에는 지방(région)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몇 차례에 걸쳐 분리 독립을 추진하였지만, 섬을 수차례나 찾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설득에 따라 프랑스의 영토로 계속 남게 되었다. 2007년에는 주민 투표를 거쳐 생마르탱과 생바르텔르미가 과들루프에서 분리되어 별도의 프랑스 해외 자치 지역(collectivité d'outre-mer, COM)이 되었다.[7]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바스테르섬〉, 《위키백과》
  2. 정혜린 기자, 〈과들루프, 하늘을 닮은 섬, 바스테르 섬과 그랑드테르 섬...카리브 캐러비안의 보석!〉, 《내외뉴스통신》, 2020-04-26
  3. 바세테레〉, 《요다위키》
  4. "Basse-Terre", Wikipedia
  5. 과들루프국립공원(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6. 과들루프〉, 《위키백과》
  7. 과들루프의 역사(세계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바스테르섬 문서는 세계의 섬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