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트라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신트라(포르투갈어: Sintra)는 포르투갈 리스보아지방 리스보아현에 위치한 도시이다. 면적은 319.23km², 인구는 약 39만 명이다. 신트라에는 무어인이 쌓은 성곽, 포르투갈 왕실의 여름 궁전 등 다양한 연대의 문화재가 많기 때문에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또한 유라시아 대륙 최서단에 위치한 호카곶 관광의 거점이기도 하다. 타고난 자연환경과 인간이 만든 건축물 사이의 향기로운 조화로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1]
개요[편집]
신트라는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서북쪽으로 28km 지점에 있다. 19세기 신트라는 유럽 낭만주의 건축의 첫 번째 중심지가 되었다. 페르디난드 2세(Ferdinand Ⅱ)는 성채 안의 폐허가 된 수도원을 새로운 감각으로 탈바꿈시켰다. 그것은 건축물에는 고딕 양식·이집트 양식·무어 양식·르네상스 양식 등의 요소를 사용하고, 정원은 토종·외래종 수목을 혼합하여 조경하여 창조한 것이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이 '위대한 에덴(the glorious Eden)'이라 표현했으며, 많은 시인과 작가들이 경치의 아름다움을 찬양할 정도로 조용하고 아름다운 고도(古都)이다. 울창하고 깊은 산 속에는 13∼15세기의 왕궁인 신트라성(城), 시가를 내려다 보는 페나성(城), 아름다운 정원인 몬세라테 등이 자리잡고 있다. 신트라성은 흰색 기둥탑 2개가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으며 창문에는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고 분수대, 30m 높이의 부엌 등 볼거리들이 많다. 페나성은 16세기에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이었으나 1839년 페르난도 2세가 개축한 후에는 왕들의 여름철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해발 450m의 산꼭대기에 우뚝 솟아 있는데 이슬람, 르네상스, 마누엘, 고딕 양식 등이 잘 어우러져 있으며 성 외부가 파스텔조의 색채로 칠해져 있다. 전체적으로 성은 장식 타일인 아줄레주가 장식되어 있어 이국적이고 아름답다. 아멜리아 여왕의 방을 비롯한 방은 장식이 독특하며, 회랑과 예배당에는 아직도 수도원의 분위기가 남아있다. 날씨가 좋으면 리스본과 테주강(타호강)이 내려다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으며, 궁전 주위의 페나공원에는 세계 각국에서 가져온 300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1995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매년 여름 도시에 산재한 교회와 궁전, 공원 등에서 큰 규모와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 '신트라 음악 페스티벌'이 펼쳐지고 있어 전 세계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2]
역사[편집]
신트라 지역은 살기 좋은 기후, 비옥한 토양, 타구스(Tagus) 강과 가까운 위치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간이 정착하기 좋은 곳이었다. 초기 신석기(기원전 제5천년기), 신석기-금석(金石)병용 시대 전환기(기원전 제3천년기), 비커 시대(beaker, 기원전 제3천년기~기원전 제2천년기), 청동기시대(기원전 15세기~기원전 6세기) 그리고 철기시대(기원전 4세기~기원전 2세기)에 이르기까지 고고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지역이다. 2세기 중반에 로마가 점령을 시작하고 오리시포(Olisipo, 현재 리스본)는 로마 영방(領邦)의 일부였다. 지역 거주민들은 로마의 생활방식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지금의 신트라 도시 지역에 로마인들이 정착하여 살았다. 또한 고고 유적들은 로마와 비잔틴시대 후반에 신트라 지역과 북아프리카 사이에 무역 거래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신트라 정착지에 대한 최초의 기록에는, 그곳이 무어인 정복 시대부터 리스본에 종속되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다른 문서에는, 그곳이 리스본 이후 그 지역에서 제일 중요한 중심지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을과 그곳에 있는 성은 레콘키스타가 일어나는 동안 여러 번 파괴되었다. 그곳은 1093년 레온(Leon)의 알폰수 6세(Alfonso Ⅵ)에 의해 처음으로 해방되었지만, 2년 후 무어인에게 다시 점령되었다. 1147년에 리스본이 정복된 이후, 신트라는 결국 아폰주 엔히케스(Afonzo Henriques) 왕에게 굴복하고, 7년 후 콘세요(concelho, 군 또는 자치시)로서 선언되었다. 그 선언에 적용되는 영역은 매우 광범위해서 4개의 교구로 나뉘었다. 초기에는 마을에 다양한 인종의 주민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쉽게 잊어버리고 사로이오스(saloios)가 되었다. 사로이오스는 리스본 주변 마을에 사는 혼혈 인종을 뜻한다.
1181년 템플기사단의 탄압 후, 아폰수 엔히케스(Afonso Henriques)는 템플기사단이 소유하던 포르투갈의 토지를 그리스도 기사단에게 넘겼다. 1383년부터 1385년까지 위기상황 동안, 신트라는 주앙(João)에게 마지막으로 항복한 마을 중 하나였다. 그 결과 디니스(Dinis) 왕이 그곳을 강탈해 여왕의 궁전으로 사용하였다. 아폰수는 16세기 후반까지 그곳을 왕실의 여름 별장으로 쓰려고 위풍당당한 왕궁을 세웠다.
15세기 후반의 신트라는 완벽한 왕자(Perfect prince) 주앙의 미망인이며 포르투갈에서 가장 위대한 여왕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레오노르(Leonor)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 도시가 확실하게 왕과 연결된 것은 마누엘 I세(Manuel I)의 보호 아래에 있을 때였다. 그는 왕궁을 대폭 확장했으며, 역사적인 항해에서 귀환하는 바스코 다 가마(Vasco de Gama)를 지켜본 페냐의 성모마리아(Nossa Senhora da Penha)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 뒤를 이은 왕들은 이곳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다. 1640년에 복원된 신트라의 왕궁은 아폰수 6세의 유배지로 전락한 뒤 관리가 소홀해졌다. 1755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기존의 거의 모든 유산이 파괴되었지만, 일부 뛰어난 법원 건물과 군사 건물은 종교 건축물과 고고학적인 표본으로서 남아 있다. 마을 중심에 있는 왕궁은 신트라를 돋보이게 하는 건축적 특징이 있다.
19세기 초반부터 신트라는 포르투갈 상류층을 유치하였고, 유명한 외국인들이 그곳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낭만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페르난두 2세(Fernando Ⅱ)와 부인인 마리아 2세(Maria Ⅱ)가 폐허인 이에로니미테(Hieronymite) 수도원을 훌륭한 궁전으로 바꾸면서 부유한 외국인들이 들르는 곳이 되었다. 그 후 신트라의 예술, 역사적 특징, 주변 경관 등이 제대로 평가받았으며 수십 년 동안 변함없이 보호되었다. 또 지난 10년 동안 그 지역의 역사적 유산을 연구하기 위해 문화 정책이 활발히 전개되었다.[3]
페나궁[편집]
페나궁(Pena Palace)은 포르투갈 리스보아주 신트라 시에 있는 왕궁으로 신트라산맥(Serra de Sintra)의 줄기에 속한 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신트라의 문화경관(Cultural Landscape of Sintra)’에 포함되어 있으며, 포르투갈의 7대 명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페나궁은 1854년에 포르투갈의 여왕인 마리아 2세(Maria II)의 남편이자 공동통치자인 페르난두 2세(Fernando II)가 세웠다. 설계는 독일 출신의 빌헬름 루트비히 폰 에슈베거(Wilhelm Ludwig von Eschwege) 백작이 맡았다. 페나궁이 있는 산꼭대기에는 원래 성모 마리아(Our Lady of Pena)를 기리는 수도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493년 포르투갈의 주앙 2세(João II)는 왕비와 함께 이곳을 순례했고, 그의 뒤를 이은 마누엘 1세(Manuel I)는 수도원을 새롭게 지어서 히에로니무스 수도회(Ordem de São Jerónimo)에 기증했다. 그러나 수도원은 1755년 리스본과 주변 지역을 덮친 대지진으로 일부 시설만 남기고 모두 무너져 폐허가 되었다.
독일의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Haus Sachsen-Coburg und Gotha) 출신인 페르난두 2세는 1836년 마리아 2세와 결혼해 포르투갈의 공동통치자가 된 뒤에 그 수도원의 유적을 왕궁으로 고쳐 세웠다. 왕궁은 1847년에 이미 거의 완성되었지만, 왕과 여왕의 요구에 따라 정원이나 장식 등이 추가되면서 1854년에 완공되었다. 이렇게 세워진 페나궁은 바위절벽 위에 세워진 웅장한 모습을 뽐내고 있을 뿐 아니라, 고딕ㆍ이슬람ㆍ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이국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어서 19세기 낭만주의(Romanticism)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꼽힌다. 1885년 페르난두 2세가 죽은 뒤에 페나궁은 그의 후처인 엘리제 헨슬러(Elise Hensler)의 소유가 되었으나, 1889년 루이스 1세(Luís I de Portugal)가 사들이면서 다시 포르투갈 왕실이 여름 궁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0년 공화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페나궁은 국가 소유의 박물관으로 쓰이게 되었다. 오늘날 페나궁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관광명소 가운데 하나이다. 실내에 전시된 고풍스런 가구와 식기 등은 중세의 포르투갈 왕가와 귀족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4]
지도[편집]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