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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국제시장은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1~4가 일대에 있는 재래시장이다.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7시 30분까지 문을 열며, 첫째 주, 셋째 주 일요일은 쉰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철수하자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1950년 한국 전쟁 이후에 미군 군용 물자와 부산항을 통해 밀수입된 물자들이 유통되어 시장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드넓은 빈터에 쏟아져 나온 갖가지 물자들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있는 대로 싹 쓸어 모아 물건을 흥정하는 도거리 시장이라는 의미도 있고, 도거리로 떼어 흥정한다는 뜻에서 도떼기시장이란 말도 등장하였다. | 부산 국제시장은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1~4가 일대에 있는 재래시장이다.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7시 30분까지 문을 열며, 첫째 주, 셋째 주 일요일은 쉰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철수하자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1950년 한국 전쟁 이후에 미군 군용 물자와 부산항을 통해 밀수입된 물자들이 유통되어 시장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드넓은 빈터에 쏟아져 나온 갖가지 물자들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있는 대로 싹 쓸어 모아 물건을 흥정하는 도거리 시장이라는 의미도 있고, 도거리로 떼어 흥정한다는 뜻에서 도떼기시장이란 말도 등장하였다. | ||
− | 이 시장을 배경으로 한 동명의 | + | 이 시장을 배경으로 한 동명의 영화인 《[[국제시장 (영화)|국제시장]]》이 2014년 12월에 개봉되었다. |
국제시장으로 향하는 도시철도 노선은 1호선 (남포역, 자갈치역)이며 주변의 유명한 곳으로는 용두산 공원과 자갈치 시장 그리고 [[영도대교]]가 있다. | 국제시장으로 향하는 도시철도 노선은 1호선 (남포역, 자갈치역)이며 주변의 유명한 곳으로는 용두산 공원과 자갈치 시장 그리고 [[영도대교]]가 있다. |
2023년 7월 22일 (토) 16:30 기준 최신판
국제시장(國際市場, international market)은 국제간 생산요소 노동, 자본 등이 교환되는 시장으로 세계 주요도시에 위치하고 있다.
개요[편집]
국제시장은 국제적으로 널리 수급되는 상품을 거래하는 장소를 이르는 말로 런던 등이 있다.
국제시장의 세분화는 거시적 세분화와 미시적 세분화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거시적 세분화는 세계 시장에서 어떤 국가 또는 지역을 진입 시장으로 선택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특정 기준에 따라 세계 시장을 여러 하위 시장으로 분할해야 하며, 각 하위 시장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마케팅 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기업은 특정 그룹 또는 여러 국가를 대상 시장으로 선택할 수 있다. 국제시장의 거시적 세분화 표준에는 지리적 표준, 경제적 표준, 문화 표준 및 조합방식이 포함된다.
미시적 세분화는 국내 시장 세분화와 유사하며, 즉 기업이 특정 해외 시장에 진출하기로 결정한 후에도 현지 시장의 고객 요구 사항이 여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중 하나 또는 여러 개의 하위 시장을 타겟 시장으로 선택하기 위해 여러 시장으로 더 세분화해야 합니다.소비재 시장에는 지리적 환경, 인구 조건 및 소비자 심리 구매의 4가지 기준이 있고 공산품 시장에는 지리적 환경, 사용자 상태, 수요 특성 및 구매 행동의 4가지 기준이 있다.
시장에 대한 이해와 마찬가지로 국제시장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데, 이는 국제 제품교환의 장으로 이해될 수 있고, 국제 상품 구매자 또는 구매 그룹의 합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국제 상품 교환에 반영된 경제 관계와 경제 활동 현상의 합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모두 합리성과 적용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국제시장을 국제마케팅의 환경으로 고려할 때 국제시장은 상품경제와 연계되어 있으며 국제시장 주체, 객체, 운반체, 미디어 등 다양한 요소로 구성된 구조적이고 기능적인 유기적 통합의 전체로 간주되어야 한다.
형성조건[편집]
첫 번째는 상대적인 집중적으로 전문 생산에 종사하는 많은 잉여 노동력이다. 원시사회의 수렵 경제시대와 봉건사회의 초기 자급자족 경제 시대에는 많은 잉여 노동력이 있을 수 없으므로 국제시장을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두 번째는 대량 잉여 제품이다. 중국 명나라 중후반에는 수공업의 번영과 자본주의의 싹이 텄고, 도자기 생산을 예로 들면 당시의 전문 생산은 상당한 규모와 숙련도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장적(匠籍)제도 때문에 관요 자체 생산은 불가능했고, 따라서 잉여 생산물도 대량으로 나올 수 없었다.
세 번째는 전 세계 시장에 직접 도달할 수 있는 광범위한 수륙 교통 네트워크를 갖추는 것다. 중국의 비단 생산은 위의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육로와 수로의 두 가지 통로를 갖추고 있지만 아랍 상인의 손에 통제되고 있어 중국의 비단은 자체 국제 시장을 설립할 수 없었다.
유형[편집]
(1) 역사적 논리의 진화와 국제시장 교환 관계의 공간적 범위에 따라 국제시장은 외국 시장, 국제 지역 시장 및 세계 시장의 세 가지로 세분화될 수 있다. 그 중 외국시장은 상품교환의 범위가 국가별 경계를 넘어 특정 외국과의 상품교환관계로 구성된 시장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외국시장은 미국시장, 일본시장 등 국가별 시장을 말하며 국제지역시장은 상품교환관계가 더욱 확대되어 EU, 북미자유무역지역 등 여러 국가 또는 지역으로 구성된 통일시장을 말하며 세계시장은 전 세계의 모든 국가 또는 지역 간에 국제분업을 기반으로 상품을 교환하고 노동력을 교환하며 자원을 배분하는 통일체이다. 지역에 따라 유럽, 북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및 오세아니아 시장으로 나눌 수 있다.
(2) 국가의 유형에 따라 선진 자본주의 국가시장, 개발도상국 시장 및 사회주의 국가시장으로 나눌 수 있다.
(3) 경제 그룹에 따라 유럽 연합 시장, 중앙아메리카 시장, 동남아시아 연합 시장, 서아프리카 국가 경제 공동체 시장 및 아랍 공동 시장으로 나눌 수 있다.
(4) 상품 구성에 따라 공업 완제품 시장, 반제품 시장 및 1차 제품 시장으로 나눌 수 있다. 공업 완제품 시장은 기계 제품 시장, 전자 제품 시장, 섬유 시장 등으로 나눌 수 있다.
(5) 거래 대상에 따라 상품 시장, 노동 시장, 기술 시장, 자본시장, 노동 시장 등으로 나눌 수 있다.
(6) 독점의 정도에 따라 독점 시장, 반독점 시장 및 비독점 시장으로 나눌 수 있다.
특징[편집]
- 국제시장의 지리적 범위 확대는 식민지 범위의 급속한 확장에서 두드러진다.국제시장의 태동 기간 동안 식민지의 범위는 주로 '신대륙'(아메리카), 아프리카 해안 및 동남아시아의 특정 섬으로 제한되었다.국제시장의 형성과 발전 기간 동안 식민지의 범위는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를 포함한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태동기에는 주요 교통로, 항구 및 연안에 식민지의 세력이 집중되었으며 형성 및 개발 기간 동안 식민지 주민들은 내륙과 외딴 지역으로 계속 확장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이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거의 100년 동안 전쟁과 음모를 통해 인도 내 600여 개 공국을 하나씩 정복해 인도를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네덜란드 식민지 개척자들은 16세기 말 인도네시아를 침공한 후 1860년대까지 자와섬, 마루쿠제도, 수마트라섬을 점령하여 인도네시아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커피, 후추, 사탕수수 및 기타 경제 작물 재배 농장으로 만들었다. 통계에 따르면 1750년부터 1759년까지 동인도 회사가 네덜란드로 송금한 평균 금액은 연간 250만 동(盾, 네덜란드의 길더, 인도네시아의 루피, 베트남의 동)에 달했고 1770년부터 1779년까지 400만 동으로 증가했다.
- 중국에서는 1839년 제1차 아편전쟁과 1856년 제2차 아편전쟁을 통해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열강들이 청나라 정부가 일련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하여 부패한 청나라 정부로부터 대량의 전쟁 배상금과 일방적인 최혜국 대우를 연속적으로 빼앗았다. 영국만 해도 제1차 아편전쟁에서 불평등한 난징조약을 통해 2,100만량 은의 전쟁배상금을 받고 중국의 영토인 홍콩을 강점하여 청나라 정부가 광저우, 푸저우, 샤먼, 닝보를 개방하도록 강요하고 상하이의 5곳을 통상항구로 삼고 조계, 협정관세권, 영사재판권과 일방적인 최혜국 대우를 받았다.
- 아프리카에서는 18세기 중반부터 1860년대까지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피비린내 나는 노예무역을 계속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안에서 아프리카 본토로 지속적으로 침투했다. 북부 아프리카에서 이집트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으며 나일 삼각주는 영국의 면화 생산 지역이 되었다. 1834년 프랑스군은 알제리를 점령하고 '프랑스령'으로 선포하여 프랑스의 포도원과 채소밭으로 만들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네덜란드와 영국이 케이프타운 식민지에 대한 경쟁을 벌였고,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 네덜란드 식민지에 의해 반세기 동안 운영된 이 식민지는 영국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지역 원주민에 대한 학살, 추방 및 노예화 정책을 채택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 니제르강 삼각주는 영국, 프랑스 팜유 및 목화 농장이 되었다. 동부 아프리카에서 유럽 식민지 개척자들은 잔혹한 노예 매매에 계속 종사하여 19세기 전반에 전성기에 이르렀다. 모잠비크에서 아메리카로 운송되는 노예는 19세기 초에 연간 15,000명, 1930년대에서 1940년대에 25,000명에 달했다. 아프리카 대륙은 매우 넓기 때문에 유럽 식민지 개척자들은 그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이를 위해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탐험을 거듭했다. 통계에 따르면 1791년부터 1850년까지 60년 동안 서구의 아프리카 탐험은 24회, 1851년부터 1860년까지 10년 동안 27회로 증가했으며 1861년부터 1870년까지 10년 동안 29회에 달해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침략하려는 욕구가 커졌다.
- 북미에서는 18세기 중반에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캐나다 식민지의 지배권을 빼앗았고, 이곳의 공산품 판매와 원료 약탈을 강화하기 위해 영국 식민지는 운하 건설과 철도 건설을 강화했으며 지역 어업, 목재, 모피 무역 및 밀 재배와 같은 식민지 경제가 빠르게 발전했다. 오세아니아에서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영국이 호주의 광활한 대륙으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호주 식민지가 죄수에서 자유 이민 쪽으로 발전했다. 1820년대 산업혁명의 첫 번째 산업인 섬유 산업에서 양모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여 호주 양 사육 산업의 급속한 발전을 촉진했다. 1820년부터 1850년까지 호주의 양모 수출 가치는 200만 파운드에서 4000만 파운드로 급증했으며 영국의 양모 수입 중 호주 양모가 절반을 차지했다. 호주의 양이 급격히 증가했을 때 지역 원주민의 수는 급격히 감소했다. 1804년 태즈메이니아 섬의 토착민은 3000~7000명으로 추정되었지만 1830년에는 약 300명만 남았다. 뉴질랜드에서 1840년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은 다른 자본주의 열강들을 몰아내고 이 풍요로운 땅을 독점하여 영국의 공업 원료와 식량 공급 기지로 만들었다.
- 국제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의 수량이 확대되었다. 국제시장의 태동기에 거래되는 상품은 주로 서유럽의 수공업품, 식민지의 노예, 귀금속(금, 은), 향신료이며 국제시장의 형성과 발전기에는 피비린내 나는 노예무역이 계속 지속되는 것 외에도 주로 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 국가산업혁명의 요구에 중점을 두고 식민지에 공산품을 수출하고 종주국에 광석, 양모, 면화 및 밀, 커피, 포도 등의 농산물을 수입합니다.동시에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및 기타 서구 열강은 식민지의 장기 점령과 심층 약탈을 강화하기 위해 기계 및 장비의 보조 출처와 자본 수출을 강화했다.
- 국제시장 약탈에 종사하는 국가의 수가 확대되었다. 국제시장의 태동기에는 주로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및 기타 국가가 국제시장 약탈에 참여했으며 국제시장의 형성 및 발전기에는 오래된 국가 외에도 신흥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러시아 등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자본주의 열강 중 영국은 산업혁명을 완수했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국제시장 쟁탈에서 독점적인 위치에 있게 되었다. 동시에 미국, 프랑스, 독일 등 후발 주자들이 지속적으로 따라오고 있으며 국제시장 경쟁은 점점 더 심화되는 모순과 이익 패턴의 재분배를 내포하고 있었다.
발전역사[편집]
세계 무역센터와 국제 분업의 형성. 186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영국은 '세계의 공장'일 뿐만 아니라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다. 한편으로 영국은 세계 각국의 공산품 공급자가 되었고 석탄, 철, 기계 및 장비에 대한 수출이 지속적으로 증가했으며 이 기간 동안 미국과 유럽 대륙의 산업 혁명은 영국에서 수입된 산업 기술 및 장비에 의존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각국은 다양한 정도로 영국의 공업 원료와 곡물, 커피 및 기타 식품의 공급처가 되었다. 면방직 산업을 예로 들면 영국의 면방직 수출액은 1819년 1821년 전체 생산액의 66.6%를 차지했고, 1829년 1831년 67.4%로 증가했으며, 1844년 1846년에는 71.4%로 높아졌으며, 영국 방직 산업이 국제시장에서 정점에 도달했을 때 공급은 국제시장의 면직물 총량의 45%를 차지했다. 면화는 미국 남부, 이집트, 인도, 브라질 및 서인도 제도를 포함한 전 세계에서 생산되었다. 세계 무역의 독점적 지위에 발맞춰 영국은 동시에 해상 운송의 지배적인 위치를 확립했으며 영국의 상선 톤수는 1850년 360만 톤에 육박하여 세계 상선 총 톤수의 47%를 차지했으며 1870년에는 569만 톤에 도달하여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및 기타 국가의 상선 톤수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세계 산업, 무역 및 해상 운송의 절대적인 우위에 힘입어 영국의 주요 은행은 전 세계의 무역 대출 사업에 종사했다. 19세기 중반에 런던은 국제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고, 파운드는 세계 각국의 무역 결제의 주요 지불 수단이자 외환 보유고 역할을 하는 세계 화폐가 되었다. 영국의 은행가들은 마르크스가 묘사한 것처럼 자본 수출을 통해 세계 최대의 채권자가 되었다.
세계 각지의 부의 원천이 끊임없이 영국으로 유입되었을 때, 세계 각국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기계 생산을 특징으로 하는 국제 분업의 구도에 다양한 정도로 휘말렸다. 당시 영국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영국 중심의 국제 분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했다: "실질적으로 세계의 5분의 1은 우리의 자발적인 공여자, 북미 대평원과 러시아는 우리의 곡물 재배원, 시카고와 오데사는 우리의 곡물 창고, 캐나다와 발트해 연안의 여러 나라는 우리의 숲이다. 우리 양떼의 목장은 호주에 있다. 페루는 우리에게 은을 제공하고 캘리포니아와 호주는 우리에게 자신의 금을 제공하고 인도는 차와 향신료를 제공한다."
금본위제도[편집]
국제 무역 기구의 정규화, 대형화, 전문화와 금본위제도(金本位制, 순금 1온스=391.20달러(1993년)라는 식으로 통화의 가치를 금의 가치에 연계시키는 화폐 제도로, 19세기에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되었다.)의 초보적인 설립
19세기 이후 국제무역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그에 따라 상품거래소의 수도 계속 증가하여 곡물, 면화, 광사 등의 벌크상품이 거의 모두 상품거래소에서 거래되고 동시에 종합상품거래소가 단일상품거래소로 지속적으로 전환되어 점점 더 전문화되고 정규화되었다. 1848년 시카고에 최초의 곡물 거래소가 생겼고, 1862년 런던에 비철금속 거래소와 뉴올리언스에 면화 거래소가 설립되었다. 동시에 콜카타의 황마, 싱가포르의 주석 및 고무와 같은 일부 거래소가 식민지의 원료 생산 지역에 등장했다. 이러한 거래소에서 샘플 또는 바우처가 계약되는 방식은 현장에서 물건을 보는 전통적인 방식을 대체했다. 당시 런던, 뉴욕, 파리, 취리히, 프랑크푸르트 등지에 규모가 큰 증권거래소가 생기기도 했다. 동시에 보험 회사, 용선 회사 및 환적 회사와 같은 무역 서비스 조직도 등장했다. 위에서 언급한 무역 기구의 변화는 국제 시장의 발전 과정을 크게 촉진했다.
금본위제도의 초기 확립은 국제시장의 안정과 확대에 도움이 되었다. 초기의 세계 화폐는 금과 은을 병용한 것으로 복본위제도(复本位制)라고 한다. 영국은 1816년에 금본위제도로 가장 먼저 전환했고 포르투갈, 독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스페인 및 기타 국가도 차례로 금본위제도로 전환했다. 금본위제도의 확립은 국제시장 발전의 중요한 상징이며 국제 지불과 국제 결제를 크게 촉진하고 국제 시장을 점점 더 완벽하게 만들었다.
부산 국제시장[편집]
부산 국제시장은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1~4가 일대에 있는 재래시장이다.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7시 30분까지 문을 열며, 첫째 주, 셋째 주 일요일은 쉰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철수하자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1950년 한국 전쟁 이후에 미군 군용 물자와 부산항을 통해 밀수입된 물자들이 유통되어 시장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드넓은 빈터에 쏟아져 나온 갖가지 물자들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있는 대로 싹 쓸어 모아 물건을 흥정하는 도거리 시장이라는 의미도 있고, 도거리로 떼어 흥정한다는 뜻에서 도떼기시장이란 말도 등장하였다.
이 시장을 배경으로 한 동명의 영화인 《국제시장》이 2014년 12월에 개봉되었다.
국제시장으로 향하는 도시철도 노선은 1호선 (남포역, 자갈치역)이며 주변의 유명한 곳으로는 용두산 공원과 자갈치 시장 그리고 영도대교가 있다.
참고자료[편집]
- 〈国际市场(商品交换的空间)〉, 《百度百科》
- 〈국제시장〉, 《위키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