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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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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시청

나주시(羅州市)는 대한민국 전라남도 중서부에 있는 시이다. 시의 중심으로 영산강이 흐르며, 나주평야가 펼쳐진다. 혁신도시 사업에 따라 빛가람동 일대에 한국전력공사, 한국농어촌공사,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등이 이전되었다. 인근에 무안광주고속도로가 지난다. [1]

개요

나주시는 동경 126°30′~ 126°54′, 북위 34°58′~ 35°04′에 위치하고 있다. 전남평야의 중심지로서 예로부터 벼농사의 중심지이며 과수 농업과 원예농업도 활발하다. 북동쪽으로 광주광역시, 북서쪽에 함평군, 남서쪽에 무안군, 남쪽에 영암군, 동쪽에는 화순군과 인접해 있다. 면적은 608.32㎢이고 인구는 2023년 6월 기준 117,098명이다. 시청 소재지는 송월동이고, 행정구역은 1 12 7동이다.

나주지역을 중심으로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국도 1호선의 도로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철도·항공 등의 접근성도 매우 편리한 지역으로 10여 개의 시·군과 교통이 원활한 곳이다. 광주광역시와 가까운 도시인 이유로 광주권에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광주광역시의 위성도시로도 인식된다. 삼한갑족 중 하나라는 반남 박씨의 본관이 되는 곳이다.[2][3]

자연환경

남동부에 용제산(龍帝山, 323m)·덕룡산(德龍山, 376m) 등이 있고, 북서부에 옥산(玉山, 334m)·금성산(錦城山, 450m)·신걸산(信傑山, 368m) 등이 있다. 높이 약 400m 내외의 이들 산지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20∼50m의 구릉지와 10m 이하의 평야이다.

구릉지는 과수원으로 개발되었으며 나주평야는 전라남도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특히, 지석천 연안에 남평들과 산포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남평읍 소재지에서 화순군 능주 사이를 흐르는 지석천은 일명 드들강이라고도 부른다. 이 부분은 길이가 4km이며, 유역에 발달된 남평 평야와 화순 평야 등의 주요 미곡 산지를 관개한다.

시의 북동쪽에서 황룡강(黃龍江)과 극락강(極樂江)이 남류 하다가 다시 지석강(砥石江)과 합류하는데, 이 지석강의 지류를 막아 건설한 나주 댐이 영산강 유역의 넓은 나주평야를 관개하고 있다. 이 댐은 작물 성장에 알맞은 온도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수면에서 3m 이내의 표면 수만을 취수할 수 있는 특수 취수탑과, 물의 효율적 관리와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유량조절장치를 설치한 국내 최대의 관개용수 댐이다. 댐에 의해 조성된 호수에는 붕어·잉어·뱀장어·날치 등 담수어족이 많아 낚시터로도 각광받고 있다.

영산강은 시의 중앙을 북동에서 남서로 흐르면서 시를 양분하고 있다. 영산강 하류는 너비가 좁은 관계로 낮은 지대는 상습 수해 지역이 되고 있다. 이들 하천 유역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와 낮은 구릉지대가 발달되고 땅이 기름져 예로부터 농경이 발달하였다.

영산강의 지류인 문평천 유역과 이 하천이 합류한 영산강 북안에 다시평야가 발달해 있다. 이 평야는 크게 나주 평야의 일부라 할 수 있으며, 총면적은 1,400ha에 이른다. 문평천을 가로막아 만든 백룡제라는 저수지가 관개용수로 이용되며, 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것이 이 평야의 특색이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하나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은 13.8℃이며, 1월 평균기온 1.1℃, 8월 평균기온 28℃이다. 연 강수량은 1,491㎜로 하절기인 6·7·8·9월에 70∼80% 이상이 내린다. 서리는 11월 초순부터 내려 이듬해 4월 초순에 끝난다.[4]

역사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일부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유물은 보산동을 비롯해 남평읍·세지면·다도면·다시면·문평면·왕곡면 등 거의 시 전 지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군과 그 아래에서 출토된 간돌검·돌도끼·돌창류가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인문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마한의 54소국 중 임소반국(臨素半國)과 신운신국(臣雲新國)이 나주·광주의 접계지역에, 불미지국(不彌支國)이 반남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이 시대의 유적으로는 반남면 대안리·흥덕리·신촌리 일대와 다시면 회진마을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 독무덤의 존재들이 주목된다. 독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 등은 이 지역에 일찍부터 비교적 강대한 정치권력체가 존재했음을 말해 준다.

백제시대에는 발라군(發羅郡)·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미동부리현(未冬富利縣) 등의 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설치한 대방주의 6현 가운데 죽군현(竹軍縣) 등 4현이 나주지역에 위치했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이 대방주는 6년 만에 폐지되었다.

신라는 686년(신문왕 6)에 발라군을 통의군(通義郡)으로 고치고, 757년(경덕왕 16)에는 통의군을 금산군(錦山郡, 혹은 錦城郡)으로, 반나부리현은 반남현(潘南縣)으로, 미동부리현은 현웅현(玄雄縣)으로 개칭하였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뒤에는 한때 후백제의 영역에 속했다가 왕건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이때 이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에 적극 협력하여 고려 건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

940년(태조 23)에 금산군을 나주로 개칭하였고,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나주목이 되어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이로써 종래 전라도 남부의 수부였던 광주(무주)를 대신해 계수관(界首官)으로 등장,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996년(성종 15)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라 하여 해양도에 속하게 되었다. 1011년(현종 2)에 거란의 침공을 피해 왕이 잠시 피란을 와서 10여 일을 머물다가 환도한 일이 있었다. 1018년에 다시 목(牧)이 되어 이후 조선 말기까지 거의 변화 없이 남부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 무안·남평·담양·낙안·곡성의 5군을 속군으로 거느렸는데, 여기에 현웅현이 남평으로 고쳐져 예속되었다. 또, 철야·회진·반남·안로·복룡·원율·여황·창평·장산·진원·화순의 11현이 속현으로 예속되었다. 이 속군·현들은 1172년(명종 2) 이후 점차 독립하거나 다른 지방에 이속되는 등의 변동이 있었다. 1270년(원종 11)에는 삼별초군에 의해 공략받기도 하였다. 1310년(충선왕 2)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목으로서 전라도 남부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1457년(세조 2)에는 진관체제에 따라 거진(巨鎭)이 설치되었으며, 목사가 병마첨사를 겸하였다.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사건으로 인해 많은 선비들이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그 후로도 선비들 상호간의 대립과 갈등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 때는 김천일(金千鎰)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1645년(인조 23)에 향리가 목사를 구타한 강상지변(綱常之變)이 일어나 금성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4년(효종 5)에 다시 복구되었다. 그 후로도 현종 때와 영조 때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1755년(영조 31)에는 임금을 비난하는 벽보가 관아 앞에 내걸리는 사건이 발생해 또 많은 선비들이 처형당하였다. 『경세유표』에는 조선 후기 나주목의 토지결수가 2만 8000결로 전국 제일이라 하였다.

1895년에 관제개혁으로 나주군으로 개칭되었다. 다음해 새로운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져 13도제가 시행되고 각 도에 관찰사가 파견되는 체제로 바뀜에 따라, 광주가 새로이 전라남도의 관찰부가 되었다. 이로써 나주는 오랫동안 누려왔던 전라도의 중심도시 구실을 광주에 양보하게 되었다. 동시에 영역의 축소도 이루어져 오산면은 광주로, 대화면은 장성으로, 금마·원정·비음·종남면은 영암으로, 삼향면은 무안으로, 적량·장본·여황면 지역은 함평으로 각기 이관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그 동안 별도로 존속해 왔던 남평군을 없애 남평면으로 하고 그 예하에 있던 여러 면들을 합병하면서 함평에 이속했던 적량·장본·여황면 지역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조선시대에 비하면 훨씬 축소된 영역을 갖게 되었다. 1927년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고, 1929년에는 나주면과 나신면이 합쳐져 나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에는 나주읍으로 승격하였다.

한편, 영산면·왕곡면·세지면 등은 이 시기에 이른바 궁삼면(宮三面)이라 불렸다. 1888년의 대흉년으로 인해 많은 농민이 떠돌게 되자 악덕 관리가 토지를 불법으로 빼앗아 엄상궁(嚴尙宮)의 소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일제강점기에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소유권 주장, 소작료 징수 등의 탄압과 횡포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에 맞서 싸우는 궁삼면토지분쟁을 계속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경제적 수탈에 저항한 사례로서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1949년에 삼도면·본량면·평동면이 광산군으로 이속되었다. 1973년부터 다도면 일대에 나주 댐 공사가 시작되어 1976년에 완공되었다. 1981년 7월 1일에는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하여 금성시라 하고 나주군에서 분리, 승격하였다. 1986년 1월 1일에 금성시를 다시 나주시라 개칭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의해 나주시와 나주군이 새로운 나주시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1일에 남평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96년 2월 10일 삼도동 일부가 금천면에 편입되었다. 1998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1개 읍 12개 면 6개 동으로 편제되었다.

1998년 과소동 통폐합에 따라 5개 동을 축소 조정하여 1 12 6동으로 개편되었다. 2014년 산포면과 금천면에 걸쳐있는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의 법정동을 빛가람동으로 지정하였으며, 2020년 현재 납평읍 및 12면 41동의 행정구역을 이룬다.

산업

전형적인 농촌 도시이지만, 나주가 시까지 성장하기까지는 조선 시대의 해상 운송로의 중요 항구였던 영산 포항의 존재가 크게 기여했다. 영산 포항이 어느 정도였냐면,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내륙의 항구였지만 등대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후 영산강하굿둑의 건설로 그 기능은 소멸 되었으며, 덤으로 이 하구둑은 영산강의 수질 악화와 나주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것에 크게 기여하여 주민들에게는 까임의 대상이다. 광주-나주-목포로 이어지는 영산강 유역의 지역민들은 하구둑으로 인한 강의 오염을 실시간으로 봐온 사람들이다. 대다수의 이곳 사람들은 하구둑을 만들려는 타 지역 사람들에게 왜 만드냐고 반문할 정도다.

과거 내륙 항구 영산포로 들어오던 삭힌 홍어는 하구언에 막혀 배가 못 들어오니 목포, 흑산도에서 냉동 차량으로 들여와서 지역 주민들이 먹을 정도만 옛날식으로 만들고, 삭혀서 냉장 택배로 서울 등 다른 지역에 보내 파는 정도, 말 그대로 명맥만 남게 되었다. 이 외의 산업 시설은 LG화학 나주공장 하나뿐이었으나 2005년 7월,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가 공동으로 혁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합의하였고, 그해 11월 장성군·담양군과의 경합 끝에 나주시가 혁신도시 유치에 성공했다. 그 결과로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빛가람 혁신도시)가 조성되었고 한국전력공사, 한국농어촌공사, 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 한국농촌경제연구원,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한국콘텐츠진흥원 등이 입주하였다. 사실상 쇠퇴한 도시가 부흥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일 듯. 그리고 혁신도시가 들어오면서 나주시의 인구는 증가 추세이고, 나주 혁신 산업단지에 에너지 특구를 조성하면서 전기 산업을 발달시킬 예정이다.

구시가지신시가지가 그대로 나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2023년 6월 기준 빛가람동 인구가 39,459명, 빛가람동을 제외한 나주 시내 동 지역 인구가 29,849명으로, 이미 나주 구시가지의 인구를 넘어선 지는 오래고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 만 명에 가까워지고 있다. 혁신도시 조성 초기인 2015년경부터 나주 구시가지와 혁신도시는 서로 이질감이 심한 분위기를 이어 왔다. 보이는 것 부터가 1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혁신도시는 도시같아 보이는데 건너편은 영락없이 농촌 및 시골 읍내로 보인다. 성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도 잘 모르는 외지인에게 설명하는 것이 아닌 이상 자신을 혁신도시에서 왔다고 설명하지, 나주에서 왔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나주시에서 구도심 재생개발계획안을 내놓았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동부 생활권인 남평읍, 산포·금천면, 빛가람동은 쾌적한 정주환경과 에너지 클러스터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게 될 것이며 서부 생활권인 동강·공산·왕곡·반남면은 마한 역사문화와 기업혁신지구로 집중 육성된다. 남부 생활권인 세지·봉황·다도면은 스포츠 헬스투어 중심의 관광농업지구로, 북부 생활권인 문평·다시·노안면은 역사문화관광과 스포츠마케팅 지구로 지정해 역사와 스포츠를 집중적으로 육성한다. 중부 생활권인 이창·송월·영산·영강·금남·성북동은 중심지원 기능과 역사 도시 재생지구로 지정해 집중 육성된다. 혁신경제, 역사문화, 생태도시 조성 등 6대 분야에 세계 최대 에너지 밸리 구축, 고대역사문화 관광자원, 나주읍성내 전통한옥마을 조성 등 33개 중점사업을 추진할 계획도 있다고 한다.

나주의 주요 특산물로는 영산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에서 재배된 쌀과 재배기록이 가장 긴 나주배가 대표적이며, 그 이외의 특산물로는 영산포 인근에서 판매되는 홍어가 있다.

교통

호남선 철도와 광주~목포 간 고속화 국도가 나주 시가지를 거쳐 서쪽으로 달리고, 국도·지방도의 도로망이 나주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다. 작은 기선이 소항하여 조기·멸치·소금·젓갈 등의 화물수송에 큰 몫을 담당했던 영산강 수운은 현대식 도로 교통 발달과 영산강 하구언 건설로 쇠퇴하였다.

호남선 나주역을 비롯하여 도로 교통의 발달로 영산포의 항구 기능은 잃었으나, 광주·목포 간의 국도 제1호선, 무안 광주 고속도로(나주 IC, 문평 IC)를 비롯한 간선 도로에 의해 광주·목포·영암 등지로 연결되는 육로의 요지를 이루고, 따라서 전라남도 지방 서부 평야 지대의 교통 요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관광

나주시는 호남의 고도(古都)로서 목사골로도 불리며, 자연 관광자원보다는 문화관광자원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동문 밖 석당간, 북문 밖 삼층석탑, 나주향교 대성전, 철천리의 칠불 석상과 석불입상, 반남면의 고분군·사마교비·정수루·미천서원 등이 있다.

명소로는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과 영산포 가야산 기슭에 깎아지른 듯이 서 있는 절벽이 영산강의 푸른 물과 장관을 이루는 앙암(仰巖)바위, 그 부근에 있는 창랑정(滄浪亭) 등이 대표적이다. 영산강 하구에 있는 다시면의 구진포(九津浦)는 영산강의 명물인 장어로 유명하다.

금성산 계곡은 맑은 물이 흐르고 단풍나무 등 많은 나무들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우며, 녹차와 난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산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광주의 무등산과 남쪽으로 영암의 월출산이 바라보이고, 도도히 흐르는 영산강의 푸른 물과 확 트인 나주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기슭에는 다보사(多寶寺)를 비롯해 심향사·태평사 등의 유서 깊은 사찰과 암자가 있다.

국민 관광지로 지정된 나주호는 그 주위 경관이 뛰어나다. 주변에 다양한 야생 동물과 식물의 서식군락지가 있어서 휴양지로 적합하다. 나주호를 둘러싸고 불회사와 운흥사 등의 사찰과 문화재가 있어서 문화유적 답사지로 새롭게 각광 받고 있다.

1980년 국민 관광지로 지정된 영산강 상류의 지석강에는 아름다운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있고, 팔각정과 1950∼1960년 된 울창한 송림, 맑고 깨끗한 물이 어우러져 수려한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전라남도 지방의 유일한 민물욕수장 유원지로 여름철에는 많은 피서객이 찾는다.

이 밖에 나주의 특산물인 배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배와 관련된 재배역사와 민속자료를 보여주는 나주배박물관이 개관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배의 재배단지인 금천면 석전리에 위치하며, 하얀색의 배꽃이 눈부시게 만발할 때면 장관을 이룬다.

나주는 영산강에서 어획된 물고기로 만든 어팔진미(魚八珍味: 조금물 또랑 참게, 몽탄강 숭어, 영산강 뱅어, 구진포 웅어, 황룡강 잉어와 자라, 수문리 장어, 복바위 복어)와 남새(채소)로 만든 소팔 진미(蔬八珍味: 동문안 미나리, 신월 마늘, 흥룡동 두부, 사마교 녹두묵, 전왕면이 생강, 솔개 참기름, 보광골 열무, 보리 마당 겨우살이)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나주의 토속음식으로는 원래 서민들이 즐기던 국밥이 ‘나주곰탕’이라 하여 새롭게 명성을 얻고 있다. 나주는 학술문화유적, 자연 휴양지을 비롯한 관광자원을 두루 갖추고 있다. 지석강과 나주호를 중심으로 한 나주 일원에는 야영장·숙박기관·음식점 등 각종 편의시설과 위락시설이 정비되어 있다.

문화행사 및 축제

문화행사로는 시의 주최로 매년 10월에 열리는 나주배축제와 매년 4월 배꽃 개화기에 맞춰 열리는 배꽃 전국 사진 촬영대회가 유명하다. 나주시문화원은 나주 향토예술문화행사를 주관하면서 지역 향토문화의 보존·발전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1981년 시로 승격되면서 10월 1일을 시민의 날로 정하여 매년 전통문화의 발굴과 각종 문예활동 및 각종 경기·경연대회를 개최하여 시의 발전과 시민의 단합을 위해 힘쓰고 있다. 또 1998년 4월에는 송월동에 문화예술회관이 건립되어 연극·음악·미술·국악 등 예술 각 분야의 전시 및 공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도

동영상

각주

  1. 나주시〉, 《위키백과》
  2. 나주시〉, 《네이버 지식백과》
  3. 나주시〉, 《나무위키》
  4. 나주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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