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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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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政權)은 일국의 군주가 행사하는 권력의 시대 또는 일국의 군주가 행사하는 정치적 권력을 의미한다. 부가(斧柯)라고도 한다. 현재는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으므로 특정 정당이 여당이 되었을 경우 그 당이 행사하는 권력도 정권이라 할 수 있다.[1]

개요[편집]

정권은 한 나라의 통치기구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정치권력이다. 따라서 정치권력이나 국가권력과 같이 추상적 개념도 아니고, 집행권이나 행정권과 같은 법적 개념도 아닌, 구체적이고 정치적인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의회와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정부를 구성하여 정치를 실제적으로 운용하는 권력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정부는 통치기구의 전체라는 광의의 정부가 아니고 집행권(행정부, 즉 내각이나 대통령)에 한정된다.

이 경우 정당정치가 전제가 되므로 자유당정권·공화당정권 하는 식으로도 불린다. 그래서 정권을 담당·획득·교체한다고 표현하며, 쟁탈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정부를 조직하는 정당의 수에 따라서 단독정권·연립정권이라는 구별도 하게 된다.

이데올로기나 정치방식의 면에서 파시즘정권·소비에트정권·독재정권·민주정권 등으로도 불리며, 정권담당자의 소재지·개인명 등에서 베이징[北京]정권·케네디정권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2]

무신정권[편집]

무신정권은 1170년부터 1270년 사이에 무신 세력에 의해 주도된 고려 왕조의 정권이다. 무신 세력은 삼별초 등 사병집단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정방·교정별감 등의 기구를 설치하여 전횡을 일삼고 독재정치를 행하였다. 무신정권기에 불법적 토지 강점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농민과 천민 등 하부계층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민란 발생과 더불어 신분질서의 동요가 일어났다. 무신정권 집권 후반부 40년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이던 시기이다. 팔만대장경 제조 등으로 강렬한 민족주체의식이 발휘되었고 이는 후대의 배원정책으로 이어졌다.

설립배경

무신정권의 성립은 1170년(명종 원년) 정중부(鄭仲夫) 등에 의한 무신정변에서 비롯되었다. 무신정변의 원인은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고려 전기 사회가 문벌 귀족들에 의한 문신 중심의 정치가 행해져 상대적으로 무신들에 대한 차별 대우가 있었다는 점이다. 제도적으로도 무반은 정3품직인 상장군(上將軍)을 최고 관직으로 했고, 2품 이상인 재상(宰相) 직에는 올라갈 수 없었다. 따라서 재상은 문신이 독점하게 되었으며,

일반 하층 군인들의 불만도 무신정변의 원인의 하나였다. 이들은 전시에는 물론 평상시에도 공역(工役)에 동원되었으며, 심지어는 군인전(軍人田)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였다.

셋째, 무신들에 대한 외면적인 멸시와 천대에도 불구하고, 무신들의 실제적인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도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다. 이와 더불어 비대해진 문신 세력과 국왕 간의 권력에 대한 갈등과 마찰이 정변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도 지적되고 있다. 즉 국왕 의종이 자신의 신변 보호의 주축이었던 견룡군(牽龍軍)을 이용하여 문신 세력을 처단했다는 친위 쿠테타적인 성격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여러 요소들은 문신 중심의 정치를 구현해왔던 고려 전기 사회를 붕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고려사회는 무신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무신들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정권이 성립되었다.[3]

각주[편집]

  1.  〈정권〉 《위키백과》
  2.  〈정권〉 《두산백과》
  3.  〈무신정권 (武臣政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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