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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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운하(영어: Suez Canal, 이집트 아랍어: قناة السويس)는 지중해와 홍해를 수에즈 지협을 통해 잇는 이집트의 운하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구분하는 운하이다. 수에즈운하는 1869년에 완공되어 파나마운하와 더불어 전 세계 해운업과 해양사에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경계 역할도 수행한다.[1]
개요[편집]
수에즈운하는 지중해와 홍해를 통해 북대서양과 인도양을 잇는 수로로, 아프리카를 우회하지 않고 유럽과 아시아를 해상으로 연결한다. 운하는 북쪽의 포트사이드와 남쪽의 수에즈 인근을 잇는다. 건설 당시의 운하는 길이 164km, 깊이 8m였지만, 몇 번의 확장 공사를 받아 현재는 길이 193.30km, 깊이 24m, 폭 205m가 되었다. 2020년에는 18,500 척 이상의 선박이 운하를 이용했다. 수에즈운하는 편도 방향으로 운영되며 선박의 엇갈림은 그레이트비터호 등 4곳에서 가능하다. 운하에는 갑문이 없기 때문에 해수가 자유롭게 흘러간다. 일반적으로 그레이트비터호 북쪽 운하의 물은 겨울에는 북쪽으로, 여름에는 남쪽으로 흐르며, 호수 남쪽의 물은 수에즈의 조수에 따라 흐름 방향이 바뀐다. 운하는 이집트 정부의 소유지만, 1956년 7월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국유화하기 전까지는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주주가 운하를 운영하는 기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1956년 10월의 수에즈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협약에 따라 "전시에서도 평시에도 통상 또는 전시의 모든 선박이 깃발의 구분없이" 사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에즈 운하는 군사전략적 역할을 해 왔다. 지중해와 홍해에 해안선이 있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특히 수에즈 운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2014년 8월, 이집트 정부는 수에즈운하 통과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발라바이패스 35km를 확장하는 공사에 착수했다. 이 확장 공사는 수에즈운하의 용량을 하루 49척에서 97척으로 늘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비용은 594억 이집트 파운드(90억 달러)로, 이집트 법인 및 개인에게만 발행된 투자 증명서로 자금을 조달했다. 확장된 신 수에즈운하는 2015년 8월 6일 개통했다.[2][3]
용량[편집]
수에즈운하는 배수량(군함) 15만 톤의 선박도 지나갈 수 있다. 선박의 흘수(선박의 바닥에서 물이 잠긴 수면까지 수직 길이)가 20m까지 허용되며, 만적 상태의 24만 톤 수퍼탱커도 통과할 수 있다. 어떤 수퍼탱커는 너무 커서, 초과 적재량은 따로 내려 운하 소유의 보트에 실어서 따로 보냈다가, 배가 운하를 지나면 다시 싣기도 하였다. 2018년에 파나마 운하와 수에즈 운하 모두 확장공사를 통해 니미츠급 항공모함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폭을 갖추었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는 2016년 확장공사 완료 전까지 운하 폭이 33m밖에 안 되어 통행 가능한 선박의 규격 제한이 있었던 반면 수에즈 운하는 그 전부터 갑문이 없고 폭이 상당히 넓어 규격이 다소 느슨하였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선박의 규격은 수에즈맥스(Suezmax)라고 하는데 길이는 400m, 수면 위 높이 68m, 단면적 1,006m²(흘수선 20.1m-선체폭 50m 또는 흘수선 12.1m-선체폭 77.5m)로 넉넉한 수준이다. 이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박은 물론 항공모함도 통행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배가 수에즈맥스 이하인 것은 아니라 화물 적재량이 30만 톤을 넘어가는 초대형 유조선이나 흘수선이 깊은 대형 광석운반선은 통행이 불가능하다. 화물을 적재할 수 있는 최대 중량 톤수는 약 16만 DWT 정도에 해당한다. 또 수에즈운하 양안을 잇는 수에즈 운하교가 2001년에 개통되어 운하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통과 높이 제한이 새로 설정되었다. 이 다리는 수에즈운하를 건너는 유일한 다리로, 나머지 도로는 수에즈 운하 양안에서 끊겨 있고 끊긴 구간은 차를 실을 수 있는 페리선이 운하를 횡단한다. 수에즈 근처에는 하저 터널로 건너는 구간도 있다.
우회로[편집]
수에즈 운하 대신 다른 길로 우회하려면 주로 아프리카의 아굴라스 곶으로 돌아간다. 이 항로는 수에즈 운하로 다닐 수 없을만큼 큰 선박이 이용하며,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기 전에는 선박들이 우회로인 아굴라스 곶으로 다녔다. 최근 소말리아 해적이 창궐하면서 안전상의 이유로 아굴라스 곶 항로를 이용하기도 한다. 1869년에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 두 대륙을 오가는 상품을 배에서 내려 지중해와 홍해 사이 육로로 운반하기도 했다. 하루에 운하를 지나갈 수 있는 선박 수는 106척이다.
운영[편집]
수에즈운하는 평탄한 지형 때문에 갑문이 없으며, 운하 양 끝 두 바다 사이의 해수면 차이도 미미하다. 평소에 운하에 세 척의 호송선이 순찰한다. 두 척은 남행이고 한 척은 북행이다. 첫 번째 남행 호송선은 매일 아침 시간에 운하로 진입해서 그레이트 비터 호수로 가는데, 여기서 길을 막지 않도록 통행 항로를 벗어나 정박하며 북행 호송선이 통과하길 기다린다. 북행 호송선은 엘 칸타라 인근 우회로에 정박한 두 번째 남행 호송선을 지나간다. 운하를 통과하는 속도는 8노트(15 km/h)로 11~16시간 정도 걸린다. 느린 속도로 움직여 운하 양안이 배가 일으키는 파동으로 침식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1955년에 대략 유럽의 석유 2/3이 이 운하를 통과했다. 현재 세계 해상 무역량의 7.5%는 이 운하를 통해 이동한다. 2008년 21,415척이 통과하였고, 통과료 수입이 총 $53.81억이었다. 이는 이집트의 2008년 GDP $4,525억의 1.2%에 해당한다. 1척당 평균 통과비용은 대략 $250,000이었다. 수에즈운하는 중립지대로서 이집트가 관리만 할 뿐 주권이 미치진 않고 수에즈운하에 대한 임의적인 조치는 할 수 없다.
고대의 운하[편집]
오늘날 존재하는 수에즈 운하가 최초는 아니다. 이미 고대 이집트 제26왕조 네카우 2세(네코 2세, 재위 : BCE 610 - BCE 595)는 지중해-홍해를 잇는 운하 건설을 최초로 시도하여 완성을 눈앞에 두었다. 그러나 신탁에서 운하가 완성되면 적들이 유리하게 이용하리라고 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하고 중지되었다. 당시 무려 14만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19세기에 만들어진 수에즈 운하와는 달리 나일강 삼각주의 제일 동쪽 끝에 흐르는 한 지류와 홍해를 연결했다. 네카우는 두 척의 배가 동시에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넓게 판 운하로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해 양쪽 바다의 함대를 통합 운영하려 했다. 역사상 수에즈 운하의 건설 작업은 여러 차례 시도됐으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 (재위 : BCE 550 - BCE 486년 경)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 드디어 완성돼 이집트와 페르시아 간 항해가 용이해졌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이집트를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마 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2세기 초의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초기 이슬람 시대에도 운하가 재 개통됐지만 그때마다 침니(沈泥) 현상이 일어나 물길이 다시 막혔다.
아바스 왕조 2대 칼리파 알 만수르 치세이던 767년, 그의 삼촌 압달라의 반란 방어과정에서 이 고대 운하는 완전히 막혀버렸으며, 오늘날 수에즈 운하를 팔 때 작업자들의 식수 공급과 물자 수송을 위한 운하(Sweet Water Canal: 가장 위의 지도의 서쪽에서 팀사호수로 연결된 수로)를 뚫을 당시에 이 고대 운하의 잔해들을 활용했다고 한다. 이후 15~16세기에 운하를 다시 개통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에까지 다다르자 포르투갈이 향신료 무역을 독점할까 우려하여 베네치아 공화국이 나섰지만, 맘루크 왕조와 협상이 벌어지는 단계에서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무위로 그쳤다. 그리고 1565~1579년까지 오스만의 재상을 지낸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다시 개통하려 했지만 계획 단계에서 불발됐다. 루이 14세나 나폴레옹도 운하 개설 조사를 했지만 포기했다.
건설[편집]
오늘날 존재하는 현대적인 운하의 역사는 1805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가 오스만령 이집트의 대총독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시작했다. 메흐메트 알리는 이집트의 맘루크 세력을 숙청하고 군 활동의 재량권을 얻은 뒤 서방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며 근대화를 추진하여 군사력을 길러 1841년 사실상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이에 메흐메트 알리와 우호 관계를 맺은 프랑스가 주도하여 운하 개통을 위한 주식을 공매하였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페르디낭 M. 레셉스(Ferdinand M. Lesseps)인데, 프랑스 외교관으로서 이집트에 파견된 차에 메흐메트 알리 및 그 아들과 친분 관계를 쌓았다. 메흐메트 알리 사후 그 아들 사이드 파샤가 이집트의 새 지도자가 되자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여, 이집트 법인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에 운하의 운영권을 양도하고 99년간 운영 후 운영권을 이집트에 양도하기로 합의하였다. 문제는 자금 조달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땅을 파내는 난공사이므로 당연히 자금도 많이 소모되었다. 수에즈 운하회사는 주식 총 40만 주를 발행하여 매각해 자금을 조달하고자 했지만, 이른바 큰 손들이 움직이지 않았던것이다.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나폴레옹 3세도 프랑스 정부 자금으로 주식을 매입하지는 않았고, 40만 주 중 20만 7,000주에 달하는 프랑스 측 지분은 모두 프랑스 국내 개인 투자자들에게 나뉘어서 매각되었다. 기타 나머지 주식들은 운하에 관심이 있을 법한 주요 강대국 정부에 분할매각을 추진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이들이 거부한 이유는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은 감히 프랑스가 영국의 세계지배를 위협할 수 있는 수에즈운하를 건설하는 것을 가만 보지 않았다. 이집트 정부와 사이드 파샤에 대한 직접적 압력은 물론이고, 형식적으로 이집트의 지배자인 오스만 제국을 통해서도 압력을 넣었으며 수에즈 회사의 주식구입 권유도 단칼에 거절하고 다른 나라들이 해당 주식을 사는 것도 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당대 최강 대영제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러시아, 미국, 오스트리아 등 다른 나라들이 수에즈 회사 주식 구입을 포기하면서 최종적으로 17만 주에 달하는 주식을 이집트 정부가 덤터기를 쓰게 되었다. 그렇게 주식판매 및 자금 조달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영국의 방해는 끝나지 않았다. 영국은 수에즈 인근 사막 부족들에게 반란을 부추긴다거나, 수에즈운하에 투입된 노동자들이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있다며 사실상의 노예노동이라고 비난하는 방법으로 건설을 방해했다. 결국 협상 끝에 수에즈 법인이 이집트 회사이며 이집트 소유이고 프랑스 정부에는 어떠한 권리가 없다는 최종 합의가 이뤄진 끝에 공사 시작 10년 만인 1869년 11월 17일 수에즈운하가 개통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려 9,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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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수에즈 운하〉, 《위키백과》
- 〈수에즈 운하〉, 《나무위키》
- 〈수에즈 운하(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레반트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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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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