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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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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란토
오트란토 위치

오트란토(Otranto)는 이탈리아 레체현의 코무네이자 도시이다. 이탈리아반도의 동부 해안에 위치해 있다. 이 도시의 이름으로 인해 부여된 오트란토 해협아드리아해이오니아해를 연결하며, 이탈리아를 알바니아와 구분시킨다. 면적은 77.2km², 인구는 약 6,000명이다.[1]

개요[편집]

오트란토는 이탈리아 남동부의 풀리아주에 있는 도시로 장화 모양 이탈리아 반도의 뒤축 끝부분에 있다. 남동쪽으로 5km 떨어진 파로 델라 팔라스카 등대는 이탈리아 최동단에 위치한다. 레체에서 남동쪽으로 약 35㎞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이탈리아 최동단의 항구도시로 오트란토해협을 사이에 두고 알바니아와 마주보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히드루스에서 비롯되어 로마의 통치하에서는 히드룬툼이라고 불렸다. 현재 알바니아 지역인 아폴로니아와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여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은 지역이었다. 8세기에 베네벤토 공작 아레치스 2세의 사유지였다. 오트란토는 11세기까지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며 그리스 문화권에 속했다. 1068년 노르만 왕국의 로버트 기스카르에게 항복하기 전까지 비잔티움(동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480년 정복자 메흐메트는 오스만 함대를 보내 이곳을 침공했고 도시는 2주 만에 포위되었다. 약 800여 명의 시민들이 이슬람 개종을 거부하다 참수당했다. 오트란토는 20세기 중엽부터 수중익선 페리호가 하절기에 코르푸게지 운항을 개시함으로써 그리스와의 해상교통이 재개되었다. 대주교관구이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요한 보급기지였다. 희생자들은 2013년 프란체스코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노르만 시대에 건축이 시작돼 12세기 완성된 오트란토 대성당은 오스만 침입 당시 대학살의 현장이었다. 이곳으로 피난한 성직자와 시민들은 몰살되었고, 13세기 이전 프레스코화는 모두 파괴되었다. 도시 남쪽의 보크사이트호수는 알루미늄이 함유된 광물인 보크사이트를 채굴하기 위한 채석장이었다. 1976년 채굴비용의 증가로 채산성이 맞지 않아 폐광되었다. 이곳에 물이 스며들어 작은 연못을 형성했고, 주변지역은 수생식물이 풍부한 습지가 되었다. 이탈리아 동쪽 교두보인 오트란토시는 수 세기 동안 쌓아온 방어체계와 요새를 보유하고 있다. 이슬람의 대학살 이후 칼라브리아 공작 아라곤의 알폰소가 오트란토성을 재건했으며 포대 시설을 추가해 성의 구조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 요새는 영국작가 호레이스 월폴이 쓴 최초의 고딕소설 '오트란토성'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지중해성 기후를 나타내며, 연평균 최고기온 8월 20.8°C, 최저기온 1월 12.7°C, 강우량은 972.2mm이다. 부근에서는 올리브, 포도, 무화과, 채소 등이 재배된다.[2][3][4]

오트란토 전투[편집]

오트란토 전투(Battle of Otranto)는 1480년과 1481년 이탈리아 남부의 아풀리아오트란토 도시와 요새를 둘러싸고 벌어진 전투로 오스만 제국과 나폴리 왕국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1480년 7월 28일, 70~200척의 오스만 함대가 이탈리아의 아풀리아 지방(현재 풀리아주)에 있던 오트란토 도시 부근에 도착했다. 이들 군대는 로도스섬 공방전에서 돌아오던 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7월 29일 수비병과 도시주민은 오트란토성의 성채에 퇴각했으나, 이 성채에는 대포가 하나도 없었다. 8월 11일 성채의 성벽은 대포에 의해 파괴되고 수비병은 살해되었다.

남성 주민을 모아 노예로 만들려는 약탈이 벌어졌다. 스테파노 아그리코리 대주교는 대성당에서 살해되고, 스테파노 펜디네리 주교와 수비대의 지휘관 프란체스코 라르고 백작은 산 채로 쇠톱에 의해 절단되었다. 8월 12일 이슬람교로 개종하기를 거부한 800명의 시민이 미네르바의 언덕(지금은 순교의 언덕이라고 부른다)에서 참수되고, 대성당은 마굿간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알바니아로 노예로 보내진 시민도 있다. 8월 중 70척의 함대가 비에스테를 공격하고, 9월 12일 유럽에서도 풍부한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이었던 성 니콜라오 디 카스올레 수도원 이 파괴되었다. 1480년 10월 레체, 타란토, 브린디시가 공격받았다.

군량 부족 때문에 게디크 아흐메드 파샤는 오트란토를 지키는 800명의 보병과 500명의 기병을 남기고 남은 군대를 이끌고 알바니아로 철수했다. 겨울을 보낸 후에 돌아온다는 계산하에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으로부터 어느덧 28년이 지났기 때문에 로마가 같은 운명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생겨, 로마 교황과 로마 시민을 도시에서 피난시키려는 계획이 세워졌다. 로마 교황 식스토 4세는 십자군 소집을 다시 호소했고, 몇몇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와 헝가리, 프랑스가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그러나 1479년 오스만 제국과 깊은 평화조약을 체결한 베네치아 공화국은 응하지 않았다. 1481년 페르디난도 1세에 의해 그의 아들인 알폰소 2세가 이끄는 군대가 일어났다. 군대 중에 하나는 헝가리왕 마티야스 코르비누스에게서 제공받은 것도 있다.

도시는 1481년 5월 1일부터 포위되었는데 5월 3일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가 서거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이 오트란토에 증원을 보내는 것이 곤란해졌고, 1481년 8월 23일 첫 번째, 9월 10일 2번째로 벌어진 2번의 공격에 도시는 탈환되었다. 2번의 공격을 거치면서 도시는 파괴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수비대는 살해되었다. 시민의 숫자는 20,000명에서 8,000명으로 감소했다. 다시 공격해 올것이라는 공포때문에 8,000명 중에 많은 숫자가 도시를 버렸다. 오늘날 800명의 순교자의 유골과 시체는 오트란토 대성당과 나폴리의 포르미에로 산타 카타리나 교회에 납골되어 있다.[5]

오트란토 해협 전투[편집]

오트란토 해협 전투(영어: Battle of the Strait of Otranto, 프랑스어: Bataille du détroit d'Otrante, 이탈리아어: Battaglia del Canale d'Otranto)는 1917년 5월 14일부터 이틀간 오트란토 해협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왕국의 연합국 해군 간에 일어난 전투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이 영국 해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둔 몇 안 되는 전투이다.

동맹국은 협상국에 비해 열세인 해군력을 극복하기 위해 주력함끼리의 직접적인 정면 충돌은 피하고 잠수함을 활용하여 연합국 함대를 괴롭히는 방식으로 피해를 강요하고 있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마찬가지였는데 전쟁 초반에는 비슷한 적수였던 이탈리아 해군을 상대로 안코나 포격을 비롯해 여러 작전들을 수행하였지만 이내 프랑스, 영국의 해군까지 합세했고 1917년부터는 일본미국까지 지중해에 해군을 파견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은 항구와 만으로 숨어들어 협상국 함대와의 숨바꼭질이나 하고 있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협상국 입장에서도 아드리아해에 진입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을 완전 박멸하기에는 갈리폴리 전투로 인해 흑해와 지중해의 해군전력이 분산되어 버렸기에 무리가 있었다.

이에 협상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해군을 고사시키기 위해 아드리아 해와 지중해를 잇는 오트란토 해협에 구축함과 트롤선을 이용해서 봉쇄선을 구축하였다. 협상국은 50여척의 구축함과 트롤선을 투입하여 대잠수함 그물망과 기뢰들을 부설했고 20여 척씩 2개의 부대로 나누어 밤낮으로 순찰을 돌며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함선 및 잠수함이 발견될때 마다 공격을 가했다. 물론 오트란토 해협이 넓었던 만큼 잠수함의 이동이 전혀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였지만 해가 갈수록 오트란토 해협 봉쇄선이 점점 견고해지는 데다가 잠수함이 부상하거나 잠망경이 관측되는 즉시 연합군의 폭뢰 공격이 이어져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활동에 큰 제약을 걸었다.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오트란토 해협 봉쇄선을 해체하기 위해 아껴 두었던 수상함 전력을 동원했고 연합군 역시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함대를 투입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중 아드리아해에서 벌어진 해전 중 가장 큰 규모의 해전이 발생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공격에 협상국은 이들이 작전을 마치고 후퇴할 때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영국 해군의 타운급 방호순양함 다트머스와 브리스톨 2척, 이탈리아 해군의 로솔리노 필로급 구축함 5척이 합세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하였고 인근 해역을 초계 중이던 이탈리아 해군의 미라벨로급 구축함 1척과 프랑스 해군의 구축함 3척도 전투에 참여하였다. 양측은 북쪽을 향해 항해하면서 포격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고 9시 28분 영국 해군 경순양함 다트머스의 함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함대의 선두에 있던 노바라를 직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다트머스와 브리스톨의 함포사거리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타트라급보다 길었으므로 이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호르티 미클로시는 양측 함대간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 소구경 함포를 사용하여 연막을 형성하면서 협상국 함대를 향해 천천히 접근하였다. 한편 협상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이 해전을 회피하고 빠르게 탈출할 것으로 예상하여 이들을 추격하기 위해 오히려 오스트리아-헝가리 함대로 다가가는 오판을 하였다. 협상국의 포격이 오스트리아-헝가리 함대의 선두인 노바라에게 집중면서 큰 피해를 입혔지만 덕분에 나머지 함대들은 큰 피해 없이 협상국 함대에 접근할 수 있었고 이후 쌍방의 포격전이 이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경순양함 1척이 대파되었지만 오트란토 봉쇄선을 성공적으로 파괴하고 협상국의 함대도 격퇴하면서 오랜만에 해전에서의 승리를 거두었다. 협상국은 양적, 질적에서 배 이상 우세하였지만 결과적으로 경순양함 1척 대파, 구축함 3척 침몰의 피해를 입었고 오트란토 봉쇄선을 파괴하고 철수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을 무사히 보내줄 수 밖에 없었다. 이 해전의 결과로 오트란토 봉쇄선이 파괴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이 다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아드리아 해 연안에서의 협상국의 해상봉쇄를 풀어낼 수 있었지만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기에는 무리였으며 전쟁에는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6]

지도[편집]

아드리아해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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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오트란토〉, 《위키백과》
  2. 오트란토〉, 《요다위키》
  3. 오트란토(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4. 오트란토(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5. 오트란토 전투〉, 《위키백과》
  6. 오트란토 해협 해전〉,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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