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산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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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산군도(舟山群島, zhōu shān qún dǎo)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양쯔강(揚子江) 하구 동중국해에 있는 군도이다. 139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로 저우산 섬(舟山島)이 가장 크다. 섬은 대부분 돌로 이루어진 불모지이다. 지명은 군도의 모습을 본 따 붙여졌는데 '바다에 정박하고 있는 배의 모습'이라는 의미이다.[1]
개요
저우산군도는 중국 저장성 동부, 상하이에서 동남쪽으로 120km, 닝보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져 있다. 저우산군도는 동경 121°30′~123°25′, 북위 29°32′~31°04′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동서 길이는 182km,남북으로 169km이다. 군도의 해역 면적은 22000km², 육지 면적은 1371km²이며 면적이 1km² 이상인 섬이 58개가 있으며 총면적의 96.9%를 차지한다. 중국 연해지대에 최대의 군도이며 군도 주변은 중국 제일의 어장으로 수산자원이 풍부하다. 저우산군도의 행정중심지는 가장 큰 섬인 저우산섬에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저우산시이고 자체 공항도 갖고 있다. 저우산도는 수심이 깊고 해안에 굴곡이 많아 큰 배를 대기에 적합하다. 창강이나 첸탕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역은 수심이 얕고 퇴적이 많은 것에 비하면 항구로서는 상당히 유리한 입지였다. 특히 저우산도의 동쪽 바다는 쿠로시오 해류가 한반도와 일본을 향해 북으로 흐르는 길목이었다. 전통시대의 항해는 바람과 해류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쿠로시오 해류를 탈 수 있는 길목이라는 것은 아주 유리한 입지였다. 대양의 항해에서는 해류를 바다의 고속도로라고 하는바 저우산도는 고속도로 출입구에 자리를 잡은 셈이다. 저우산섬(해안선 길이 85km) 다음으로 가장 큰 섬은 다이산섬이다. 행정구역은 딩하이, 다이산, 푸퉈의 3개의 현(縣)으로 이루어지며, 최북단에 있는 성쓰열도와 함께 저우산전구(專區)를 형성한다. 군도 주변은 중국 제일의 어장의 하나이며 조기, 갈치, 오징어, 게, 식용 해파리, 상어, 병어 등의 수산자원이 풍부하다. 딩하이에는 어업생산지휘부가 있고, 푸퉈현의 선자먼(沈家門)은 중국 최대의 어업시장으로 알려져 있다. 다이산현의 가오팅전(高亭鎭)에는 근대화된 수산가공공장과 제빙(製氷)공장이 있다. 딩하이는 군도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며, 닝보와의 사이에 정기여객선이 운항한다. 다이산섬은 주된 소금 생산지며, 저우산섬 동쪽에 있는 푸퉈산섬은 중국 4대 불교 성지의 하나로 꼽힌다.[2]
역사
고대에는 닝보(영파)에서 바다와 합류하는 용강(甬江) 하구 동쪽에 있다 하여 용동(甬東), 혹은 바다 한 가운데에 있다 하여 해중주(海中洲)라 불렸다. 진한 대에부터는 닝보에 설치된 회계군 구장현(句章縣)에 속하였다. 동진 시기 손은의 반란 시에 그 거점 중 하나였다. 당나라 대인 738년에 처음으로 경내 옹산에서 비롯된 옹산현(翁山縣)을 설치하였다. 명주(明州)에 속하였고, 5리의 성벽이 세워졌다. 다만 771년 보승(寶勝) 연호와 함께 칭제한 원조(袁晁)의 반란으로 폐현되었고, 다시 구장현 관할이 되었다. 당대에 주산 군도는 관음 신앙의 중심이 되었고, 출항을 앞둔 선원들이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였다. 9세기 중반 일본 임제종의 창시자인 승려 혜악(慧鍔)이 신라초에서 배가 걸리자 관음 보살께 기도를 올려 구조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송나라 시기 해상 실크로드가 활성화되며 거점으로써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왕안석의 건의로 재차 현을 두며 '국가를 번창하게 한다'는 뜻인 창국현(昌國縣)이라 명명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류황 (六橫島) 태평묘에는 왕안석 조각상이 있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 역시 주산 군도를 거쳐 한반도로 향하였다. 원대인 1278년에는 원나라의 일본 원정의 준비를 위해 조선소가 설치되며 창국주(昌國州)로 승격되었다. 2년 후 현으로 돌아갔으나 1290년 재차 창국주가 되었다. 1319년 원 조정의 허가 하에 강소 지방을 유람한 고려 충선왕이 이제현을 대동하고 이곳의 보타산을 찾아 글을 지었다. 이때 중국의 화공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이제현의 초상은 국보 110호이다.
명나라 수립 후 1369년 다시 창국현으로 격하되었고 1379년 성벽을 복구하였다. 다만 1386년 왜구에 대응한 해금정책의 일환으로 현이 폐지되어 일창국향(一昌國鄉)으로 격하되어 영파의 정해현(定海縣)에 속했다. 1387년에는 공도정책으로 섬 주민들을 내륙으로 소개시켰다. 빈 섬은 절강 상인들과 포르투갈 인들의 상관이 세워졌다. 그러던 1548년 절강순무 주환 (朱紈)이 병력을 파견해 불도섬(佛渡岛) 상서항(双屿港)의 포르투갈 성채를 공격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돌과 나무로 항구를 막고 성을 불태우자 수백의 포르투갈 인들은 모두 죽거나 해상 도피하였다. 1554년 왜구가 성을 점령하고 약탈하며 재차 쇠퇴하였다. 1651년 청나라 군대가 섬을 점령, 성벽을 허물었다.
청대에도 이어지던 해금 정책은 1683년 강희제가 동녕 왕국을 멸하고 대만을 정복한 후 풀렸다. 이로써 주산 군도의 인구는 증가하였고, 1687년 6월 재차 현이 설치되었다. 청조는 본래 영파에 있던 정해현(定海縣)이라 명명하였고, 기존 정해현은 전해현으로 개칭되었다. 18세기 들어 영국이 홍모관(紅毛館)이란 상관을 세워 무역 거점으로 삼기도 하였다. 다만 1760년 청조가 모든 대외 무역을 광저우의 공행으로 일원화시키자 철수하였고, 그후 청나라의 군사 기지가 되었다. 1793년 매카트니 사절단의 요구 사항 중 하나는 저우산의 요새화되지 않은 섬에 유럽인의 왕래와 거주, 정박, 창고 설립을 허가해달라는 것이었다. 홍콩이 한적한 어촌일 무렵 저우산은 이미 16세기부터 열강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요구가 거절됨으로써 촉발된 1840-42년 제1차 아편전쟁 시에는 포격전 끝에 영국군이 청나라 측의 포대를 파괴하고 정해현을 두 차례 점령, 아문관(衙門管)을 두어 다스렸다. 난징 조약에 따라 영국군은 1846년 'Chusan'으로 일컫던 정해현에서 철수하였다. 영국 정부는 이미 중요한 항구였던 저우산을 두고 '집 한채 없는 황량한 섬'인 홍콩을 할양받은 것에 격분했다. 그후 청조는 정해직예청(定海直隸厅)을 설치하여 해안 수비를 강화하였고, 흠차대신 유겸(裕謙)의 주청에 따라 정해도두(定海道頭)라 불리는 토성을 쌓고 포대를 설치하였다. 그럼에도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당시 영국군에게 다시 점령당하였다. 1862년 2월에는 태평천국의 장수 왕의균이 섬을 점령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전사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군이 섬을 장악, 현으로 복귀하였다. 중일전쟁 당시 일대는 일본군에게 우선적으로 점령되었다.
1942년 10월 영국인 포로를 운반하던 일본 선박 리스본 마루를 미국 잠수함 (USS Grouper)이 어뢰로 공격하여 저우산군도의 동부인 칭방 섬(青浜岛)에서 격침시켰다. 승선 인원 대부분이 익사하였고, 주변 어부들이 384명의 영국인 포로를 구출하였다. 중화민국기인 1946년 북쪽의 성쓰열도(嵊泗列岛)가 따로 장쑤성의 열도직할구로 분리되었고, 1949년 현이 되었다.
한편 국공내전에서 수도 난징이 함락되고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이후에도 저우산은 여전히 제해권을 장악한 국민당군 수중에 있었다. 대륙 회복의 주요 거점으로서 저우산 군도를 고평가한 장제스는 1949년 10월 저우산을 친히 방문하여 주둔군을 9만으로 증강, 장강 하류 일대를 봉쇄하였고 1950년 초 다이산섬(垈山島)에 공군 비행장이 완공되자 저우산에서 이륙한 국민당군 공군기들이 난징, 상하이, 항저우 일대를 폭격, 특히 상하이의 산업시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인민해방군은 눈엣가시와도 같은 저우산 점령을 결의하고 1949년 10월 초 저우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서 다셰섬(大榭島), 진탕섬(金塘島), 타오화섬(桃花島), 류헝섬(六橫島) 등 여러 섬을 점령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11월 초 저우산 본섬 공략에 필요한 거점인 덩부섬(登步島) 점령에 실패하여 저우산의 완전 점령까지는 나아가지 못 했다.
그러나 타이완 다음으로 국민당의 가장 큰 거점이던 하이난이 함락되고 인민해방군이 당시 최신형 제트전투기인 MiG-15까지 도입하면서 국민당군이 저우산을 방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인 장강 하류 일대의 제해권과 제공권이 위협받자 타이완 우선 정책의 일환으로 장제스는 1950년 5월 저우산의 주둔군 철수를 지시하였다. 5월 13일부터 16일까지 저우산에 주둔하던 12만 명의 국민당군과 2만 명의 주민들은 야음을 틈타 인민해방군의 눈을 피해 타이완으로 철수했고 5월 17일 인민해방군은 드디어 저우산을 접수하였다. 이후 닝보시에 소속되었던 군도는 1953년 저우산 전구로 편성되었다. 1960년 닝보에 이어 상하이의 관할에 놓였지만 1962년 다시 전구가 되었고, 1967년 지구로 편성되었다.[3]
푸퉈산 풍경명승구
푸퉈산 풍경명승구(普陀山风景名胜区)는 저장성(浙江省) 저우산시(舟山市, 주산시) 푸퉈구(普陀区, 보타구)에 있는 4대 불교명산(四大佛教名山)의 하나인 푸퉈산(普陀山, 보타산)을 중심으로 한 면적 41.85㎢의 국가급풍경명승구(1차, 1982)이다. 푸퉈산(普陀山)은 우타이산(五台山, 산서 五台县), 어메이산(峨嵋山, 쓰촨 峨眉山市), 주화산(九华山, 안후이 青阳县)과 함께 사대 불교명산 중의 하나로 항저우만(杭州湾)에서 약 100해리 떨어진 저우산군도(舟山群岛, 주산군도)의 저우산시(舟山市, 주산시)에 소재하며 경내 면적은 12.5㎢, 높이는 284m이다.
사대 불교명산 중 유일하게 해상에 있는 불교성지로 해천불국(海天佛国)이라는 명성을 지니고 있으며 관음보살도량(观音菩萨道场)으로 5대(五代) 시기에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观音院)이 건립된 이후 대대로 사원을 건립하여 20여 개의 사찰이 있으며 그 중 대표적인 사원은 보제선사(普济禅寺), 법우선사(法雨禅寺), 혜제선사(慧济禅寺)의 3개 사찰은 남방에서의 초기 사묘(寺庙) 건축군의 전형이다. 2007.5 국가 66개 5A급여유경구(旅游景区)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푸퉈산(普陀山)은 사방이 바다와 섬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섬에는 천보사(千步沙), 박보사(百步沙) 백사장 및 조음동(潮音洞), 법음동(梵音洞) 남천문(南天门), 서천문(西天门) 등 명승지 20여 개소가 있다.
전설상 남인도에 있다는 관세음보살의 영지(靈地) 보타락(補陀落:범어로 Potalaka)의 명칭을 딴 것으로, 당(唐)나라 때 어떤 승려가 우타이산에서 관음상(觀音像)을 가지고 오는데 배가 이 곳에 이르자 저절로 멎은 채 움직이지 않으므로 바오퉈사(寶陀寺)를 세우고 불상을 모신 것이 성지가 된 시초라 한다. 티베트의 라싸와 더불어 중국에서는 관음시현(觀音示顯)의 땅으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일반적 신앙 외에 예로부터 항해의 안전을 비는 의식도 많이 행해졌다.[4]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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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저우산군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舟山群岛(中国第一大群岛)〉, 《百度百科》
- ↑ 〈저우산시〉, 《나무위키》
- ↑ 〈푸퉈산 풍경명승구〉,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저우산시〉, 《나무위키》
- 〈舟山群岛(中国第一大群岛)〉, 《百度百科》
- 〈저우산군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푸퉈산 풍경명승구〉,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