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로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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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네시(러시아어: Воро́неж, 영어: Voronezh, 문화어: 워로네쥬)는 러시아 중앙연방관구에 속하는 보로네시주의 주도이다. 보로네시는 모스크바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러시아의 남서쪽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우크라이나에서 가까운 도시이다. 면적은 601km², 인구는 약 106만 명으로 러시아에서 15번째로 많은 도시다. 보로네시는 보로네시강과 돈강의 합류점에서 12km 떨어져 있고, 보로네시주의 주도이며 중심지이다. 보로네시는 철도 요충지로 모스크바, 로스토프나도누, 키이우를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1]
개요
보로네시는 모스크바 남쪽에 있으며 돈강이 시의 외곽을 지나간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강의 폭이 매우 넓은 돈강의 주요 지류인 보로네시강이 있다. 유럽 러시아를 우랄산맥과 시베리아, 카프카스산맥과 우크라이나, M4 고속도로(모스크바-보로네시-로스토프나도누-노보로시스크)와 이어주는 서남철도의 본부가 이곳에 있다. 청동기 시대부터 주민들이 정착해 온 것으로 추정되지만, 보로네시라는 명칭은 1177년 연대기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공식적으로는 타타르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한 1585년을 건립 연도로 한다. 이 요새는 후에 벨고로트 방어선의 일부가 되었으며, 표트르 1세(Пётр Ⅰ, 1672~1725) 시대인 1695년에는 해군 함대가 설치되었다. 1830년대부터 농경지를 활발하게 개발하는 정책으로 곡물 교역과 제분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점령 당하는 등 전쟁으로 인하여 18,000여 채의 건물이 파괴되면서 도시가 크게 훼손되었다. 1950년대까지 복원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고, 이전보다 확장된 도시로 재구성하였다. 대부분의 행정, 문화, 교육 기관이 밀집한 도심은 격자 도로망으로 설계돼 있다. 공업지역은 도심의 서쪽이나 낮고 모래가 많은 왼쪽 제방에 위치한다. 보로네시는 습한 대륙성 기후로 겨울은 길고 추운 반면 여름은 짧고 따뜻하다. 보로네시는 중앙흑토지대의 경제, 산업, 문화, 과학 중심지다. 2013년에 처음으로 인구 100만명을 넘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중간 보급 거점도시로 사용되었으며, 2023년 바그너 그룹 반란 당시 바그너 그룹이 점령하였다. [2]
역사
보로네시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177년 랴잔(Ryazan)의 야로폴크(Yaropolk) 왕자가 패전한 뒤 보로노시(Voronozh)로 도망쳤다는 기록에서 언급되었다. 고고학과 역사 자료에 따르면 원래의 보로네시는 보로네시강과 다수의 정착지를 함께 아우른다. 강 하류에서 발견된 8~11세기 초 슬라브족의 독특한 도시계획단지에는 현재의 보로네시와 함께 약 42km에 걸쳐 있는 요새 13개 등이 포함됐다. 12~13세기에는 랴잔에 더 가까운 상류에 새 정착지들이 나타났다.
16세기에 보로네시강을 포함한 돈강 중부 유역은 몽골 황금군단(Golden Horde)을 계승한 노가이(Nogai) 한국(汗國)으로부터 점차 러시아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1585년 노가이인과 크리미아 타타르인의 공격으로부터 무라프스키 트레일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한 요새를 건설하라는 표도르 1세의 명령으로 현재의 보로네시가 세워졌다. 도시 명칭은 강에서 따왔다.
17세기에 보로네시는 점차 규모가 큰 마을로 발전했다. 표트르 대제는 보로네시에 조선소를 짓고 여기에서 건조한 러시아 최초의 함대 아조프전대로 1695년과 1696년 터키 아조프 요새를 공격했다.
정교회 보로네시교구가 1682년 설립됐고 첫 주교 미트로판(Mitrofan)은 후에 보로네시 수호성인으로 추앙됐다. 보로네시 해군기지 덕분에 보로네시는 한때 남부 러시아 최대 도시이자 광활하고 비옥한 지역의 경제 중심지로 부상했다. 아조프총독부가 1711년 보로네시에 들어섰고 나중에는 보로네시총독부로 바뀌었다.
보로네시는 19세기에 중앙흑토지대의 중심지였다. 밀가루, 수지, 버터, 비누, 가죽 등의 제조업이 발달했고 빵, 소, 기름 등의 거래가 성행했다. 보로네시와 모스크바 및 로스토프나도누를 연결하는 철도가 각각 1868년과 1871년 개통됐다.[3]
보로네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와 추축국 간의 격전지였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 공략을 위한 부대 집결지이자 돈강 횡단 거점으로 보로네시를 활용했다. 1941년 보로네시 굴착기공장이 ‘카추샤’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BM-13 로켓탄 발사기 제조시설 2기를 가동했다. 이에 따라 일제 사격에 걸리는 시간이 5분에서 15초로 단축됐으며 여기서 만든 BM-13 300대 이상이 1941년 12월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됐다.
1941년의 10월 혁명 기념 군사행진은 모스크바, 쿠이비셰프, 보로네시의 세 곳에서만 거행됐다. 1942년 6월 독일군과 헝가리군의 공격에 맞서 소련군은 보로네시 전선을 구축했다. 보로네시 공격은 독일이 소련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케이스 블루(Case Blue)’란 암호명으로 전개한 1942년 대공세의 첫 단계였다. 독일군과 헝가리군에 점령됐던 보로네시 서부는 열흘간의 접전 끝에 1943년 1월 소련군이 탈환했으나 도시는 전체 건물의 92%가 파괴될 정도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보로네시는 1950년에 이르러 재건됐고 건물과 역사적 기념물 대부분이 복구됐다. 전쟁고아 등 어린 소년들을 위한 기숙학교인 명문 수보로프 사관학교가 이곳에 설치됐다. 1960년까지 새로운 공장들이 속속 건설됐다. 1968년 투폴레프 Tu-144 초음속 여객기가 보로네시 항공기공장에서 생산됐고 1977년 10월에는 소련 최초의 국내용 대형 항공기 일류신 Il-86도 제작됐다.
1989년 보로네시의 한 공원에 착륙한 미확인 비행물체(UFO)의 외계인들과 만났다는 아이들의 주장이 당시 국영 통신 타스통신(현 이타르타스통신)에 의해 상세히 보도됐다. 그러나 타스가 인용한 러시아 과학자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타스의 보도를 믿지 말라고 말했고 타스 기자도 이야기가 부풀려졌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보로네시는 2011년 9월 10~17일까지 도시 창건 425주년을 맞아 연방정부 차원의 축하 행사를 거행하면서 도시 개발을 위한 연방 및 지방 예산을 대거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2012년 12월 17일 보로네시는 인구가 100만 명 이상인 러시아의 15번째 도시가 되었다.[4]
교통
보로네시-모스크바 철도 노선은 보로네시에 본점이 있는 러시아철도회사의 동남철도망에 편입돼 있다. 보로네시는 모스크바 이외에 키예프, 쿠르스크, 노보로시스크, 소치, 탐보프 등과도 철도로 직결된다. 가장 중요한 역은 도심에 있는 보로네시-1 철도역이다. 보로네시에 있는 세 개의 버스 정류장은 모스크바, 벨고로드, 리페츠크, 볼고그라드, 로스토프나도누, 아스트라칸 등 많은 도시와 연결된다.
폴레(Polet)항공사의 본거지인 보로네시국제공항(Международный аэропорт Воронеж)이 도시 북쪽에 있다. 투폴레프 Tu-144 생산설비를 아직도 유일하게 가동하는 보로네시 항공기생산협회의 자회사인 프리다차(Pridacha)공항도 이 도시에 있다. 보로네시 남서쪽에는 미국천연자원보호위원회(NRDC)가 핵폭격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보고서에서 밝힌 보로네시 말세보(Malshevo) 공군기지가 있다.
경제
보로네시 경제는 기계, 금속, 전자, 식품 산업이 이끌고 있다. 주요 기업은 보로네시 항공기생산협회 외에 1958년 세계 최초로 휴대전화와 무선전화 알타이(Altai)를 만든 소즈베즈디에(Sozvezdie), 미사일과 항공기 엔진 등을 생산하는 보로네시 기계공장 등이 있다. 삼림스텝의 옥토를 활용한 농업이 발달돼 곡물 수출과 제분도 활발하다. 전력은 화력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에서 공급받는다. 러시아투자기금의 지원으로 100여 신규 기업을 수용할 마슬로스키(Maslowski) 산업단지 조성 사업이 시행되고 있다.
보로네시주립대학교
보로네시주립대학교(Voronezh State University)는 러시아 서부에 위치한 보로네시주의 주도 보로네시에 있는 종합대학교이다. 1918년 설립된 이 대학은 도심에 위치해 있으며, 교수와 학생들의 연구를 위해 리페츠크주 옐레츠키의 자연보호구역인 갈리치야 고라를 행정적으로 관리한다. 약칭은 VSU이다. VSU는 러시아과학아카데미가 관리하는 18개 학과와 6개 연구기관, 16개 연구 실험실과 300만 권 이상의 도서 등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을 가지고 있다. 이 대학교에서 과학연구는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과학 관련 학과뿐만 아니라 다수의 지원그룹과 연구 인프라에 의해 수행되고 지원된다.
보로네시주립대학교는 지역의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전 세계 120여 개의 대학 및 연구기관, 기업과의 광범위한 연계를 갖고 있다. 유럽연합(EU)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Erasmus)와 TEMPUS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QS의 2023년 세계대학순위에서 세계 1001-1200위권에 포함됐으며, 신흥유럽중앙아시아(EECA) 대학 가운데 192위를 기록했다.
1802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팔로비치 1세(1777~1825)의 칙령으로 에스토니아에 타르투대학이 설립됐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8년 3월 독일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한 후 타르투대학에서 보로네시로 대피한 교수들이 이 대학을 설립했다. 1918년 11월 이 대학은 의학부, 물리학 · 수학부, 역사학 · 언어학부, 법학부 4개 학부로 출발했다. 이듬해 이 대학의 학생 수는 1만 명에 달했다. 1920년 타르투 조약에 의해 에스토니아는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타르투대학의 재산이 에스토니아로 반환됐다. 그러나 독일 제국의 에스토니아 점령으로 인해 이 대학을 떠난 교수들은 대부분 에스토니아로 돌아오지 않았다. 1920년대 초 보로네시 교육학부가 추가로 설립됐으며, 보로네시주립대는 수학 · 물리학 · 화학 · 자연과학 · 러시아어문학 · 사회학 · 경제학 등으로 구성됐다. 1930년 의학부는 독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1943년 보로네시주립대는 타타르스탄공화국의 카마강 우안에 자리 잡은, 수도 카잔에서 동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옐라부가로 이전했다.[5]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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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보로네시〉, 《위키백과》
- ↑ 〈보로네시〉, 《나무위키》
- ↑ 〈보로네즈〉, 《요다위키》
- ↑ 〈보로네시(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 ↑ 〈보로네시주립대학(세계의 대학)〉,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보로네시〉, 《위키백과》
- 〈보로네시〉, 《나무위키》
- 〈보로네즈〉, 《요다위키》
- 〈보로네시(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 〈보로네시주립대학(세계의 대학)〉,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러시아유럽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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