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정책
북방정책(北方政策)은 대한민국의 외교 정책이다. 노태우 정부에서 추진됐다.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국교 수립 및 교류를 통해서 북한과의 전쟁 위협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추진됐다.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 시도는 사실 박정희 정부 시절이던 1977년에도 있었다.[1]
개요
북방정책은 1988년 노태우 정부가 집권을 하면서 수립한 대한민국의 외교 및 대북 정책이다. 냉전 및 탈냉전 시기의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를 통해서 외교적 지평을 확장하고, 이를 통해서 북한과 협상하려는 것이 북방정책의 목표였다. 이는 동유럽 국가들과 당시 소련,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 수립 및 개선을 통한 북한에 대한 관여를 높이려는 시도로 귀결되었으며, 기존의 대공산권 적대정책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방정책이 시행됨에 따라서, 우선적으로 동유럽의 국가들과 수교 논의가 이뤄졌다. 대표적으로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체코 등과 수교에 있어서 경제협정과 차관 제공이 우선적으로 이뤄졌다. 외교정책에 따라 1990년 6월 대한민국과 소비에트 연방 정상회담이 열렸으며 그 해 10월 소련과의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듬해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러시아와 국교를 재개하였다. 또한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은 한국 전쟁의 주요 적성국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오랜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던 중화민국과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2]
평가
북방정책은 대한민국이 서방세계의 자본주의 강국인 미국에 대한 극단적인 의존을 타파하고 본격적으로 국제 외교 무대에 데뷔한 계기로 높이 평가받는다. 국제연합 가입 역시 이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이후 한국은 높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불과 수 년 내에 비상임이사국을 역임하고 사무총장을 배출하는 등 국제 무대의 주요국 중 하나로 빠르게 발돋움한다.
노태우 정부 때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에 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한반도 비핵화 선언, 상호간의 불가침 합의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이해했다는 점에서 호의적인 평가가 있다.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 역시 이후 한국의 외교에 긍정적인 족적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한소수교 이후 한국은 경제적으로 휘청이던 소련에 다량의 차관을 빌려주었고, 직후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로 전환되면서 이를 계기로 불곰사업 등 양국 간 군사교류가 활성화되기도 했다. 불과 반 세기만에 최빈국이던 국가가 공산권의 수장국에게 경제지원을 해 주는 모습은 체제경쟁의 끝을 알리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양국 관계를 넘어 공산권 국가들에 한국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효과도 발휘했다.
정부 수립 이후 전쟁까지 치렀던 중국, 베트남과의 오랜 적대를 끝마친 1992년 한중수교와 한월수교 역시 중요한 사건이었으나, 한중수교의 경우 세부적인 평가를 두고는 갑론을박이 있는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
한편, 이 시기 러시아권에 진출한 기업들은 이후 러시아의 모라토리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의리를 지키면서 러시아인들의 대한 인식 상승에 크게 일조하였으며, 동유럽권에 진출한 기업들은 냉전 종식 이후 대한민국의 대유럽 수출기지이자 생산기지로 톡톡하게 기여했다.
이러한 성과로 인해 노태우 정부는 학계로부터 유독 외교 분야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편이다. '동유럽 등 공산권과의 국교 정상화'를 비롯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서울올림픽으로 대표되는 대북 체제경쟁 승리, 국력 우위의 입증을 통한 한국의 자신감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며, 약 10년 후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에서 제기되었던 '퍼주기', '유화정책'이라는 식의 비난도 덜 받았다.
국방 분야에서도 북방정책은 큰 도움이 되었다. 불곰사업을 통해 러시아의 국방기술을 도입할 수 있었고, 러시아의 북한에 대한 군사지원을 끊어버리는 효과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종합해보면, 40년간 이어져온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대한민국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이겼음을 증명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불과 10여년전만 하더라도 북한과 수교를 하면서 원조를 주던 국가들이 북한이라는 파트너를 버리고 한국과 외교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는 것은 당시 북한 입장에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였고, 그만큼 국내외 충격도 굉장했다.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북한이 자력갱생을 운운하며 국제적으로 고립을 선택하는 이유를 들어 이 북방정책을 꼽기도 한다.[1]
중국과의 수교
한중수교의 경우 하나의 중국 원칙 때문에 일제강점기와 냉전기의 맹방이던 대만과의 단교라는 비용을 치러야 했다. 때문에 2010년대~2020년대 들어 한중관계 및 양국 간 국민감정이 눈에 띄게 악화되자, 주로 이상주의 성향을 띄는 반(Anti)권위주의 진영에서는 굳이 그렇게까지 중국과의 수교를 추진할 필요가 있었느냐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구체적으로, 민주주의 국가 간의 연대와 가치 공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는 저런 평가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다만 어차피 중국이 현실정치의 국가로 존재하는 이상, 오히려 중국과의 민간 교류를 늘려나감으로써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는 쪽이 우발적인 충돌을 막을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한편, 국익과 실리를 기준으로 외교 정책을 판단하는 현실주의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비판에 부정적이다. 먼저, 당대 동북아시아 정세에서 중국이 차지하던 위치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한반도 문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였고, 이는 남북통일을 국시로 내걸었던 당대 한국에게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게다가 중국은 이미 1970년대에 대만에게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빼앗아 오면서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도 상당히 커진 상태였다. 반면 대만은 이와 동시에 유엔에서 자진 탈퇴하면서 영향력이 날로 축소되어가던 처지였으며, 섬에 고립된 지정학적 연유로 한국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미국과 일본은 이미 1970년대에 중국과 재수교하고 중국 시장에 일찌감치 발을 들이밀어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보고 있던 상황이었고, 미중관계와 중일관계 역시 공산국가의 근본적인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끝까지 거부하는 것은 중국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인 이익을 일본 등 다른 경쟁국들에 내주겠다는 의미인 동시에 동북아시아 외교에서 주요한 패 중 하나를 스스로 버리는 것이기도 했다. 중국이 예나 지금이나 잠재적 적성국인 건 사실이지만, 외교란 적성국과도 전략적인 제휴나 대화를 해야 할 때가 있고, 이를 위해 최소한의 외교관계는 필요했다는 것이다.
1980년대의 중국은 죽의 장막으로 대표되는 오랜 폐쇄주의를 끝내고 갓 국제사회에 복귀한 국가였으며, '도광양회'라는 지침에서도 드러나듯 주변국과의 마찰을 가능한 회피하며 경제 발전에만 집중하던 국가였다. 1980년대 후반 미국에게 가장 위협이 되던 아시아 국가는 중국이 아닌 일본이었다. 1980년대 일본은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에서 보듯이 미국을 추월한다는 전망까지 나오던 때로, 플라자 합의와 미일 반도체 협정 등으로 미국의 견제를 받을 정도였지만, 당시 중국 GDP는 일본의 1/8 수준에 불과했다. 현대 독일과 과거 나치 독일이 같은 '독일'이지만 주변국들이 독일을 대하는 태도도 극명하게 다르듯,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과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이름은 같은 중국이라도 정책이 다르니 당연히 다른 전략으로 맞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가령, 과거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아니라 국민당이 승리해서 지금의 중국 대륙을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아니라 중화민국(대만)이 차지했다고 가정하자. 그럼에도 그 '중화민국'이 시대별로 다른 정책을 시행하면 당연히 다른 전략으로 대응해야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을 망각한 것이다. 또한 노태우 정부시기는 탈냉전의 시대이기에 오늘날 신냉전 시대하고 구분할 필요가 있다. 탈냉전 시대의 대통령이기에 당시 시대적 온건한 분위기에 따른거라고 보면 된다. 이건 마찬가지로 탈냉전 시대에 대통령을 역임했던 김영삼, 김대중도 마찬가지였다. 따지고보면 탈냉전 시대에는 중국이나 일본의 지도자들도 비교적 온건파인 인물들이 많았다. 장쩌민이나 후진타오도 지금의 시진핑에 비하면 온건적인 외교를 하는 편이었으며, 일본도 무라야마, 고노, 오부치가 총리나 관방장관으로 있을때 한국에 대해서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취해주었다. 노태우 대통령을 포함하여 탈냉전 시기의 대통령들은 이에 같이 온건적으로 응했다고 보면된다.[1]
기타
- 미국은 처음에는 반대하는 듯했지만, 1989년부터는 찬성하게 되었다.
- 북방정책 당시 동독도 수교 대상이었다. 1990년 3월부터 루마니아와 함께 본격적인 수교 협상이 시작되어 1990년 5월 워싱턴 주재 양국 대사관 간의 비공식 접촉을 통해 수교 합의가 이뤄졌다. 당시 기준으로는 독일이 통일되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걸린다는 판단이 지배적이었던 터라 일단 주한 서독 대사관에 동독 외교관을 상주시키고, 서독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동독 업무를 겸하면서 한시적으로나마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던 것. 그러나 생각보다 빠르게 그 해 10월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며 한국 - 동독 수교는 영원히 이뤄지지 못했다.
- 이 정책의 수혜를 입은 대표적인 기업이 대우자동차. 미지의 세계였던 동유럽이 개방되자 가장 빠르게 적극적으로 진출하면서 입지를 다졌고 동유럽 자동차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며 사세를 확장했다.[1]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